소설가 김훈의 신작 산문 '연필로 쓰기'가 출간되었다. 그는 책 서두에 이렇게 썼다.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다 지나갔다.
밤에는 글을 쓰지 말자.
밤에는 밤을 맞자.
그는 요즘도 집필실 칠판에 '必日新(필일신,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세 글자를 써두고 새로운 언어를 퍼올리기 위해 연필을 쥐고 있다. 산문 "라면을 끓이며" 이후 3년 반여의 시간, 그의 책상에서 지우개 가루가 산을 이루었다가 빗자루에 쓸려나가고, 무수한 파지들이 쌓였다가 쓰레기통으로 던져진 후에야 200자 원고지 1156매가 쌓였고, 그 원고들이 이제 468쪽의 두툼한 책이 되어 세상으로 나왔다.
과거에 김훈은 '산문은 노인의 장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도 작가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일과 기억의 파편들을 끄집어내고 파헤쳐 거듭 살아본 후에야 간신히 쓸 수 있는 장르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이기 전에 이미 탁월한 에세이스트였던 그는 어느덧 칠순에 이르러 스스로의 내면과 대한민국 현대사를 아우르며 이 '노인의 장르'를 완성해간다.
그의 문장은 오함마를 들고 철거촌을 부수던 지난 시대의 철거반원들과, 그 철거반원들에게 달려들다가 머리채를 붙잡히고 울부짖던 시대의 엄마들에 대한 유년의 무섭고 참혹한 기억으로부터, 젊은 시절 생애가 다 거덜난 것 같은 날 술을 퍼마시고 다음날 아침 뱃속이 끓을 때 누었던 슬픈 똥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칼의 노래"에 미처 담을 수 없었던 '인간 이순신'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 지난해 세월호 4주기를 앞두고 그가 팽목항, 동거차도, 서거차도에서 머물며 취재한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이다.
가장 일상적이고 사소한 대상을 집요하게 그대로 묘사하여 기어이 인간과 세계의 민낯을 보여주는 김훈의 글쓰기는 이번 책에서도 여전하다. 지난 산문집에서 '라면' 한 그릇으로 끼니를 대충 때우는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냈던 그는, 이번 책에선 '똥’'이야기로 매일 아침 끓는 속으로 변기 위에 주저앉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생활인들의 심금을 울린다.
모두가 혐오하는 똥에 대한 묘사에서는 날동 냄새마저 풍긴다.
생애가 다 거덜난 것이 확실해서 울분과 짜증, 미움과 피로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날에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별수없이 술을 마시게 된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의 이야기다. 술 취한 자의 그 무책임하고 가엾은 정서를 마구 지껄여대면서 이 사람 저 사람과 지껄이고 낄낄거리고 없는 사람 욕하고 악다구니하고 지지고 볶다가 돌아오는 새벽들은 허무하고 참혹했다. (…)
다음날 아침에 머리는 깨지고 속은 뒤집히고 몸속은 쓰레기로 가득찬다. 이런 날의 자기혐오는 화장실 변기에 앉았을 때 완성된다.
뱃속이 끓어서, 똥은 다급한 신호를 보내오고 항문은 통제력을 잃고 저절로 열린다. (「밥과 똥」, 42~43쪽)
그는 계속 해서
똥의 모양새는 남루한데 냄새는 맹렬하다. 사나운 냄새가 길길이 날뛰면서 사람을 찌르고 무서운 확산력으로 퍼져나간다. 간밤 술자리에서 줄곧 피워댔던 담배 냄새까지도 똥냄새에 배어 있다. 간밤에 마구 지껄였던 그 공허한 말들의 파편도 덜 썩은 채로 똥 속에 섞여서 나온다. 똥 속에 말의 쓰레기들이 구더기처럼 끓고 있다.
저것이 나로구나. 저것이 내 실존의 엑기스로구나. 저것이 내 밥이고 내 술이고 내 몸이고 내 시간이로구나. 저것이 최상위 포식자의 똥인가? 아니다. 저것은 먹이사슬에서 제외되지 않기 위하여 먹이사슬의 하층부로 스스로 기어들어간 자의 똥이다. 밥이 삭아서 조화로운 똥으로 순조롭게 연결되면서 몸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밥과 똥의 관계는 생계를 도모하는 신산(辛酸)에 의해 차단되거나 왜곡된다. 이 똥은 사회경제적 모순과 갈등이 한 개인의 창자 속에서 먹이와 불화를 일으켜서 소화되지 않은 채 쏟아져나온 고해의 배설물이다. (…)
지금 동해에서 해가 뜨는 매일 아침마다 이 나라의 수많은 청장년들이 변기에 앉아서 내 젊은 날의 아침처럼 슬픔과 분노의 똥을 누고 있다. 밥에서 똥에 이르는 길은 어둡고 험하다. (「밥과 똥」, 43~45쪽)
그러나 밥과 똥이 뒤얽힌 이 삶의 악다구니 속에서도, 그는 똥에 매몰되어 허우적거리지 말고 삶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똥의 더러움과 똥의 모욕감을 도리어 전쟁무기로 활용했던 정약용처럼 말이다.
똥 속에서도 그는 단념할 수 없는 삶의 길을 모색했고, 당대의 질곡을 향해 그 길을 설파했다. 적에게 똥을 끼얹어가면서, 인간은 살아남아야 하고 자신을 지켜야 하고 희망을 기약해야 한다. 이 경세가의 우국(憂國)은 똥 속에도 길이 있다고 외친다. (「밥과 똥」, 48~49쪽)
그러나 제아무리 적들에게 똥을 끼얹어가면서 계속 가봐도 사라지지 않는 고통, 여전히 건재한 적들이 있다. 이(李)가 떨어진(落) 자리의 사당이라는 뜻의 이순신 사당 '이락사'에서 시작되는 글 "내 마음의 이순신"에서 그는 내외부의 잔혹한 적의에 둘러싸인 채 전쟁을 치러야 했던 이순신의 내면을 조심스럽게 복원해낸다.
그가 감옥을 나와서 쓴 첫번째 문장은 "감옥문을 나왔다"이다. "난중일기"를 읽을 때, 이 문장은 벼락처럼 나를 때린다. 이 문장은, 남한산성 서문의 밑돌처럼 무수한 표정을 감춘 채 무표정하다.
이순신은 한산 수영에서 체포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의 명예는 짓밟혔고 죽음이 예비되어 있었고 몸에는 고문이 가해졌다. 그리고 다시 계급장 없는 병졸의 신분으로 백의종군 길에 나설 때, 이순신이 자신을 가두고 때리고 죽이려 했던 임금과 그 주변의 문신권력자들에 대해서 어떤 판단과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후인들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는 부지런하고 꼼꼼한 기록자였지만, 매맞고 백의종군하는 자신의 내면에 관해서는 한 글자도 쓰지 않았고, 술자리에서 부하들에게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았다.
쓰지 않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말하여질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들끓고 있었을 터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그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
공로가 죽음일 수도 있다는 이 불의한 세상의 더러움을 이순신은 알고 있었고, 도적을 물리치고 전쟁을 끝내는 날 그는 바다에서 전사했다. (「내 마음의 이순신Ⅰ」 , 101~104쪽)
김훈에게 이순신 장군은 역사적인 해전을 치러낸 위대한 영웅으로서만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적의와 치욕으로 점철된 이 와글거리고 악악대는 '인간세(人間世)의 고해'를 끝까지 건너간 인물로서 소중하다. 이순신은 술자리에서 부하들에게조차 자신의 고통과 치욕을 떠벌리지 않고 전시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말하지 않고, 갈 길을 간다" 그 침묵의 힘, 오직 사실만을 기록하는 정직성, 죽음에서 삶으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이순신의 리더십을 김훈은, 지금도 마음에 품고 있다.
이번 신작에서 그는 이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들을 언급하며 슬픔과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를 진정성 없는 눈물로 막아보려 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5.19 대루(大淚)', 폭염수당 100원을 요구했던 한 배달라이더에 대한 이 사회의 처우, 국회의원들이 서로 오수(汚水)를 끼얹듯 주고받는 '물타기' 언어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담은 글들도 그렇거니와, 그가 가보지 못한 반쪽의 산하 '북한'을 생각하며 쓴 몇 편의 글들에서는, 그가 이 세계의 진탕과 모순에 기꺼이 발을 담그고, 그의 연필로 정확하게 분노하겠다는 결의가 느껴진다.
한편, 김훈의 세계에 스며든 유머를 발견하는 것도 김훈의 신작을 읽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쉼표 하나 어중간한 부사 하나 슬쩍 끼워넣을 틈 없었던 그의 단단한 문장과 허무의 세계에 슬쩍 농담과 웃음이 배었다. 노인과 여성들의 결론도 없고 한도 없는 수다가 판소리처럼 신명나게 출렁거린다.
때로 그는 북적이는 결혼식장에서 '고매한 인품을 완성한 신사'로 소개받고 흰 장갑을 낀 채 주례사를 하지만, 젊은 하객들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김훈은 다시는 주례를 맡지 않으리라 선언하는데, 이 일화를 담은 글의 제목은 '꼰대는 말한다'이다. 웬만해서는 다시 듣기 어려울 '김훈의 주례사'를 엿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하나의 재미이다.
그는 기꺼이 스스로를 '꼰대'라 지칭하며 늙음에 대하여 여러 우스개와 단상을 풀어내지만, 나이든다는 것이 그에게는 비단 회한과 슬픔만은 아니었다. 그는 '늙기의 기쁨'에 대해 이렇게 썼다.
너무 늦기는 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흐리멍덩해지고 또 편안해진다. 이것은 늙기의 기쁨이다. 늙기는 동사의 세계라기보다는 형용사의 세계이다. 날이 저물어서 빛이 물러서고 시간의 밀도가 엷어지는 저녁 무렵의 자유는 서늘하다. 이 시간들은 내가 사는 동네, 일산 한강 하구의 썰물과도 같다. 이 흐린 시야 속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연히 드러난다. 자의식이 물러서야 세상이 보이는데, 이때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늘 보던 것들의 새로움이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다. 이것은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의 세계이다. (「늙기와 죽기」, 74쪽)
그래서 그는 이 선연히 '보이는 것들'을 충실하게 받아 적었다. 나이든 그는 요즘 나무와 숲과 물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20년째 그가 산책하고 걸으며 쉬어가는 '일산 호수공원'에는 그 외에도 많은 사람과 생명들이 지나가고 지나간다.
단풍잎 같은 손으로 인사를 하고 팔랑팔랑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호수공원의 산신령'은 바라본다. 절망과 불의로 가득찬 이 세계에서도 아이들은 자라고, 사람들은 공터에서 공을 차고, 젊은이들은 떡볶이를 먹으며 끼니의 무거움을 털어내며, 눈이 내리면 거리에 몰려나와 연애하고 키스한다. '산신령'이 된 김훈은 마치 투명인간처럼, 이 진부해서 아름다운 거리와 세상을 기웃거리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오늘도 연필로 몰래 받아쓰고 있다.
이제 그는 여생의 날들을 아끼며 가까이 있는 것들을 가까이 두고 살려 한다. 이 책에 실린 글의 상당 부분은 그가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누항사―후진 거리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들이다. 이 누추하고 허접하고 후진 거리에 서서 여느 사람들처럼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를 마시며' 써내려간 글들이다. 그러나 이 누린내 나고 먼지 자욱한 거리에서도 흙냄새 나는 냉잇국 한 사발의 온기와 아이에게 뽀뽀하는 젊은 엄마가 있고, 돌이킬 수 없는 국가폭력과 참사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에게 소중한 것은 이렇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는 사람들'이다.
김훈의 '연필로 쓰기'는 '몸으로 쓰기'다. 기계가 없어도, 마땅한 공간이 없어도, 희망이나 전망이 없어도, 호수공원 벤치에서, 빗길에 배달라이더가 넘어져 짬뽕 국물이 흐르고 단무지가 조각난 거리에서, 그는 관찰하고 듣고 쓰고 있다. 그렇게 쓴 글들이 이 책으로 묶였다.
가장 더러운 똥에서부터 그의 마음속 고결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이순신에 이르기까지―김훈이 몽당연필로 겨우 붙들어둔 문장들이 여기에 남았다. 이 책은 70대의 김훈이 연필로 꾹꾹 눌러쓴 산문의 진경(眞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