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부터 바빠졌다.
각 기업체뿐만 아니라 공무원, 공사, 심지어는 군대까지 '평가와 승진'의 계절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매년 그렇지만 평가는 매서웠다.
위로 올라가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제자리이거나 후배들에게 추월달하는 사례도 부지기수였다.
그런 까닭에 매년 4분기가 되면 많은 전화를 받는다.
금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잘 된 사람의 기별도 있지만 그보다는 실패한 사람, 누락된 사람들로부터의 연락이 훨씬 많았다.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유는 없었다.
일단 만났다.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나는 그를 찾아갔다.
함께 식사를 했고 커피를 마시며 그들의 얘기를 경청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었다.
대부분 분노에 차서 열변을 토로하기 일쑤였다.
"못해 먹겠다, 2-30년 세월이 허무하다"고 했다.
주로 40대 중반부터 50대 중반의 남성들이었다.
이 나이 쯤되면 인생의 풍상을 겪을대로 겪은 사람들이지만 '승진'의 문제가 자신의 일이었을 땐 반응이 달랐다.
냉정한 평가에 대한 인식과 대처가 극과 극이었다.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예수님이나 부처님을 제외하고 '희노애락'의 결정체인 인간인 이상 어느 누가 초연할 수 있겠는가?
십분 이해한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한 잔 마실 때까지 나는 마음을 담아 상대방의 얘기를 주로 들어주려 애썼다.
그것 때문에 찾아 갔으니까.
큰 조직을 떠나 개인사업을 하는 내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한 끼의 밥과 술을 사고, 한 사람의 고통과 애환을 마음을 담아 경청해 주는 일 뿐이었다.
전화나 문자 보다는 대면하여 '공감'해 주고 '위로'를 보내는 일이 중요하고도 시급했다.
매년 4분기엔 그래서 좀 바쁘다.
해마다 4분기의 풍경은 대개 비슷했다.
상대방의 깊은 속얘기를 다 듣고 미팅을 마칠 때쯤 나도 한마디를 건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의 작은 변화'라고, 다시 오르기 위해선 내려가는 길을 과감하게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교과서 같은 얘기로 들리겠지만 나도 누구 못지 않게 '눈물겨운 빵'을 많이 먹어 본 사람이었기에 그냥 세치 혀로 던지는 말이 아니었다.
물론, '내리막길'을 '배움과 성장'의 과정으로 과감하게 수용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도 1990년부터 2000년까지 직장 생활 10년을 마무리 짓고, 김대중 정부 시절에 '아코스닷컴'이라는 벤처기업을 창업했다가 10개월 만에 처참하게 무너졌었다.
당시엔 애들이 무척 어렸는데 우유 살 돈이 없어 새끼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했다.
침대, 피아노, 가구 등 대부분의 세간을 버리고 주먹만한 집으로 내쫓기다시피 이사했었다.
살림을 가지고 갈만한 공간이 아예 없었다.
그때 그 심정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찌 백분의 일이라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밤에 뒷산에 홀로 올라가 내 가슴을 쥐어짜며 얼마나 남 모르게 울었는지 모른다.
한 두번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에게 손을 벌려 두번째로 창업했던 '서비스코리아'까지 연거푸 말아먹었다.
경제적으로 철저하게 파탄나고 찢긴 무능한 가장.
조직을 떠난 뒤 5년 내에 내가 그런 '비참한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이 그렇게도 처참하고 살을 에는 고통일 줄이야.
특히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아빠 품으로 달려드는 애들을 대할 때마다 내 가슴은 낱낱이 분해되고 해체되에 사방으로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어쩌다가 술이라도 한 잔 걸친 날에는 나도 모르게 '마포대교'에도 여러번 갔었다.
그러나 그대로 삶을 포기하거나 좌절할 순 없었다.
아까 상술했던 바와 같이 내 인생에 운명처럼 다가선 '내리막 길'을 과감하게 수용하고, 죽을 힘을 다해 다시 한번 일어서 보자고 생각했다.
이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만 바라보는 '가족'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33세에 어느 기업의 '본부장'으로 승진했다.
당시엔 해당 사업부의 '본부장'이 그 회사의 '대표'였다.
사업자 등록증에도, 수도 없이 발행되는 각종 '세금계산서'에도 내 이름이 '대표'로 각인되어 있었다.
월급 외에도 '대표이사 수당'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순항 중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IMF 사태'가 터졌다.
날벼락이었다.
국내외를 뛰어다니며 3년 간 구조조정을 마무리 짓고 당당하게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이 치열한 전쟁터 같은 세상에 호기어린 도전장을 던질 때까지 난 '실패'란 단어를 잘 모르고 살았다.
10개월 뒤, 끝모를 나락으로 사정없이 굴러떨어졌다.
기어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어두운 첫번째 '크레바스'였다.
수도 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흐르는 눈물을 양팔로 훔치며 생각하고 또 다짐했었다.
'생각의 작은 변화'.
이게 필요하다고 절감했다.
내려가는 길을 즐기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과감하게 받아들이며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다시 한번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갈 수 있는 '작은 틈새'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절박했다.
삶과 죽음의 '변곡점'에서 간절하게 붙잡고 싶었던 작은 지푸라기 하나.
내 멘탈과 각오 그리고 긴 세월 동안의 피나는 노력이 절대적이었다.
그런 마음가짐이 바로 서기까지 적잖은 세월 동안 심적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한 번 방향타가 정해지자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최소 20년 이상.
나의 극적인 '부침'을 곁에서 고스란히 지켜봤던 내 지인들이었기에 나의 얘기가 세치 혀가 내뱉는 '빈말'이 아니란 걸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몇 마디가 그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미팅 후 며칠이 지나면 대개 이런 문자나 전화가 왔다.
"내려가는 길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그 말의 '의미'를 잘 간직하겠노라고.
평생 어찌 좋은 일들만 있겠는가.
실패나 좌절 없이, 고통스런 긴 터널 없이 어찌 승승장구만 할 수 있겠는가.
신은 공편하시기에 한 인간에게 줄곧 양지만 허락하시는 법은 없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고, 밝음이 있으면 머지 않아 어둠이 내리는 것이 세상 이치다.
내 나이 마흔 일곱.
나도 아직 인생을 잘 모른다.
그러나 조금 손해보는 듯하게, 조금 더 양보하고 웃어주면서 살면 되지 않을까 한다.
지나친 욕심은 많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그 스트레스는 결국 자신의 심신을 병들게 만드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될 것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주변의 지인들에게까지 심각한 폐해를 주는 그리하여 어떤 항생제로도 다스릴 수 없는 '수퍼 박테리아'가 될 수도 있다.
'만산홍엽'이다.
보기 좋다.
신의 걸작에 감동스럽기도 하고.
이런 아름다운 계절에 좀 넉넉한 마음으로 하늘 한 번 더 바라보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뜨거운 가슴으로 열정적으로 살되 '기대수준'을 좀 낮게 유지하면 될 성싶다.
때로는 '내려가는 길'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많은 재물이나 높은 지위가 절대로 행복을 보장해 주진 않는다.
'텅빈 충만' 그리고 '헌신과 나눔'.
그런 마음으로 살면 되지 싶다.
인생사 '일체유심조'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해 본다.
2010년 11월 1일.
새벽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