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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요한 16:16~24 (세이레 기도회를 마치는 주일)
I.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지난 세이레 새벽기도회를 통해 요한복음의 독특한 본문을 따라서 말씀에 은혜를 나누었습 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까지 요한복음의 독특한 본문, 공관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게 됩니다. “예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하는 말씀입니다.
내 어릴 때 살던 마을이 이름이 못골, 한문으로 못지, 골곡을 시용해서 지곡, 15호쯤 되는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앞산과 뒷 동산이 있고 앞과 뒤에 산이 있는데 사시사철 푸른 큰 솔밭이 있었습니다.
마을 위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고 그 위에는 산골다랑이 논에 역시 앞뒤로 산이 있습니다.
산을 돌아 마음 입구 어귀에는 문탕거리가 있고 그를 지나서면서 동네가 시작이 된다.
첫집에는 아들만 7형제인지 8형제인지 잘모르지만 여자형제 없이 남자들만이 있다.
성씨는 첫번째가 기전, 둘째 셋째 기흥이 넷째가 기원이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가 여덟번째 막내가 혁기이다.
그 중에 목욕을 갔다가 귀툴이라는 곳에 물이 도는 곳에서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한참후 죽어서 나온 아이도 있었다. 그리고 드 뒤엔 길만섭씨댁 재홍이 준홍이 그리고 그 뒷에는 여자아이만 네 명인가 다섯인가 된다. 여기에서 나와 유일한 초등학교 동창이 있는데 그가 재홍이고 그는 중학교때 농약이 쓰다면서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관옥씨댁 만복씨댁 그 앞집에는 그러니까 그 집이 앞에서 보면 두 번째 집인데 이쁜네 집니다. 그 집에는 늙으신 어머니 혼자 계시는데 소위 이쁜이 엄마이고 그 뒤집 만복씨의 형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되면 이쁜이 아들이 도시에 살다가 와서 3면이 금강줄기가 휘돌아서 흘러가는데 물놀이를 실컷 하고 방학이 끝날때 쯤 보따리를 싸서 도시 저희들 집으로 간다.
그집 뒤쪽 병벅씨집이 있고 위로 딸이 둘이 있고 밑으로 아들이 있다. 그리고 오래도록 그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그 중간으로 서당을 열었던 집 수염이 텁수룩한 학섭이 부친이있고 아들은 장섭이와 학섭이가 있고 경자, 경님이 등이 있었다 한때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기르기도 했다.
그 뒤로 종권이 집이 있고 어머니의 사촌동생이 살았는데 그 분은 폐결핵으로 술을먹고 돌아가셨다.
그 오른 편 앞집에 엣날에는 김태환이가 그 뒤에 양재영이가 살았는데 그는 예수믿고 사찰집사로 대전에서 오랴 계시고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동네어귀에서 첫집 두번째 세번째 그리고 네번째 집이 우리집이다. 우선 가운데 골목이 이쁘이네 집과 우리집 사이로 종대네집 병벅씨집 학셉이네집 그리고 재영이 종권이네 집 등이 있다. 바로 이곳이 못골의 다운타운이었다.
그리고 다섯번째는 준복이네집 월남에 갔다 온 사람이다. 신촌에서는 아마도 준벅이와 웃담에 동길이 두 사람이다.
맨 윗집 그러니까 못샴이라고 불리웠던 연못에 가장 가까운곳에 살았던 태성이네집 그의 아버지 양수부씨가 살았다. 덩예태성이 남매가 살았다.
이제 우리집에대해 말하려고한다.
어귀에는 그 솔밭 밑에 초가집 두 채가 있었는데 두 채 가운데 한 채가 우리 집입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초가집 지붕 위로 정자나무 가지가 지나갔습니다. 밤이면 그 나뭇가지에 부엉새가 앉아 부엉부엉 울고 갔습니다. 우리 집 앞에는 오래된 참나무 몇 그루가 있어서 소쿠리만한 표고버섯이 열렸습니다. 동리 사람들은 그 참나무가 우리 집 소유인 줄 알고 버섯을 가져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참나무 뒷편엔 우리 집 논밭이 있어서 여름이면 개굴개굴 밤새도록 개구리 소리를 들으면서 잠자리 에 들었고 잠을 깨곤 했습니다. 또 다른 아름드리 정자나무 밑에는 부드러운 모래밭이 있어서 동리 어른들이 노는 아이들을 불러다가 씨름을 시킵니다. 이길 때마다 누가 사탕이라고 불렀던 새끼 손가락만한 사탕 하나씩을 줍니다. 제 이빨이 진작부터 나빴던 것은 항상 제가 씨름을 하면 이겼기 때문입니 다. 제가 기억도 못하는 내 어릴 적 두 채 초가집 옆에 엄청나게 큰 집이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내 어머니는 논밭에 일하러 나가시고 할머니랑 나무 그늘 밑에서 놀다가 예배당을 건축하던 목수 아저씨들이 새참을 먹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모라는 아이가 아장 아장 걸어가 목수아저씨한테 묻습니다. “아저씨 아저씨 이 큰 집에 누가 살아요?” 짓궂은 목숨아저씨 “하나님이 사신데.” “할머니 할머니 하나님이란 분 대따 부자인가 봐. 하나님의 집 대따 크다.” 그 집이 하나님의 집 교회인 걸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없던 아이는 그때부터 이 집주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사는 게 그렇게도 좋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크게 보였던 그 예배당이 새가족 영접홀만 했습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 그 집이 그렇게 크게 보였던지요. 이때부터 제겐 남다른 배짱이 있었습니다. 이 큰집의 주인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다. 우리 아버지는 대따 부자다. 우리 아버지가 부자라서 내게는 모자람이 없다. 이게 세상말로 배짱이었고 자신감이었는데 이게 믿음의 언어로 말하면 “믿음”입니다. 좀 더 커가면서 이 자신감과 배짱이 신학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한 분이시며, 그분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인생 살면서 내 삶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그분에게 달려가 기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의 모든 문제를 알고 계시며, 내가 달려갈 때마다 나를 기쁨으로 영접하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내겐 어려움이 항상 많이 있었지만 그분은 이 세상의 주인이 되시고 내가 간구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셨으며 내가 원하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것으로 항상 갚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제 인생에 얼마나 커다란 자신감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어릴 때부터 제게 있었던 세상 무서운 것이 없는 그 배짱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 삶이 위기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라는 이 믿음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자신이 되어 주었습니다. II.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 엄청난 자산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어떤 하나님을 믿습니까?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면 구태여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친히 계획하신 대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어려움과 문제를 다 알고 계시지 않는가? 구태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 기도하지 않아도 다 아실 터인데 우리 인생을 기도 시간에 낭비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복음을 전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지 않은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 다. 그러나 성경에 교훈을 빌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역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역은 기도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은 호미 한 자루로 일하는 것과 같다면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포크레인과 같은 분이라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모든 문제를 친히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모든 삶을 형통케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래서 기도해야 된다. 약속이 있기 때문에 기도해야 된다. 그래도 기도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우리 믿음공동체 회복과 안녕을 약속하셨지만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에스겔 36:36에 보면 하나님은 황폐케 된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이 간구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회복하겠다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3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시온을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축복할 것이다. 그래도 너는 기도해라. 나는 너를 치료할 것이다. 그래서 기도해라. 나는 너희들을 회복케 할 것이다. 그래도 기도해라. 하나님이 약속을 하셨으면, 하나님이 친히 계획을 하셨으면 그대로 이루어 가시면 될 것인데 왜 기도하라고 말씀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가운 데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은 내 삶 속에 더욱 강력하게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가 받는 모든 일들이 선물인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기도하고 얻어야, 기도하고 은혜를 받아야 그 관리가 가능하게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지 않고 얻으면 얻은 것 때문에 잘못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기도하고 얻어야 하나님께서 은혜 를 주신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고 우리가 섬기게 된다는 겁니다.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까?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세요. 기도는 우리의 공로로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자격으로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잘못한 게 있으면 하나님 앞에 우리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반드시 마지막에 하는 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기도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요절 23절을 보세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 로 주시리라”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 이름으로 구하고 예수 이름으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기도에 관한 또 다른 요한복음의 교훈이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바로 다음 14절에도 동일한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내가 역사하리라. 내가 기적을 베풀리라.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 여러분은 예수 그 이름의 능력을 아십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 짐을 해결하셨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 예수 이름의 능력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 권세를 손에 붙들고 그 능력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병든 분이 계십니까?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병마야 물러갈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는 건강해질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마귀에게 시달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렇게 명령하세요. 이 더러운 마귀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물러가라. 내게서 떠나갈지어다. 여러분을 묶고 있는 온갖 문제들이 있습니까? 여러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온갖 장애물들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주여 이루시옵소서. 주여 역사하시옵소서. 여러분 자신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호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호받고 축복받았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받았고, 치유받았고, 회복되어졌다. 건강하다 실수하고 넘어졌지만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았다. 새로워졌다. 나는 사단에게 빼앗겼던 기도의 권세를 되찾았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세상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매 사건마다 예수 이름의 권세를 행하는 법을 우리가 알고 사용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III. 아이테오의 기도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눈 후 마지막으로 설교하신 일종의 고별 설교입니다. 고별 설교가 끝나면 예수님은 로마 군인의 손에 잡혀 십자가를 지시고 별세하시 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본문 16장을 살펴보면 “조금 있으면”즉 “잠깐”이란 말이 7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수치의 심문을 받으시고 채찍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이 고난, 뿐만아니라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고 또 목숨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불안에 떠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인데 당황하지 말아라. “잠깐” 후면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로 운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인간사에서 가장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무엇일까요?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도 “잠깐”이면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잠시, 잠깐 후면 기쁨이 온다. 무슨 기쁨일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기쁨입니다. 고통의 시간 9시간도, 부활의 시간 사흘도 잠시,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80년, 90년도 천년이 하루 같은 천국의 시간으로 보면 잠깐 입니다. 예수님을 잃게될까 봐 근심 걱정하는 제자들의 시간도 잠깐이요, 잠깐 후에 나는 부활하게 될 것이고 보혜사 성령이 너희들 가운데 임하게 될 것이고 너희들의 근심 걱정이 도리어 변화되어서 기쁨이 될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고통 중에 계신 분이 있습니까? 커다란 어려움을 만난 분이 계십니까? 막다른 골목에서 쩔쩔매는 일을 만난 분이 계십니까? 그 시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 이름의 권세로,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깜짝 놀랄만한 시간, 잠시 후면 고통은 지나고 주님의 임재와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을 짤막한 시간 안에 평안으로 바꾸는 신비한 방법을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근심, 걱정을 기쁨으로 바꾸는 신비한 방법을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예수 이름에 능력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기도하다. 구하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가 17가지 이상 나옵니다. 우리말성경 에는 기도하다, 구하다라고 번역했지만 신약성경에서만도 11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그 중에서 도 본문에 나오는 “구하다”라는 동사는 주님의 고별 설교에서 7번씩이나 등장하는 “아이테 오”는 떼를 써서 탄원한다는 뜻입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지금 응답받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은 위급한 상황속에서 하나 님의 이름을 부르며 매달려 애원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아이테오! 이 기도는 상황을 지금 역전시켜야 하는 절박한 문제 앞에서 부르짖는 기도입니 다. 야곱이 천사의 옷자락을 붙들고 환도뼈가 부러져서도 처절한 고통 가운데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면 놓을 수가 없다고 매달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광야 40년 여정을 마치고 가나안 정복 목전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초월적 역사를 요청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수 10:1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내 인생 앞길을 가로막고 출렁이는 파도야 잠잠할지 어다.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야 갈라질지어다. 여리고성아 무너질지어다. 담대한 능력의 기도를 아이테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상황, 기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입니까? 지구촌의 위기를 우리 모두가 느끼지 않습니까? 국제관계는 어떻습니까? 지금 평안한 국제 관계가 어디에 있던가요?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이 나라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보아도 좋을까요?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평안하기만 합니까?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온갖 유혹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히 이 험한 세상을 개척하며 승리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어지십니까? 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라고 느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조차도 온갖 유혹과 지뢰가 세상 밭에 널려있는 한복판을 걸어가는 것 같은 위험천만한 세상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덤벼서 택한 백성, 교회 중직자들도 쓰러지고 넘어지게 만드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게 될 때에 사람을 만나는 일은 쉽기 만 만하던가요? 한 마디에 상처받은 우리의 심령들은 우리 속에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로 하루하루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건강 잃어버리고 질병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삶의 환경은 세워졌다면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어려운 삶의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은 평안하기만 하던가요? 문제와 갈등없 이 행복하기만 하던가요? 기도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온갖 위기상황, 전방위적인 위기 상황, 고난과 재난이 상존하는 이 시대에 주님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너희들의 근심 걱정이 변하여 평안으로 바뀌어지게 될 것이다. 온갖 염려가 변하여 행복으로 기쁨으로 바뀌어지게 될 것이다. 아이테오!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할지어다. IV. 무엇이든지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잠시 십자가의 고통으로 제자들 곁을 떠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당황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가, 믿음생활하다가 우리가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넘어지는 일이 있어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나도 잠시 후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테니 염려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될까요? 주님의 고별 설교 가운데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말이 7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 사실 이 말은 기도의 원리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기도는 질서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방법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정력으로 잘못 구하면 응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기도할 때에 만면에 미소를 띠고,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전능하신 역사를 찬양하 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지난날의 은혜의 손길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미사여구로 기도하는 기도의 멋을 몰라서 그렇게 기도하라고 말씀 하신 것일까요? 사람이 너무나도 절박하면 떼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떼를 쓰는 어린아이는 질서를 따지지 않습니다. 엉엉 소리를 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할 때에 어렵사리 세운 사업이 부도 앞에서 쩔쩔매야 할 때에, 하나님 앞에 질서 논리를 따져서 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무엇이든지의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사고를 만나서 생명이 위태로울 때에 우리는 주님 앞에 아이테오. 떼를 쓰며 무엇이든지 구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부딪힐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죽은 나사로 앞에서 미사여구를 사용하면서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만물이 약동하는 봄입니다. 저기 한 그릇 나무도 움을 틔우고 잎이 무성하게 지금 봄을 노래하듯이 사랑하는 나의 친구나 사사로 죽음의 옷을 입고 여기 누워있 습니다. 아버지여 당신의 사랑의 손길을 뻗쳐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야 나오거라! 부르짖어 기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든지의 기도! 우리에게 얼마나 큰 자유를 주는 기도입니까? 무엇이든지의 기도! 우리에게 얼마나 큰 권세를 주는 기도입니까? 무엇이든지의 기도!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특권의 기도입니까? 무한한 날개를 달고 독수리처럼 푸른 창공을 날으면서, 구하고자 하는 모든 기도를 주님 앞에 자유롭게 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길을 지나도 그 공장을 만나지 못합니다만 오래 전에 제가 곤지암 에 있는 소망 수양관을 찾을 때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논 가운데서 차를 잠깐 세우고 쉬는데 저 언덕 위에 큰 공장이 하나 있더라고요. 아마 열쇠공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공장의 사장이 그리스도인이었던지 공장 벽에 이렇게 씌여져 있었습니다. God is the Key! 하나님은 열쇠이시다. 그 말이 얼마나 충격적이 었는지 거기에 새겨진 글씨가 살아서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내 심장에 와서 박히는 걸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그래 기도는 열쇠야! 하나님의 열쇠야! 우리교회에 모든 묶인 것을 풀어내는 열쇠야! 이 사회에 모든 묶인 환경을 푸는 열쇠, 내 인생에 잠궈진 모든 것들을 푸는 열쇠야! God is the Key! Jesus is the Key! 하나님은 우리 문제를 여는 열쇠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게 될 때에, 어떤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난다 할지라도, 어떤 어려움에 직면한 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해결할 수 없는 어떤 고난과 어떤 시련을 만난다 할지라도 당황하 지 마시길 바랍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방황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열쇠되는 능력의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무엇이든지 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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