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6.6. 현충일에 TV 조선에서 11시 20분부터 방영한 ‘건국전쟁’을 시청했다. 그동안 이승만에 대해서 부정적인 관점에서 제작된 영상물은 재조명하기로 하자. 아래 영상물은 이승만에 대해서 편파적인 견해로 제작되었다고 판단된다. 삭제하고 싶지만 일부는 사실일수도 있을지 몰라서 그대로 놔둔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료 기록 사실을 객관적으로 조사 관찰 평가해야 한다.
해설/이순재 탤런트: 100년전 3월의 첫날, 이곳 서대문 형무소에는 조선독립 만세를 외친 3천여 명의 조선 사람들이 갇힙니다. 그러나 미쳐 가두지 못한 게 있습니다. 저마다 품고 있던 나라의 독립 그리고 사람의 독립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이야기는 만세를 부른 그날부터서 영원히 기억해야 될 역사가 된 어떤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 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에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제가 12살 소년 때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과 나라를 되찾은 감격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퍼진 독립 만세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하와이에 있는 아주 작은 애국 단체가 독립을 위해서 활동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저희는 바로 그곳을 찾아 여러분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하와이~ 이 세 글자를 들으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고 마음은 절로 설렙니다. 열대 푸른 바다 꿈같은 휴가를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이 만나게 될 하와이는 다릅니다. 100년전 일제로부터 독립군 한 사람에게 하와이는 꿈을 이루기 위해 기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은 백범 김구 선생, 김구 선생의 자서전인 白凡逸志(백범일지)는 그 전체로 독립운동의 역사입니다. 특히 백범일지의 하권은 미주 각지에 흩어져 살던 동포들이 당시 임시정부에 보낸 정성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낯선 단체 이름 하나가 또렷이 기록됩니다. 바로 하와이 愛國團입니다. 1930년대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의 형편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당시의 곤고함은 백범일지에도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죠. 기댈 곳은 해외 동포들, 특히 노동자로 살면서도 나라의 독립을 소망했던 미주 지역의 동포였습니다. 기울어져간 운명의 우리 임시정부가 기댈 곳은 만주 러시아 일본 미국 등지에 살고 있는 우리 해외 동포들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바로 붓을 들었습니다. 임시정부의 각박한 사정을 알리기 위해서였죠. 그러던 어느날 우리 독립 운동역사의 한 획이 된 아주 반가운 편지 한장이 멀리 하와이에서 날라왔습니다. 김구 선생 앞으로 편지를 보낸 사람은 임성우 선생, 하와이에 있는 안창호, 임성우 등 제씨(諸氏)가 편지로 묻기를 그리고 그 임성우 선생이 바로 하와이 애국단원입니다. 하와이 애국단, 이 단체는 1932년 2월 14일, 임시정부의 독립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하와이에서 살고 있는 우리 한국사람들이 세운 비밀 조직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조직에 참여한 8명 중 그 공적을 인정받은 인물은 임성우 (1889~1970/건국훈장 독립장) 과 현도명 (1883~1968/건국훈장 애족장) 선생 단 두 분 뿐입니다. 이 분들 외에 나머지 여섯 분들에 대해서는 이름만 겨우 알려졌을 뿐 그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김예준, 김경옥, 김태정, 김성옥, 김형기, 김기순 이들은 누구일까요? 호놀룰루항/미국 하와이주,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한인들이 하와이 땅을 처음 밟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902년 1월 미국, 최초의 이민자 121명 가운데 102명이 호놀룰루에 도착합니다. 그후 약 7천명의 한인이 하와이로 이주해 왔고 이주한 대부분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와이에 흩어져 있던 30개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향했고 그것은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한 일터가 되었죠. 하와이 애국 단원의 흔적을 찾기 위한 첫 여정도 바로 이 시기부터 시작해 보려 합니다.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미국 호놀룰루
이순재: 안녕하십니까?
이덕희/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 반갑습니다.
해설; 하와이로 향한 배 안에서 이민자들은 그들의 이름과 나이 결혼여부 등을 적어야 했습니다. 오늘 만난 이덕희 소장은 그 명단을 일일히 살펴 모두 7415명의 한인 이민자 명단을 작성한 연구자입니다.
이순재: 선생님이 정리하신 이민자 명단과 출입국 기록에 (하와이 애국단원의 정보가) 혹시 남아 있지 않겠나, 임성우 선생과 현도명 선생은 알려져 있고 그외 여섯 분은~
이덕희: 김기순씨는 36세 1905년도에 오셨어요.
이순재: 그 다음에 김성옥
이덕희: 김성옥씨 중 한 분은 36세, 결혼을 하신 분인데 1904년에 들어오셨군요.
이순재; 그 다음에 김예준씨
이덕희: 예, 김예준씨 있고요, 지금 말씀하신 분들은 다 명단에 있습니다. 입국하신 건 맞습니다.
이순재; 명단 중에는 동명이인도 적지 않습니다.
이덕희: 김예준씨---결혼했는데 혼자 오셨네요.
이순재; 다행히 성별과 나이 등 함께 기록된 정보가 있어서 오차의 범위를 좁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주한 반가운 이름들, 하와이 애국단원의 이민자 기록입니다.
Name Age Married Status Last Residence Arrival date Grp
현도명 Hyen,Do Myeng 22 married An Min dong 9/26/1904 Mongolia
김예준 Kim,Yer Choon 23 married Sang Su Kwan 11/21/1904 Manchuria
김성옥 Kim,Sung Ok 23 widower chemulpo 3/19/1903 Korea
김태정 Kim, Tai Chung 28 widower PyengHai 12/5/1903 Doric
김경옥 Kim,Kyenf Ok 20 married Jel Chun 11/18/1903 Hognkong
김형기 Kim,Hyeng Ki 18 single NamWon 8/11/1904 Siberia
김기순 Kim,Ki Sun 20 single KoChaRi 12/24/1904 China
이덕희: 애국단 이라는 거는 1935년에서 1940년경 생겼다는데 정확하게 그게 호놀룰루에서 생긴 게 아니라 와히아와 라는 이 섬(오하우섬)의 시골에서 생겼죠.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만들었고 시내에서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신문에 하와이 애국단원들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순재: 그러나 명단 그 이상의 흔적을 찾지는 못 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단서 하나를 얻었죠. North Wahiawa Schofield Bks, Wahiawa Welcome You 하와이 애국단원들이 살았다는 바로 그 마을입니다. 와히아와 올리브가(街)/미국 하와이주, 큰 올리브 나무가 있어 올리브 이름을 붙였다는 거리, 이곳엔 1907년에 세워진 아주 오래된 교회 하나가 있습니다. 올리브연합교회/미국 하와이주 와히아와 와히아와에 도착해 가장 처음 교회를 찾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 예배 동영상), 나고 자란 땅을 떠나서 타국으로 온 사람에게 외로움을 덜고 살길을 찾기 위한 모임은 예나 지금이나 절실한 것입니다. 한인 이민 첫 십년 동안 하와이 곳곳에서 세워진 예배당만 39곳, 사람들은 교회에서 한글과 영어를 배우고 타향살이의 고단함을 나누었습니다. 세월과 함께 희미해지는 옛 일, 그 자취를 밝히는 일을 어떤 사람은 삶의 목표로 삼기도 합니다. 김창환 원로 목사(올리브연합감리교회)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
김창환/올리브연합교회 원로목사: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이순재: 예, 이순재입니다.
김창환: 텔레비전에서만 뵙다가 실제로 뵈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해설: 김창환 목사는 지난 1968년 우리말 예배가 필요한 한인들을 위해 이곳에 처음 부임합니다. 교회와 관련된 오랜 역사를 아는 유일한 분이죠.
이순재: 저는 1934년도에 태어나서 34년생입니다.
김창환: 34년생 이세요? 저도 34년생이에요.
이순재: 그러세요? 여기 두 사람 만큼 나이 들어 교회의 긴 역사를 대신 말해주고 있는 오랜 사진과 문서들, 김창환 목사가 그 동안 마을 곳곳을 다니며 직접 모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아래 두번째 단서가 있었습니다.
김창환: 사실 이 안을 보시면 더 옛날 사람들이 적혀 있는데~
이순재; 생명록(生命錄), 교인의 생명월일과 사망기록, 그리고 가계도까지 관련된 정보를 꼼꼼하게 적은 자료집입니다. 한인이민 1세대들의 삶과 죽음의 기록들~ 이게 다 옛날 기법이네요. 장자(長子), 여기에 우리가 찾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김창환: 아, 여기 현도명 선생이 계시네
이순재: 네, 김경옥 선생이 계시죠. 현도명, 문성욱, 김경옥, 김기순, 그리고 김례준 이들의 활동을 당시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까요.
김창환: 애국단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어요.
이순재: 예,
김창환: 그런데 아까 그 당시에 임시정부에서 자금이 필요하다 하면 여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희생적으로 다 도우셨을 겁니다.
이순재: 하와이 애국단에 대한 기억 대신에 (독립공채-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발행한 공채) 김창환 목사가 꺼내든 건 독립공채),
김창환: (독립공채가) 백불 짜리도 있었고 오백불 짜리도 있었고 천불짜리도 있었어요.
이순재: 상당이 큰돈이에요.
김창환: 그럼요, 지금으로 치면 몇백만불 되는 거죠.
이순재; 그렇죠,
김창환: 아까, 3.1 운동 이후 바로 임시정부에 자금이 필요할 때 보냈을 거예요.
이순재: 쪼갤 것도 없는 살림이지만 따로 떼어 모아야 했던 돈, 와히아와 올리브가(街)/미국 하와이주 그 흔적이 지금까지도 발견됩니다. 온 가족이 이사를 간 후 지금은 비어 있는 집, 이것도 예외는 아닙니다.
김창환: 어~ 이 상자~
이순재: 이 가족은 무엇을 두고 간 걸까요?
김창환: 이게 매리 전(Mary Chun) 할머니의 서류상자에요. 그분의 파일박스예요. 며느리가 이 집을 팔고 얼마 전에 이사갈 때 이걸 그냥 버리고 갔어요.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보면 쓰레기 처럼 다 쌓여 있어 그 쓰레기 같은 데를 뒤져서 지금 교회에 진열해 놓은 것이 그렇게 나온 거예요.
이순재: 두고 간 상자 안에는 낡은 종이 뭉치들로 가득합니다.
김창환: 별의 것이 다 있네, 대한독립 의연금을 제1차로 낸 영수증이에요. 이건 10원 25전 (10달러 25센트) 10원(불)이면 그 당시 사탕수수 농장의 월급이 한 달에 15불, 여자분의 월급의 반 이상 돼, 대한독립 의연금 증서,
이순재; 고된 노동의 대가로 받은 거의 모든 품삯을 이 마을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내놓았습니다.
김창환: 돈도 많이 내셨어, 이 할머니 뭘 잡숫고 살았는지 모르겠어 돈 이렇게 다 내면서 말이야.
이순재: 할머니가 남기고 간 흔적은 그래서 독립을 위한 간절한 마음인 동시에 그 시기 한인들의 고된 세월입니다. (하와이 플랜테이션 빌리지/미국 하와이주), 놀랍게도 그 많던 사탕수수 농장을 지금의 하와이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한인들의 일터도 세탁소로 목공소로 수리점으로 하나 둘 바뀌어 갔습니다. 사실 여기 전부가 사탕수수 밭이었는데 아마 이전에 지형이 변하고 용도가 변하니까 이건 기념으로 조금 남겨 놓은 것 같은데 (Hawaii’s Plantation Village), 사실 보기가 힘듭니다. 근데 이게 이렇게 굵고 키도 엄청나게 크네, 눈 찔릴라, 아이구~ 정말 강하고 억세네,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이고~ 삶터가 변하고 일터가 변해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우는 일만은 멈추지 않은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이제 오래된 사진을 통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누우아누 추모공원/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Nuuanu Memorial Park & Mortuary 2233 Nuuanu Avenue) 누우아누 추모공원, 초기 이민 한인들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와이하와 마을에 한인 1세들도 대부분 이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하와이 애국단원들의 묘지도 여기에 있을 거라는 소식에 낯익은 이름들을 찾아봅니다. 여기가 현도명 선생 묘구나. In Loving Memory DO MYUNG HYUN “Always in our hearts” Feb 24 1883~May 29 1918, 하와이 애국단원 중 임성우 선생과 함께 건국훈장을 받은 미주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리고 현도명 선생의 묘지와 멀지 않은 곳에서 또 한 분의 반가운 이름을 발견합니다. 여기 김예준 이라고 한글로 쓰여있네 Aug 5 1881~May 7 1970 영어로는 YO CHOON KIM 이라고 되어 있는데, (하와이에) 도착하신 게 1904년 이때 23세였으니까 그러면 1904년에서 23세를 빼면 1881년 맞네, 영어 철자는 좀 이상하지만 김예준 선생이 맞네.
해설: 이름 뿐이던 하와이 애국단원과 처음으로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이순재; 1970년도에 돌아가셨으니까 70년도면 뭐 우리야 한창 젊었을 때이니까 그전에 와서 뵈었으면 찾아뵐 수도 있었겠지.
해설: 김예준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약50년이 흘렀습니다. 이 시간은 우리가 무관심으로 흘려 보낸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 앞에 작은 꽃 한송이 놓기까지 왜 많은 시간들이 흘렀을까요.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저의 여정이 너무 늦은 것은 아니길 바랍니다. 묘지를 다녀온 후 이렇다 할 흔적을 찾지 못하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 목사님~
김창환: 제가 오늘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이순재: 예~ 예~
김창환: 하와이 애국단의 김예준 선생의 아들을 찾았습니다.
이순재: 아이구~ 그러십니까
해설: 김창환 원로 목사에게서 김예준 선생의 아들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은 겁니다. 그 아들은 바로 김영호(하와이 애국단원 김예준 선생의 장남)씨,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그는 웬지 어리둥절한 표정입니다.
기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Thank you for your time).
김영호/하와이 애국단원 김예준씨의 장남: 별 말씀을요. (My pleasure). 저는 김예준의 장남입니다. (사진: 한국 독립당 하와이 총본부 간부들, 1937).
해설: 한국 독립당 하와이 지부 간부였던 임성우 현도명 선생은 당시 올리브교회 교인이었습니다. (단체사진), 김예준 선생도 마찬가지였죠. 50년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한국에서 찾아오다니 아들은 예전 사진을 찾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애써 떠올려 봅니다.
김영호: 오~ 여기에요, 여기! 바로 여기에요. 꼬마가 저예요. 정말 오래됐네요. 수십년 전이에요.
김창환: 아버지가 웃고 계신가요?
김영호; 그런 것 같네요. 웃고 계신 것 같네요. 아주 드믄 일이에요. 아버지는 잘 웃는 분이 아니에요. 아버지께는 절대 말 대답할 수 없었어요. 굉장히 옛날 사람이죠.
해설: 아버지는 엄격하고 인색하고 냉정했답니다. 김영호씨가 어리둥절했던 건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아버지가 임시정부를 도운 하와이 애국단원이라고 합니다.
김영호: 깜짝 놀라서 제 딸한테 이야기 했어요. 내 아버지가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셨대. 이게 믿어지니? 라고요.
해설: 곧 바로 아버지의 물건을 살펴 보았지만 독립운동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김영호: 무슨 영화 같았어요. 모든 예전 사진들을 찾으려 다섯 상자나 뒤졌는데 아무 것도 찾지 못했어요.
해설;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의 일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김영호: 그래서 은행에 갔죠. 출생증명서까지 찾아봤어요. 출생증명서에 따르면 제가 태어날 당시에 저희 아버지는 미군기지의 세탁소 일을 하셨어요.
해설; 김영호씨의 어린 시절은 풍족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밤까지 미군 부대에서 쏟아져 나오는 군복에 파묻혀 살았죠. 세탁업으로 버는 돈은 먹고 살기도 빠듯했습니다.
김영호: 그렇게 인색하고 구두쇠 같았던 저희 아버지가 독립운동 자금을 한국에 보내셨다는 걸 절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출발할 때 어머니 교회에 다녀올게요. 한국에서 온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봐야겠어요. 자세한 것은 다녀와서 말씀을 들리게요 라고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 앞에 앉아서 말씀드렸죠 (올리브연합감리교회/미국 하와이 주 와히아와),
이순재: 전 또 와히아와 교회를 찾았습니다. 아주 오랫만에 특별한 분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 때문인데요. 안녕하십니까? 오셨네요.
김창환: (김영호씨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김예준씨의 아들 김영호씨입니다 (팔 구십대 교인들 교회현관에서 기다림),
해설; 바로 와히아와 독립운동의 아들 딸, 그리고 그들과 어린 시절을 함께 한 한인 2세들입니다. (이순재씨에게 화환을 걸어줌), 예상치 못한 환대에 오히려 제가 특별한 손님이 된 순간입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나라에서 이제야 찾아온 손님을 그들은 반갑고 따뜻하게 맞아줍니다.
이순재: (모두 착석한 후) 제 나이가 우리 김 목사님과 같습니다. 여든 넷, 84세입니다. 그래서 실례되지만 우리 선배님들은 현재 춘추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이능주(1930년생)/하와이 교민 2세: 이제 여든 여덟 살입니다.
현종호(1925년생)/하와이 애국단원 현도명 둘째 아들: 내 나이는 구십 몇살이더라. 기억이 잘 안 나네요. 하하, 1925년생입니다.
현월계(1927년생)/하와이 애국단원 현도명 맏딸: 1927년 생인 저는 이분의 여동생이고요.
김창환: (한 할머니를 가리키며) 이 분이 현도명 선생 막내예요.
현월영(1933년생)/하와이 애국단원 현도명 막내 딸: 저는 1933년에 태어났으니까 85살이에요.
이순재: 누님이시네
현월영: 내가 누나니까 내 말 잘 듣는 게 좋을 거예요.
김영호/하와이 애국단원 김예준 맏아들: 저는 1932년 4월 26일에 태어났어요. 86살이에요.
전영희(1927년생)/애국지사 박신애 둘째 딸; 저는 1927년생이니까 91세예요.
이순재; 그러시구나, 누님은요?
전영실(1932년생)/애국지사 박신애 막내딸: 1932년 4월11일이에요. 여기서는 아기네요.
이순재; 다들 정정하시고 건강하십니다.
김창환: 그런데 한 가지 재밋는 것은 이분들이 교회 바로 앞 건물들에 다 같이 살았어요. 여러분 모두 이웃 사촌이었죠. (한인2세 단체사진),
해설: 한인 2세들에게 교회는 학교이자 놀이터였고 아버지 어머니들에게는 조국의 소식을 알리는 사랑방이었습니다. 밤 늦게까지 일하느라 볼 수 없는 아버지를 아이들은 교회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순재: 어머님, 아버님 여기 처음 오셔서 어떤 생활을 하셨는지 또 그 당시에 자녀들로서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현월영: 모든 남자가 나무 아래 앉아서 정치 토론을 하고 있었어요. 기억들 나지? 그래서 아버지를 찾으려면 교회에 가서 나무 밑을 보면 되었지요.
현종호: 종종 싸우기도 했지요.
현월영: 틀림없이 소주를 들고 계셨겠죠.
해설: 전영희씨가 처음 부모님에 관한 말문을 엽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박신애 (1889~1979/건국훈장 애족장) 선생, 애국부인회 대표이기도 했던 박신애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를 지원했습니다.
전영희: 어머니는 임시정부의 모금을 도우셨죠. 모금을 해서 당시 하와이에 계셨던 김구 선생에게 보냈죠. 당시 하와이에는 모금한 돈을 한국으로 보내던 사람들이 여럿 있었어요.
해설: 그리고 한인 2세들은 와히아와 한인 애국단원들인 그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능주/하와이 교민2세: 매우 적극적이었어요. 그 당시 한국인들 모두가 그랬어요. 저는 그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올리브교회교인 8명이 (하와이 애국단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김예준 선생이 한국의 독립을 지원했던 일에 참여했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 않습니다. 돈이라든지 많은 것들을 관리하는 중요한 분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해설: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김영호씨가 문득 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김영호: 아버지는 항상 돈이 많았어요. 침대 매트리스 안에 돈이 많았었죠.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오면 돈을 그 안에 넣어두셨죠. 우리는 그 침대를 만질 수가 없었어요. 침대 정리도 아버지께서 직접 하셨죠. 제가 봤던 모든 돈이 다---저는 용돈을 벌기 위해 일해야 했어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아버지가 왜 항상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고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많은 돈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어른들 단체사진),
해설; 김예준 선생의 역할은 무사히 임시정부에 전달되기 전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관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재미교민단체 주간 신문인 국민보에서도 하와이 애국단의 활동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10년전에 하와이 애국단으로 설립된 한국독립당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아 왔다: 출처-국민보-태평양 주보 1942년 5월 13일자),
김예준: 김원봉 등 제씨로부터 130원의 특연을 받은 것 (출처: 한국 독립당 제4회 전체위원회 국민보 1945년 4월 18일자), 기사에는 김예준 선생의 이름과 그가 임시정부에 한 일 (재정보고 작금 양년 월례금과 특연양 종합금 4761원 43전에서 김구 선생에게 300원을 송금하였다: 출처-한국 독립당 하와이지부 연회 국민보 1944년 6월 14일자), 그렇게 모인 자금이 어떻게 쓰였는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처음 들어난 하와이 애국단의 흔적입니다. 하와이 애국단의 임성우 선생이 임시정부에 보낸 돈은 모두 천 달러 (마침 그때 하와이에서 명목을 정한 돈 몇 백 달러가 왔다. 나는 그 돈을 받아서 거지 차림의 옷과 전대 속에 감추고 걸식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니 나의 남루한 옷 속에 천여 원의 돈이 있다는 것을 나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출처-백범일지 친필본), 이 돈은 김구 선생이 간절히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을 위해 쓰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히로히토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1900~1932) 선생의 의거, 그리고 윤봉길 (1908~1932) 의사의 의거가 그것입니다. 일본 전승 기념식장을 향해 던진 윤봉길 의사의 폭탄(1932.4.29)은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하와이 애국단이 없었다면 없었을 수도 있는 역사~ 김예준 선생은 왜 아들에게 조금의 내색도 비치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이능주: 그 시절에는 매우 비밀스러웠고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어요. 내가 한국에 독립운동 자금을보낸다고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시절이었어요.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게 참 어려웠어요.
김창환: 하와이 한국 사회가 대립이 되어 있어서 자금지원을 공개적으로 할 환경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네요.
해설; (이승만이 있는 단체사진) 와히아와에는 아픈 상처가 있습니다. (동지회-친이승만 계열의 한인단체-1924년 설립), 당시에 하와이에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노선을 지지하는 동지회 그리고 박용만의 독립운동 노선을 지지하는 국민회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죠. (국민회-친박용만 계열의 한인단체-1909년 설립), 두 단체의 대립은 심각했습니다. 독립운동을 감시하던 한국인 밀정에 의해 일본 외무성에 보고될 정도였죠. (재호놀룰루 일본 총영사관-박용만파 이승만파 襲擊決鬪),
이능주; 여러 단체가 있었어요. 동지회와 국민회 두 단체는 항상 서로 싸웠어요.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사회를 나눴어요. 이승만은 한인 사회를 통제하길 원했지만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 했어요. 와히아와는 그를 힘들게 한 지역이었고 그게 분열을 일으켰어요.
해설; 모두 국민회 소속이던 와히아와 사람들, 저항할 수 없는 역사의 파도 앞에서 그들이 한 일은 조금씩 잊히게 됩니다. (현월영씨 자택/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하와이 애국단원이며 독립 유공자로 추서된 현도명 선생의 막내딸 현월영씨,
현월영; (가족사진 앞에서) 제 아버지 현도명, 그리고 저예요. 귀엽죠?
해설; 그녀의 아버지는 일제 패망 4년전인 1941년까지 독립자금을 냈습니다.
현월영; 저희 어머니는 아버지가 많은 돈을 (독립운동에) 기부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머니는 종종 아버지에게 짜증을 내셨어요. 가족도 좀 생각하라고요. 이곳의 한국인들은 언제나 (일제 강점기의) 조국을 지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들이 임시정부를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자금을 보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어요.
해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지만 조국은 그들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현월영; 아버지는 다시는 모국으로 돌아가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독립운동을 지지한 모두가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안다는 것, 그게 중요하죠. 잊히지 않는다는 거니까요.
해설; 평생 독립운동을 도왔던 와히아와의 사람들 (단체사진), 그들은 왜 조국에 돌아갈 수 없었을까요? 이 사실은 하와이 애국단원의 이야기가 조명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미주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자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하와이이지만, 그 역사는 반쪽 자리입니다. 나머지 반쪽에 묻히고 잊힌 이유~이제 그 답을 들을 때입니다.
최영호/하와이대 역사학과 명예교수: 아이고, 반갑습니다.
이순재: 서울에서 온 이순재입니다.
최영호: 어서 오십시오.
이순재: 교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생년월이 어떻게 되십니까?
최영호: 저는 87세, 1931년 양띠,
이순재: 31년생이시군요, 네, 제가 34년생입니다. 세살 아래입니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최영호: 하하하, (앞으로) 후배입니다. 반갑습니다.
해설: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 정통한 하와이대 최영호 명예교수, 반쪽 자리 독립운동사를 역사학자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이순재: (하와이 애국단원 중에) 몇 분은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으셔서 업적이 인정이 되었는데 많은 분들이 빠져 있더라고요.
최영호: 첫째는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이후부터 하와이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해서 철저한 감시를 했습니다. 밀정을 동원하고 일본 영사관 직원들을 동원해서 한국 사람들에 대한 감시를 아주 철저하게 했습니다.
해설: 상하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대던 한인들의 행적, (하와이에 거주하는 조선인 불령단체(不逞團體)는 소위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에 호응하여 주로 자금단체로서 활동해 왔는데---(중략)—출처: 친일단체와 반일단체(조선독립운동)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 그들이 속한 단체의 계보까지도 일제의 감시었던 엄혹한 시절 (支部-민족주의파(김구)-한국 독립당/한국광복군, 공산주의파 (김원봉)-조선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한국광복군에 합류), 하와이 애국단이었던 임성우 선생도 예외는 아니어서 더욱 몸을 감출 수 밖에 없었죠. (하와이의 요주의 조선인 임성우),
해설; 하와이 애국단이 그 뿐만이 아닙니다.
최영호: 그 당시에 가장 가슴 아팠던 게 옛날에 사탕수수 농장 노무자로 여기에 온 사람들이 해방되었으니까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이 자기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었을 것 아니겠어요.
이순재: 그럴 테죠.
최영호: 이제 갈 수 있는 기회인데 그걸 못 갔다고요. 왜냐하면 여기에 있는 영사관이 여권과 비자를 주지 않았어요.
이순재: 하와이 이민 1세의 절반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를 노교수는 어렵게 고백합니다.
최영호: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가장 공이 큰 사람은 아무리 봐도 이승만 이상은 없어요. 근데, 이승만 그는 내가 보기에는 약점이 많아요. 너무 많아요.
해설: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국민회에 대한 차별은 더욱 심해집니다. 국민회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고국방문은 허락되지 않았죠. 초대 정부가 하와이 한인들의 절반을 외면한 이유를 최영호 교수는 어렵게 알게 됩니다.
최영호: 이승만의 충복으로 여기 왔다던 사람인 (총영사) 오OO씨 내가 개인적으로 알아요. 그 사람에게 내가 몇번 물었다고, 자기는 “(국민회 사람들에게) 여권 안 준 적 없다” 쭉 부인했다고, 마지막에 나한테 얘기를 했어요. 자기가 국민회 사람들에게 (고국행 비자를) 주지 못한 이유가 그때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로 나가 있던 사람이 여기서 이승만 밑에 있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대요. “내가 그런(국민회) 사람들한테 비자를 주게 되면 이 사람의 노여움이 자기한테 올텐데 그걸 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식으로 내게 고백을 했어요.
해설; (하와이 한인독립군사진) 노선이 달랐던 박용만 선생과의 주도권 다툼, 박용만 (1881~1928/건국훈장 대통령장), 하와이 독립운동사의 상처가 되지만 두 사람의 반문이 최영호 교수는 안타깝기만 합니다.
최영호: 박용만의 생각은 우리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무장투쟁을 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군사력을 키워야겠다. 이승만의 주장은 우리가 독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육-외교를 중심으로 해야겠다. 그러니까 이게 철학적인 독립운동 방법에 대한 차이에요. 그 당시에는 우리가 사실 이 문제를 가지고 서로 막 죽이겠다고 싸움을 했지만 사실 이게 다 필요한 거잖아요.
해설: 다 필요한 것이죠. 갈등하고 갈라져서 우리가 힘과 역량을 분산시키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사실 하와이에서도 그 일이 벌어진 겁니다.
최영호: 그렇죠
이순재: 그래서 결국 우리 정부수립 이후에 반이승만 쪽 인사들이 불이익을 많이 당한 이유가 바로 그겁니까?
최영호: 그렇죠, 그렇게 되는 것이죠.
이순재: 노교수의 고백이 내내 머리 속을 맨 돕니다. 그의 고백은 서로 반목하는 역사가 더 이상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당부이기도 합니다. 하와이의 아픈 역사가 묻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그때와 다른가요? 김영호씨가 아버지 김예준 선생이 묻힌 묘역을 찾았습니다. 잊고 산 시간이 너무 길었던 걸까요? 아버지의 묘지는 도무지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한참을 헤매던 그때~
김영호: (꽃 한송이를 들고) 오~ 아버지, 여기 계셨네요.
해설; 아들은 아버지를 만납니다.
김영호; 아버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해설; 아버지 만큼 나이 들어서야 아버질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큰 절은 이제야 알게 된 아버지의 삶에 뒤늦게 올리는 존경의 큰 절입니다.
김영호: 아버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해설; (교회 교인들 단체사진), 그토록 엄격하고 인색했던 아버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숨을 죽이며 자금을 모았던 독립운동가,
김영호: 아버지가 제게 왜 아무 말씀도 안 해주셨는지 이해가 안돼요. 하지만 이제는 이해해요.
해설; 늙은 아들은 결심합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이제 자손들에게 전하기로 말입니다. (김영호씨 자택/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해설; 김예준 선생과 하와이 애국단의 이야기는 김영호씨의 자녀들에게도 놀라운 것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던 가족의 역사는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세탁소 이야기가 전부였으니까요. 이제 세탁소는 김예준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신 역사적인 장소가 됐습니다. (사진: 김예준씨와 손자),
로린 제이 김/김영호씨 아들: 오, 저예요, 저처럼 보이나요?
로린 엘렌 김/김영호씨 딸: 이런 이야기를 듣고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엘렌: 맞아요, 연구를 좀 해야할 것 같아요.
제이: 놀라워요, 이제야 우리 가족에 대해 배웠어요.
엘렌: 믿기 어려워요
김영호: 그래, 놀랍지
제이: 난 우리가 그냥 이곳에 와서 일을 구하고 대학에 간 거라고 생각했어
엘렌: (할아버지가) 그냥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세탁소를 운영하는 줄로만 알았지.
제이: 이런 비밀스러운 삶이었는지 몰랐지
김영호: 정말이지, 비밀스러운 삶이야.
엘렌: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네요.
김영호: 맞아, 비현실적이야.
제이: 이제 에이든, 아빠, 로리 고모, 그리고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모든 것이 역사를 통해 내려오는구나.
해설: 지금 김영호씨 가족의 역사가 새로 쓰이고 있습니다.
김영호: 이번 기회에 저는 아버지에 대해 알았던 것보다 더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렇게관심을 가져주셔서요. 그리고 아버지가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셔서요.
해설; 이제 우리는 여덟 분의 하와이 애국단원 중 임성우 선생, 현도명 선생, 그리고 김예준 선생의 독립운동의 역사까지도 분명히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잊혀진 채 묻혀져 있는 나머지 다섯 분의 독립운동 역사를 찾아내서 세상에 알려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몫이라고 말입니다. 끝. (EBS 다큐프라임 1484회 제1부 프롤로그: 하와이 애국단을 찾아서에서 정리).
① 1959년 63년전 중학생 때 이승만에 대해서 글짓기 한 게 생각난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이승만의 공과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알게 되었다. 하와이 국민회(박용만)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하와이 한인 1세대의 반이 조국이 해방이 되었는데도 이승만과 그의 충복에 의해서 비자 발급이 거부되어 조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어갔다니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② 100년전 3월의 첫날, 서대문 형무소에 조선독립 만세를 외친 3천여 명의 조선 사람들이 갇혔다. 그러나 미쳐 가두지 못한 게 있다. 저마다 품고 있던 나라의 독립, 독립을 바라는 마음이다. 이 이야기는 만세를 부른 그날로 부터 영원히 기억해야 될 역사가 된 어떤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다. 1932년 하와이에 있는 아주 작은 애국 단체가 독립을 위해서 활동한 역사가 있다. 100년전 일제로부터 독립군 한 사람에게 하와이는 꿈을 이루기 위해 기댈 수 있는 곳이었다. 그 한 사람은 백범 김구 선생, 김구 선생의 자서전인 白凡逸志(백범일지)는 그 전체로 독립운동의 역사다.
③ 백범일지 하권은 미주 각지에서 임시정부에 보낸 정성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다. 그 가운데 낯선 단체 이름 하나 하와이 愛國團, 1930년대 상해 임시정부의 형편은 상당히 어려웠다. 기댈 곳은 해외 동포들, 특히 노동자로 살면서도 나라의 독립을 소망했던 미주 지역의 동포였다.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의 각박한 사정을 알리기 위해서 바로 붓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주 반가운 편지가 멀리 하와이에서 날라왔다. 발신인은 임성우 선생, 그는 바로 하와이 애국단원이었다.
④ 이 단체는 1932년 2월 14일, 임시정부의 독립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하와이에서 살고 있는 한국사람들이 세운 비밀 조직이었다. 이 조직에 참여한 8명 중 그 공적을 인정받은 인물은 임성우 (1889~1970/건국훈장 독립장) 선생과 현도명 (1883~1968/건국훈장 애족장) 선생 단 두 분 뿐이다. 2명 외에 나머지 여섯 분들에 대해서는 이름만 겨우 알려졌을 뿐 그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 김예준, 김경옥, 김태정, 김성옥, 김형기, 김기순 이들은 누구일까. 이들을 찾기 위해서는 한인 하와이 이민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1902년 1월 미국, 최초의 이민자 121명 가운데 102명이 호놀룰루에 도착한다. 그후 약 7천명의 한인이 하와이로 이주해 왔고 이주한 대부분은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하와이에 흩어져 있던 30개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향했고 그것은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한 일터가 되었다.
⑤ 이민자들은 모두 7415명, 임성우와 현도명 외에 여섯 분은 김기순(26/1905년), 김성옥(26/1903년), 김예준 (23/1904년), 김태정 (28/1903년), 김경옥 (20/1903년), 김형기 (18/1904년). 하와이 애국단은 1935년에서 1940년경 생겼는데 오하우섬의 시골 와히아와에서 생겼다. 하와이 애국단원들이 살았다는 미국 하와이 주 와히아와 올리브가(街), 이곳엔 1907년에 세워진 아주 오래된 올리브연합교회가 있다. 김창환 원로 목사(올리브연합감리교회)는 지난 1968년 우리말 예배가 필요한 한인들을 위해 이곳에 처음 부임한다. 교회와 관련된 오랜 역사를 아는 유일한 분이다.
⑥ 교회 생명록(生命錄)은 교인의 생명월일과 사망기록, 가계도까지 관련된 정보를 꼼꼼하게 적은 자료집이다. 한인이민 1세대들의 삶과 죽음의 기록들, 하와이 애국단에 대한 기억 대신에 독립공채가 백불 짜리 오백불 짜리 천불짜리가 있었다. 상당이 큰돈이다. 지금으로 치면 몇백만불 되는 돈, 3.1 운동 이후 바로 임시정부에 자금이 필요할 때 보냈다. 쪼갤 것도 없는 살림이지만 따로 떼어 모아야 했던 돈, 그 흔적이 지금까지도 발견된다. 그 당시 사탕수수 농장의 월급이 한 달에 15불, 여자분의 월급의 반 이상, 대한독립 의연금 증서, 고된 노동의 대가로 받은 거의 모든 품삯을 이 마을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내놓았다.
⑦ 그 많던 사탕수수 농장을 지금의 하와이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인들의 일터도 세탁소로 목공소로 수리점으로 바뀌어 갔다. 삶터가 변하고 일터가 변해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우는 일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누우아누 추모공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민 한인1세 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하와이 애국단원들의 묘지도 여기에 있다. 현도명 선생묘, 멀지 않은 곳에서 김예준 선생묘, 김예준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약50년이 흘렀다. 그 아들은 바로 김영호씨, 한국 독립당 하와이 지부 간부였던 임성우 현도명 김예준 선생은 당시 올리브교회 교인이었다. 김영호씨의 아버지는 미군기지의 세탁소 일을 하셨다. 세탁업으로 버는 돈은 먹고 살기도 빠듯했다. 인색하고 구두쇠 같았던 김예준씨가 독립운동 자금을 한국에 보내셨다는 걸 아들은 절대 믿을 수 없었다.
⑧ 하와이 애국단의 아들 딸, 한인 2세들이 모였다. 이능주(1930년생)/교민 2세(88), 현종호(1925년생)/현도명 둘째 아들(97), 현월계(1927년생)/현도명 맏딸(95), 현월영(1933년생)/현도명 막내 딸(85), 김영호/김예준 맏아들(86), 전영희(1927년생)/박신애 둘째 딸(91), 전영실(1932년생)/박신애 막내딸(86), 모두 이웃 사촌이다. 한인 2세들에게 교회는 학교이자 놀이터였고 아버지 어머니들에게는 조국의 소식을 알리는 사랑방이었다. 전영희씨가 처음 부모님에 관한 말문을 연다. 그녀의 어머니는 박신애 (1889~1979/건국훈장 애족장)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 김구 선생에게 보냈다.
⑨ 한인 2세들은 와히아와 한인 애국단원들인 그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올리브교회교인 8명이 하와이 애국단에 참여했다. 김예준 선생은 돈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김예준 선생의 역할은 무사히 임시정부에 전달되기 전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국민보(1942.5.13)에서 하와이 애국단의 활동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사에는 김예준 선생의 이름과 그가 임시정부에 한 일 (국민보 1944년 6월 14일자), 모인 자금이 어떻게 쓰였는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세상에 처음 들어난 하와이 애국단의 흔적이다.
⑩ (백범일지) 마침 그때 하와이에서 명목을 정한 돈 몇 백 달러가 왔다. 나는 그 돈을 받아서 거지 차림의 옷과 전대 속에 감추고 걸식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니 나의 남루한 옷 속에 천여 원의 돈이 있다는 것을 나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돈은 김구 선생이 간절히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을 위해 쓰인다. 히로히토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1900~1932) 선생의 의거, 그리고 윤봉길 (1908~1932) 의사의 의거, 윤봉길 의사의 폭탄(1932.4.29)은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꾸었다. 하와이 애국단이 없었다면 없었을 수도 있는 역사,
⑪ 김예준 선생은 아들에게 조금의 내색도 비치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한국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낸다고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당시 하와이 한국 사회가 대립이 되어 있어서 자금지원을 공개적으로 할 환경이 아니었다. 와히아와에는 아픈 상처가 있단다. 당시 하와이에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노선을 지지하는 동지회(1924년 설립)와 박용만의 독립운동 노선을 지지하는 국민회(1909년설립)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두 단체의 대립은 심각했다. 독립운동을 감시하던 한국인 밀정에 의해 일본 외무성에 보고될 정도였다. 동지회와 국민회는 항상 서로 싸웠다. 이승만은 한인 사회를 통제하길 원했지만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 했다. 와히아와는 모두 박용만을 지지하여 그를 힘들게 하였다.
⑫ 현도명씨는 일제 패망 4년전인 1941년까지 독립자금을 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나라를 되찾은 감격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 만세가 울려퍼졌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현도명씨는 다시는 모국으로 돌아가실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지지한 모두가 인정을 받아야 한다. 평생 독립운동을 도왔던 와히아와의 사람들, 그들은 조국이 해방이 되었는데도 왜 조국에 돌아갈 수 없었을까. 이 질문은 하와이 애국단원의 이야기가 조명되는 이유이다.
⑬ 미주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자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하와이이지만 그 역사는 반쪽 자리다. 나머지 반쪽에 묻히고 잊힌 이유의 답을 들을 때다. 하와이 애국단원 8명 중에 몇 분은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으셔서 업적이 인정이 되었는데 많은 분들이 빠져 있다. 첫째는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이후부터 하와이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해서 철저한 감시를 했다. 밀정을 동원하고 일본 영사관 직원들을 동원해서 한국 사람들에 대한 감시를 아주 철저하게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대던 한인들의 행적, 그들이 속한 단체의 계보까지도 일제의 감시당했던 엄혹한 시절, 하와이 애국단이었던 임성우 선생도 예외는 아니어서 더욱 몸을 감출 수 밖에 없었다 (하와이의 요주의 조선인 임성우),
⑭ 그 당시에 가장 가슴 아팠던 건 옛날에 사탕수수 농장 노무자로 여기에 온 사람들이 1945년 8.15 해방이 되었으니까 당연히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은 자기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은 것이었다. 갈 수 있는 기회인데 못 갔다. 왜냐하면 하와이 영사관에서 여권과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하와이는 이민 1세의 절반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가장 공이 큰 사람은 아무리 봐도 이승만 밖에 없다. 근데, 이승만 그는 약점이 많다. 너무 많다.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국민회에 대한 차별은 더욱 심했다고, 박용만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고국방문은 허락되지 않았다.
⑮ 대한민국 초대 정부가 하와이 한인들의 절반을 외면한 이유는 이승만의 충복이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로 왔기 때문이다. 하와이 영사가 총영사의 눈치를 보고 국민회 사람들에게 (고국행 비자를) 주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그때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는 하와이에서 이승만 밑에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비자를 국민회 사람들한테 주게 되면 총영사의 노여움을 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노선이 달랐던 박용만 선생과의 주도권 다툼, 박용만의 생각은 우리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군사력을 키워야겠다. 이승만의 주장은 우리가 독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육-외교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 이게 철학적인 독립운동 방법에 대한 차이다. 사실 다 필요한 거다. 갈등하고 갈라져서 우리가 힘과 역량을 분산시키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 있다. 우리 정부수립 이후에 反이승만 쪽 인사들이 불이익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
ⓐ 하와이의 아픈 역사는 묻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그때와 다른가. 김영호씨가 아버지의 묘역을 찾았다. 잊고 산 시간이 너무 길었다. 아들은 아버지 만큼 나이 들어서야 아버질 만났다. 큰 절을 올렸다. 이제야 알게 된 아버지의 삶에 뒤늦게 올리는 존경의 큰 절, 아버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숨을 죽이며 자금을 모았던 독립운동가, 김예준 선생의 이야기는 김영호씨의 자녀들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던 가족의 역사는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세탁소 이야기가 전부였다. 이제 세탁소는 김예준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신 성스러운 역사적인 장소가 됐다. 지금 김영호씨 가족의 역사가 새로 쓰이고 있다. 김예준씨는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 이제 우리는 여덟 분의 하와이 애국단원 중 김예준 선생의 독립운동의 역사까지도 기억하게 되었다. 여전히 잊혀진 채 묻혀져 있는 나머지 다섯 분의 독립운동 역사를 찾아내서 세상에 알려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