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2352
4월1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eAUzQ0-Ep3E&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2&t=0s
(방송 미사 리스트)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feature=share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시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순간, 골고타 언덕에서 예정된 끔찍한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어느 순간,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끔찍이도 사랑하셨던 동족 유다인들에게 진리와 자유에 대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복음 8장 31~32절)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진리가 무엇인가 묵상해봅니다. 진리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겠지요.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이시라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로서 그분으로부터 파견되신 분이라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뵙는 것이 곧 하느님을 뵙는 것이라는 진리, 그분 안에 하느님에 계신다는 진리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라는 진리, 그분 손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는 진리, 그분은 모든 율법과 계명 전체를 수렴하고 완성하신다는 진리, 그분은 우리 인생의 최종 목표요,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이유라는 진리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수록 눈물겹고 감사한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하느님이시라는 진리,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고 챙기신다는 진리, 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언제나 노심초사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윤곽이 잡히지 않는 멀고먼 당신이 아니라 내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진리, 오늘도 내 바로 등 뒤에 서 계시면서 나를 바라보시고 나와 함께 움직이신다는 진리, 내가 고통과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항상 나를 떠받치고 계신다는 진리입니다.
뒤돌아보니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믿고, 참으로 아까운 세월 허송세월했음을 아쉬워합니다. 한때 재물이 최고요 진리라고 여겼습니다. 재물만이 우리를 끝도 없이 계속되는 가난과 고통과 벗어나게 해주는 진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정작 재물은 절대적 위치에 놓일 깜이 안되는 대상이더군요.
그토록 오랜 세월 공들여 쌓아올린 천문학적인 재물들이 인간을 우리 인간을 영원히 살게 만들어주는 줄 알았었는데, 죽음 앞에, 하느님 앞에는 정말이지 하찮은 상대적인 대상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느님, 영원한 생명, 불멸, 영혼과도 같은 대상 앞에 재물이라는 가치는 너무나 부차적이면서도 상대적인 가치로 전락해버리고 말더군요.
결국 나중에는 재물이라는 것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되어 버리는 체험도 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축척된 재능이나 학식, 그로 인해 차지하게 된 자리나 역할, 위치가 최고라 여겼습니나. 그런데 그런 것들을 열심히 쌓아 올라가던 어느 날, 우리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 고스란히 남겨두고 내려서야 할 날이 순식간에 다가오더군요.
그 모든 것이 별것 아니라는 것 깨달은 뒤에야 체득하게 된 진리 한 가지, 우리네 인생사 안에서 영원불변하는 건 없다는 것, 다 지나간다는 것, 다 지나가고 나면, 마침내 우리에게 남는 최종적인 대상은 사랑이신 주님 뿐이라는 진리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에게 인정받는 이의 말만이 나를 변화시킨다>
성 프란치스코의 아버지는 큰 포목상을 경영해서 돈을 많이 번 부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자신의 사업을 훌륭하게 이어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방탕하게 지내던 프란치스코의 삶은 허물어져 가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하느님을 만나고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서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기도하고 주님의 뜻만을 찾았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 집 안에 있던 옷감과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아씨시 주교에게 아들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요구합니다.
“이제 이놈은 나의 아들이 아니니 호적에서 이놈의 이름을 제거해 주시오!”
여러모로 둘의 관계를 화해시켜보려던 주교도 결국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제 프란치스코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옷을 벗어 아버지에게 주며 “이것 받으세요. 앞으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를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교가 자신의 망토를 벗어 프란치스코에게 입혀주었습니다.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지상 아버지의 뜻에서 자유로워지고 하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게 됩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아버지의 욕망을 욕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겠습니까?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라고 하십니다. 죄의 종살이를 하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곧 진리이기에 그 가르침을 따르면 죄에서 해방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죄에서 해방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계속 죄를 짓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아버지가 다르기 때문이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이시기에 만약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지 않고 다른 무언가를 아버지라 여기면 그 말씀은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친아버지의 말씀을 따르지, 모르는 아저씨의 말을 따르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유다인들은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라고 반박합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니, 그들은 실제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참 아버지로 여기면서 그분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사형수가 죽기 전에 어머니를 꼭 한번 면회하게 해달라고 간청해서 면회를 시켜주었더니 창살 안에서 어머니를 가까이 오라고 해서는 코를 물어뜯더랍니다. 그 이유는 “왜 내가 어려서 남의 것을 훔쳐 오고 나쁜 짓을 할 때 못 하게 말리지 않아서 내가 오늘날 큰 죄를 범하고 사형을 당하게 했느냐”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잘못 나갈 때는 부모가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아이들이 부모를 부모로 인정할 때야만 가능합니다. 사춘기가 넘어가면 아이들은 부모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부모가 하는 말들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말은 말을 하는 사람을 인정할 때야만 그 사람 안에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춘기가 오기 이전에 꼭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참 아버지요, 성모 마리아를 참 어머니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그분들의 사랑을 깨닫게 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사랑으로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게 되면 그분의 말씀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죄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부모에게도 효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방식입니다.
(유튜브 복음 묵상)
https://youtu.be/ZYq02dN0vA0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4월1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 8,31-42 :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31절) 우리가 그 말씀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진리와 자유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것이 바로 믿음과 희망으로 사는 이들이며, 진리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절) 이 때에 우리는 진리 자체를 향해 가는 것이며 그 진리는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된다.
이 자유는 우리가 진리에 우리 자신이 온전히 따를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다. 이 진리는 우리를 죽음, 곧 죄의 노예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평화 속에서 진리를 누리지 못하는 한 어떠한 자유도 누리지 못한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죽음으로부터, 부패로부터, 변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의미이다.진리는 그 자체가 죽지 않고 썩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죽지 않고 썩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33절) 라고 한다.이 말이 이미 진실이 아니다. 요셉이 팔려갔고(창세37,28 참조), 예언자들이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는가?(2열왕 24 참조) 또한 400여 년 동안 이집트에서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들며 이집트인들을 섬기지 않았는가?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종살이하던 집에서 구해내시지 않았는가?(참조: 탈출 13,3; 신명 5,6) 그리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34절) 어떤 문제 어떤 상황에서든 악에 의지할 경우 그는 죄의 종이 되는 것이며, 죄로 인해 생긴 상처와 낙인은 그 도망친 종이라는 드러내 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들과 딸의 참된 자유를 주신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무른다.”(35절) 죄의 종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영원한 벌을 받지만,자유를 얻을 자격을 받은 아들딸은 언제나 하느님의 호의를 받고 결코 그것을 빼앗기지 않는다. 아들을 통하여 자유롭게 되고 아들의 자격을 얻으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37절)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게으름으로 소홀한 실천으로 그의 자손이라는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을 알려주신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것이다.즉 그들의 마음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그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39절)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말하고 있다. 전 생애를 통하여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가졌던 관계를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그러한 신앙으로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40절)고 하셨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41절) 하시니까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41절)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42절) 하느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의 아버지가 아니시다. 예수님께서 사랑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셨고, 그 하느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또한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 순간 이후 진정 우리는 하느님 앞에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하면서, 이 사순절을 통하여 나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 앞에 새로이 태어나는 기회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1) 죄를 짓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고, 그래서 ‘죄’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차단하는 ‘벽’입니다. 그 ‘벽’의 이쪽은 하느님과 나의 관계가 차단되고 자유가 없는 감옥이고, ‘벽’의 저쪽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안식처입니다.
2) 죄를 짓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등지는 것이고, 그래서 ‘죄’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1요한 4,18) 그 두려움은 나에게서 영혼의 평화와 안식을 빼앗아 갑니다. 평화와 안식이 없다는 점에서 ‘죄’ 속에 있는 상태는 곧 감옥입니다.
3)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다음에 하느님의 시선을 피하려고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세 3,8) 그것은 죄를 지은 인간들의 ‘부끄러움’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내리실 때 백성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습니다.(탈출 20,18)
그것은 죄 속에 있는 인간들은 감히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밀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자신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깨닫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그 경우의 두려움도 사실은 부끄러움입니다.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게 만드는 그 부끄러움 때문에 ‘죄’는 영혼의 감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속에 있는(감옥에 갇혀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즉 인간들에게 참된 해방과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주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들을 감옥에서 억지로 끌어내시는 분이 아니라, 감옥 문을 열어 주시면서 인간들이 스스로 그 감옥에서 걸어 나가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감옥 문을 열어 주신 일은 ‘용서’이고, 내가 그 감옥 밖으로 걸어 나가는 일은 ‘회개’입니다.
<양심이 완전히 마비되어 있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죄의식이 없고, 그래서 심판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누가 그것을 알려 주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위선자들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을 아주 심하게 꾸짖으신 말씀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위선자들을 회개시키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위선자들 자신들이 고집을 부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죄를 짓고 나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회개와 구원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님도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배반자 유다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지옥을 향해서 자기 발로 걸어가는 사람에게 “그쪽으로 가면 안 된다.”라고 타이를 수는 있지만, 강제로 붙잡아서 천국으로 끌고 갈 수는 없습니다. 회개하고 구원받는 일은 강제로 해서 될 일이 아니고, 각자 자신의 자유의지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36)
여기서 ‘진리’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자유’는 구원과 생명을 뜻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모두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이고, 다시 이 말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달음’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다릅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 수행과 수련을 해서 도달하는 어떤 높은 경지인데,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우리가 받고 있는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만이 사람들에게 참 자유를 준다는 뜻이고, 또 이 말씀은 사실상 “내가 너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겠다."(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는 선언입니다.
그 자유와 해방을 얻으려면(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면서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가(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마음을 다하여 온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신앙인이) 되고,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해방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계명들을 실천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힘들어 하면서 그것을 멍에나 짐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몇몇 계명들은 실천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명들을 멍에나 짐으로 여기는 것은, 마음이 온전히 예수님 쪽으로 향하지 않고 다른 마음을 품거나 한눈을 팔거나 딴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속된 욕심과 욕망을 제대로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의무가 아닙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이 신앙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도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우리는 힘들어서 못하는 것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죄 때문에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고, 영혼의 자유를 잃게 되기 때문에 ‘죄의 종’처럼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다음에만 자유를 잃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는 순간부터 자유를 잃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혹을 받거나 느끼는 첫 순간부터 그것을 물리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죄인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
[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자유>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렇게 외치며 실제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지난 인류의 역사 속에 많이 있었습니다. 자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과도 맞바꿀 만큼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을 거역하고 죄를 지어 죽음에 이르렀던 상황에서도 자유를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자유는 인간에게 하느님을 찾게 하는 가장 소중한 도구입니다. 자유라는 것이 이처럼 소중한 것이지만, 그러나 모든 자유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해서 삶의 궁극적 의미가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현상은 같지만 그 내용은 제각기 다릅니다. 서로 질이 다르고 서로 차원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감옥에서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는 시간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는 사람에게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는 사상과 이념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가장 높은 차원의 자유는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죄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모든 근원은 죄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죄로부터의 자유는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있다면 죄를 이겨낼 힘을 가지겠지만 우리는 진리를 소유할 힘이 없습니다. 그 힘은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진리를 찾고 죄를 이겨내는 길입니다.
=====================
[대구대교구 허광철 요셉 신부님]
<진리 역시 사랑>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습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 수용소 사람들을 농락한 나치들의 구호였습니다. 극심한 노동 후 그들이 얻게 된 자유란 진짜 자유가 아니라 죽음이었지요.
하지만 수감자들은 대문자로 씌어 있는 글자 중 B를 교묘히 뒤집어 놓음으로써, 그러니까 보기엔 B자가 맞지만 뚱뚱한 아랫부분이 위쪽에 있도록 하여 나치들에게 무언의 항의를 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치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패러디합니다. 하지만 진짜 진리와 관련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결코 인간을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진짜 진리가 들어갈 자리조차 막아 버리기에 그러한 이들은 살인까지 저질러 버릴 정도로 위험합니다.(37절 참조) 우리의 신앙은 진리를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1요한 5,6) 진리는 곧 하느님, 하느님의 이름은 사랑이기에 ‘진리 역시 사랑’입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습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 수용소 사람들을 농락한 나치들의 구호였습니다. 극심한 노동 후 그들이 얻게 된 자유란 진짜 자유가 아니라 죽음이었지요.
하지만 수감자들은 대문자로 씌어 있는 글자 중 B를 교묘히 뒤집어 놓음으로써, 그러니까 보기엔 B자가 맞지만 뚱뚱한 아랫부분이 위쪽에 있도록 하여 나치들에게 무언의 항의를 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치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패러디합니다. 하지만 진짜 진리와 관련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결코 인간을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진짜 진리가 들어갈 자리조차 막아 버리기에 그러한 이들은 살인까지 저질러 버릴 정도로 위험합니다.(37절 참조)
우리의 신앙은 진리를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1요한 5,6) 진리는 곧 하느님, 하느님의 이름은 사랑이기에 ‘진리 역시 사랑’입니다. 되뇌어 봅니다.
“진리가(하느님이/사랑이)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
=====================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과 같이 예수와 유다인들 사이의 논쟁을 들려준다. 요한복음사가는 이 논쟁을 통하여 예수의 신적(神的) 자기계시를 도모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인들의 고정관념을 근거로 한 고집과 아집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예수와 유다인 지도자들 사이의 절벽은 점점 더 깊어만 가고, 둘 사이의 이해 가능한 지평이나 공감대는 점점 멀어만 간다. 논쟁의 결과는 결국 서로의 고립으로 치닫는다.
어제 복음은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했다.(30절) 그런데 그들이 '정말 예수님을 믿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이는 우리보다 예수께서 먼저 가지신 느낌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31절)라는 서두로 시작한다. 언뜻 보기에 예수께서 믿음을 가졌다는 유다인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려는 듯이 보이나 실상은 논쟁의 연속이다.
논쟁의 연속으로 전개되는 오늘 복음은, 그러나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산다면 참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고, 그럴 때 진리를 알게 되며, 이 진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한다(31-32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죄의 노예가 된다(34절)는 것이다. 오늘의 두 가지 가르침은 다 '자유'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인데, 참으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사는 것'이다.
'말씀을 새기고 산다'는 것은 참다운 제자로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예수를 향한 단순하고 순간적인 이끌림이나 매료됨이 아니라 충실함과 인내함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제자는 그 보상으로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그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32절) 여기서 진리란 두말 할 것 없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결국 진리이신 예수께서 자유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짓는 자는 죄의 노예가 된다.(34절)
노예는 자유를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는 신분일 뿐만 아니라 아예 자유를 지니지 못한 신분이다. 이는 죄 자체가 참다운 자유를 선사하는 진리이신 예수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자는 자유가 없는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 죄를 지은 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참다운 자유를 선사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시다.(36절) 예수님은 진리이시고, 진리가 곧 사람을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참다운 자유는 다시금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실천하며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비록 자유를 주장하더라도 그 자유는 종종 아무 거리낌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방종(放縱)이 될 수밖에 없다. 그에게 참다운 자유를 선사하는 진리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예수와 진리, 이는 예수님 옆에 어떤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스스로가 바로 진리 자체이신 것이다. 진리란 예수님이 어떤 철학자로서 배워 익혀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어떤 불변의 지성적 가르침도 아니다.
진리는 바로 예수님 그 자체이시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말씀 안에 사는 것은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자주 진리(예수님)가 주는 자유(은총)의 삶과, 진리를 거부하는 죄(세상)가 주는 가책(종살이)의 삶을 두고 선택의 고민에 자주 빠지게 된다. 그러나 진리를 택한 자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류시화의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흉년이 들어 굶주린 과부와 딸이 있었습니다. 과부는 딸에게 하나 남은 보석 목걸이를 팔자고 했습니다. 딸은 목걸이를 가지고 보석상에게 갔습니다. 보석상은 목걸이를 보았습니다. 지금은 시세가 낮으니 집에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대신에 약간의 돈을 빌려 주었고, 시간이 되면 내일부터 나와서 일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딸은 목걸이를 집으로 가져갔고, 보석상과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딸은 보석 감정에 재능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유능한 보석 감정사가 되었습니다.
문득 어머니의 보석 목걸이가 생각났고, 집에 가서 보석을 감정했습니다. 딸은 놀랬습니다. 어머니의 목걸이는 도금이었고, 보석도 순도가 낮았습니다. 다음날 딸은 보석상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어머니의 목걸이가 도금인줄 알았습니까? 보석상은 이야기 했습니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사실을 이야기하면 당신은 내가 속이는 줄 알고, 다른 보석상을 찾아 다녔을 겁니다. 결국 실망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나는 사실을 말하기 보다는 당신에게 일자리를 주고 싶었답니다. 보석 목걸이가 없어도 능력이 있으면 굶주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석상의 이야기를 들은 딸은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용광로에 들어갔지만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성서에는 이런 놀라운 표징이 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위를 걸으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걷게 하였습니다. 루르드의 샘물에 몸을 담그면 병이 나았습니다. 이런 표징은 분명 있었습니다. 이런 표징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불 항아리에 들어가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팡이로 홍해를 가를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 위를 걷고, 풍랑을 잠재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는 물리법칙을 넘어서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영적인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리제네스는 성서해석의 3가지 차원을 이야기했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시대와 문화, 역사와 전통이 다른 곳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도덕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시대와 문화, 역사와 전통이 다를지라도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공동선을 위한 삶으로 초대합니다. 영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보편적인 상식과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오랜 시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였습니다. 사실입니다. 사실이라는 관점에서는 인과관계의 그물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소유라는 그물을 버리기 어렵습니다.
영화 ‘판도라’에서 주인공은 가족에게 가겠다고 말하였지만, 위험한 사고의 현장으로 돌아갔습니다. 누군가는 불을 꺼야 했습니다. 주인공은 불 속으로 들어갔고, 수많은 사람을 구하였습니다. 주인공은 불 속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가족과 살아남은 사람의 가슴 속에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혈연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공간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진리’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사실이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첫걸음>
요한 8,31-42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첫걸음>
누구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지만
모두가 첫걸음을
내딛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향한 첫걸음은
진리를 알지 못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유를 향한 첫걸음은
자유롭지 못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올바름을 향한 첫걸음은
올바르지 못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첫걸음은
나 아닌 것을 나로 생각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첫걸음은
하느님 아닌 것을 하느님으로 섬겼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향한 첫걸음은
깨닫지 못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지만
모두가 첫걸음을
내딛는 것은 아닙니다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 혹은 책을 많은 분들이 보셨을 것입니다. 꼭 이를 보지는 않으셨을지라도 많은 분들이 장발장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통해 이 이야기가 어떠한 내용인지 많이 아실 것이라 생각 됩니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쓴 이 이야기의 주인공 장발장은 범죄자 출신입니다.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으로 인해 빵을 훔치다 범죄자가 된 그는, 신분을 숨긴 채 시장이 되어 가난한 시민들을 돌보고 가련한 사생아의 보호자가 됩니다.
또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것을 알면서도 마차에 깔린 노인을 구하는 등 언제나 타인을 도와주고자 노력합니다. 특별히 이 이야기의 원작 소설은 장발장이 이렇게 선행을 실천하게 된 이유를 초반에 상당부분 할애합니다. 그 계기는 죄인으로 살아가던 장발장의 도둑질을 눈감아줌으로써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준 인물 미리엘 주교로부터 시작됩니다. 막 가석방된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만난 것은 1815년, 주교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장발장의 통행증에는 “석방된 죄수, 태생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19년 동안 징역살이를 했음. 주택침입 절도죄로 5년. 네 번의 탈옥 기도로 14년. 굉장히 위험한 자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개만도 못하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장발장은 가는 곳마다 멸시받았고 세상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교도소를 출소한 후 갈 곳이 없어 우연히 묵게 된 성당에서 그는 미리엘 주교를 만나게 됩니다.
주교가 그를 식탁에 앉혔을 때 장발장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며 “몹쓸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깎아 내립니다. 그때 주교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신분을 밝히지 않아도 좋았소. 여기는 내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집이오. 나는 이 문을 들어오는 사람에게 일일이 이름을 묻지 않고, 다만 괴로움이 있는가 없는가를 물어볼 뿐이오.”
그러므로 주교는 주교관이 “내 집이 아니라 당신 집”이라고 말하고, 장 발장을 “내 형제”라고 부릅니다. 주교는 아무런 설교도 훈계도 없이 그의 마음을 다독거려 줍니다.
‘비참한 사람’ 즉, 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 에게 필요한 것은 훈계가 아니라 자비와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발장은 여섯 벌의 은그릇을 훔쳐 달아납니다. 그러다 결국 헌병에게 붙잡혀오자 주교는 “나는 당신에게 은촛대도 주었는데 왜 그릇만 가져갔느냐”며 오히려 장발장을 변호해 줍니다. 그렇게 헌병들이 떠난 뒤 왜 자신을 도와주었냐는 장발장의 말에 주교가 대답합니다. “내가 이 은촛대로 당신의 영혼을 샀으니 앞으로 사랑을 실천하길 바라오.” 주교의 자비와 사랑을 평생 잊을 수 없었던 장발장은 이 은촛대를 평생 지니고 다니게 됩니다. 이 은촛대가 그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제 장발장은 비로소 자신의 열등감과 분노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물론 신분이 노출될 것에 긴장을 놓치지 않지만 그 조차 무릅쓰고 쉴 새 없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자비와 사랑 안에서 그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자비와 사랑 안에 머물고 그것을 실천하거나 체험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소 의아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들에게 종교는 자칫 행동을 구속하고 권고하며 금지명령을 내리는, 소위 말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장애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원수를 사랑하고 잘못한 이를 용서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감정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니 다소 궤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참된 가치인지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속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진리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많은 재물, 물질적 풍요, 현실적인 안락, 좋은 학벌, 평탄한 가정, 높은 명예, 아름다운 외모, 그 외에도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들.
실제로 이러한 것들이 진리라 여겨지고 많은 이들이 이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어제의 강론에서도 말씀드렸듯 세상의 어떠한 것도 죽음 이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전 생애의 선 혹은 악이 남겨질 뿐입니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면 결국 우리가 세상에서 추구해야 할 참된 진리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생애를 통해 알려주신 진리, 즉 사랑과 자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막바지에 이르고 있는 사순 시기는 바로 이러한 참 진리를 바라보는 시기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내던지신 생명, 그 비참한 모습이 우리를 위한 사랑이며 자비임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이 행위는 세상의 구원, 나의 죄의 용서를 위해 먼저 내보이신 사랑의 극적이고 결정적인 표지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속해있는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듯 해 보이지만 이러한 제한은 오히려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 아름다운 정신을 가져다줍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세속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영원한 생명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먼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자 십자가에 자진하여 오르시는 주님의 자비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에게 자유를 선사하는 진리입니다. 그리하여 빅토르 위고는 소설에서 미리엘 주교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습니다.
“오 존재하시는 당신이시여! 코헬렛은 당신을 가리켜 전능함이라 하고, 마카베오는 당신을 가리켜 창조자라 하고, 잠언은 당신을 지혜와 진리라고 하고, 요한은 당신을 빛이라 하며 에즈라는 당신이 정의라 하고, 창세기는 당신을 가리켜 신이라 하고, 인간은 당신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당신을 가리켜 자비라 합니다. 그런데 이 자비가 당신의 모든 이름들 중 가장 아름답습니다.” 아멘.
=====================
[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지금이 더 좋은데…>
지금은 광주 요양병원에 계시지만, 예전에 엄마가 목포에 계실 때 엄마 집에 들렀다가 동네 여기저기 보았습니다. 예전에 여기서 개구리 잡았는데, 여기가 친구네 집이었는데, 구슬치기하다가 밤에 집에 들어갈 줄 모르고 있다가 엄마에게 멱살 잡혀가서 신나게 매를 맞았던 기억들, 우표수집을 위해 새벽부터 나와서 줄 서고 있었던 우체국은 아직도 있고요. 그리고 우체국 옆에서 깡패를 만나서 매 맞고 돈 빼앗겼던 기억들……. 전에는 사람들이 늘 북적북적했던 양조장, 그리고 엄마 집 옆 방앗간에서는 설과 추석 대목이면 하루 용돈 받고 알바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옛날의 기억들을 떠올리면 흐뭇한 미소가 생깁니다.
옛날의 일들은 모두 재미있었고 행복했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닐 텐데, 나쁜 일 역시도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면서 이러한 말을 조용히 되뇌게 됩니다. ‘그때가 좋았는데…….그립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오늘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오늘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어라.”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는다.”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에게 생기거나 맡겨진 짐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으면서 생긴 짐들을 기쁘게 지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짐들이 시련이나 고통을 주심이 아니라 축복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짐을 지고자 한다면,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축복을 주심을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신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내 말을 붙잡고 있으면”이라는 뜻은 ‘가난한 이들에게 넉넉하게 베푼다.’라는 뜻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잘못, 약점을 보면서도 그것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과 죄를 용서한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고운님들의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라는 뜻이고, 그리고 ‘공중의 새들과 들판의 꽃들을 고운님들의 모습으로 삼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놓지 않으면서 씹고, 뜯고, 먹고 즐겨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신앙인으로서 정말로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고운님들이 세상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이제 저는 ‘그때가 좋았는데….’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지금 순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살아생전에 암 투병하던 ‘최인호(베드로)’라는 작가분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추억이야 낡은 옷과 같아서 떠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 내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남은 생 동안 하느님께 얼마나 가까이 갈 수 있을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이 죄 많은 죄인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받아 주실까요? 물론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용서해주시는 분이지만, 그래도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부끄럽지 않은 영혼으로 서고 싶은데 그것이 걱정이랍니다. 나같이 죄 많은 죄인을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실까요? 그것이 요즘의 소망입니다. 나이와 함께 오는 여러 가지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도 잘 받아들일 만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 요즘의 간절한 기도 제목입니다.”
요즘 코로나 19로 인해 여기저기서 많이 힘들다고 어렵다고 합니다만, 더 답딥하게 만드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짚고 가야할 일이 있습니다. 고운님들에게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쳐올 때, 누가 고운님들의 희망이 되어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아니면 반대로, 고운님들의 희망을 꺾고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데 엉뚱한 소리로 비판하고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 하고, 또한 이 어려움을 통해 자기들 잇속을 챙기려고 하는 이들이, 그리고 그 집단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물론, 고운님들에게 모든 거센 폭풍이나 산 불같은 어려움 상황이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헤치고 원하는 목적에 다다르며 좋겠습니다. 그 어떤 것도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라면….’ 고운님들의 앞길을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운님들 각자에게 묻습니다.
“너는 나를 믿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고운님들의 삶에 첫째 자리로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주님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 두레박도 ‘너는 나를 믿느냐?’라는 물음에 ‘예’라고 대답하면서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음으로 적당한 때가 되면 필요한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어 고운님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주님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54)
♧♧ 시편 78편 50절…
"당신 분노의 길을 닦으시어 저들의 목숨을 죽음에서 구하지 않으시고 저들의 생명을 흑사병에게 넘기셨다."
* 당신 분노의 길을 닦으시어...
‘길을 닦으시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라스 나티브’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평평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하느님께서 이집트에 대한 당신의 분노를 쏟으실 길을 닦으셨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서 당신의 뜻대로 심판을 단행하셨음을 의미합니다.
* 저들의 목숨을 죽음에서 구하지 않으시고...
‘저들의 목숨...’은 문자적으로 ‘저들 자신’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하느님께서 사람과 가축을 막론하고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다 죽인 열째 재앙을 가리킵니다.(탈출기 11장 4-6절. 12장 29-30절. 참조)
* 저들의 생명을 흑사병에게 넘기셨다.
탈출기 12장에는 맏아들과 맏배의 죽음이 흑사병으로 인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로 미루어보아 당시 전염병이었던 흑사병(페스트)이 하느님의 열째 맏아들 재앙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 시편 78편 51절…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을, 함의 천막 속 저들 정력의 첫 소생을 치셨다."
* 함의 천막...
창세기 기록에 의하면, 이집트인들은 함의 후손들이었습니다(창세기 10장 6절. 참조).
그러므로 여기서 ‘함의 천막’은 이집트를 뜻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저들 정력의 첫 소생을 치셨다.
여기서 ‘정력의 첫 소생’은 맏아들을 말합니다.(창세기 49장 3절. 참조) 하느님께서는 죽음의 재앙을 내리시어 이집트 모든 집들의 맏아들은물론 가축의 맏배까지도 모두 죽이셨습니다.(탈출기 12장 29절. 참조) 그러나 과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가정은 이러한 재앙을 피하였습니다.(탈출기 12장 1-14절. 참조) 이 과월절의 어린 양은 당신의 피를 친히 흘려 인간의 죄를 대속함으로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신 하느님의 어린 양 예수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이사야서 53장 7절. 요한복음 1장 29절. 참조)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머리가 좋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그걸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머리가 아주 좋으면 최고의 선뿐 아니라 최고의 악을 실현할 수도 있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옳은 길로만 간다면, 너무 서두르다가 길을 잃는 사람보다 더 멀리 갈 수가 있다.” 이 말은 위대한 근대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머리가 좋아야 올바른 판단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히려 최고의 악을 실현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독재로 많은 사람을 고통 속으로 이끌었던 독재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역사 속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사람 역시 머리는 너무나 좋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희망과 좋은 모범을 보여줬던 인물은 머리에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천천히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선’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머리 좋은 것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꾸준히 ‘선’을 실천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은 머리 좋은 것이 커다란 복을 받은 것처럼 착각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머리가 너무 좋으신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칭찬일까요? 악담일까요? 머리가 좋아서 악으로 기울어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면, 이 말을 악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열이면 열 모두가 악담이 아닌 칭찬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라고 유다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머물다’라는 의미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먼저 주님께 가는 것이 일 번이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머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온다면, 듣는다면, 찬양한다면 등의 단어가 아니라 ‘머무르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이 머문다는 것은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주님께 박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커다란 나무는 쉽게 뽑을 수가 없습니다. 땅속 깊이 뿌리가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께 박혀 있는 상태가 ‘머무르는’ 상태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말하면서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지나치게 자랑하고 있지만, 이 관계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음을 가르치면서 그 관계를 차례차례 벗겨 내십니다. 즉,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실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만이 참된 자유를 주시는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께 믿음으로 머무는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을 믿게 되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사순시기를 잘 보내고 계신가요?
어느날 문득(정용철)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잘 한다고 하는데/ 그는 내가 잘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나를 교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그를 믿고 있는데/ 그는 자기가 의심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떠나기 위해/ 일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그는 더 머물기 위해/ 애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벌써 잊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이것도 옳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저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내 이름과 그의 이름이 다르듯/ 내 하루가 그의 하루가 다르듯/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구나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좋고 편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을 틀렸다고 확신하는 순간, 상대방과의 관계는 어렵고 힘들게 될 뿐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아브라함의 참 자손-
봄이 되면 생각나는 ‘봄길’이라는 정호승의 시가 있습니다. 어제도 이 ‘봄길’이란 시가 신문 한 면을 코로나 환자들을 돌보는 간호사의 사진과 더불어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도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봄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이런 봄길로 상징되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랑의 사람이, 진리의 사람이 진정 자유인입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명명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진리의 협력자’로 일컬어지기를 원했던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 역시 자유인이었습니다.
누구나 원하는 바 자유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말하는 참 자유는 우리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참으로 이런 자유를 선물로 받은 사람은 생사를 초월하여 봄길같은 사랑의 사람이 되어 참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유를 희구합니다. 자유의 종류도 참 많고 거짓, 가짜 자유도 많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유는 오직 하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진 하느님으로부터의 선물인 참 자유입니다.
이런 참 자유를 선물로 받을 때 참 행복과 평화와 기쁨이 있고 참 사랑의 사람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진정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참나의 실현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런 자유인이야 말로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요 진정 위대한 인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주님 말씀이, 주님 자신이 바로 진리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새삼 진리의 말씀은 인간의 본질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주님 말씀 안에 머물러 푹 젖어 살 때 주님의 제자가 되어, 진리이신 주님과 하나가 되어 비로소 진리를 깨닫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대한 사랑은 참 자유의 관건임을, 참 자유인은 믿는 모든 이의 소명召命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진리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의 은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 갈수록 우리는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며, 하여 우리 영적 삶의 여정은 ‘진리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자유의 여정’이라 칭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가 내 말안에 머무르면(If you remain in my word)”이란 표현도 좋았지만 어제 읽은 영어 표현도 참신했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네 집으로 만든다면(If you make my word your home)”, 얼마나 친근감 있고 참신합니까!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영혼의 집이, 가정이 될 때 주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깨달아 자유로워질 것이니 참으로 충만한 행복일 것입니다. 참으로 이 말씀의 집을, 가정을 못 찾아, 또 바로 가까이 지금 여기 영혼이 머물 영혼의 집인 말씀 안에 정주하지 못하고 방황, 표류하는 영적 ‘홈리스(homeless)인 노숙자露宿者’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우리의 근원적 두려움과 불안도 여기에 기인함을 봅니다.
연목구어緣木求魚란 말이 생각납니다. 자유를 찾지만 자유를 찾지 못하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 가까이 있는 자유의 집인 진리의 말씀을 놔두고 떠나, 엉뚱한 곳에서 찾기 때문이니 이 또한 인간의 무지를 반영합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참 자유가 선물임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죄의 종은 바로 그 영혼이 말씀의 집에 정주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이지만 아들은 바로 언제나 말씀의 집에 머무릅니다. 바로 이런 아드님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면 우리 또한 주님과 함께 말씀의 집에 머무르게 되어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아드님 예수님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참 자유인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다니엘서의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서도 건재했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참 자유인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고 하느님 진리 안에 깊이 정주했던 세 청년이었습니다.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서 세 청년 외에 또 하나의 불가사의의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주님의 현존, 주님의 천사였습니다.
바로 진리이신 주님께서 함께 할 때 영육의 건강이요 참 자유인임을 깨닫습니다.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하느님 찬미의 고백이 참으로 통쾌합니다. 진리의 증거자 세 청년의 승리요 참 자유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다니엘3,95).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어 당신 진리의 연인이, 진리의 협력자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주기 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주님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야말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못하였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처럼 보일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하여금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 하느님의 말씀을 몇 번이나 기억하고 실행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제자는 한시도 스승의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말씀을 실천할 때이고 사랑할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일상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실천을 요구 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노예가 될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강요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인 협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뜻인 진리를 따릅니다.
또한 진정한 자유는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이웃도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야고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을 만납니다. 그 선물은 다름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말씀, 머무름, 제자, 진리, 자유!
이 문장 안에는 축약하거나 뭉뚱그릴 수 없을만치 소중한 단어들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머무르면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닫고 자유를 누리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요한 8,37)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는 말에 유다인들이 발끈합니다.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찾아 숙고하고 적용하는 대신, 이미 정답으로 주어진 율법에 맹목적으로 매여 살다 보니 자유와 부자유의 차이조차 망각한 듯합니다.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은 단순히 신분적으로 예속된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지요.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자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이는 율법과 관습의 종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요한 8,37)
예수님은 종과 아들, 노예와 자유인의 차이가 존재의 내면에 말씀을 품을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고 과감히 말씀하십니다. 자기 안에 말씀을 간직한 이는 말씀이신 분을 알아볼 뿐만 아니라 그 말씀과 하나 되어 무엇이든 말씀께서 기뻐하실 일을 합니다. 의무나 책무로 움직이지 않고 사랑하기에 자유로이 나아갑니다.
제1독서는 바빌론으로 유배갔다가 왕궁에 발탁된 세 청년이 우상숭배를 거부하자 불가마에 던져지는 무시무시한 대목입니다.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다니 3,92)
이 말은 해설자나 일반 목격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이 흉포한 일을 지시한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기에 더욱 힘이 있습니다.
세 청년은 생사고락을 비롯해 온 존재를 하느님께 의탁하였기에 진정 자유롭습니다. 고수하고 움켜쥐어야 할 자기 것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자유로울 수 없지요. 그리고 자유로운 이는 설령 불가마 같은 시련과 고통의 도가니에 던져진다 해도 상처를 입지 않으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분께서는 ...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다니 3,18)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그들의 자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구해 주시리라는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굳게 믿지만,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모든 일과 사건이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영광을 향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마치 빚쟁이 다루듯 다그치고 토라지고 실망하는 얕은 속으로는 감히 이해하기조차도 버거운 믿음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요한 8,42)
누가 아들인지 종인지, 자유인인지 노예인지가 판가름 되는 기준은 사랑입니다. 세상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러 오신 아드님을 믿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이는 인종, 신분, 국적, 빈부, 직업에 관계 없이 하느님의 자녀이고 자유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부활의 여명을 고대하며 더 짙은 어두움에 잠긴 이때, 말씀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실 자리를 마련하고 실제로 그분을 모셔들입시다. 하루종일 다가오신 말씀을 되씹고 곱씹으며 머무르는 사이 우리는 그분을 더 믿고 더 사랑하게 됩니다. 믿음과 사랑이 견고히 성장한 이들은 삶의 필요와 요구, 바람 앞에서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다친 곳 없이 불 속을 거닐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 안에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사랑으로 충만하실 벗님을 축복합니다.
=====================
[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주님의 수난과 부활
주님의 수난은 현세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가리킵니다만, 주님의 부활과 그 영광은 우리가 받을 영원한 생명을 가리킵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주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수고와 고통과 죽음에 허덕이는 이 세상 속으로 뛰어 드시어 인류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을 무릅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시고 우리의 무의미한 수고와 고통이 주님의 십자가 수난과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
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이는 이미 제자 된 이들에게 참으로 제자 되기를 초대하는 말씀입니다. 곧 ‘자유’로의 초대입니다. 그것은 단지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넘어서, 나아가 그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말한 대로,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말씀이신 그분께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그분 영의 수액을 받아먹고 우리가 그분 안에,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게 되는 ‘상호내주’(perichoresis)를 말해줍니다. 이는 그저 상대 안에 머무르는 단순한 내주나 거주가 아니라, 역동적인 상호교환, 곧 서로 향하여 있음을 말합니다. 서로 향하여 있어서 서로에게 건너가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extasis와 kenosis)을 내포합니다. 같은 복음서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요한 16,13)
그렇습니다. 말씀과 우리가 이렇게 상호내주하면 진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진리이신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말씀이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지탄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요한 8,37)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할 수 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향하여 있으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무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머무르는 자리요, 궁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진리이신 주님만이 진정, 저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고”(요한 8,34), 진리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진리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주님!
제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가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제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되게 하소서!
당신은 진리이오니,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자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아무리 집이 커도 좁고
답답하게 느끼는 때가 있고,
아무리 집이 작아도 넓고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에 묶인것이 있으면
환경이 아무리 받쳐줘도
멍에를 지고 있는것 같지요.
죄의 사슬, 이것은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의 목을 조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따르는 이는
자유를 얻어 누린다고 하십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그에맞게
대응하며 사는 삶의 태도는 종살이가 아니라,
삶의 무대에서 주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사랑할때 자유롭습니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 36)
사람과 생명
사랑과 자유는
따로 떼어
설명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자유가
또 하나의 자유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고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자유를
우리에게 기꺼이
내어주십니다.
내어주는 자유가
우리를 괴롭히는
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님 없는
자유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참된 자유입니다.
자유가 우리를
생명의 기쁨을
맛보게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은 언제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참된 자유입니다.
우리 삶으로
내려오시어
가장 좋은 사랑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향해
나가는 사랑의
사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