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농아원 청각장애인 청소년 자립 프로그램
희망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떡
서울의 한 떡 연구소. 청각장애 청소년들이 쉴 새 없이 수화를 주고받으며 분주히 움직인다. 미래의 떡집 CEO를 꿈꾸는 이들이 오늘 ‘떡 박사님’에게서 전수받을 떡은 ‘팥앙금설기’다. 맨 처음 멥쌀가루를 계량하는 일은 막내의 몫이다. 여기에 소금과 막걸리를 추가하고 사각형 모양의 시루에 담은 뒤 찜기에 찌는 일은 제일 능숙한 반장이 맡았다. 이 과정이 떡 만들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찐 설기 위에 팥앙금을 체로 쳐 얇게 까는 일은 섬세한 손길이 특기인 동갑내기 친구가 맡았다. 이렇게 떡의 층을 올려가며 몇 차례 찌기를 반복하다 시루를 뒤집으니 한 시간여 만에 먹음직스러운 떡이 완성됐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떡이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사진설명 : 떡 제작 실습 중인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판매 실습을 하고 있다>
삼성농아원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손잡고 취업을 준비 중이던 청각장애인 청소년들에게 무료 기술교육에 나섰다. 대개 농아원을 졸업한 청각장애인들은 철판가공 공장이나 유리절단 공장처럼 소음이 심한 중소업체에 취업하는 게 일반적이다. 보통사람은 참기 어려운 소음도 이들에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떡 프린스’들의 진로는 선배들과 다를 것 같다. 공장 대신 떡 기술자, 나아가 떡집 사장의 꿈을 키우며 세상 속으로 뛰어든 아이들을 만났다.
입 모양과 수화를 통해 의사를 전달해야 하는 청각장애 청소년들이 일반인에게서 떡 만드는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선생님이 목청을 높여 이름을 불러도 고개를 숙인 채 일에 열중하다 보면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잦다. 궁금한 걸 물어보고 싶어 수화를 해도 선생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국 삼성농아원의 사회복지사가 통역으로 나섰고, 칠판에 일일이 순서를 글로 적어가며 떡 만드는 법을 익혔다.
<사진설명 : 아이들이 직접 제작한 떡>
견문을 넓히기 위해 지방에서 열린 떡 박람회도 방문한다. 숙련된 기술을 갖기까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밤을 새워가며 노력한 끝에 알음알음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만들 수 있는 떡의 종류도 찹쌀떡부터 인절미, 모듬설기, 호박설기, 자색고구마설기, 떡 샌드위치까지 점차 늘어났다. 농아원 후배들은 희망의 청사진인 떡 프린스 선배들에게서 떡 만들기 기술 배우기를 고대하고 있다.
“내 손으로 만든 떡을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지금까지 모은 돈을 저축하기 위해 통장도 새로 만들었지요. 열심히 떡을 만들고 돈도 많이 모아 직접 떡 가게를 내고 싶어요.”
박현종(청각장애2급·가명) 군은 어서 성공해서 우리나라와 외국의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는 게 꿈이다.
<사진설명 : 아이들이 홍승동 떡 연구소에서 실습을 하고 있다>
홍승동 떡 연구소가 2년간 핵심기술을 전수해준 데다, 손재주가 뛰어나고 정성을 들여서인지 한번 먹어본 고객들은 꼭 다시 찾는다. 메뉴도 다양하다. 찰떡·설기·송편은 물론 컵케이크·떡샌드위치·고구마케이크 등 그 종류만 30여 가지에 이른다. 모든 재료는 우리 농산물이다. 수도방위사령부, 서울삼성학교, 행복플러스가게 등에 조금씩 납품하면서 입소문도 타기 시작했다. “청각장애인은 청각이 약한 대신 손·맛의 감각은 비장애인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직업훈련교사의 귀띔대로,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주문도 밀려들고 있다.
재료비와 인건비를 빼고 나면 그리 남는 게 없지만 희망으로 가득 찬 아이들이다. 월급은 많지 않아도 자립의 기반을 마련할 일자리라는 점에서 수천만 원의 월급을 받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말에 힘이 실렸다.
자동차 부품조립 일을 하다 이곳에 왔다는 오재석(청각장애2급·가명) 군은 “일반기업에서 청각장애인들에 대한 차별의 벽은 생각보다 높더라고요. 월급은 적지만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배우며 생활하는 이곳이 더없이 행복해요. 우리가 만든 떡을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게 너무 고맙고 보람 있어요. 좀 더 실력을 쌓아서 가장 맛있는 명품 떡을 만들 겁니다. 가게를 열어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떡 기술을 전수하고 싶어요.”라는 꿈을 전했다.
넉넉한 처지는 아니지만 남을 돕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하루 지난 떡은 절대 팔지 않고 남은 떡은 인근 농아원에 나눠주는 온정을 베푸는 참이다. 이들의 소리 없는 꿈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비록 활동에 조금 제약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몇 배의 정성과 노력으로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남들에게는 단순한 먹거리지만 청각 장애를 가진 청소년들에게 떡은 삶의 중요한 목표로 자리 잡았다. 오늘도 이 작은 떡집에는 희망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사랑의 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