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자의 축복 / 박영수
미국 캘리포니아 주 어느 대학과 우리 대학이 교류협력관계를 틀 때의 일이다. 홍보 부서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전송지로 날아온 대표단 방문계획서를 살피다가 적이 실망했다.
협의차 오겠다는 사람이 부총장과 부인(교수) 그리고 세 딸 뿐이었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가족여행에 대접을 좀 받아 보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런데 청주의 하루 일정이 학교 방문 말고도 도심 한복판에 있는 공원을 돌아보는 게 고작인 걸로 보면 관광여행은 아닌 듯도 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다 ‘비고란’을 보고 궁금증은 다소 풀렸다.
거기에는 부총장의 두 자녀가 뜻밖에도 청주 태생의 입양아라고 적혀 있었다. 공원은 그 애들과 관계가 있는 듯했다.
문득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입양아의 친부모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극적인 재상봉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울고불고하는 감격적인 상봉장면이 매스컴을 타면, 우리 대학은 덩달아 빛을 낼 수 있다는 계산, 홍보 담당자다운 발상이라고 할까.
즉각 교류를 주선한 S교수를 통해 의사를 타진해 보았으나 실망스럽게도 그럴 의향이 없다는 연락이 왔다. 생각을 덮어 버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추가로 날아온 한 장의 전송지는 내 마음을 흔들어 놓고 말았다. 홀트아동복지재단의 입양기록을 요약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1983년 4월 어느 날 새벽, 청주 중앙공원 방범초소 안에 몰래 내다 버려진 기아(棄兒)를 경찰이 발견함. 세 살과 두 살짜리 이 여아는 홀트재단에 넘겨졌고 일정기간 위탁과정을 거쳐 85년 가을 미국 캘리포니아 브라운가에 입양 처리됨.
도대체 어찌 이리도 무책임한 부모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전쟁 때도 아니고 굶주리던 시절도 아닌 엊그제 같은 80년대 초, 내가 살고 있는 청주 땅에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처음엔 비정한 모정(母情)에 혀를 내주르며 원망을 퍼부었지만 흥분이 가라앉고 나자 슬그머니 ‘오죽했으면 하나도 아닌 두 딸을 내다 버렸을까.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동정론이 고개를 내밀었다.
TV 화면에서 보던 감동어린 가족 상봉의 모습, 그 중에도 “왜 나를 버렸느냐.”라고 몸부림치던 딸이 “못난 애미를 용서해다오. 그 때는 그런 사정이 있었더란다.”하자 끝내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던 장면이 퍼뜩 떠올랐다.
‘그래 맺힌 한은 풀어야 해. 아무리 버렸다 해도 혈욱은 혈육. 만나게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야. 오해도 풀 수 있고 뿌리를 찾고 나면 미움도 그리움으로 바뀔 수도 있지 않겠어? 여기까지 데려온 걸 보면 은근히 기다릴지도 모를 일이거든.’
자문자답을 하다 보니 어쩌면 그녀들이 향수병(鄕愁病)에 걸려 있을 듯도 싶었고, 내색을 않으면서도 부모와 형제를 그리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일행이 중앙공원을 방문할 때 슬그머니 기자들을 끼어들게 하여 자연스럽게 취재를 유도하는 은밀한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강보에 싸여진 채 버려져 이름조차 기억 못하더라도 부모형제 닮지 않은 사람은 없는 법, 화면에 얼굴이 소개되면 부모 쪽에서 자식을 알아볼 수 있을 성싶었다.
나는 출입기자들에게 입양아들의 모국방문 사연을 흘리면서 연락을 할 테니 알아서 취재를 해보라고 넌지시 귀뜸을 했다.
브라운 부총장 가족은 약속한 날 예정된 시간에 우리 대학을 찾아 왔다. 차에서 내리는 일행을 영접하면서 나의 눈은 입양아 두 자매 쪽에 꽂혔다.
중후한 인품의 브라운 씨 내외와 금발에 눈이 파란 친딸 파피리우스가 내린 뒤 이윽고 지젤과 소피아 두 양딸이 모습을 나타냈다. 치렁치렁 내린 머리. 까맣게 그을은 얼굴에 하이얀 이를 드러내 놓고 활짝 미소를 머금은 열일곱, 열여섯 살의 자매는 마치 쌍둥이 같았다. 친딸이 온실 속의 꽃이라면 두 한국인 양딸은 들판에 아무렇게나 핀 야생화 같았다.
소녀답지 않은 세련된 매너로 거침없이 악수를 청하는 그녀들의 손을 잡으며,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영롱한 흑진주가 바로 이럴까. 사계절 따사롭다는 풍요의 땅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한국의 딸들,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아, 부끄럽구나!’
그들을 총장실로 안내하면서 터진 탄식이었다. 못난 우리가 내다버린 아이들이 코쟁이들이 저토록 당당하게 키워 놓았으니……. 옆에 선 브라운 씨의 키가 새삼 크게 느껴졌다.
대표단은 진일보한 상호협력 방안을 내놓아 구체적인 교류안이 쉬게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자매결연은 핑계일 거라는 우려는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예상보다 큰 수확을 올릴 수 있었다.
점심은 소문난 한식집을 골랐다. 메뉴는 특별 한정식. 맛깔스런 반찬들이 가지런한 점심상을 대하자 일행은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입양아 자매는 서투른 젓가락질이었지만 햇나물 반찬이 구미에 당기는 모양이었다. 체질은 속이지 못하는 것일까. 버터와 치즈를 먹으며 자랐음에도 된장국, 호박무침, 미역국을 맛있게 먹었다. 교육심리학 박사인 브라운 부인의 정성 때문일까, 세 자매는 우애가 남달라 보였다.
혈육의 정이니 향수병이니 따지는 것은 한국적인 잣대에 불과했다. 입양아들의 얼굴에 구김살은 고사하고 그늘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식사 후 어른들끼리 차를 나누는 시간에 아이들의 친부모를 찾는 문제를 거론해 보았다. 브라운 씨는 진지한 표정이 되어 솔직히 털어놓았다.
“애들이 원하지 않는 일입니다. 버린 부모에 대한 증오심도 있고요. 아내가 애들의 심리상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방문은 자주하도록 배려하여 모국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갖도록 해줄 생각입니다. 학업성적도 우수하고 무슨 일이고 적극성을 보여 우리는 친딸보다 더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 생각이 너무 좁았다. 급히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취소, 취소”를 연발하며, 일행이 다른 볼 일이 생겨 그냥 가게 되었다고 기자들 따돌리기에 급급했다.
공원을 찾은 입양아 자매는 신기한 듯 사방을 살피다가,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방범초소에 이르러서도 표정이 밝기만 했다. 천연덕스럽게 “으앙-”하고 우는 제스처까지 보이며 웃음을 날리는 것이었다. 15년 전 버려졌던 처절한 사연이 마치 남의 일처럼 보였다.
그 아이들이 버려지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여고생이 되어 학교폭력에 시달리거나 입시 준비하느라 밤잠을 설치고 있을 것인가. 집이 가난했을 터이니 학교를 중퇴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가 공장 문이 닫히기라도 했다면 거리를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중앙공원 어딘가에 행운의 여신이 있었단 말인가.
9백 년 묵은 은행나무가 축복의 미소를 보낸 것인가. 버림을 받아 오히려 행복한 새 삶을 얻은 입양아 자매들. 그러나 혈육의 정에 연연하여 가족을 찾으려 하지 말고, 앞서가는 나라에서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성장해 주었으면 싶다.
사무실로 돌아와, 기자들의 항의 섞인 닦달에 곤혹스러우면서도, 사랑의 힘이 빚은 쌍무지개를 보고 난 것처럼 더없이 흐뭇했다. 내 마음에 새겨진 영롱한 쌍무지개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