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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변을 이겨내는데 힘써야할 21항의 상차문 ~ 백강 이경여 상국
효종 4년 계사(1653) 7월 2일(을축)
영중추부사 이경여가 올린 재변을 이겨내는데 힘써야할 21항의 상차문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상차하기를,
“접때 연영전(延英殿)에 납시어 많은 관원을 접견하셨을 때에 재변을 당하여 몹시 절박하게 경계하고 두려워하시는 뜻이 말씀에 넘치고 뭇 신하에게 하문하여 도움을 구하는 것이 매우 절실하셨으니, 입시한 신하들이 누구인들 반가워하고 감격하지 않았겠습니까. 신은 식견이 천박하고 고질병이 낫지 않아 정신이 어두운 상황에 갑자기 주대(奏對)하느라고 생각을 다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이로써 책임을 면하려 하여 끝내 성대하신 뜻을 저버린다면 신의 죄가 더욱 클 것입니다. 또 뜻은 만사의 근본이고 뉘우침은 착한 것을 회복하는 기틀이니, 전일의 일은 반드시 과거를 뉘우쳐 깨닫고 장래를 무사하게 하려는 의도가 일념에서 분발하여 이런 비상한 거조(擧措)가 있게 되었으니, 이른바 태평이 오늘부터 비롯한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은 전후에 은혜를 받은 것이 월등한데 지척에서 하문하실 때에 고루한 생각을 다 아뢰지 못하였으므로 애타는 마음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에 감히 예전에 들은 것을 대략 주워 모으고 진심을 드러내어 다음과 같이 삼가 아뢰니, 성심(聖心)ㆍ성학(聖學)ㆍ제가(齊家)ㆍ효제(孝悌)ㆍ돈종(惇宗)ㆍ임상(任相)ㆍ추성(推誠)ㆍ예하(禮下)ㆍ애민(愛民)ㆍ근정(勤政)과 기강을 세우고[立紀綱] 명기를 중히 여기고[重名器] 붕당을 없애고[去朋黨] 아첨을 멀리하고[遠讒佞] 상벌을 살피고[審賞罰] 형옥을 돌보고[恤刑獄] 교화를 밝히고[明敎化] 인재를 기르고[養人才] 병정을 닦고[修兵政] 절검을 숭상하고[崇節儉] 신의를 중히 여기는 것[重信義]입니다.
이른바 성심(聖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개 본심이 지켜지지 않으면 덥지 않아도 답답하고 춥지 않아도 떨리며 미워할 것이 없어도 노엽고 좋아할 것이 없어도 기쁜 법이니, 이 때문에 군자에게는 그 마음을 바루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잡히고 나면 덥더라도 답답하지 않고 춥더라도 떨리지 않으며 기뻐할 만해야 기뻐하고 노여울 만해야 노여우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대근본(大根本)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함양하는 방도도 불씨(佛氏)처럼 면벽(面壁)하거나 도가(道家)처럼 청정(淸淨)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발동되기 전에 지키고 발동된 뒤에 살피며 미리 기필하지 말고 잊지도 말아 보존해 마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비고 밝은 한 조각 마음이 그 속에 거두어져 있어 북돋는 것이 깊고 두터우며 이(理)가 밝고 의(義)가 정(精)하여 경계하고 삼가고 두렵게 여기는 것이 잠시도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근본이 이미 굳어져서 어느 것을 취하여도 본원(本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키고 버리는 사이에서 주재(主宰)하는 것이 없으면 마음이 이미 없는 것이니, 어찌 외물(外物)에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仁)을 숙련하는 공부가 어찌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천덕(天德)ㆍ왕도(王道)는 그 요체가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데에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아서 유암(幽暗)하고 은미(隱微)한 데에 문득 간단(間斷)되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 날로 고명(高明)한 데에 오르겠습니까. 당 태종(唐太宗)이 일찍이 ‘임금의 한 마음은 공격받는 것이 많다.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여 그 하나만 받아들이는 날이면 위망(危亡)이 따른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자성(資性)이 밝고 트여 이 마음이 희미한 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인(聖人)의 극치(極治)라는 것도 결국은 이 길 외에 따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중주(中主)의 소강(小康)도 이를 빌려서 다스렸을 것이니, 다니기가 험한 산길에서 애쓰고 초목이 무성한 곳에서 배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성학(聖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덕을 밝히려는 옛사람이 마음을 바루는 것을 근본으로 삼기는 하였으나, 본심의 착함은 그 체가 지극히 작은 반면 이욕(利欲)이 공격하는 것은 번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색(聲色) 취미(臭味)와 완호(玩好) 복용(服用)과 토목(土木)을 화려하게 하고 화리(貨利)를 불리는 일이 잡다하게 앞에 나와 거기에 빠지는 것이 날로 심해집니다. 그 사이에 착한 꼬투리가 드러나 마음과 몸이 고요한 때는 대개 열흘 추운 중에 하루 볕 쬐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학문을 강명(講明)하여 이 마음을 개발(開發)하지 않으면, 또한 어떻게 이 마음의 바른 것을 회복하고 이욕의 사사로운 것을 이겨 만화(萬化)의 주재가 되고 끝이 없는 사변(事變)에 대응하겠습니까.
이른바 강학(講學)은 장구(章句)나 구독(口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인의 가르침을 깊이 몸받고 그 지취(旨趣)를 밝혀서, 자신에게 돌이켜 의리의 당연한 것을 찾고 일에 비추어 잘잘못의 기틀을 증험함으로써,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참으로 아는 동시에 미리 생각하여 익히 강구하고 평소부터 대책을 세워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경중을 재제(裁制)하는 일을 거론하여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신기한 것만 일삼고 고원(高遠)하기를 힘쓰며 몸과 마음에 절실한 생각이 없이 옆으로 굽은 길을 달려간다면, 버려두고 게을리하는 자와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치가 이미 밝지 못하니, 어찌 정치에 보탬이 있겠습니까.
또 시강(侍講)하는 관원은 실로 옛 사부(師傅)와 같은 직임입니다. 이 때문에 세종(世宗) 때의 집현 학사(集賢學士)인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김종직(金宗直) 같은 무리는 다 한때의 선발을 극진히 하여 진심으로 맡겼으므로 물고기와 물처럼 합치하여 예절은 간이(簡易)하면서 성의는 서로 미더웠습니다. 총명이 어찌 넓어지지 않을 수 있으며 위 아래가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은 인재가 적어서 그러한 몇몇 신하들을 갑자기 얻기는 쉽지 않겠으나, 또한 마땅한 사람이 없다 하겠습니까. 임금이 늘 유신(儒臣)을 가까이하지 못하는 것은 그 예절이 엄격하여 접견할 때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군신은 부자와 같은데 어찌 번잡한 격식으로 대해야 하겠습니까. 세종 때의 옛일처럼 때없이 출입하고 강독할 때에는 조용히 모시고 차분히 점점 닦아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날마다 궁녀 환시를 가까이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생각하건대, 원자(元子)는 타고난 자질이 숙성하여 학문이 날로 진취하니, 더욱더 바른 선비를 친근히 하여 덕성을 훈도해야 할 것입니다. 철종(哲宗)을 보도하는 일 때문에 선인 태후(宣仁太后)에게 정자(程子)가 청한 곳에는 바름을 기르는 길과 기미(幾微)를 방지하는 뜻이 두루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그 전서(全書)를 상고해서 참작하여 행하므로써 보도하는 방도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또 뛰어난 자질이 본디 여느 사람과 다르더라도 지금의 춘추를 생각하면 겨우 성동(成童)이 되었으니, 가까이 두고 부리는 사람은 다 노성한 자를 가려서 거동하는 절도를 늘 삼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또 조정에서 물러나오신 여가에 자주 와서 모시게 하여 친히 독서를 권하고 이끌어 마지않으시어 이것으로 공경한 예절을 익히고 효순한 마음을 기르게 하고 거처와 복용(服用)도 되도록 소박하게 하여 검덕(儉德)을 삼가 닦는 것이 천성처럼 익혀지게 하소서. 그리고 의장(儀章)의 도수(度數)와 기거하는 예절이 대조(大朝)와 매우 닮은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조심하여 한결같이 조종 때에 근습(近習)ㆍ영신(佞臣)이 아첨하는 것을 제거한 옛 규례를 따라, 어버이를 공경하고 임금을 높이는 도리와 스승을 높이고 자기 권세를 잊는 의리를 어린 나이에 교양할 때에 터득하게 하소서. 그러면 어찌 종사(宗社)의 그지없는 복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제가(齊家)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자(周子)의 말에 ‘집에서 어려우면 천하에서 쉬워지고 집에서 친근하면 천하에서 멀어진다.’ 하였는데, 대개 집안에서는 은애가 늘 의리를 가리므로 소원하면 공도(公道)가 행해지기 쉽고 친근하면 사애(私愛)에 빠지기 쉬우니, 이것이 어렵게 하는 까닭입니다. 어려운 것을 먼저 하지 않고서 쉬운 것을 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경(易經)》 가인괘(家人卦)에 ‘위엄이 있으면 마침내 길(吉)하다.’ 하였으며, 그 상(象)에 또 ‘위엄이 있는 것이 길하다는 것은 자신에게 돌이키는 것을 뜻한다.’ 하였습니다. 은의가 도탑더라도 윤리는 바루지 않을 수 없고, 정의가 통하더라도 안팎은 정숙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근일 궁금(宮禁)이 엄하지 않다는 말이 자못 외간에 전파되므로 신이 전에도 늘 아뢰었습니다. 지금 인아(姻婭)의 족속은 다 사대부로 자처하는 자들이니, 어찌 굽은 길을 열어서 청명한 정치를 해칠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합문(閤門)의 기거와 속절(俗節)의 주식(酒食)은 오히려 잘못된 풍습을 따르면서 혹 남보다 더하려고 힘쓰기도 하며, 성심(聖心)에도 친소의 구분을 두시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 신하가 예라고 하면서 사사로이 바치고 임금이 개인적인 일이라 하여 너무 가깝게 대하면 위 아래가 서로 잘못하여 그 조짐이 반드시 총애를 베풀어 업신여김을 받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법전을 준수하여 궐내에 출입하는 자에게는 모두 신부(信符)를 지급하고 병조(兵曹)를 시켜 문호(門戶)의 방금(防禁)을 엄하게 하여 옛 제도를 회복시킴으로써 궁인이 감히 밖에 나가지 못하고 족속이 감히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기도(祈禱)하는 무격(巫覡)과 규외(規外)의 직염(織染) 따위 일이 궁정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며, 액정 안팎의 사환도 다 순박하고 근신하여 말이 없는 자를 선택하여 각각 그 직분을 지키게 하되, 간사한 짓을 하여 과조(科條)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유사에 내어 주어 범법 사실에 따라 벌주게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 공주궁(公主宮)에 공급하는 것으로 말하면 사랑하여 넉넉하게 해 주려는 것이 실로 부모의 마음입니다마는, 사치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곧 천리의 바른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것은 완전하게만 하면 될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대(臺)를 높게 하고 관(館)을 진기하게 하여 탐욕을 조장해야 하겠으며, 재산을 두는 것은 쓸 만하게만 하면 될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전토(田土)를 넓게 하여 백성과 쟁탈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멈추지않으면 제궁(諸宮)이 사방에서 비방을 받을 뿐더러 국가에도 원망이 돌아올 것입니다. 더구나 집의 간살은 본디 《대전(大典)》의 상제(常制)가 있으니, 모두 성헌(成憲)에 맞추고 감히 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듣건대, 연안(延安)에 둔전(屯田) 8백 석지기를 새로 설치한 것이 있어서 네 궁(宮)에 나누어도 오히려 2백 석지기가 되는데도 적다고 여겨 다시 공전(公田)을 보탰다 합니다. 둑을 쌓고 새로 설치하는 모든 의논을 일체 그만두는 것은 은의가 아울러 행해지고 공사가 모두 이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찍이 듣건대, 선조(宣祖) 때에 한 왕자(王子)의 집 곧 남별궁(南別宮)을 지었는데, 중국 장수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너희 작은 나라로서 왕자의 집을 이렇게 짓다니, 황실(皇室)의 친왕(親王)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이것이 오늘의 환난을 가져온 까닭이다.’ 하였다 합니다. 선조께서 이 말을 듣고는 난이 일어난 때부터 10여 년 동안 한 번도 영선(營繕)을 벌이지 않으셨다 하니, 아마도 이 말에 대하여 느낌이 있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허형(許衡)이 ‘천지 간의 인물에는 저마다 분한(分限)이 있으니 분한 밖에 지나치게 바라서는 안 된다. 마구 써 없애는 것이 많고 보면 하늘에 죄를 얻는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사치를 다하고 탐욕을 다하는 것은 실로 복을 꾀하는 방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漢)나라의 상시(常侍)는 정중(鄭衆)을 봉후(封侯)할 때에 비롯하였고 당(唐)나라의 중위(中尉)는 고 역사(高力士)를 3품(品)으로 삼을 때에 비롯하였는데, 처음에는 어찌 미미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다시 억제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척촉(蹢躅)의 교훈을 생각하여 미리 금니(金柅)의 계책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환관(宦官)이 자못 성한 것을 식자가 다 근심합니다. 양덕(陽德)이 바야흐로 형통하는데 저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마는, 적간(摘奸)을 조종하고 진공(進供)을 막는 일같은 것은 성사(城社)의 으슥한 곳에 소굴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서리를 밟으면 장차 굳은 얼음의 계절이 오게 된다는 경계야말로 뒷날의 근심에 절실하니, 중신(中臣)을 엄히 단속하여 충근(忠勤)하도록 가르쳐 악하지 않기를 기대하되 일을 맡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른바 효우(孝友)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상의 효성이 천성에서 나오고 우애는 본심에서 말미암으니,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사랑을 깊게 하여 형제의 정을 도탑게 하는 것이야 본디 전하의 여사(餘事)일 것입니다. 효심을 미루어 다스리면 천하도 문제가 없을 것인데, 더구나 우리 동방이겠습니까. 전(傳)에 ‘어버이를 사랑하는 자는 감히 남에게 악할 수 없고 어버이를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에게 교만할 수 없다. 애경(愛敬)을 어버이 섬기는 데에 다하고서야 덕교(德敎)가 백성에게 입혀진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애경하는 마음을 미루어 확충하기 때문입니다. 《시경(詩經)》에 ‘과처(寡妻)의 모범이 되고 형제에게 이르고서 가방(家邦)에 받아들여진다.’ 하였습니다. 임금이 천륜의 친속에 대해 반드시 지극한 사랑이 깊더라도 교훈이 그 안에서 지켜지고, 사사로운 은혜가 도탑더라도 의리가 그 가운데에서 행해지게 하고서야 교만하고 사치한 것이 일어나지 않고 두터운 경사가 바야흐로 오게 되니, 인애가 극진하고 의리가 지극한 것으로 이보다 나은 것이 달리 없습니다.
동평(東平)이 선행(善行)을 하고 성기(成器)가 공근(恭謹)한 것이 황의(皇矣)의 순지(順祉)를 누린 까닭입니다. 진진(振振)한 인지(麟趾)의 노래는 국가를 위하여 축하한 것인데, 아, 오늘날의 변을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관숙(管叔)ㆍ채숙(蔡叔)을 제거하여 공의(公義)는 절로 행해졌더라도, 인인(仁人)이 아우에 대하여 어찌 원한을 쌓고 분노를 감추었겠습니까. 예전에 주공(周公)이 관숙ㆍ채숙이 합심하지 않는 것을 민망히 여겨 상체(上棣)를 지었는데, 창연히 불쌍히 여겨 슬퍼하는 뜻과 따뜻이 도타운 인정을 베푼 은혜는 지금도 반복하여 읽으면 오히려 눈물이 흐를 만합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처변(處變)하신 방도는 부득이한 것이었더라도, 안개ㆍ이슬에 병들 걱정을 늘 연충(淵衷)으로 염려하시는데, 이미 나타난 이 단서를 말미암아 더욱 친애하는 정을 다하여 죄인으로 보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돈종(惇宗)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서경(書經)》에 ‘구족(九族)을 돈서(敦敍)한다.’ 하였는데, 돈(敦)은 그 은혜를 두텁게 하는 것이고 서(敍)는 그 도리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지위를 높이고 녹(祿)을 많게 하며 그 호오(好惡)를 같이하는 것이야말로 본디 친족을 친근히 하는 의리입니다마는, 사치를 금지하고 방자한 것을 억제하여 간사한 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친족을 바루는 도리입니다. 오늘날의 종친들은 다 과거에 어육(魚肉)이 되었던 후예들인데, 선왕의 인육(仁育)에 힘입어 이제까지 무사하였으니, 아, 지극한 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것이 이미 오래 되어 은혜를 믿고 뜻을 방자하게 하는 자도 절로 적지 않습니다. 공위(公威)는 사문(私門)에 빼앗기고 국세(國勢)는 귀가(貴家)에 나뉘어 천 길의 산기슭과 만 리의 바다 물결을 구역을 지정하여 나누어 갈라서 자기 소유로 못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땔나무를 베어 올 길이 끊어져 원근이 폐해를 받아도 공법(公法)을 감히 행하지 못하고 헌리(憲吏)들은 감히 따지지 못하니, 이른바 법을 뜻대로 결단하여 꺼리는 게 없다는 것이 불행히도 이에 가깝습니다. 접때 이미 국가의 엄단이 있었으나 명령이 나가도 되돌아오고마니 이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유사(有司)의 법이 만약 중간에서 흔들리는 일이 없다면 사람들이 절로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방자한 버릇을 금단하는 것은 제절(制節)에서 비롯해야 하고 제절하는 방도는 친자제(親子弟)에서 비롯해야 합니다. 봉록(俸祿) 이외에 일용하는 의복ㆍ음식은 넉넉히 대우하되 외람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염분(鹽盆)ㆍ어전(漁箭)의 이익이 얼마입니까. 궁노(宮奴)가 사방으로 나가서 저마다 각도를 맡아 수령을 욕보이고 어부에게서 마구 빼앗으므로, 해부(海夫)가 생업을 잃어 원망이 떼지어 일어납니다. 이 뒤로는 궁차(宮差)를 금하되 법을 어기고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 그 도와 그 고을에서 잡아 가두고 엄중히 구핵(究覈)할 수 있게 하고, 어염선세(魚鹽船稅)를 모두 호조에 붙여 한 해의 수입을 물어 수량에 맞추어 셈하여 주고, 의정부ㆍ충훈부ㆍ기로소 등 각 아문(衙門)도 마찬가지로 시행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해묵은 고질적 폐단을 조금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임상(任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늘은 홀로 세공(歲功)을 이루지 못하고 임금은 홀로 치도(治道)를 이루지 못하는 법입니다. 삼대(三代) 군신(君臣)의 이야기는 오랜 것이거니와, 이를테면 당 태종(唐太宗)이 위징(魏徵)에게, 또한 송 태조(宋太祖)가 조보(趙普)에게 천하의 중임을 맡겨서 일대(一代)의 정치를 이루었으니, 어찌 보필하는 신하 중에 맡길 사람이 없는 데도 임금이 공을 이룰 수 있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성의가 서로 미뻐서 제 몸처럼 여기고서야, 가부에 대한 의논을 드려도 뜻에 거슬리게 여기지 않고, 어진 사람을 천거하고 임용하여도 붕당으로 여기지 않고, 간사한 자를 물리쳐도 독단으로 여기지 않고, 이익을 꾀하고 폐단을 없애도 의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위로는 임금의 잘못과 궁금의 은밀한 일로부터 골육 형제 사이의 일에 이르기까지 또한 참여하여 잘잘못을 의논하며 정신을 모아서 안팎이 한결같게 하고, 이어 널리 준재(俊才)를 불러 서위(庶位)에 벌여 두어 경박한 자를 억제하고 경망한 의논을 진정시키게 하고, 또 혹 임금을 속일 생각을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를 바루어 백료를 격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육경(六卿)으로 말하면 서정(庶政)을 나누어 총괄하고 서사(庶司)의 관원은 각각 천공(天工)을 대신합니다. 아침에 제수했다가 저녁에 바꾸어 마치 여관에 든 듯이 된다면, 모든 공적이 이루어지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육관(六官)의 장(長)을 정밀하게 가리고 각각 그 관속(官屬)을 천거하게 하되 당(唐)나라 대성(臺省)의 제도처럼 구임(久任)하여 성적을 요구해야 반드시 그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조종(祖宗)께서는 관리를 구임하고 이서(吏胥)를 번가셨으므로 관리가 그 권세를 잡았는데, 지금은 관리를 자주 갈고 이서를 원정(元定)하므로 이서가 그 권세를 빼앗았으니, 주객(主客)의 구근(久近)의 형세는 본디 그러한 것입니다.
이른바 납간(納諫)이란 뜻을 겸손히 한다는 말인데, 이윤(伊尹)은 ‘뜻에 맞는 말은 도리에 어그러지는지를 살피라.’ 하였고, 장손흘(臧孫紇)은 ‘계손(季孫)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질진(疾疢)이다.’ 하였습니다. 임금이 옳다 하는 것을 따라서 옳다 하고 임금이 그르다 하는 것을 따라서 그르다 한다면, 내 말을 어기지 않는 것은 기쁘더라도 일에 해롭지 않겠습니까. 약을 먹고 어지러운 것은 병에 이롭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일에 이로우니, 이것이 주사(周舍)가 입바른 말을 하던 일을 조앙(趙鞅)이 사모한 까닭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마음을 비워 간언을 받아들이고 허물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않으셨으니 막힘이 없는 아름다움을 뉘라서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뻐하고 노여워하실 즈음에 나를 속이리라 억측하는 병통을 면하지 못하시어 바람ㆍ천둥같은 위엄이 갑자기 진동하고 귀양보내는 일이 조정에서 계속되니, 상하가 놀라 돌아보고 기상(氣象)이 서글피 막힙니다. 귀양보내는 법은 예전에 사흉(四凶)을 처치한 방법입니다. 한 마디 말만 잘못해도 문득 이 벌을 주니 누가 언짢은 낯빛을 무릅쓰고 바른 말로 간쟁하려 하겠습니까. 당 태종이 일찍이 위징에게 노하여 ‘이 시골 늙은이를 죽여야겠다.’ 하였습니다. 잘 받아들이는 태종으로서도 죽이려고까지 하였으니, 포용하는 도량은 이처럼 어렵습니다. 오직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를 수 있고서야 언로(言路)가 소통되는 아름다움을 이룰 것입니다.
또 예전에는 백공(百工)이 기예(技藝)에 관한 일을 가지고 간언하였고 보면, 안으로는 공상(公相)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다들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경고(卿孤)의 높은 자리에 있더라도 나름대로 해사(該司)에 미룹니다. 만약 서사(庶司)의 장(長)이 각각 그 직책에 관한 일을 말할 수 있게 한다면, 보고 듣는 것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간(臺諫)의 직임은 그 중함이 재상(宰相)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유온수(劉溫叟)가 어사 중승(御史中丞)이 되었을 때에 10년 동안 옮기지 않다가 죽게 되어서는 이을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을 한탄하며 오래도록 그 자리를 비워 두었습니다. 옛 흥왕(興王)이 이 벼슬을 중히 여기고 마땅한 사람을 찾기 어려워 한 것이 이러하였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요즈음은 대부(臺府)의 선임을 보통 임용처럼 여기고, 갈기를 잦고 쉽게 하여 두어 달 동안이라도 일을 맡는 자가 드무니, 공론(公論)을 넓히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기 바란들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바르고 곧은 선비를 극진히 가려 삼사(三司)에 두고서 어렵게 여기고 삼가며 오래 두고 오로지 맡겨야 할 것이니 책임이 일단 중해지면 사람들도 스스로 힘쓸 것입니다.
또 은대(銀臺)의 직임은 곧 옛 문하(門下)의 직임이니 그 임무가 매우 중대합니다. 당 태종이 일찍이 문하를 경계하여 ‘일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다 아뢰어야 한다. 문서를 봉행하기만 한다면 누군들 할 수 없겠는가.’ 하였습니다. 마땅한 사람을 정밀하게 가리고 구제(舊制)를 더욱 밝혀 정교(政敎) 중 공의(公議)에 맞지 않는 것을 봉환(封還)하도록 허락함으로써 나타나기 전에 잘못을 바로잡게 하고, 정원(政院)의 계사(啓辭)는 조보(朝報)에 내지 말아서 들어가 임금에게 고하고 밖에서 순행(順行)하는 뜻을 보존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추성(推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은 한 사람의 몸으로 만 백성 위에 임어(臨御)하여 만기(萬機)의 번다한 것을 응대하니, 정성을 다하지 않고 홀로 사사로운 지혜를 부린다면, 이목(耳目)과 심려(心慮)가 미치는 것이 얼마나 될 수 있겠습니까. 두루 막고 상세히 살피는 것은 먼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니, 어떻게 남이 나를 속이는 것을 막겠습니까. 예전부터 살피기를 좋아하는 임금으로는 당 덕종(唐德宗)만한 이가 없는데, 건중(建中) 때의 일에서 역시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활달하여 인후(仁厚)함으로 일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사물을 주재하실 즈음에 평온한 마음으로 순탄하게 응대하지 못하시어, 악한 자를 탄핵하면 뜻을 달리하는 자를 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어진 자를 천거하면 뜻을 같이하는 자를 편드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며, 대신(大臣)은 옹폐(壅蔽)하지 않나 의심하고, 소관(小官)은 의탁하지 않나 의심하는 나머지 천 갈래 만 갈래 길에 상호간에 장치를 해놓고 있습니다. 속이리라 억측하는 마음이 신충을 감아 둘러 마음 속에 이미 본체가 가려졌는데, 어떻게 활협(闊狹)을 재처(裁處)하여 과불급의 어긋남이 없게 하고 정성껏 사물을 극진히 처리하여 사방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엿보는 자는 공교한 술책을 부리고 뜻을 맞추는 자는 아첨하는 술책을 부려서 고요하려 하여도 더욱 시끄럽게 되고 증익하려 하여도 도리어 감손되니, 머리를 돌려 길을 바꾸지 않으면 그칠 수 없을 듯합니다. 증자(曾子)가 ‘부자(夫子)의 도(道)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 하였는데 지키는 것이 간약(簡約)하지 않습니까.
이른바 예하(禮下)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은 예(禮)로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忠)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본디 천경(天經) 지의(地義)입니다. 임금과 신하의 명분은 엄하더라도 상하가 만날 때에 예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어찌 작록(爵祿)과 위형(威刑)으로 신하를 분주하게 하여 당폐(堂陛)가 날로 낮아지고 염치가 날로 없어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에 대해 가의(賈誼)가 일찍이 문제(文帝)를 위하여 호소하였는데 ‘대신(大臣)이 중병(重柄)과 대권(大權)을 잡고도 노예의 염치없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것이 참으로 이것입니다. 그때 주발(周勃)이 한 번 하옥되었는데 가의의 말이 이러하였으니, 가의가 오늘날의 일을 다시 본다면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반드시 그때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요즈음에는 매때리고 욕하는 벌이 대부(大夫)에게 가해집니다. 아침에 금자(金紫)를 벗기고 저녁에 조시(朝市)에서 매질하니, 기기(忌器)의 도리가 이렇지는 않을 듯합니다. 광주 도독(廣州都督) 배주선(裴伷先)을 하옥하고 매 때리려 할 때에 장열(張說)이 ‘형장(刑杖)을 대부에게 가하지 않는 것은 그가 임금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士)는 죽일 수는 있으나 욕보일 수는 없습니다.’ 하니, 명황(明皇)이 곧 멈추었는데, 이것은 본받을 만합니다.
또 《시경(詩經)》에 ‘어떤 사람은 들락거리며 수근거리는데 어떤 사람은 못하는 일이 없구나.’ 하였습니다. 충신의 의리상 감히 고병(告病)할 수는 없으나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노고를 고르게 해주어야 하는 법입니다. 이를테면 유경창(柳慶昌)은 변방에서 돌아오자 마자 곧바로 변방의 병부(兵符)를 차게 되었는데, 혼자 노고하는 것을 한탄하는 것은 인정이 다 같은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은 깨끗하고 고요하여 지키는 것이 있고 여러 해 동안 외방(外方)에 있었으니, 신은 실로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기는 하나 신하를 거느리는 뜻에 방해될 듯합니다.
이른바 애민(愛民)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이 백성을 대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은데, 자식이 굶주리고 추우면 부모로서 예사로 여기는 자가 있겠습니까. 신은 아직도 경인년의 수교(手敎)를 기억합니다. 송(宋)나라 조후(曺后)가 ‘천하에 이롭다면 내가 어찌 머리털이나 피부를 아끼겠느냐’고 한 말을 인용하셨으니, 본말과 경중의 구분을 전하께서 이미 스스로 아셨다고 하겠습니다. 예전에 명(明)나라 인종 황제(仁宗皇帝) 때 봉사(奉使)하고 강회(江淮)에서 돌아온 자가 기근을 말하니, 드디어 강관(江關)의 수백만 섬의 쌀을 내어 구제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사농(司農)과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나, 인종이 ‘유사(有司)가 걱정하는 것은 경비(經費)이니, 함께 의논하면 일이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선인(宣仁)의 마음으로 인종의 정치를 행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동(河東)에서 곡식을 옮기는 것으로 마음을 다하였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심각한데 해결책은 미미해서 구제하는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해마다 잇따라 흉년을 만나 홍수와 가뭄이 서로 이었는데 다행히 이제 씨뿌리는 시기를 잃지 않고 비도 조금 내려서 추수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해묵은 기근 끝에 미납된 조세가 참으로 많고 공사(公私)가 곤궁하여 곡식을 화매(和賣)한 것이 필시 배로 늘어났을 것이니, 옛사람이 풍년의 폐해가 흉년보다 심하다고 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신이 지금 미리 아뢰는 것은 전하께서 이 점에 유의하여 유사의 청에 대비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정사가 위에 달려 있는 것이기는 하나 봉행하는 책임은 실로 백성을 기르는 수령에게 있습니다. 한 선제(漢宣帝)는 이천석(二千石)이 나와 함께 다스린다 하였고 당 태종(唐太宗)은 영장(令長)의 이름을 병풍에 써 두고 늘 보았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요체를 알았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대읍(大邑)ㆍ대도(大都)는 나라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호남(湖南)의 전주(全州)ㆍ나주(羅州)ㆍ영암(靈巖)ㆍ남원(南原)과, 호서(湖西)의 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와, 영남(嶺南)의 경주(慶州)ㆍ상주(尙州)ㆍ진주(晋州)ㆍ안동(安東)과, 기타 제로(諸路)에 있는 각각 번요(煩要)한 곳은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백성이 그 폐해를 받을 뿐더러 불행히 변을 당할 경우 어디를 믿겠습니까. 신중히 선임하는 법을 더욱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묘당(廟堂)을 시켜 전관(銓官)과 함께 의논하여, 반드시 시종(侍從)에 출입하고 명성과 공적을 이미 나타내고 꼿꼿하고 재국(才局)이 있는 선비를 가려서 반드시 의의(擬議)하게 하고, 해조로 하여금 정사 때에 가려 차임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마땅한 사람을 얻은 뒤에는 인재를 양육하기를 아울러 요구하여 반드시 호령(湖嶺)이 예전처럼 번성하도록 한다면, 반드시 정사 때에 임박하여 구차하게 채우는 식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이른바 근정(勤政)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위사(衛士)에게 음식을 먹이라 명하거나 날마다 입계한 문서의 일정한 양을 스스로 재결하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운행은 씩씩하여 쉬지 않으니, 이를 몸받는 자가 조금이라도 간단(間斷)이 있으면 만화(萬化)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 문왕(周文王)이 해가 중천에서 기울 때까지 밥먹을 겨를이 없었고, 상탕(商湯)이 어둑한 새벽에 일어나 날이 밝기를 기다린 것이 어찌 일할 것이 없어서 그랬겠습니까. 조무(趙武)가 진(晋)나라의 경(卿)이었을 때에 일영(日影)을 보며 탐하니, 군자(君子)는 그가 마침내 잘 끝내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더구나 존귀한 임금이겠습니까. 《예기(禮記)》에 ‘장엄하고 경건하면 날로 강해지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투박해진다.’ 하였습니다.
임금은 궁궐 깊은 곳에서 부귀의 봉양을 극진히 받으니,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연안(宴安)에 중독되지 않는 이가 드물 것입니다. 조종(祖宗)의 성시(盛時)에는 종일 납시어 승지들이 번갈아 들어가 일을 아뢰고 공경(公卿)ㆍ근시(近侍)가 때없이 뵈었으므로, 지기(志氣)가 점점 강해지고 양명(陽明)이 날로 나아질 뿐더러 인재를 익히 알고 이해(利害)를 더욱 아실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박문(博聞)한 선비에게 힘입어 예지를 더하고,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덕성(德性)을 도왔으니, 그 효과가 어찌 적었겠습니까.
또 자산(子産)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자문하고 저녁에는 앞으로 내릴 명령을 생각하고 밤에는 몸을 쉰다. 그래서 그 기(氣)를 적당히 발산하여 이 마음에 모여 막힌 것이 있게 하지 말라. 군자(君子)에게는 이 네 가지 때가 있는데 이것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하면 병이 난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루 동안에 환관(宦官)ㆍ궁첩(宮妾)을 대할 때가 적고 어진 사대부를 접할 때가 많게 한다면, 어찌 성명(性命)을 기르고 보전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기강을 세운다[立紀綱]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기강이 서는 것은 다른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공평하고 정대하여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내 법을 해치게 하지 않고 충현(忠賢)을 널리 선임하고 진심으로 맡겨서 충성을 다하고 직무를 다하게 하여 이 법을 유지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한 무제(漢武帝)는 형벌을 엄하게 하였으나 해내(海內)가 소란하였고 수 문제(隋文帝)는 엄하게 다스리는 것을 숭상하였으나 천하가 더욱 어지러워졌습니다. 세상에서 혹 법을 엄하게 하는 것을 가지고 기강을 논하기도 합니다. 이는 임시 미봉책을 가지고 인(仁)을 논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배도(裴度)가 당 헌종(唐憲宗)에게 말하기를 ‘한홍(韓弘)이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나가 적을 치더라도 왕승종(王承宗)이 팔짱을 끼고 땅을 갈라 차지한다면 어찌 조정의 힘이 그 생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처치를 마땅하게 하여 그 마음을 크게 감복하게 할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처치가 마땅하다면 어찌 기강이 서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말하기를 ‘궁중(宮中)ㆍ부중(府中)은 모두 일체이니 선악을 상벌하는 것이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간사한 짓을 하여 과조(科條)를 범한 자와 충선한 자가 있으면 유사(有司)에 붙여서 폐하의 공평하고 밝은 정치를 밝히셔야 합니다.’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여기에 이어 말하기를 ‘작은 촉(蜀)나라로서 또한 공사(公私)에 대하여 스스로 피차를 분별하였으니, 이 때문에 양주(梁州)ㆍ익주(益州)의 반을 차지한 나라로서 오(吳)나라와 위(魏)나라 전역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국가의 형세가 공명(孔明)이 살던 시기에 비해 또한 어떠합니까.’ 하였습니다. 요즈음에는 궁중과 부중이 둘로 갈라져 무릇 일이 외척ㆍ후궁에 관계되거나 옥사가 내시에 관련된 것은 하나도 유사에 붙이지 못하니, 이것은 사사로운 뜻이 멋대로 행해질 조짐이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큰 까닭입니다. 이러한 일에 대하여 조금도 아끼는 것이 없다면 큰 근본이 이미 바로잡힐 것이니, 어찌 기강이 펴지지 않겠습니까. 상께서 성지(聖志)를 굳게 정하시어 사은(私恩)이나 소인(小仁)에 흔들리지 말고 고식이나 구습에 얽매이지 말아서 먼저 내옥(內獄)을 폐지하고 모든 송사에 관계되는 것을 모두 형조에 돌려 조금도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끼지 못하게 하고 궁가에 관계되는 것도 모두 국법에 맡겨 친소에 따라 달리 베풀어 법을 막고 변동하지 못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찌 진작하고 숙정(肅整)하는 요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명기를 중히 여겨야 한다[重名器]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이 유지하고 고무하여 한 세상을 어거하는 것은 오직 명기뿐입니다. 명기가 중하면 몇 말이나 몇 되 밖에 안 되는 녹(祿)으로도 호걸(豪傑)을 전도시킬 수 있으나, 명기가 가벼우면 날마다 경상(卿相)을 제수하더라도 사람들이 힘쓰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부자(夫子)가 번영(繁纓)을 아까워한 까닭입니다. 우리 나라는 본디 가난한 나라이므로 무릇 상줄 것이 있을 때에는 청자(靑紫)로 금백(金帛)을 갈음하는데, 일이 많아진 이래로 외람됨이 날로 심해졌으므로 사람들이 금옥(金玉)의 반열(班列)을 그리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조종의 성시에는 자급(資級)을 가장 중히 여겼으므로 통덕(通德)으로 사인(舍人)을 삼은 것을 지금도 일컫습니다. 당상(堂上)의 선임은 반드시 정직(正職)을 지내야 하고 아장(亞長)ㆍ동벽(東壁)을 거치고 문지(門地)와 명망이 다 높아야 비로소 초배(超拜)될 수 있고, 당상을 거쳐서 아경(亞卿)에 제수되고, 아경을 거쳐서 재상에 발탁되었는데 다 한때의 명망 있는 자를 극진히 가렸습니다. 그러므로 덕망 있는 자를 임명하는 명기가 혼란하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금옥이 뜰에 가득해도 인재가 부족한 것을 늘 걱정합니다. 이는 지름길이 많아 덕망으로 선임하는 것이 실로 쇠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순신(李舜臣)이 한산(閑山)에서 이기고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이긴 그 공로는 중흥(中興)을 연 것이었는데도 그때의 논공(論功)은 한 자급을 올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번 군기(軍器)를 장만하거나 한번 도둑을 잡은 공도 다 금옥으로 자급을 곧바로 올려주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선치한 수령은 첫째라 일컬어져도 의복만을 줄 뿐이니, 그 경중을 잃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대(漢代)에는 현(縣)에서 치적이 가장 뛰어난 자는 군수(郡守)에 초배(超拜)되고 군수가 성적이 있으면 구경(九卿)에 입배(入拜)되었으므로, 격려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인재를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감(都監)의 상격(賞格)은 글씨를 쓰는 작은 기예도 다 자급을 높이고 품계를 바꾸어 마치 큰 공로가 있는 듯이 하므로 기를 쓰며 덤비는 풍습을 조장하고 염양(廉讓)하는 절조를 잃게 하니, 이 규례를 고치지 않으면 관방(官方)을 엄숙하게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에 하던 것을 크게 바꾸어 잘못된 규례를 따르지 말고 도감의 관원에게는 다른 상을 주고 쉽사리 벼슬을 올리지 말며 천례(賤隷)의 무리는 임민(臨民)하게 하지 말고 천역에 종사하는 무리에게는 사은(私恩)을 베풀지 말아서 백성의 뜻이 안정되고 굽은 길이 닫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치도(治道)의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붕당을 없애야 한다[去朋黨]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뿌리박은 것이 이미 굳고 여파가 점점 퍼지므로 본디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갓 그 이름을 미워하여 모두 없애려 하면 백마청류(白馬淸流)의 화(禍)가 될 것이고, 양편을 다 보존하면서 조정하려 하면 우이(牛李)가 서로 반목한 일이 될 것입니다. 오직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을 그르게 여기며 어진 자를 어질게 여기고 악한 자를 악하게 여기며 덕을 헤아려 지위를 주고 재능을 헤아려 벼슬을 맡기며 죄가 있는 자는 형벌하고 착한 일을 한 자는 상주어 공정하고 밝은 것이 다 지극하고 피차가 모두 잊을 수 있다면 사물이 각각 마땅한 데로 돌아갈 것이니, 어찌 사사로이 붕당을 맺을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피차를 견주어 먼저 색목(色目)을 나눈다면, 군자는 그 뜻을 행할 수 없고 소인은 그 사사로운 것을 들일 수 있으므로 혐의스러운 것을 염려하여 자취를 감추거나 아부하여 더러워질 것이니, 또한 나라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서경(書經)》에 ‘백성에 간사한 무리가 없고 관리가 사욕에 치우친 덕을 가진 자가 없는 것은 임금이 표준을 세우기 때문이다.’ 하였고, ‘치우침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표준에 모여 표준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였는데,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평탄하며 기울지 않고 넓고 멀어서 사사로운 것을 끼우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자신을 삼가서 조림(照臨)하신 지 이미 5년이 지났으니, 조신(朝臣)의 사정(邪正)ㆍ현우(賢愚)와 논의의 시비ㆍ곡직을 어찌 통촉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 사정(邪正)이나 시비에 대하여 반드시 다 그 정상을 알지 못하여 혹 서로 어그러지게 하는 점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붕당을 미워하는 일념에 먼저 가려져서 사람들이 엿보고 헤아려 그 자취를 감출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훤히 크게 공정하여 사심이 없게 하여 시비를 판별하는 본체를 잃지 않으시어, 미추(美醜)와 경중(輕重)이 각각 그 바른 것을 얻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아첨을 멀리해야 한다[遠讒佞]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간사한 무리는 흔히 임시변통하는 술수가 넉넉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꾀가 넉넉하나 오직 그 마음먹는 것이 바르지 않으므로 착하려 하지 않고 악하려 하며 충직하려 하지 않고 속이려 합니다. 따라서 참으로 호오를 밝히고 정상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어떻게 우정(禹鼎)에서 이매(魑魅)를 가려내고 일월(日月)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사라지게 하겠습니까. 오늘날의 조정은 임금의 덕이 청명하고 뭇 인재가 모여 나오므로 아첨하는 폐해를 성대(盛代)에서 논할 것은 아닙니다마는, 임금은 높고 깊은 데에 있으므로 듣고 싶은 것은 바깥의 말이고, 임금은 위세가 무겁고 크므로 늘 좋아하는 것은 아첨하는 무리이니, 세상을 다스리는 근심에 어찌 단주(丹朱)와 같지 말라는 경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절의(節義)를 위하여 죽을 사람은 싫어하는 낯빛을 무릅쓰고 감히 간언(諫言)하는 사람 가운데에서 찾아야한다.’ 하였으니, 임금이 이것을 알면 얻은 것이 벌써 많은 셈입니다.
무릇 아첨하는 자는 반드시 임금의 의향을 엿보아 뜻을 미리 알아서 받들고, 임금의 마음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을 헤아려 곡진히 헐뜯거나 칭찬하며, 기세(氣勢)가 좋은 자에게는 기어 붙어 결탁하고 정직한 자에게는 겉으로는 칭찬하되 속으로는 배척하는 등 정태(情態)가 은밀하고 계책을 쓰는 것이 여러 가지이니, 받아들일 즈음에 그들의 행동을 살피고 치우치는 내 마음을 끊으면 영예(英睿)가 비추는 바에 자취를 숨길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형옥을 삼가야 한다[恤刑獄]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상을 묻지 않고 법에만 맡기는 것은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데에 크게 해롭고, 빨리 판결하지 않고 오래 지체시키는 것은 옥사를 결단하는 데에 크게 폐단이 되는 것입니다. 과실로 지은 죄는 커도 용서하고 고의로 지은 죄는 작아도 죄주며,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고 재범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과실 또는 재앙 때문에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천고(千古)의 성왕(聖王)이 형옥을 삼가는 바른 뜻입니다. 살리기를 좋아하는 그 마음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게 지극하여 반드시 그 정상을 살피는 것이 이러하였던 것이니, 천하에 어찌 원망하는 백성이 있었겠습니까. 예전에는 중요한 죄수를 판결하는 것도 4~5일이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우연히 법망에 걸린 것도 반드시 가두어 때를 넘기니, 옥사를 결단하는 체례가 어찌 이러해야 하겠습니까. 형옥을 맡은 관원이 다른 일을 겸하지 말고 옥사를 살피는 일에 전념하여 빨리 판결하도록 힘쓰게 하여 옥사를 지체시키지 말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낭리(郞吏)의 선임도 학문이 있고 공평한 선비를 가려서 옛 정리(廷吏)의 제도처럼 논의를 도와 옥사의 평결을 아뢸 수 있게 한다면 작은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제 기강이 쇠퇴하여 법금(法禁)이 행해지지 않으므로 세상에 혹 최식(崔寔)의 논의가 있으니, 이것은 그럴 듯합니다. 최식 때에 환관(宦官)이 권병(權柄)을 훔치고 외척(外戚)이 조정(朝廷)을 마음대로 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론(政論)》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 때문으로서, 신불해(申不害)와 한비(韓非)가 끼친 해독을 지극히 고통받는 백성에게 베풀 만하다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전에 천조(天祚)를 길이 누린 자는 반드시 인심을 굳게 매는 방법이 있어 깊고 두터운 은택을 백성에게 입혔습니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구가(謳歌)할 생각을 세상이 다하도록 잊지 않았으니, 이것이 선왕께서 기강을 태산처럼 안정되게 하고 하루 아침에 흙이 무너지는 걱정을 없게 만든 방법입니다.
한 고조(漢高祖)가 삼장(三章)의 법을 약정하고, 당 태종(唐太宗)이 태배(笞背)의 형(刑)을 폐지하고 삼복(三覆)의 제도를 만들었으니, 한나라와 당나라가 오래 간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송 태조(宋太祖)로 말하면 인후(仁厚)로 나라를 세운 것이 전대(前代)보다 뛰어나거니와 늘 《우서(虞書)》를 읽고 ‘사흉(四凶)의 죄도 유찬(流竄)에 그쳤는데 어찌하여 후세의 법망은 엄밀한가.’ 하였습니다. 너그러운 정치가 송나라 2백 년의 가법(家法)이었으니, 남도(南渡)한 뒤에도 인심이 흩어지지 않은 것이 어찌 문덕(文德)이 있는 조상에게 힘입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삼가 살피건대 선왕의 지극한 인애가 두루 미쳐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인 적이 없었으므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천리에 널리 입혀졌습니다. 이 때문에 난리에 세 번 파천하여 국세가 거의 망할 뻔하였으나 민정(民情)의 향배는 끝내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 인자하십니다. 지금 성명(聖明)께서 임어하시어 정치는 너그러움을 숭상하니, 계술(繼述)하는 아름다움에는 신이 비평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고 숙정하는 데에 뜻을 둔 나머지 속으로는 인자한 마음을 갖되 겉으로는 엄한 법을 베푸시므로, 법에 맡겨두지 않고 되도록 중벌하기를 힘써 면직(免職)으로 감정된 벌이 혹 도배(徒配)까지 되기도 합니다. 위엄을 오래 보이면 익숙해져서 보람은 없고 폐단만 생기는 법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전철(前轍)을 고쳐서 모든 옥사의 평결은 한결같이 아뢴 대로 따르고, 억울한 옥사에 관계되는 모든 것은 유사(有司)가 신품(申稟)할 수 있게 하며 너무 규례에 얽매이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경외(京外)의 옥에 갇힌 사람도 유사와 각도가 빨리 결단하게 하며, 역옥(逆獄)이나 강상(綱常)에 관한 것이 아니면 반드시 겨울이 되기를 기다려서 처형하여 임금이 천도(天道)를 따르는 뜻을 보이셔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교화를 밝힌다[明敎化]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부터 나라를 세울 때에는 각각 한 나라의 규모가 있어서 조종(祖宗)이 이를 새로 세우고 자손이 이를 이어 지키는 법입니다. 하(夏)나라의 충(忠)과 상(商)나라의 질(質)과 주(周)나라의 문(文)과 서한(西漢)의 패도(霸道)와 동한(東漢)의 절의(節義)와 조송(趙宋)의 충후(忠厚)는 이것으로 비롯하여 이것으로 마쳤는데, 우리 나라가 이제까지 유지한 까닭은 과연 어느 도(道)를 따라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다만 명교(名敎)일 뿐입니다. 아, 천지가 크게 변하여 관상(冠裳)이 바뀌어 놓였으나 한 조각 우리 동방만이 의관(衣冠)을 보전하였으니, 어찌 관(冠)을 훼손하고 면(冕)을 찢어 구구한 명교를 아울러 못쓸 물건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말하면 슬퍼서 다시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른바 교화라는 것은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군신ㆍ부자ㆍ부부ㆍ붕우가 각각 그 도리를 다하면 망국(亡國)ㆍ패가(敗家)가 어디에서 생기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근년 이래로 가정의 더러운 일과 집안끼리 다투는 변과 상기(喪紀)의 문란이 이따금 사족(士族)에서 나온단 말입니까. 어찌 세교(世敎)가 쇠퇴하고 풍화(風化)가 밝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너진 풍속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성명(聖明)께 달려 있으니, 예(禮)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는 일은 치우치거나 폐지할 수 없습니다. 또 학교의 정사(政事)는 소략하기가 또한 심하므로 동몽(童蒙)의 교양이 바르지 않아서 경박하고 사치한 것이 드디어 조장되고 세도(世道)가 점점 투박해져서 지도하는 방도를 잃었으니, 맑은 명망과 도타운 학문이 있는 선비를 얻어 성균(成均)의 직임을 맡겨 부박한 버릇을 통렬히 억제하고 오로지 실행을 숭상하게 하면 성취하는 보람이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오늘날의 풍류(風流)는 진대(晋代)와 같은 점이 있습니다. 술마시며 농담하고 다른 일은 다시 하지 않으며 예의 염치는 자신과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니, 표준을 세우는 임금의 자리에서 그 취향을 바로잡지 않으면 이미 대세가 글러진 것을 만회할 수 없을 듯합니다. 중외에 신칙하여 상중에 예를 다하게 하고, 효성 우애스럽고 화목하게 지내는 선비를 찾아 아뢰게 하여 특별히 장려하여 정표(旌表)하고 제직(除職)하며, 혹 슬픔을 잊고 풍속을 어겨 복상(服喪)을 삼가지 않고 더러운 짓을 하여 윤리를 어지럽히고 다투어서 우애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또한 적발하여 율문(律文)에 따라 처단해야 할 것입니다. 1년상을 입을 자가 장사지내기 전에 과거에 응시하거나 가장(家長)으로서 3년상 안에 혼인하는 자도 법을 세워 금단해야 합니다. 명관(名官)으로서 술에 빠져 직무를 폐기하거나 예법을 폐기하는 자는 타일러 경계하되 한결같이 세종(世宗) 때의 고사를 따라 두렵게 생각하고 고치게 한 뒤에 그래도 고치지 않는 자는 법사(法司)와 전조(銓曹)를 시켜 심한 자는 거론하여 탄핵하고 경한 자는 좌천시켜야 합니다. 수령(守令)으로서 읍비(邑婢)를 몰래 간통하고 이어서 데려온 자도 각도를 시켜 사실대로 아뢰게 하여 적당히 벌주어 선비의 풍습을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 풍속을 변화하는 데에 작은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살피건대 전 부사(府使) 임유후(任有後)는 어미를 모시고 병란을 피하여 영외(嶺外)의 해변에서 객지에 오래 있는 중에도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였고, 어미가 죽게 되어서는 관(棺)을 가지고 서쪽으로 돌아와 여묘살이하며 죽을 먹고 조석으로 무덤에 가되 3년 동안 게을리하지 않았고, 이제는 복을 벗었으나 곡읍(哭泣)하는 슬픔과 호모(號慕)하는 정성이 이웃을 감동시키니, 이것은 근일 조신(朝紳) 사이에서 드물게 들리는 행실입니다. 또 그 사람은 평소에 염정(廉靖)을 실천하고 진취할 뜻이 없으나 문사(文辭)가 넉넉하여 무리에서 뛰어나니, 재행(才行)을 찾으려면 남보다 앞설 것인데 조정에 그 무리의 후원이 적어서 아직도 묻혀 있으므로 신은 아깝게 여깁니다. 장려하여 발탁하는 은전을 베풀어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인재를 기른다[養人才]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재예장(杞梓豫章)같은 훌륭한 재목들은 하루에 자라는 것이 아닌데 언덕에는 송백(松柏)이 없고 근교에는 미목(美木)이 없으니, 가꾸어 기르지 않으면 어떻게 동량(棟樑)이 될 만한 것을 성취하겠습니까. 천 그루 큰 재목은 갑자기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큰 집이 무너지려 할 때에 버틸 만한 나무가 없어서 썩은 그루 약한 들보가 번번이 나라의 일을 망치니, 사직을 위하여 멀리 염려하는 자라면 어찌 인재를 미리 길러서 이 일을 담당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문장은 하나의 작은 기예일 뿐이나, 선조(宣祖) 때에 뭇 인재를 미리 길러서 마침내 그 힘을 얻었는데, 중흥(中興)의 큰 공은 사명(辭命)이 그 반을 차지하였습니다. 전일과 같이 호당(湖堂)의 설치를 청하는 것은 본디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닌 줄 압니다마는, 문풍(文風)을 격려하여 일으키면 반드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석사(碩士)ㆍ굉유(宏儒)로 말하면 뒷날 장상(將相)이 될 그릇이니, 더욱 널리 찾아 두루 시험하여 과연 남들보다 나은 조행이 있고 월등한 재능이 있다면 기량이 빼어난 것을 깊이 인정하여 보전하여 기르고 완전하게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 선조 때의 이항복(李恒福)ㆍ이덕형(李德馨)ㆍ신흠(申欽)ㆍ이정귀(李廷龜) 등은 다 성상의 마음으로 간택하여 낭서(郞署)에 발탁하였습니다. 평소에 그 사람들을 알지 못했다면 변란에 임하여 어떻게 효용(効用)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선조 초년으로 말하면 김우옹(金宇顒)ㆍ유성룡(柳成龍)은 다 영남의 선비이고 박순(朴淳)ㆍ정철(鄭澈)은 다 호중(湖中)에서 나왔으며, 그 나머지는 이루 다 적을 수 없으나 모두 초야의 소원한 선비로서 모두 일대(一代)의 고관(高官)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호령(湖嶺)의 선비가 조관(朝官) 명부의 높은 자리에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명문(名門) 우족(右族)이라고 하여 반드시 다 어질다고 할 수 없듯이 초야의 소원하고 미천한 자라고 하여 어찌 다 재능이 없겠습니까. 어진 자라면 누구든 벼슬시켜야 할 것인데, 어찌 원근을 가리겠습니까. 예전과 지금을 견주어 볼 때 그저 더욱 개탄할 따름입니다.
또, 신이 삼수(三水)에 있을 때에 육진(六鎭) 사람으로서 변장(邊將)이 된 자를 보니, 궁마(弓馬)에 익숙하고 기력이 씩씩하여 뇌물을 바쳐 선발된 장수와 같지 않았습니다. 신이 보지 못한 것이 또한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옛말에 산서(山西)에서 장수가 난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닐 듯합니다. 각도의 감사를 시켜 마음을 다하여 찾아서 아뢰게 하고 전선(銓選)을 맡은 관원이 듣고 본 바를 참고해서 등용하여 인재를 버려두었다는 한탄이 없게 하고 사방의 인심을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서북(西北)의 무사(武士)는 본도(本道)를 시켜 먼저 궁마를 시험하고 다음에 인물을 보아 등급을 매겨 보고하며, 금려(禁旅)에 편성하여 예속시키고 재능에 따라 임용하였다가, 과연 특이한 재능이 무리에서 뛰어나면 곤수의 부월이나 변장의 병부를 맡긴들 어찌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감사는 수령의 벼리[綱]이다.’ 하였습니다. 반드시 명성이 평소에 나타나고 재국(才局)이 남보다 뛰어난 자를 얻어야 이 직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묘당(廟堂)과 전조(銓曹)가 함께 의논하여 팔도의 방백(方伯)을 크건 작건 마땅한 사람을 얻도록 힘쓰라고 거듭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묘당이 한 감사를 택하여 한 도가 절로 맑아질 것입니다. 신은 본디 감식안이 없으므로 전후에 선비를 천거하라는 명이 있을 때에 한두 집안의 행실만으로 우러러 명지(明旨)에 답하였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이응시(李應蓍)는 평소에 정직하다는 명성이 드러났으니, 한번의 과실이 어찌 방해되겠습니까. 윤문거(尹文擧)는 청렴을 스스로 지키며 일찍이 경력도 있는데 법을 지키고 굽히지 않습니다. 다만 고요한 것을 지키고 물러가기를 좋아하여 교유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절로 알지 못하는데, 그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욱 취할 만한 점입니다. 두 사람은 다 죄적(罪籍)에 들어 있으므로 쉽사리 의논하기는 어려울 듯하나 인재를 찾는 이때에 두 신하와 같은 자는 실로 얻기 쉽지 않기에 감히 이처럼 외람되게 아룁니다.
이른바 병정을 닦는다[修兵政]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주 세종(周世宗)이 일찍이 ‘농부 백 사람이 전사(戰士) 한 사람을 기르지 못한다. 내가 이 쓸데없는 것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 드디어 쓸데없는 인원을 도태하고 정병을 가리니 병위(兵威)가 드디어 떨쳤습니다. 그렇다면 군대가 강하고 약한 것은 군사의 많고 적은 데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도태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각도 속오군(束伍軍)에서 뽑고 훈국(訓局)과 어영청(御營廳)의 군사를 합쳐 통틀어 10만의 병액을 만들어 어린아이까지 등록되는 걱정이 없게 하고, 무재(武才)가 뛰어나거나 꿰뚫어 쏘고 명중하는 자가 아니면 다 화수(火手)로 삼고, 또 출신(出身)ㆍ무학(武學)에서도 정예하고 용맹한 자를 가려 한 대(隊)를 만들어야 할 듯합니다. 그러면 군사가 이미 정하게 가려졌으므로 강하지 않을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훈국의 군졸은 쓸데없고 늙은 자가 반을 차지하고, 삼수(三手)의 본래 정해진 양식은 3천 석에 지나지 않는데 액수를 늘린 것은 갑절 더하니, 경비가 어려운 것은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또 어영군(御營軍)의 보인(保人)에게서 쌀을 거두는 것은 양식을 구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또한 병기(兵器)를 대 준다는 당초의 뜻에 어그러집니다. 훈국의 군사 1천 명을 도태하고 그 양식으로 어영을 돕는다면 반드시 따로 거두지 않아도 군사의 양식이 넉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의 폐단에는 모두 근원이 있는데 그 근원을 찾지 않고 말류를 다스리려 한다면 어지러이 무너지는 것이 갖가지로 나와서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병정의 폐단도 양민(良民)이 적어서 군적(軍籍)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公)은 적고 사(私)는 많아서 날로 점점 줄어갑니다. 임금이 보배로 여기는 것은 다만 백성일 뿐인데, 나라 안의 생명 있는 무리를 도리어 사실(私室)에게 반을 나누어주니, 어떻게 나라에 양민이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공천(公賤)ㆍ사천(私賤)ㆍ양천(良賤)으로 하여금 모두 모역(母役)을 따르게 한다면 10년이 넘지 않아서 양민이 반드시 많아질 것입니다.
이른바 절검을 숭상해야 한다[崇節儉]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땅이 물건을 만드는 데에 정해진 액수가 있고 사람이 물건을 만드는 데에 정해진 한도가 있으니, 가져다 쓰는 데에 절도가 있으면 늘 넉넉하겠으나 가져다 쓰는 데에 절도가 없으면 늘 모자랄 것입니다. 아무리 적은 재물도 우리 백성의 고혈(膏血)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천물(天物)을 마구 써 없애서 백성의 생업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세종(世宗) 때에는 궁인(宮人)이 1백 인이 못되고 구마(廐馬)가 수십 필에 지나지 않고 복어(服御)ㆍ기용(器用)도 되도록 검소하기를 힘쓰셨으므로 열성(列聖)께서 대대로 지켜서 가법(家法)으로 삼으셨다 합니다. 신이 일찍이 목릉(穆陵) 터를 고쳐 잡을 때에 삼가 유의(遺衣)를 보건대, 다 무명 옷과 두꺼운 명주였고 비단으로 된 것이 없었으니, 예전에 비의(菲衣)라 한 것이라도 어떻게 이보다 더하였겠습니까. 궁액(宮掖)이 좋은 옷을 입는 폐단은 광해(光海) 때에 비롯하였는데, 선조(先朝)에 더러운 풍습을 고쳤으나 끼친 해독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한가하실 때에 조종 때의 정간(井間)을 상고하시면 전성(前聖)께서 사욕을 누르고 백성을 사랑하신 지극한 뜻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궁중의 용도는 긴급하지 않은 비용을 덜고 몸소 검약으로 이끌어 사치한 버릇을 크게 바꾸고 법관에게 명백히 경계하여 분수를 넘는 것을 금지하여 위로 사대부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분수를 무릅쓰고 제도를 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신의를 중히 여겨야 한다[重信義]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자(夫子)가 ‘예로부터 누구나 죽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백성에게 믿음이 없으면 설 곳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옛 왕자(王者)는 사해(四海)를 속이지 않고 패자(霸者)는 사린(四隣)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백성을 속이지 아니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와 반대로 하여 속임수가 날로 더하므로 상하가 서로 어그러지니, 이로운 것이 얼마나 되겠으며 손상되는 것은 또 어떠하겠습니까. 한 소열제(漢昭烈帝)가 패망한 끝에 강한(江漢)을 유리(流離)하였으나 형초(荊楚)의 선비가 구름처럼 따른 것은 다만 신의가 평소에 섰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호령을 낼 때마다 신중하지 않아서 혹 이미 내렸다가 곧 그만두거나 명령하였더라도 시행하지 않으니, 이것은 믿음을 잃을 조짐입니다. 덕음(德音)이 때때로 내려져 백성이 바야흐로 귀를 기울여도 곧 유사에게 막혀서 은택이 내려지지 않으므로 백성이 들어도 믿지 않으니, 이것은 의리를 잃을 조짐입니다. 신의가 일단 무너지고 나면 장차 어떻게 백성을 부리겠습니까. 이제부터는 호령을 낼 때에 반드시 익히 강구하여 한 사람의 말을 치우치게 듣지 말고 한갓 작은 이익을 탐내지 말며 널리 경사(卿士)에게 묻고 널리 민정을 물으며 공론을 참작하고 묘당에서 결단하여, 명령하지 않을지언정 명령하면 반드시 시행하고,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하면 반드시 결과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가 일단 맺어져 백성이 듣고 의혹하지 않으면 임금의 움직임에 따라 크게 응하여 뜻을 받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마지막에 또 아뢰기를,
“재이(災異)의 도(道)는 그 이치가 아득하나, 이번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것은 음(陰)이 성할 조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소옹(邵雍)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할 때에는 군도(君道)가 성하고 부도(父道)가 성하고 부도(夫道)가 성하고 군자의 도가 성하나, 망할 때에는 반드시 신도(臣道)가 성하고 자도(子道)가 성하고 처도(妻道)가 성하고 소인의 도가 성하고 이적(夷狄)의 도가 성한다. 이 때문에 구괘(姤卦)의 초육(初六)에 여장(女壯)을 미리 경계하여 성인(聖人)이 양을 돕고 음을 눌렀으니 그 뜻이 깊다.’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을 들어 쓰고 악을 막으며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을 그르게 여겨 군자가 늘 성하고 소인이 늘 사라지게 하며 충직한 자를 가까이하고 참녕한 자를 멀리하며 덕의(德義)를 먼저 힘쓰고 공리(功利)를 뒤로 하여 이것으로 국가의 원기를 도와서 끝없는 큰 복을 터잡으소서.”하였다.
【원전】 조선왕조실록 35 집 633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王室) / 윤리(倫理)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정(軍政) / 신분(身分) / 재정(財政) / 농업(農業) / 구휼(救恤)
[주-D001] 어찌 …… 있겠습니까. :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는 가르침을 생각하여 견고한 예방책을 세워야 한다는 뜻. 《역경(易經)》 구괘(姤卦)에 “초육(初六)은 금니(金柅 수레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쇠로 고정하는 물건)에 동여맴이니 고요하면 길(吉)하고 가는 바가 있으면 흉하다. 파리한 돼지가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하는 모양과 같으면 된다.” 하였다.
[주-D002] 성사(城社) : 성과 사당. 여우나 쥐가 몸을 의지하는 안전한 곳으로, 간사한 신하가 임금의 권세를 의지하는 말로 쓰인다.
[주-D003] 과처(寡妻) : 임금이 정부인(正夫人)을 이르는 말.
[주-D004] 동평(東平)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아들 동평헌왕(東平憲王) 유창(劉蒼).
[주-D005] 성기(成器) : 당 예종(唐睿宗)의 장자(長子) 이헌(李憲).
[주-D006] 황의(皇矣)의 순지(順祉) :
황의는 《시경(詩經)》의 편명(篇名), 순지는 인자하고 화평하여 두루 복종함에 따라 받게 된 하늘의 복. 황의편에 “이 큰 나라의 임금이 되어 능히 인자하고 화평하여 두루 복종하며 능히 상하가 친근하더니 문왕(文王)에 이르러 그 덕에 뉘우침이 없으니 이미 상제(上帝)의 복을 받아 손자에게 베풀었다.” 하였다.
[주-D007] 진진(振振)한 인지(麟趾)의 노래 :
《시경》 인지지편(麟之趾篇)을 가리킨다. 진진은 인후(仁厚)한 모양, 인지는 기린의 발. 인지지편에 “기린의 발은 공자(公子)의 발이니, 아 기린이로다.” 하였다. 기린은 상상의 동물로서 산 벌레나 풀을 밟지 않으며 임금이 지극히 어진 때에 나타난다 한다. 인지지편은 문왕과 후비(后妃)의 교화가 미쳐 자손이 인후하고 번창함을 노래한 것이다.
[주-D008] 상체(上棣) : 《시경(詩經)》의 편명.
[주-D009] 질진(疾疢) : 겉보기와 맛은 좋으나 해가 되는 것.
[주-D010] 경고(卿孤) : 삼공(三公)에 버금가는 벼슬.
[주-D011] 건중(建中) : 덕종의연호.
[주-D012] 당폐(堂陛) : 임금과 신하를비유한 말.
[주-D013] 금자(金紫) : 고관(高官)의 의장(儀章).
[주-D014] 기기(忌器) :
투서기기(投鼠忌器)의 준말. 쥐에게 물건을 던져 죽이려 하여도 그 옆에 있는 그릇을 다칠세라 꺼린다는 뜻이다. 부정적인 파급효과 때문에 일을 삼가한다는 비유. 《한서(漢書)》 권48 가의전(賈誼傳).
[주-D015] 경인년 : 1650 효종 원년.
[주-D016] 선인(宣仁) : 송 조후(宋曺后)의 시호.
[주-D017] 이천석(二千石) : 자사(刺史).
[주-D018] 조무(趙武)가 …… 알았습니다. :
조무는 일명 조맹(趙孟), 진(秦)나라의 후자(后子) 침(鍼)이 조맹과 함께 진 나라 임금의 무도(無道)함을 이야기할 때에 진나라 임금은 일찍 죽되 5 년은 갈 것이라 하니, 조맹이 일영(日影)을 보며 “아침저녁이 서로 달라지는데 누가 능히 5 년을 기다리겠는가.” 하였는데, 후자가 나가서 남에게 말하기를 “조맹이 곧 죽을 것이다. 백성을 맡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한 해를 탐하고 하루를 탐하니, 더불어 얼마나 가겠는가.”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원년(元年).
[주-D019] 부자(夫子)가 …… 까닭입니다. :
위(衛)나라의 손환자(孫桓子)가 군사를 거느리고 제(齊)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에 중숙우계(仲叔于溪)가 구제하였다. 위나라에서 고을[邑]을 상으로 주려 하니 중숙우계가 사양하고 곡현(曲縣 제후가 쓰는 악기)ㆍ번영(繁纓 제후가 쓰는 말장식)을 갖추어 조현(朝見)하겠다고 청하여 허가받았다. 공자(孔子)가 이 말을 듣고 “아깝다. 고을을 많이 주는 것만 못하다……. 명(名)으로 신(信)을 내고 신으로 기(器)를 지키고 기로 예(禮)를 닦고 예로 의(義)를 행하고 의로 이(利)를 일으키고 이로 백성을 다스리니 정사(政事)의 대절(大節)을 남에게 빌려 주면 남에게 정사를 맡기는 것이다.”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성공(成公) 2년.
[주-D020] 청자(靑紫) : 고관(高官)의 의장(儀章).
[주-D021] 금옥(金玉) : 고관의 의장.
[주-D022] 백마청류(白馬淸流)의 화(禍) :
당 애제(唐哀帝) 때에 주전충(朱全忠 뒤에 후량 태조(後梁太祖)가 됨)이 장정범(張廷範)을 태상경(太常卿)으로 삼는 것을 배추(裴樞)가 반대하다가 좌천되어 활주(滑州)로 가는데 주전충이 백마역(白馬驛)에 사람을 보내어 배추를 죽여 시체를 황하(黃河)에 던져 넣게 하였다. 당초에 주전충의 좌리(佐吏) 이진(李振)이 “이들은 스스로 청류(淸流)라 하니 황하에 던져 영구히 탁류가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당서(唐書)》 권140 배구전(裴樞傳).
[주-D023] 우이(牛李)가 …… 일 :
당(唐)나라 목종(穆宗) 때부터 무종(武宗) 때까지 약 40년 동안 우승유(牛僧孺)ㆍ이종민(李宗閔) 등과 이길보(李吉甫)ㆍ이덕유(李德裕) 등이 서로 붕당을 만들어 반목한 일.
[주-D024] 우정(禹鼎) : 우 임금이 구주(九州)의 금을 모아 주조했다는 솥.
[주-D025] 최식(崔寔) :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의 사람.
[주-D026] 비의(菲衣) : 너절한 옷.
[주-D027] 여장(女壯) : 여덕(女德)이 부정(不貞)하여 강장(强壯)함.
ⓒ 한국고전번역원 | 정연탁 (역) | 1991
○領中樞府事李敬輿上箚曰:
頃者臨御延英, 晉接多官, 遇災戒懼, 丁寧痛迫之意, 溢於言表, 俯詢群工, 求助甚切, 入侍諸臣, 孰不聳動感激? 臣識見浮淺, 痼疾沈綿, 精神昏憒, 倉卒奏對, 未盡所懷。 以此塞責, 終負盛意, 則臣罪尤大。 且志爲萬事之本, 悔是復善之機, 前日之擧, 必悔悟旣往, 圖補將來, 奮發於一念之間, 有此非常之擧, 所謂太平, 自今日始者也。 臣前後受恩, 卓越等夷, 而咫尺咨詢, 未盡固陋, 私心耿耿, 終夜未已。 玆敢略綴舊聞, 披瀝肝膽, 謹陳如左, 曰聖心、曰聖學、曰齊家、曰孝弟、曰惇宗、曰任相、曰推誠、曰禮下、曰愛民、曰勤政、曰立紀綱、曰重名器、曰去朋黨、曰遠讒侫、曰審賞罰、曰恤刑獄、曰明敎化、曰養人才、曰修兵政、曰崇節儉、曰重信義。 所謂聖心, 蓋心不存, 則不熱而煩, 不寒而慄, 無所惡而怒, 無所悅而喜。 是以, 君子莫大於正其心。 此心旣正, 則雖熱而不煩, 雖寒而不慄, 當喜而喜, 當怒而怒, 朱子所謂大根本者是也。 涵養之道, 亦非如佛氏面壁, 道家淸淨而已, 必操存於未發之前, 省察於已發之後, 勿正勿忘, 存存不已。 常使一片虛明, 斂在這裏, 裁培深厚, 理明義精, 戒愼恐懼, 無須臾離, 則根本已固, 左右逢源矣。 苟於操舍存亡之間, 無所主宰, 則心旣不存, 何能應物? 雖然, 仁熟之功, 豈一朝一夕之所致哉? 程子以爲: "天德、王道, 其要只在謹獨。" 若不謹獨, 幽暗隱微, 便有間斷之處, 何以日躋高明也? 唐 太宗嘗謂: "人主一心, 攻之者衆, 少懈而受其一, 則危亡隨之。" 蓋其資性明達, 有以識此心之依俙矣。 然則聖人極治, 終不外此而他求, 中主少康, 亦必假此而爲治, 孰如役志崎嶇之境, 徘徊蓁蕪之域也哉? 所謂聖學, 古之欲明其德者, 雖以正心爲本, 而本心之善, 其體至微, 利慾之攻, 不勝其煩。 聲色、臭味、玩好、服用、土木之華、貨利之殖, 雜進於前, 陷溺日甚。 其間善端呈露, 心體湛然之時, 蓋十寒之一曝耳。 苟非講明此學, 開發是心, 亦何以復此心之正, 勝利欲之私, 爲萬化之主宰, 應無窮之事變哉? 所謂講學, 非章句口讀之謂也。 必能深體聖訓, 明其旨趣, 反之於身, 以求義理之當, 參之於事, 以驗得失之機, 以至眞知所當爲者與所不當爲者, 熟講預思, 擬議有素, 則裁制輕重, 擧而加之。 若徒事新奇, 務爲高遠, 不切身心, 旁騖曲逕, 則雖與荒怠棄忽者有間, 理旣不明, 何補於治? 且侍講之官, 實古師傅之任。 是以, 世宗朝集賢學士, 如成三問、朴彭年、金宗直輩, 皆極一時之選, 托以心腹, 契若魚水, 禮節簡易, 誠意相孚。 聰明安得不廣, 上下安得不交? 卽今人才眇然, 如數臣者, 未易猝得, 亦豈曰無其人也? 人主不能每近儒臣者, 以其禮際嚴截, 接見有時也。 君臣, 父子也, 奚以煩文爲也? 宜如世宗朝故事, 使之出入無時, 講讀之際, 從容陪侍, 優游漸磨, 則豈與日近婦寺, 同日語哉? 仍念, 元子天資夙成, 學問日進, 尤宜親近正士, 薰陶德性。 程子以輔導哲宗, 請於宣仁太后, 養正之道、防微之意, 周備曲盡, 伏望取考其全書, 參酌以行之, 以盡輔導之方。 且雖岐嶷之質, 自殊常人, 念今春秋, 纔及成童, 伏望左右使令, 皆擇老成, 起居節宣, 常加愼嗇。 且於退朝之暇, 數令來侍, 親自勸讀, 提撕不已, 以之習恭敬之節, 長孝順之心, 居處、服用, 亦從朴素, 使儉德之愼, 習與性成。 至於儀章度數、起居禮節, 逼嫌大朝者, 雖小必謹, 一循祖宗朝故事, 掃除近習、侫臣導諛之規, 使敬親尊君之道、隆師忘勢之義, 得之於沖年蒙養之時, 豈非宗社無疆之福也? 所謂齊家, 周子之言曰: "家難而天下易, 家親而天下疎。" 蓋閨門之內, 恩常掩義, 疎則公道易行, 親則私愛易溺, 此其所以難也。 不先其難, 未有能其易者, 故《易》之《家人》曰: "威如終吉。" 《象》又曰: "威如之吉, 反身之謂也。" 恩義雖篤, 而倫理不可不正; 情義雖通, 而內外不可不斬。 近日宮禁不嚴之說, 頗傳外間, 臣於頃日, 亦常仰達。 當今姻婭之屬, 皆以士大夫自期者, 寧有曲逕之開, 以害淸明之治者哉? 然閤門起居, 俗節酒食, 猶從謬習, 或爲務勝, 聖心所存, 亦不無親疎之分。 人臣以私享爲禮, 人主以親昵爲私, 則上下交失, 其漸必至於啓寵納侮之域矣。 宜遵法典, 闕內出入者, 竝給信符, 使兵曹嚴門戶之禁, 以復舊制, 宮人不敢出外, 族屬不敢入內。 祈禱巫覡、規外織染等事, 無汚宮庭掖庭, 內外使喚, 亦皆擇諄謹無言者, 各守其職, 而如有作奸犯科者, 出付有司, 隨犯施罰。 至於公主諸宮之奉, 愛之欲富, 此實父母之心, 而侈而不反, 便失天理之正。 作室則使之苟完可也, 何必崇臺珍館, 以長逸欲; 置産則使之足用可也, 何必連亘阡陌, 與民爭奪耶? 若是而不已, 則不但諸宮取謗於四方, 亦且怨歸於國家。 況家室間閣, 自有《大典》常制, 宜一視成憲, 毋敢逾越。 且聞延安有新設屯田八百石種, 分之四宮, 猶可二百, 若猶少也, 更以公田益之。 凡諸築堰新設之議, 一切罷之, 豈非恩義竝行, 而公私俱利也? 曾聞宣廟朝, 營一王子第宅, 卽南別宮也。
天將謂我人曰: "以爾小邦, 而王子第宅, 雖皇室親王, 無以過此。 此所以致今日之難也。" 宣祖聞之, 自亂後十餘年間, 未嘗開一營繕, 意者有感於斯語也。 許衡有言曰: "天地間爲人爲物, 各有分限, 分限之外, 不可過求。 暴殄旣多, 得罪于天。" 蓋窮侈極慾, 實非基福之道也。 且漢之常侍, 始於鄭衆之封侯; 唐之中尉, 創於力士之三品, 其始豈不微也, 而其終至於不可復制, 豈宜不思蹢躅之訓, 預爲金柅之計也? 今日宦官之頗盛, 識者皆以爲憂。 陽德方亨, 彼何能爲, 但如摘奸之操縱、進供之阻搪, 勢同城社, 陰幽成窟。 堅氷之戒, 實切他日之憂, 宜嚴勑中臣, 敎以忠勤, 待之不惡, 勿任以事也。 所謂孝友, 竊觀聖孝出天, 友愛因心, 愉容深愛, 花萼大被, 自是殿下餘事。 孝理優於天下, 況吾東方乎? 《傳》曰: "愛親者不敢惡於人; 敬親者不敢慢於人。 愛敬盡於事親, 而德敎加於百姓。" 蓋推愛敬之心, 擴而充之。 詩曰: "刑于寡妻, 至于兄弟, 以御于家邦。" 帝王之於天倫, 必使至愛彌深, 而敎存乎其內, 私恩雖篤, 而義行乎其中, 然後驕侈不生, 厚慶方來, 仁盡義至, 過此無他。 東平之爲善、成器之恭謹, 所以享皇矣之順祉也。 振振麟趾之詠, 深爲國家祝之。 嗚呼! 今日之變, 尙忍言哉? 雖辟管、蔡, 公義自行, 而仁人於弟, 何嘗宿怨藏怒? 昔周公閔管、蔡之不咸, 爲《常棣》之詩, 愴然閔惻之意, 溫然篤敍之恩, 至今三復, 猶可淚下。 殿下今日處變之道, 雖不得已, 而霧露之憂, 常軫淵衷, 因此已發之端, 益致親愛之情, 無以罪人視也。 所謂惇宗, 《書》曰: "敦敍九族。" 敦者, 厚其恩也; 敍者, 正其理也。 尊位重祿, 同其好惡, 自是親親之義, 而禁侈制方, 無納於邪, 亦敍族之道也。 今日諸宗, 皆曩時魚肉之餘也。 賴先王仁育, 優游至今, 吁! 可謂至德也已。 雖然, 涵濡旣久, 恃恩恣意者, 亦自不少。 公威奪於私門, 國勢分於貴家, 千尋嶽麓、萬里海波, 指區分畫, 認爲己有。 樵蘇路斷, 遠近受害, 公法不敢行, 憲吏不敢問, 所謂擊斷無諱者, 不幸近之。 頃日已有國家嚴斷, 而令出而反, 今日痼弊。 有司之法, 若無從中旁撓, 則人自不犯矣。 斷橫恣之習, 當自制節始, 制節之道, 當自親子弟始。 俸祿之外, 日用服膳, 合有優處而不濫。 鹽盆、漁箭所利幾何? 宮奴四出, 各掌諸道, 折辱守宰, 橫奪漁人, 海夫失業, 怨咨朋興。 自今以後, 宜禁宮差, 冒法作弊者, 許令該道該邑, 捉囚重究, 魚鹽船稅, 竝屬戶曹, 問歲所入, 准數計給, 議政府、忠勳府、耆老所各衙門, 亦一體施行, 則積年痼弊, 可以少祛矣。 所謂任相, 天不能獨成歲功, 君不能獨成治道。 三代君臣尙矣, 如唐宗之魏徵、宋祖之趙普, 亦能托天下之重, 成一代之治, 豈有手足心膂, 茫無所託, 而人主可與成功哉? 必須誠意相孚, 視猶心腹, 然後獻可替否而不以爲忤, 薦賢任人而不以爲黨, 退奸黜侫而不以爲專, 興利去弊而不以爲疑。 上自君上闕失、宮禁嚴閟, 以至骨肉兄弟之間, 亦使參議得失, 聚精會神, 表裏如一, 仍使旁招俊乂, 列于庶位, 裁抑浮躁, 鎭定浮議, 又或有懷詐罔上者, 正其罪戾, 以勵百僚。 至於六卿之長, 分摠庶政, 庶司之官, 各代天工, 而朝除夕遷, 如舍逆旅, 庶績之熙, 其可望乎? 宜精擇六官之長, 使之各薦其屬, 如唐臺省之制, 久任責成, 必有其效。 祖宗久任官吏, 輪回吏胥, 故官執其柄, 今則數遞官吏, 元定吏胥, 故吏奪其權, 主客久近之勢, 固其然也。 所謂納諫, 遜志之言, 伊尹以爲: "求諸非道。" 季孫之愛, 臧訖以爲疢疾。 若君所謂是, 從而是之; 君所謂非, 從而非之, 雖喜其莫違予言, 得無害於事耶? 瞑眩利病, 逆耳利行, 此趙鞅所以思周舍之諤諤也。 殿下卽阼以來, 虛心受諫, 改過不吝, 轉圜之美, 孰不欽仰? 第於喜怒之際, 未免億詐之病, 風霆振於造次, 竄黜繼於朝端, 上下驚顧, 氣象愁沮。 放流之典, 古之所以待四凶也。 一言之失, 便置此科, 誰肯犯顔正諫也? 唐太宗嘗怒魏徵曰: "會須殺此田舍翁。" 以太宗之能受, 至於欲殺, 包容之度, 若是難哉。 唯能捨己從人, 然後乃致弗咈之美耳。 且古者, 工執藝事而諫, 則內自公相, 下至庶民, 皆在可言。
今則雖卿孤之尊, 猶以該司自託。 若使庶司之長, 各得以其官言, 則視聽之廣, 不爲無助矣。 且臺諫之任, 與宰相相輕重。 故劉溫叟爲御史中丞, 十年不遷, 及卒, 嘆無人可繼, 虛位久之。 古之興王, 重此職難其人如此。 竊觀, 近日臺府之選, 視同常調, 遞易煩易, 鮮有數月莅事者, 欲望恢公論、振頹綱, 不亦難乎? 宜極選端方正直之士, 置之三司, 其難其愼, 其久其專, 責任旣重, 人亦自勵矣。 且銀臺之任, 卽古門下之職, 其任甚大。 唐 太宗嘗勑門下曰: "事有不便, 皆應執奏。 若但奉行文書, 則誰不可爲?" 宜精選其人, 申明舊制, 政敎之不允於公議者, 許令封還, 使之救於未著之前, 政院啓辭, 毋出朝報, 以存入告順外之意可也。 所謂推誠, 人主以一人之身, 御億兆之上, 應萬機之煩, 苟非至誠, 獨役私智, 則耳目心慮之所及者, 其能幾何? 周防曲察, 先自欺也, 何以禁人之欺我也? 自古好察之君, 莫如唐 德宗, 而建中之事, 亦可以見矣。 伏見殿下, 天資豁達, 濟以仁厚。 第於宰物之際, 未能平心順應, 彈惡則疑其伐異, 進賢則疑其黨同, 大臣則疑其壅蔽, 小官則疑其付託, 千岐萬轍, 機括互設。 逆詐億料, 纏繞震衷, 方寸之地, 本體已蔽, 安得裁處闊狹, 無過不及之差, 而至誠盡物, 服四方之心哉? 窺伺者逞其巧, 迎合者投其便, 欲靜而愈鬧, 欲益而反損, 不有回頭轉轍, 恐不可了矣。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 豈非所操者約也? 所謂禮下,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自是天經地義。 君臣之名分雖嚴, 上下之交際, 不可無禮, 豈可以爵祿、 威刑, 奔走其臣, 使堂陛日卑, 廉恥日喪乎? 此事, 賈誼嘗爲文帝誦之, 其曰: "大臣握重柄、大權, 而無乃有徒隷無恥之心者?" 誠是也。 當時, 周勃一下請室, 誼之言乃如此, 設使誼復見今日, 太息流涕, 必不止此。 竊觀, 近日笞傌之罰, 上於大夫。 朝褫金紫, 暮撻朝市, 忌器之道, 似不若是。 廣州都督裵伷先下獄將杖, 張說曰: "刑不上大夫, 爲其近君也。 士可殺, 不可辱。" 明皇亟然而止, 此可法也。 且《詩》曰: "或出入風議, 或靡事不爲, 雖忠臣之義, 不敢告病, 待下之道, 理宜均勞。 如柳慶昌纔納關節, 遽佩塞符, 獨賢之歎, 人情所同。 且其人廉靖有守, 頻年在外, 臣實惜之。 此雖小事, 似妨體下之意矣。
所謂愛民, 人主之於民, 猶父母之於子也。 子有飢寒, 爲父母者, 有恝視者乎? 臣尙記庚寅手敎。 引宋曹后 "苟有利於天下, 吾何愛於髮膚。" 之語, 本末輕重之分, 殿下已自得矣。 昔在皇朝仁宗皇帝時, 奉使自江淮來者, 言其饑饉, 遂發江關數百萬米以濟之。 其人請與司農議之, 仁宗曰: "有司所恤者經費, 若與之議, 則事不行矣。" 誠能以宣仁之心, 行仁宗之政, 則豈不美哉? 苟以河東移粟, 爲可盡心, 則一勺輿薪, 恐無所救矣。 連歲遭凶, 水旱相仍, 而幸今播種不失, 雨水稍若, 西成之望, 或可少有, 而但念積飢之餘, 逋租實多, 公私之困, 和糶必倍, 古人以豐年之害, 甚於凶歲者, 殆以此也。 臣今預陳者, 望殿下留意於此, 而有以待有司之請耳。 且惠鮮之政, 雖在於上, 奉行之責, 實在牧守。 漢 宣帝以二千石與我共理, 唐 太宗書令長之名於屛風, 坐起看之, 可謂知愛民之要矣。 況大邑、大都所以庇國。 如湖南之全ㆍ羅ㆍ靈ㆍ南、湖西之忠ㆍ淸ㆍ公ㆍ洪、嶺南之慶ㆍ尙ㆍ晋ㆍ安, 其他諸路各有煩要, 苟非其人, 不但民受其害, 不幸遇變, 何所依恃? 愼擇之典, 尤宜加念。 令廟堂與銓官同議, 必擇出入侍從, 已著聲績, 愷悌才局之士, 必爲擬議, 使該曹臨政擇差。 旣得其人, 兼責養育人才, 期復湖嶺昔時之盛, 則必有愈於臨政苟充之類矣。 所謂勤政, 非謂如衛士傳餐, 衡石自程而已。 天健不息, 體之者一有間斷, 萬化不成。 文王之日昃、商湯之昧爽, 豈無所事而然哉? 趙武, 晋卿也, 視蔭而偸, 君子知其不終。 況帝王之尊乎? 《記》曰: "莊敬日强, 安肆日偸。" 人君處宮壼之邃, 極富貴之奉, 若非自强, 其不中宴安之毒者幾希。 祖宗盛時, 出御終日, 諸承旨迭入白事, 公卿、近侍, 接見無時, 不但志氣漸强, 陽明日勝, 亦可熟諳人才, 益知利害矣。 況資博聞之士, 以益睿智, 近正直之人, 以輔德性, 其效豈淺鮮哉? 且子産之言曰: "朝以聽政, 晝以訪問, 夕以修令, 夜以安身。 節宣其氣, 而毋使湫底玆心。 君子有四時, 一之則生疾。" 誠使一日之間, 對宦官、宮妾之時少, 接賢士、大夫之時多, 則豈非養命保性之一大助也? 所謂立紀綱, 紀綱之立, 不在於他。 只是公平正大, 不使纖毫私意, 或害吾法, 博選忠賢, 寄以腹心, 使得竭忠盡職, 維持此法而已。 漢 武嚴刑, 海內騷然; 隋 文尙刻, 天下愈亂。 世或以峻法論紀綱者, 何異於以姑息論仁哉? 裵度言於憲宗曰: "韓弘輿疾討賊, 承宗斂手削地, 豈朝廷之力, 能制死命哉? 徒以處置得宜, 大服其心耳。" 故處置得宜, 何患紀綱之不立哉? 諸葛武侯之言曰: "宮中、府中, 俱爲一體, 陟罰臧否, 不宜異同。 若有作奸犯科及爲忠善者, 宜付有司, 以昭陛下平明之治。" 朱子繼之曰: "以蜀之小, 又於公私, 自分彼此, 是以梁、益之半, 圖吳、魏之全。 況國家形勢, 視孔明之時, 又如何耶?" 近日宮、府之分, 判爲二途, 凡事係戚掖, 獄連內寺者, 未能一付有司, 此私意橫流之漸, 人心不服之大者。 於此等事, 若無芥吝, 則大本旣正, 何綱不張? 自上宜堅定聖志, 勿爲私恩、小仁所奪, 勿爲姑循、舊習所拘, 先罷內獄。 凡係訟訴, 一歸刑曹, 不使一毫私意, 參錯於其間。 凡係宮家, 一任邦憲, 毋使親疎異施, 沮撓三尺, 則豈非振肅之要務也? 所謂重名器, 人君之所維持鼓舞, 以駕馭一世者, 唯名器而已。 名器重則斗升之祿, 可以顚倒豪傑, 名器輕則雖日拜卿相, 而人不勸矣, 此夫子所以惜繁纓也。 本朝素稱貧國, 凡有賞賚, 以靑紫而代金帛。 多事以來, 猥濫日甚, 人視金玉之班, 不甚貴也。 嘗聞, 祖宗盛時, 最重資級, 通德舍人, 至今稱之。 堂上之選則必經正職, 由亞長、東壁, 地望俱隆, 然後始得超拜。 由堂上而拜亞卿, 由亞卿而擢卿月, 皆極一時之望, 故命德之器, 不至淆雜。 今則金玉滿庭, 而每患乏人者, 由蹊逕多門, 而德選實替也。 至於李舜臣 閑山之勝, 權慄 幸州之捷, 功啓中興, 而當時論功, 只加一資。今則一軍器之備、一捕寇之功, 皆超陞金玉, 曾不持難。 善治守令, 雖稱第一, 只給表裏, 豈非失其輕重哉? 漢世縣治最者, 超拜郡守, 郡守有績, 入拜九卿, 非徒激勸, 亦可得人。 且都監賞格, 書字小技, 亦皆升階變品, 有若大功勞者然, 長奔競之風、喪廉讓之節, 不改此規, 難穆官方。 宜一變前爲, 毋循謬例, 都監之官, 施以他賞, 毋輕加秩, 至若賤隷之徒, 勿令臨民, 羈的之輩, 毋借私恩, 使民志有定, 曲逕閉塞, 豈非治道之本也? 所謂去朋黨, 植根旣固, 流波漸漫, 固不可容易爲言。 徒欲惡其名而竝去之, 則白馬淸流之禍是已, 欲兩存而調停之, 則牛、李相軋之事是已。
唯能是是非非, 賢賢惡惡, 度德而授位, 量能而任職, 有罪者刑, 有善者賞, 公明兩至, 彼此俱忘, 則物各付物, 安有朋私之患哉? 不然而較量彼此, 先分色目, 則君子不得行其志, 小人得以容其私, 顧嫌避跡, 依阿淟涊, 亦何補於人國哉? 《書》曰: "人無有淫朋, 人無有比德, 惟皇作極。" 其曰: "毋偏毋陂, 至于會極、歸極。" 者, 豈有他哉? 不過平平蕩蕩, 不參己私而已。 殿下恭己 照臨, 已過五年, 朝臣之邪正、賢愚, 論議之是非、曲直, 豈不洞燭? 然殿下之以爲邪正是非, 未必皆得其情, 而或有相反者何也? 由惡朋黨一念, 先爲之蔽, 使人得以窺測, 而遁其形影也。 宜廓然大公, 處以無心, 不失衡鑑之本體, 使姸媸輕重, 各得其正也。 所謂遠讒侫, 姦侫之輩, 類多饒權數、足智術, 惟其立心之不正, 故不以爲善而以爲惡, 不以爲忠而以爲欺。 苟非眞明好惡, 曲察情狀, 何以辨魑魅於禹鼎, 消陰晛於日月也? 今日朝廷, 主德淸明, 群才彙進, 讒侫之害, 非所論於聖代, 而人主處高居深, 所欲聞者, 外間之言也; 人主威重勢大, 所常好者, 阿諛之輩也。 治世之憂, 豈可無毋若丹朱之戒也? 古人曰: "伏節死義, 當於犯顔敢諫中求之。" 人主知此, 則思過半矣。 凡讒侫者, 必窺伺人主意向, 先意承奉, 探測君心愛憎, 曲加毁譽, 有氣勢者攀附而交結; 有正直者陽譽而陰斥, 情態陰閟, 用計多端, 若於聽納之際, 觀彼俯仰, 絶吾偏私, 則英睿所照, 物無遁形矣。 所謂恤刑獄, 不原其情, 而徒任於法, 此治獄之大害也; 不亟決折, 而久淹留時, 此斷獄之大弊也。 宥過無大, 刑故無小, 怙終賊刑, 眚災肆赦者, 誠千古聖王欽恤之正旨也。 由其好生之心, 出於至誠, 哀矜之至, 必察其情, 如是天下安有冤民哉? 古者服念要囚, 不過四五日, 而今則偶掛文網者, 亦必縲縶逾時, 斷獄之體, 豈宜如是? 宜令掌刑之官, 勿兼他事, 專意治讞, 務令速決, 毋使滯獄。 郞吏之選, 亦擇經術平易之士, 使得佐論奏當, 如古廷史之制, 則不無少裨矣。 且今紀綱陵夷, 條禁不行, 世或有崔寔之論, 此似然矣。 不知當寔之時, 宦竪竊柄、戚里擅朝, 政論之作, 正爲此也, 非謂申、韓遺毒, 可施於倒懸之民也。 古之能享永祚者, 必有以固結人心, 使深思厚澤, 涵濡生民, 然後謳歌之思, 沒世不忘, 此, 先王所以有泰山四維之安, 而無一朝土崩之患者也。 漢之高祖, 約三章之法; 唐之太宗, 止笞背之刑, 爲三覆之制, 漢、唐之久長, 實由於此。 至於宋祖, 仁厚立國, 逈出前代, 常讀《虞書》曰: "四凶之罪, 止於流竄, 何後世法網之密也?" 寬仁之治, 爲宋二百年家法, 南渡之後, 人心不離者, 寧不有賴於藝祖耶? 臣伏見, 先王至仁浹洽, 未嘗妄殺一人, 好生之德, 旁霈千里。 是以, 三離播越, 國勢幾亡, 而民情向背, 終始不變。 嗚呼仁哉! 卽今聖明當宁, 政尙寬仁, 繼述之美, 臣無間然。 然, 殿下志在振肅頹綱, 內蓄仁心而外施嚴法, 不任三尺, 務從重科, 勘免之罰, 或至徒配。 威久而褻, 效蔑弊生。 宜自今改其前轍, 大小獻讞, 一從奏當, 凡係冤抑, 許令有司有所申稟, 勿爲太拘於規例。 內外繫囚, 亦令所司及各道, 從速斷決, 非逆獄綱常, 施刑必待冬月, 以示王者順天之意。 所謂明敎化, 自古立國, 各有一國之規模, 祖宗創之, 子孫守之。 夏之忠、商之質、周之文、西京之雜覇、東漢之節義、趙宋之忠厚, 以此而始, 以此而終, 本朝之所以維持至今, 果遵何道? 只是一箇名敎而已。 嗚呼! 天地大變, 冠裳易置, 一片吾東, 獨保衣冠, 豈可毁冠裂冕, 竝與區區之名敎, 而弁髦之哉? 言之於悒, 不欲更論。 所謂敎化, 所以明人倫耳。 君臣、父子、夫婦、朋友, 各盡其道, 則亡國敗家, 何自以生哉? 柰何近年以來, 閨門之穢、䦧墻之變、喪紀之紊, 間出士族? 豈世敎陵夷, 風化不明耶? 作新頹俗, 是在聖明導禮齊刑, 不可偏廢。 且學校之政, 疎略又甚, 蒙養不端, 浮靡遂長, 世道漸偸, 導迪失方, 若得淸名篤學之士, 責之成均之任, 痛抑浮薄, 專尙實行, 成就之效, 必不淺鮮矣。 竊觀今日風流, 有似晋世。 銜盃談諧, 更無餘事, 禮義廉恥, 規爲外物, 若非表極之地, 正其趨向, 恐無以回狂瀾於旣東耳。 宜申飭中外, 居喪盡禮, 孝弟敦睦之士, 蒐訪啓聞, 特加優奬, 旌表除職, 或有忘哀悖俗, 不謹持服, 淫穢亂倫, 爭鬪不友之類, 亦宜摘發, 依律處斷。 至於期喪, 未葬前赴擧者、家長三年內嫁娶者, 亦爲立制禁斷。 名官之耽酒廢事及廢棄禮法者, 開諭警飭, 一遵世宗朝故事, 使之惕慮改圖, 然後猶不改者, 令法司、銓曹, 甚者擧劾, 輕者左敍。 守令之潛奸邑婢, 仍爲率來者, 亦令諸道, 從實啓聞, 量加罪罰, 以厲士風, 則豈不爲化俗之小補也? 伏見, 前府使任有後奉母避兵, 久處嶺海逆旅之中, 亦能養以甘旨, 及其母沒, 扶櫬西歸, 居廬啜粥, 朝夕上塚, 三年不懈, 今已服闋, 而哭泣之哀、號慕之誠, 感動隣里, 此近日朝紳間罕聞之行。
且其人素履廉靖, 無意進取, 文辭蔚然, 卓冠儕類, 欲求才行, 宜居人先。 朝乏朋援, 尙今湮沒, 臣竊惜之, 合有奬拔之典, 以爲激勸之地。 所謂養人才, 杞梓豫章之連抱, 非一日之長, 丘垤無松栢, 近郊無美木, 若不長養, 何以成就棟樑之具? 千章之材, 非可卒致, 而大廈將傾, 無木可支, 朽株弱棟, 每敗國事, 爲社稷長遠慮者, 其可不預養是人, 以辦是功哉? 且文章一小技耳, 宣祖朝儲養群才, 終得其力, 中興大烈, 辭命居其半。 前日湖堂之請, 固知非今日急務, 而激起文風, 未必無助矣。 至於碩士、宏儒, 他日將相之具, 尤宜博訪歷試, 果有過人之操, 出等之行, 便宜深加器異, 保養完護。 宣祖朝如李恒福、李德馨、申欽、李廷龜等, 皆簡自宸衷, 拔於郞署。 若平居不能知其人, 臨亂何以效其用乎? 且以宣祖初年言之, 金宇顒、柳成龍, 皆是嶺士; 朴淳、鄭澈, 俱出湖中, 其餘不可彈記。 俱以草野之遠士, 竝爲一代之冠冕, 而今則未聞湖嶺之士, 顯位朝籍。 名門右族, 未必皆賢, 草野疎賤, 豈皆無才? 立賢無方, 何擇遠近? 以古況今, 只增一慨。 且臣在三水時, 曾見六鎭人爲邊將者, 皆便弓馬、健氣力, 不比債送之將。 臣所不見, 亦復何限? 古云山西出將, 似不虛矣。 宜令諸道監司, 悉心蒐訪, 以備啓聞; 銓選之官, 聞見參用, 俾無遺才之嘆, 以慰四方之心。 西北武士, 令本道先試弓馬, 次觀人物, 等第馳啓, 編隷禁旅, 隨才調用, 果有異才拔萃, 閫鉞邊符, 何所不可? 且朱子之言曰: "監司, 守令之綱也。" 必得名稱素著, 才局出人, 然後可堪是任。 亦宜申明廟堂、銓曹、八道方 伯, 無論大小, 同議掄選, 務得其人, 則廟堂擇一監司, 而一道自淸矣。 臣素乏鑑識, 前後薦士之命, 只以一二家行, 仰塞明旨。 伏見, 李應蓍素著直聲, 一眚何害? 尹文擧廉潔自守, 曾有履歷, 守法不撓。 但守靜好退, 不爲交遊, 故人自不知, 其所不見知者, 尤其可取處耳。 二人者, 皆編罪籍, 似難輕議, 而當此求才之日, 如二臣者, 實未易得, 玆敢猥達如是耳。 所謂修兵政, 昔周 世宗嘗曰: "農夫百, 不能養戰士一。 吾安用此無用之物?" 遂汰冗簡精, 兵威遂振。 然則兵之强弱, 不在多少, 臣意以爲宜汰。 蒐諸道束伍, 合訓局、御營, 通爲十萬之數, 使無幼稚竝籍之患, 若非武才絶倫及洞射命中者, 皆爲火手, 且於出身武學, 亦擇精勇, 作爲一隊, 則兵旣精簡, 不患不强矣。 訓局之卒, 冗老居半, 三手原糧, 不過三千, 而增額加倍, 經費之屈, 不足怪也。 且御營軍保人收米, 出於討糧無所, 而亦非資給器械之初意也。 若汰訓兵一千, 以其糧資御營, 則不必別收, 而軍食可飽也。 天下之弊, 莫不有源, 不求其源, 而欲治末流, 則橫潰百出, 不可隄防。 卽今兵政之弊, 亦由於良民鮮少, 無以充籍故也。 公少私多, 日漸消蹙。 王者所寶, 只在人民, 而邦域之內含生之類, 却與私室分半, 幾何而不至於國無良民也? 若使公ㆍ私賤、良民, 竝從母役, 則不出十年, 良民必多矣。 所謂崇節儉, 地之成物, 有大數; 人之成物, 有大限, 取之有度, 用之有節, 則常足; 取之無度, 用之無節, 則常不足。 錙銖之財, 莫非吾民之膏血, 奈何暴殄天物, 以絶赤子生業耶? 竊聞, 世宗朝宮人未滿百數, 廐馬不過數十, 服御、器用, 務從儉素, 列聖世守以爲家法。 臣嘗於穆陵改兆, 伏見遺衣, 皆綿衣、大練, 無錦帛之具, 雖古稱菲衣, 何以加此? 宮掖服美之弊, 俑於光海, 先朝革汚, 遺毒未已。 殿下若於淸宴之間, 取考祖宗朝井間, 則可知前聖克己愛民之至意耳。 宮中用度, 宜除不急之費, 躬率以儉, 一變侈習, 明勑法官, 禁其踰越, 上自士大夫, 下至庶民, 無得犯分過制, 豈不可也? 所謂重信義, 夫子曰: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是以, 古之王者, 不欺四海; 伯者, 不欺四隣。 善爲國者, 不欺其民, 昧者反是, 以至權詐日勝, 上下相離, 所利幾何, 所損又幾何哉? 漢 昭烈敗亡之餘, 流離江漢, 而荊楚之士, 從之如雲者, 徒以信義素立故也。 國家每發號令, 未嘗愼重, 或旣下而旋止, 或雖令而不行, 此失信之漸也。 德音時下, 民方傾耳, 而旋爲有司所格沮, 屯膏不下, 民聽不信, 此失義之漸也。 信義旣壞, 將何以使其民乎? 自今發號施令, 必待熟講, 毋偏聽一人之言, 毋徒貪分寸之利, 廣詢於卿士, 旁採乎民情, 參之於公議, 斷之於廟堂, 有不令, 令之必行; 有不爲, 爲之必果。 信義旣結, 民聽不惑, 則可以擧足低仰, 丕應徯志矣。
其終又曰:
災異之道, 其理杳忽, 而今此雌鷄化爲雄, 可知爲陰盛之漸。 昔邵雍有言曰: "國之興也, 君道盛, 父道盛, 夫道盛, 君子之道盛; 其亡也, 必臣道盛, 子道盛, 妻道盛, 小人之道盛, 夷狄之道盛。 是以, 《姤》之初六, 預戒女壯, 聖人扶陽抑陰, 其意深也。 伏願殿下, 揚善遏惡, 是是非非, 使君子常長, 而小人常消, 近忠直而遠讒侫, 先德義而後功利, 以之扶國家之元氣, 基無疆之洪休焉。
조선왕조실록【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6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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