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에 빠지다
우리네 삶에서 가는 곳마다 고수가 있다는 의미로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는 글귀가 있다.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그의 문화유산답사기 부제로 재활용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도 했다. 조선중기 문인 유한준이 김광국의 ‘석농화원’ 발문에서 남긴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이게 된다.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라는 구절을 살짝 비틀어 썼다.
일월 초 방학에 들어 보름이 지난다. 날씨는 그렇게 춥지는 않았으나 미세먼지로 야외 활동에 신경이 쓰였다. 그새 꾸준히 근교 산자락을 누비거나 갯가로 산책을 다닌다. 대학 동기와는 의령 유곡 세간에서 박진교를 건너 창녕 개비리길도 걷고 거제 칠천도와 수야방도를 둘러왔다. 혼자서는 양산 임경대를 올라갔고 동해남부선 열차로 좌천역에서 일광과 기장을 다녀오기도 했다.
엊그제는 시내버스로 본포로 나가 거기서부터 걸어 본포교를 지나 비봉리 패총전시관을 둘러본 후 비봉고개를 넘어 부곡 온천장으로 가 온천수에 몸을 담갔다. 어제는 안민동에서 안민고갯길을 걸어 진해로 넘어가 경화장을 구경하고 왔다. 날씨가 춥지 않으니 미세먼지로 대기가 희뿌옇다. 차라리 겨울답게 꽁꽁 얼어붙는 추위가 닥치든지 눈비가 내려 미세먼지를 씻어갔으면 싶다.
일월 셋째 토요일은 산행이나 산책 차림이 아닌 평소 출근복으로 집을 나섰다. 도시락을 채운 배낭을 둘러멜 일은 없었다. 집에서 가까운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4층의 자율학습실은 일반자료실보도 1시간 먼저 문이 열렸다. 주로 공무원시험 준비생들이 책과 씨름하는 곳이다. 내가 들릴 데가 아니었으나 일반자료실 문이 열리길 기다리느라 문밖을 서성이이면서 현장 동태를 살폈다.
2층의 일반자료실은 9시 정각에 문이 열렸다. 먼저 신착도서 코너를 살피니 내 마음을 얻은 책을 고르지 못했다. 외과의사 이국종의 ‘골든아워’가 눈길을 끌었다만 표제만 봐도 내용은 짐작이 갔다. 예술 코너에서 한나절 동안 읽을 서책을 몇 권 골라 뽑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미술평론가 손철주의 책 두 권을 비롯해 우리 그림과 건축에 관한 책을 넘겨보기로 작정했다.
아침나절은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를 읽었다. 부제가 ‘하루 한 점만 보아도, 하루 한 편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였다. 우리 옛 그림을 소재와 내용별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었다. ‘들국화’는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낙관이 찍힌 정조 임금의 그림이 나오는가 하면 ‘서생과 처녀’라는 작자 미상이라도 신윤복이나 김홍도와 견줄 만한 그림이었다.
저자가 ‘눈 오면 생각나는 사람’ 소제목을 붙인 윤두서 ‘나뭇짐’도 나왔다. 멜대가 휠 정도로 나뭇짐을 진 사내가 비탈길을 내려왔다. 먼 산과 나뭇가지가 간밤 내린 폭설로 하얗다. 눈이 그쳐도 산바람은 차갑다. 사내는 실눈을 뜨고 입은 꾹 다물었다. 짚신에 감발을 찬 아랫도리가 엉거주춤한 기마자세다. 털벙거지를 눌러쓰고 시린 손을 소매에 감춘 채 미끄러질세라 조심스러웠다.
정오가 되어 지하층 구내식당으로 내려가 차림표에 내걸린 떡국으로 점심을 들고 오후 시간을 맞았다. 오후에도 역시 손철주의 저서 ‘사람을 보는 눈’을 펼쳤다. 전권의 내용이 사람이 나오는 옛 그림이었다. 일하는 사람, 노는 사람, 꽃을 보는 사람, 글을 읽는 사람, 숲을 걷는 사람, 물에 가는 사람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림이었다. 물론 내가 익히 아는 그림도 있었다.
‘동양은 산수화 세력이 강하고, 서양은 인물화 역사가 길다.’라는 얘기가 있단다. 미술사학자들은 ‘동양은 자연을 받들어 모셨고, 서양은 자연을 데려다 썼다.’고 보았다. 얼굴은 마음이 비치고 닮게 마련이다. 옛 사람은 ‘나무의 나이는 나이테에 묻고, 사람의 이력은 얼굴에 물어라.’고 했다. 얼굴이 그 사람의 자서전인 것이다. 자화상도 나오고 제자가 스승을 그린 초상화도 나왔다. 19.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