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훌륭한 조상님을 둔 후손이라 필자 또한 진주강문의 자손으로서 약간이나마 이 분들에 대해서 알고 있기에 몇 자 적어봅니다.
강수남(姜壽男) 선조는 진주강문 박사공파 제13세 되시는 분으로 임진왜란 공신호를 받으시고 표절사(表節祠) 에 배향되신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훌륭한 분이십니다.
이 분에 대한 자세한 이력을 올리니 퍼가시어 다시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대대손손 이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충렬공(忠烈公) 諱 강수남(姜壽男)
*청백리(淸白吏),부조묘(不,示+兆,廟),임진왜란 순절,자손세세녹용(子孫世世錄用)
증가선대부 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
1552~1592 [조선] 문신. 자는 인수(仁수). 호는 사월정(沙月亭), 조식(曺植)의 문인 1580(선조 13)년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 승정원 주서. 성균관 전적을 거쳐 예조. 병조의 좌랑과 정랑을 역임. 1592년 임진왜란에 경기도 관찰사 심대(沈垈)의 종사관으로 출전 중. 삭령에서 적의 야습을 받아 전사했다. 선조때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1709(숙종 35)년 이조판서에 추증과 아울러 충렬(忠烈)이라 시호를 내리고 사우(祠宇)조성시 제물을 내리고 어필로 일체정려(一體旌閭)라는 휘호를 내렸고 판서 홍만조(洪萬朝)가 찬한 시장(諡狀)과 부제학 권경(權璟)이 찬한 정문기(旌門記)와 성호 이익(李翼)이 찬한 신도비명이 있다. 양지는 조상의 덕으로 벼슬에 올라 적성현감을 거쳐 삭녕군수가 되었다. 임진왜란(1592) 때 삭녕에 와 있던 경기도 관찰사인 심대의 종사관으로서 일본군에 대항해 싸우다 순절하였다. 그가 죽은 뒤 정조 20년(1796) 이조판서로 증직되고 충민이란 시호를 받았다. 표절사는 충신이나 효자, 열녀를 칭찬하며 나라에서 그들의 고향에 세워주던 정려의 성격을 띠고 있다. 입구에는 솟을대문이 있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앞쪽에는 섬돌이 있고 사당 안쪽에는 마루가 깔려 있다. 현재 이곳에는 윤경래와 강수남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있다.
첫댓글 강유 할아버님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인터넷상의 댓글로 올린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분의 답변도 최종 증직에 대한 오류가 있습니다
카페지기님이 올리신 앞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최종증직은 이조참판이 아니라 이조판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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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家 후손이시군요. 壽자 男자 선조님에 대한 사적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