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산 공소
묘재성지인근에 있는 용소막 성당 공소
†묘재성지
순교자 남상교(아우구스티노) 공이 사셨던 유택지이며
성인 남종삼 요한 공의 본가이다
†베론성지
황사영 백서가 쓰여진 토굴과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는 곳이며
최초의 신학교가 있었던 거룩한
성지이다
위치 : 충북제천시 봉양읍 구학2리 644-1( 베론성지)
학산공소 전경............
이른아침 안개가 자욱히 낀 이곳에 뻐꾸기가 무슨 소식처럼 울어대고 있었다.
학산공소앞 전경.........
물안개, 산 안개가 피어오르는 물가에 이름모를 새들이 떼지어 날아간다.
학산공소 입구............. 아담하고 정겹게 지어진 공소
학산공소 전경..............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고 있다.
학산공소......... 성모님.........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미사중.......... 신부님 강론 ( 오전 7시 )
한달 넘게 만나는 교우들과 함께 반갑게 인사하시는 신부님
미사중.......... 영성체
미사중......... 영성체
미사후....... 신부님 교우들과 이야기중...
미사후............... 신부님과 수녀님....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공소에서 100m 떨어진 곳에
학산 묘재 성지가 있다
묘재성지 표지석.......
이곳은 순교자 남상교 아우구스티노 공이 사셨던 유택이며 그 아드님인 성인
남종삼 요한 공의 본가이다
묘제 성지 입구 대문............. 주먹만한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보였으나, 열어 놓았다.
이 유적지는 순교자 남상교 아우구스티노 공과 성인 남종산 요한 공의
부자간의 뜨거운 신앙과
육친의 정분이 담뿍 어린 성지이다.
묘재 유택전경.........
박해의 고절을 뚫고 목숨을 연명한 남종삼 성인의 후손들 가운데
증손자에 이르러 세명의 자녀가운데 두명이 사제가 되는
영광이 찾아든다
묘재유택 전경........... 남종삼 요한 성인 상
또한 성인의 막내아들 남규희( 프란치스코 ) 는 요절하고
아내 이씨마저 유복자 남상철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남상철의 세딸은 우리나라 최초의 세자매 수녀가 되었다
묘재 유택전경.......... 온 마음을 다하여 묵주기도 5단을 바치다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한 피의 역사끝에 찾아든 축복이다.
순교자 남상교 아우구스티노 공 , 성인 남종삼 요한 공 유적지 돌비석
생가 뒷편에 모셔놓은 성모님 상
십자가의 길....... 기도하며.............
남종삼 요한 성인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승지에 이르러 국왕을 보필하였으며
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 광장에서
참수 치명 순교하였고
십자가의 길............... 1처 사형선고 받으심..
1984년 영광의 성인품에 오르셨다
성인은 순교하기 전에 자주 이곳으로
아버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으셨다
십자가의 길........ 3처 첫번째 넘어지심
당시 러시아 세력이 남하하여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성인은 오로지 조국과 교회를 위하며
일신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흥선대원군에게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아책을 건의하셨다
십자가의 길...... 10처.....
결정적으로 남종삼 성인을
죽음에 이르게하고 병인 박해의 발단이 되는
"이이제이 방아책" 이란
서구세력을 불러들여 다른 서구세력을
물리치게 함으로써 우리를 방어하지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길.......... 14처 예수님 무덤에 묻히심
이로인하여 성인은 박해를 받고 쫓기는 몸이되어
이곳으로 아버님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구하였던 바
부친 상교공은 간곡히 이르셨다
" 너는 분명히 충성된 신하로써 도리를 다하였고
교회를 위해서도 할일을 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너의 목숨은
이미결정지어졌다.
뒷날 사형선고문에 수결을 놓으라 할때
너는 교회에 욕되지 않게
각별히 조심하여라."
이런 부친의 훈계와 분부를 받잡고....
십자가의 길..........
성인은 이곳에서 20리인 배론 신학당으로 찾아가
사제로부터 마지막 성사를 받은뒤
서울로 올라 오던 도중에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심 끝에
주님의 뜻에따라 순교하셨던 것이다
배론성지로 도보성지순례 이동
묘제성지-> 베론성지 8km
오전 10시 20분 출발
베론성지로 도보성지순례 이동중..... 5번 국도를 따라
따가운 태양열을 받으며 묵주기도를 시작하다.
베론성지는 우리 교회에서 가장 훌륭한 신앙인 이었고
순교자였던 황사영 (알렉시오)이 이곳에서
마치 기도하듯이 한자한자 정성들여 백서를 썻고
도보성지순례 이동중........... 탁사정을 지나며...
다음으로 한국교회 큰 변화를 일으킬수 있었던
신학교 즉 , 성 요셉 신학당을 10여년 간이나
운영하였는데 .....
도보성지순레 이동중......... 베론성지 삼거리
이 땅에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헌신하였던
푸르티에, 프리니콜라 신부와
3명의 순교자를 포함한 10여명의 신학생들
도보성지순례 이동중........... 베론성지 입구 십자가 상
그리고 이들이 뒷바라지에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던
장주기 요셉 성인과,
베론 교우촌의 신자들,
하나뿐인 목숨과 이름마저도 주
님께 봉헌한 무명의 순교자
베론성지 입구....... 여기서 3km를 더 들어가야 한다.
사제로서 12년간 번뇌와 역경을
모두 주님께의탁하고 신뢰하면서
성실히 살다간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님께서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다리며
이거룩한 땅에 묻혀있다.
도보성지순례 이동중...... 넘실거리듯 둘러싼 험준한 산세
200여년전 이곳은 얼마나 척박하고 험한 산골이었을까
이 골짜기에 배 밑바닥 같다고 해서
"베론" 이라고 불리던 다소곳한 터에
옛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도보성지순례 이동중.... 맑은 하늘 아래 평온하고 아득한 전경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황사영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고
사태가 급박해 지자 창원 황씨 문중에서
회의를 열어 황사영에게
지금이라도 벼슬길에 나가 하늘이 내리신
그 뛰어난 재주를 헛되이 버리지 말고
출세하여 문중을 중흥케 하라는 요구가 이어진다.
베론성지에 도착하다.... 먼저 최양업 신부님 묘소로 이동중
황사영은 깊이 숙고한 끝에 결단을 내린다.
모든사람이 칭찬애 마지않았던
수염을 깍아 없애고 명문 대가의
양반신분을 집어던진다
임금이 준 금양비도 사절하고
보장된 출세길도 전부 버리고
신앙생활 하나를 지키기위해 거지로 변장해서
충북 제천의 베론으로 들어간다.
십자가의 길........ 최양업 신부님 묘소로 이동중
황사영이 베론 토굴속에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있던 그해에
주문모 신부님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한국 교회가 주문모 신부님을 통해
세계 교회와 연결이 되왔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어둡고 외진 동네가 될 처지에 있었다.
십자가의 길...... 최야업 신부님 묘소로 이동중
그래서 황사영은 한국 교회 사정을 알리고
사제를 보내달라는 등의 연락하는 일을
직접 맡기로 결심한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고
황심 , 옥천희등의 협조자를 구한다.
황사영 토굴......
황사영은 토굴 속에서 중국 교회에 보내는
베이징 주교에게 올리는 탄원서를 쓴다
이게 그 유명한 " 황사영 백서" 이다
황사영 토굴 내부.......
박해를 피해 이상주라는 가명으로
베론으로 몸을 숨긴 황사영은
이곳 옹기골에서 여덟달동안 숨어있으면서
가로 62cm 세로 38cm 인 흰 명주 천에다가
붓으로 한줄에 110자 씩 122줄
모두 13, 348 자를 잔글씨로 깨알같이 쓴다
황사영 순교 현양탑
황사영은 하느님을 바로 모시기 위해
스물일곱살 젊은 나이에 현세의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진리를 향해 두려움 없이 생애를 마쳤다
성직자 묘소....... 최양업 신부님 묘소 이동중
묘소 앞에서 잠시 기도하며
천상에서의 복을 누리시기를 빌어본다
최양업신부 묘소에 도착하다.... 안내판
최양업 신부님 묘.... 온마음을 다하여 묵주 기도 5단을 바치다
신부님 묘소 위 잔 풀을 뜯으며 ....
자비로운신 주님 간절히 청하오니
최양업 토마스 사제를 성인 반열에 들게하기를
우리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대성당 앞에 계신 최양업 신부님 동상
1861년 6월 15일 최양업 신부가
문경에서 병사하자 약 5개월간
베티에 가매장 했다가
11월초 이곳 베론으로 이장되어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안장되었다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 사목활동 일대기를 대리석판에 새겨놓았다
1835년 11월 22일에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사제인
모방 나베드로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3명의 충청도 출신 소년들을 신학생으로 선발한다.
최양업 신부 조각 공원....
1838년 11월에 동창 최방제가 사망하고
이때 최양업과 김대건은 벌써 라틴어 성경을
읽을수 있었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
1847년 7월과 1848년 초 1849년에도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1849년 12월에
최양업 신부는 다행히 압록강을 넘어
서울에 도착하였다.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
조국에 귀국한 최양업 신부는
서울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곧바로 충청도로 가서 고 주교를 만나
하룻밤을 지내고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다음날 부터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으로
끊임없이 사목활동 여행을 강행한다.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
최신부는 1861년 6월에 사목활동을 보고하려고
서울로 가던 길에 겹친 과로로 말미암아
장티푸스에 걸렸다.
그리하여 발병한지 보름만인
6월 15일에 사망하였다.
신학당 터...... 신학교 교장 이었던 프르티에 신부와 교사 프티니콜라 신부동상
이곳이 신학당 터 임을 알리는 돌위에
십자가를 새겨 조선의 아들들을 하느님에게로
이끌기 위해 애쓰시던 그 자리이다.
1855년에 설립된 성 요셉 신학교
교장 신부였던 프르티에 신부가 남긴 편지
(1865년 11.20) 에서 그때의 열악한 실정을 알수있다
"감옥이라고나 말해야 할, 신학교 역할을 하는
오두막집에 8년간 갇혀있었기 때문에
나의 건강은 완전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할수가 없습니다
학생들과 나는 방 두개를 겨우쓰고 있습니다
이 두 방은 잘 닫히지 조차 않는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어서
공기와 냄새가 이쪽방에서 저쪽 방으로 쉽게 옮겨갑니다
이번 겨울에는 내가 걸린 발진티푸스를
들에게 옮겨주어서 하나씩 차례로 앓고 있습니다"
당시 공부하는 신학생 모습을 재현......
당시공부하는 신학생 모습을 재현
당시 공부하는 신학생 모습을 재현
1988년에 복원된 성 요셉 신학교.........
한국 교회 안에서 최초로 격식을 갖춘 신학교로
세칸짜리 초가집에서 학생 6명으로 시작한 학교였다.
최양업 신부를 기념하여 세워진 "바다의 별" 대성당이다
이곳 지형을 상징화 하면서 노아의 방주가 그러했듯이
교회를 구원의 배로 이해하고 표현하고있다.
대성당 내부....
배 밑바닥을 상징하여 장식처리 했다고 알려진
성당의 벽과 천장은 나무로 되어있는데
마치 옛 여인들이 쓰던 참빗의 살처럼 뻗어내린
천장의 나무결은 웅장해 보였다.
둥근 구름다리 아래 맑디 맑은 연못.... 앞에 계신 예수님 상
베론성지를 지켜온 배은하 신부는
베론을 세가지 중요한 역사성을 가지는
성지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 상......
황사영이 베이징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쓴
역사의 땅
대성당 전경....
근대 교육으로 이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성 요 셉 신학교가
있었던 교육의 땅
대성당 앞에 있는 최양업 신부의 동상
그리고 땅의 순교자로 한국교회 복음화의 길을 닦았던
선구자 적인 인물 최양업 신부 묘가 있는
성소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대성당 전경.....
베론성지는 황사영 최양업, 장주기라는 세개의 빛과
피의 기둥으로 세워진 거룩한 성지인 것이다
후기..
잔디위 성모님 상...
성지 곳곳에서 평화를 느낄수 있었으며 자연과 잘 어우러지게
조성된 아름답고 거룩한 성지였다
원주 교구가 베론성지 개발위원회를 구성하여
성지개발에 나선것이 1976년 7월 이었다니
어느새 그만한 세월이 쌓인 것이다.
새벽기도........... 새벽 3시
새벽 3시에 기상하여 공소에서 은혜롭게 성가도 부르고
묵상도 하고 마음껏 주님앞에서 기도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공소앞을 지나가는 야간열차
기차소리가 왠지 동심으로 돌아가는 자장가 같다
묘재성지..
대청마루에 뽀얗게 먼지가 쌓이고
성모님도 먼지를 쓰신것같아
수건을 빨아 대청마루를 물걸레질 하고
성모님도 닦아 드렸다.
성지 올라가는 길에......
성지 초입부터 해서 길 양쪽에 곳곳에서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모두가 숙박시설 내지는 음식점 그런 업소들이었다
조만간에 거룩한 성지가 홰손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난개발로 인해 길잃은 토종 개구리..... 어디로 갈까
도망가지도 않고 도로위에 그대로 있었는데
그대로 두고 지나갔다.
숲속으로 보내고 올걸.....
성지내에 있는 시설.....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
황사영 순교 현양탑
황사영이 하느님을 바로 모시기 위해서
그가 누릴수 있었던 것을 얼마나 버렸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11대 명문대가의 양반 신분과 그가 누리던 부를 버렸고
임금님이 허락해 주었던 출세길도 버렸고
임금님이 하사하신 금양비도 버리고 명예도 버리고
모든 사람이 칭찬했던 그 수려한 외모까지 버렸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하느님을 바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무엇을 버리고 있는가
얼마만큼 버리고 있는가...
황사영이 버린것의 몇분의 일이라도 버릴수 있는가..
그것이 오늘을 사는 나의, 우리의 과제인 것입니다.
(자료도움)
한수산: 순교자의 길을 따라
김길수:하늘로 가는 나그네
정진석: 너는 주초놓고 나는 세우고
달래: 천주교회사
오영환: 순교의 맥을 찾아서
첫댓글 아우구스딩 (leesanggin)형제님 귀중하고 성스러운 자료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자주 부르는 성가 거든요 .....
오래 머물며 음미하고 감니다 주님의 평화가 형제님의 가정에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부족한 순례길을 격려하여 주셔서,,,성가를 이렇게 들어보니 또 다른 감회가 오는데요
은혜로운 카페에 더욱 성령 충만하시어 회원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기를 빌어 봅니다
아주 좋은 성지순례자료 감사히 모셔갑니다. 퇴직 후 반드시 이 곳에 가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