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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성야 미사
루카 2,1-14
‘선한 의지’가 도대체 무엇일까?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성야 미사에서는 목동들이 천사들에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말을 듣습니다.
여기에는 그들만이 아기 예수님을 뵐 자격이 있음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말 안에는 무슨 일을 해서 마음에 들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가톨릭의 전통적 해석, “pax hominibus bonae voluntatis”, 곧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평화”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직역이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의미는 의역이고 현대 신학자들의 합의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된 데에는 “선한 의지”란 단어의 뜻의 중요성을 번역하면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의지’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의지와 욕구를 발휘합니다.
그중에 선한 의지도 있고 악한 의지도 있다는 뜻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격리 원숭이 실험을 통해서 새끼 원숭이가 젖이 나오는 철사 어미보다는 젖이 나오지 않아도 따듯함을 주는
인형 어미를 어미로 인정한다는 것을 증명해 냈습니다.
이것이 선한 의지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어머니의 냉대 속에서 자랐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면 생기는 것이 열등감이고 우울감입니다.
태어나면 아기들은 다 선한 의지를 가집니다. 젖을 먹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엄마를 찾으려는 의지입니다.
엄마를 찾지 못하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 먹으면서 엄마보다는 엄마 젖을 더 추구하게 됩니다.
선한 의지가 오염이 되는 것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원숭이 새끼들을 일부러 어미와 격리하며 우울증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며 발견한 것은 새끼 원숭이들은 먹이와 편한 시설이 아닌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줄 어미를 찾고 무리를 찾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덕분으로 할로우 박사는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치유하는 길은 사랑받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기처럼 사랑만을 요구하는 남자와 사는 것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첫 번째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았지만, 결국 이혼하고 맙니다.
할로우 박사의 우울증은 점점 심해졌고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사랑을 만났습니다.
이때 ‘구원자 원숭이’의 개념을 발견하게 됩니다. 격리 6개월이 안 된 원숭이들은 정기적으로 다른 무리의 원숭이들과 사귀다 보면 우울증이 사라진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두 번째 부인도 두 아이를 낳고는 암으로 사망합니다.
인간으로는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우울증이 심해져서 전기충격으로 우울증을 극복해보려 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첫 번째 아내와 재혼했지만, 상태는 계속 나아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실험실의 원숭이들을 학대했다는 비난 속에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알았습니다.
사랑으로 상처받은 자신은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음을.
그러나 ‘착한 뜻’은 아니었습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삐딱하게만 보는 주인공은 한 스승의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에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나를 창조한 엄마처럼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을 사람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아기들은 착한 뜻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 알고 살아갈 힘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의 목자들은 착한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면 정체성이 생긴 것입니다.
엄마를 만나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엄마는 나를 창조하여 나에게 생명과 같은 젖을 주는 존재입니다.
이 착한 뜻을 가졌기에 그들에게 메시아의 표징이 구유에 뉜 아기였던 것입니다.
밥은 곧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을 양식으로 내어주시면 자신들은 자녀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만을 찾기를 원하는 이들이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누구를 구원하실까요? 아기처럼 엄마를 찾지 않으면 죽는 게 낫다는 착한 뜻을 가진 이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어떤 이들은 돈으로 가난에서 구원되려고 하고 먹는 것으로 배고픔에서 구원되려 합니다.
그렇게는 메시아를 만나지 못합니다.
착한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이처럼 세상없어도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메시아만을 찾는 착한 뜻이 있나요?
그러면 오늘 밤에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선한 의지는 구원자를 부르는 목소리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24일 [주님 성탄 대축일] - 밤 미사
이사야 9,1-6
티토 2,11-14
루카 2,1-14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를 위해 탄생하셨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빅매치 중에 빅매치라고 할 수 있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리버풀대 파리 생제르망의 경기를 현장에서 직관할 수 있는 입장 티켓과 왕복 비행기 표를 보내 초대한다면, 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뛸 듯이 기뻐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 가방을 준비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밤에 주님의 천사는 몇몇 사람들에게 탄생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관할 수 있는 초대장을 보냅니다.
‘메시아 탄생 현장 직관!’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 그 값진 티켓은 로마 황제나 황비, 유다왕이나 왕비, 수석사제나 율법학교 교장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에게? 놀랍게도 학벌은 전무하고, 가문도 보잘 것 없으며, 하루 온종일 양들과 붙어 다니는 일이 전부인 들판의 목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 조직 안에서 목자들은 하위 그룹에 속하는 신분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목자, 하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말도 섞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자들 역시 우리 처지가 그렇지 하고, 자포자기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하느님, 가장 존귀하신 그분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에 탄생하시며, 요셉과 마리아 외에 최초로 목격을 허락한 사람들이 가장 낮은 곳에 살아가던 가장 보잘 것 없는 삶의 소유자 목자들이었습니다.
탄생 때부터 나자렛의 숨은 생활, 그리고 활기 넘치던 공생활, 마침내 골고타 언덕 위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보여주신 모습은 낮은 자의 모습, 작은 자의 모습, 지극히 겸손하신 모습이었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이 작고 낮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명료합니다.
우리도 당신의 모범을 따라 작아지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은총은 또한 작은 자들, 낮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이 은혜로운 성탄의 밤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하는 말씀 또한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복음 2장 10~12절)
“너희를 위하여!” 주님께서 다른 세력가들과 잘 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목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동시에 오늘 갖은 세상의 고통과 상처로 고생하는 또 다른 작은 자들인 우리를 위하여 탄생하셨답니다.
바로 나를 위하여!
이 경이롭고 축복 된 성탄의 신비 앞에 천사들과 한목소리로 감사와 찬미, 영광의 노래를 힘차게 불러야겠습니다.
구세주께서 바로 나를 위해 탄생하셨다니, 내 안에서도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켜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성탄 대축일 밤미사 강론>
(2024. 12. 24. 화)(루카 2,1-14)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메시아입니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4-14)”
1) 여기서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라는 말은, 방을 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관에 투숙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베들레헴 주민들 가운데에도 산모를 위해서 방을 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방이 없어서’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물론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출산에 대비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했을 것이고, 여관비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온 사람들이 여관방을 모두 차지했고, 아무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아무도 반기지 않는
차가운 세상으로 오신 것이고, 그때부터 이미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요한복음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9-11).”
그 상황에 대해서 혹시라도, “만일에 내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나는 기꺼이 요셉과 마리아를 위해서 나의 방을, 아니, 나의 집 전체를 내주었을 것이다.” 라고 큰소리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큰소리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다음 말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41-4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지금 내 곁에 있는 ‘작은 이’가 바로 예수님이고,
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입니다.
2)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배척만 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맞아들여서, 비록 방은 아니고 외양간이었지만, 어떻든 출산을 위한 장소를 내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마도 8절에 나오는 ‘목자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에 그 지역의 외양간은 주로 동굴이었는데,
외양간 역할도 하고, 목자들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의 숙소를 요셉과 마리아에게
기꺼이 내주고, 자기들은 들에서 노숙을 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누워 계셨던 ‘구유’는 우리나라 외양간의 여물통과는 다르고, 양을 먹이는 건초를 담는 그릇이었기 때문에 아기를 눕히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요셉과 마리아를 몰랐고,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인줄도 몰랐지만, 그들은 메시아를 맞아들인 ‘마음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이 말에서 ‘손님’은 요셉과 마리아처럼 딱한 상황에 처해 있는 나그네를 뜻하고, ‘천사들’은 하느님을 뜻합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딱한 처지에 놓인 성가정을 접대하다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 하느님’을 접대한 의인들입니다.
3)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라는 말은,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8-29).”
아기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워 계셨다는 것은,
인간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음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 즉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