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르족(600~1453)

고대에는 캅카스와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인도유럽어족을 쓰는 종족들과 현지인들이 혼혈된 트라키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기원전 5세기에 오드뤼사이 왕국을 건국하였고, 이 시기에 그리스와 많은 교류를 거치면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바르바로이라고 불리며 멸시를 받았다. 그러다가 이후에 이 일대의 트라키아인들은 로마와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오랜기간에 걸쳐 받으며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사용함에 따라 트라키아어도 사어가 되었다. 이후 이들 트라키아인들은 서기 6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기간동안 슬라브인들이 비잔티움 제국으로 남하함에 따라 상당수가 살상되고 살아남은 트라키아인들은 남하한 슬라브인들에게 융합되어서 트라키아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그리스어에서 불가리아어의 원형인 고대 교회 슬라브어로 대체되었다.
한편 불가르인들은 서아시아 캅카스 산맥 지역에서 살고 있던 튀르크계 유목민족이었다. 그 이후 볼가 강가로 이주했고, 이 때문이 불가르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6세기 초, 불가르 부족 중 하나였던 우티구르족의 쿠브라트가 불가르 부족들을 통일하고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에 대 불가리아를 건국하였다.
그러나 대 불가리아는 오래가지 못했다. 쿠브라트의 장남 바트바얀은 하자르인에게 패배하였고 대 불가리아는 하자르에 복속되었다. 쿠브라트의 다른 아들들은 서로 자신들의 무리를 이끌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차남 코트라그의 무리는 볼가 강과 카마 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이주하였고 이들이 볼가 불가르인이 된다. 삼남 아스파루흐(Аспарух)는 아들 네 명과 함께 현재 불가리아 지방에 와서 정착하면서, 토착민으로 살고 있던 트라키아 슬라브인들과 혼혈이 이루어졌다. 나머지 아들들은 마케도니아, 바이에른, 이탈리아 등지로 이주하였으나 독립적인 국가를 건국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들 불가르인들은 주변 민족에 동화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2. 중세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역사적으로는 679년 최초의 불가리아 왕국이 건설되어 등장하였다. 이 시기 불가리아 왕국은 그 세력을 크게 떨쳐 대칸 크룸 대왕이 동로마 제국 황제 니케포루스 1세의 군을 궤멸시키기도 하는 등 동로마 제국을 크게 위협하였으며, 여러 차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공물을 받기도 했다. 9세기에는 나라가 크게 안정되었으며, 보리스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기독교(정교회)를 받아들이고 문화가 발전하였다.
10세기에는 명군주인 시메온 1세(시메온 대제)가 집권하였다. 시메온 1세는 그리스 방면으로 크게 영토를 넓히고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였다.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로마노스 1세는 시메온 1세에게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황제(차르)의 제관을 씌워주었고, 로마 제국과 프랑크 왕국 다음의 세 번째 유럽 제국인 불가리아 제국을 세우게 되었다. 또한 초기 기독교 이후 최초의 총대주교좌인 불가리아 총대주교가 창설되어 종교적으로도 큰 위신을 얻었다.
당시 불가리아 제국의 위세는 실로 대단한 것으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파견되었던 키릴과 메토디 형제에 의해 키릴 문자가 만들어졌으며, 이 키릴 문자를 바탕으로 성립된 교회 슬라브어와 이를 바탕으로 향유된 불가리아 문학은 정교회 슬라브권으로 퍼져나갔다. 이 고대 교회 슬라브어는 동유럽권의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불가리아는 러시아 이전의 슬라브 세계의 실질적인 맹주 역할을 하던 국가였다. 이렇게 불가리아는 동유럽권의 양대 강국이었던 헝가리와의 오랜 투쟁에서 승리하며 경쟁자를 탈락시키고 서부와 북부로 계속해서 팽창해 나가며 발칸 반도의 대국으로 번영할 것처럼 보였으나..
불가리아 제국이 최대 판도를 이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로마 제국의 혼란스러웠던 정치가 내부 불안요소가 정리됨에 따라 점차 안정되고, 또 동로마 제국의 주적이었던 이슬람 세력이 분열되고 제국이 오히려 공세로 돌아서자 상황은 급변했다. 상대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든 동로마 제국은 감히 북쪽 국경에서 제국을 자처하고 있는 불가리아를 아니꼽게 보았다. 불가리아의 전성기는 어디까지나 동로마의 혼란기를 담보로 해서 성립한 것이었는데, 안정기에 접어들어 고질적인 우환거리였던 유럽과 아시아의 양대 전선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제국 동부에서 병력을 전용하여 발칸 반도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된 동로마 제국에게 불가리아는 애시당초 근본적인 국력에서부터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국내의 혼란 또한 극심해져서 황제의 귀족들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고 반란과 봉기가 잇달았다. 그 결과 10세기 후반, 제국이 성립한지 백년도 안되어 키예프 공국과 동로마 제국에게 연이어 공격당해 일차적으로 몰락하였다. 그 후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재기를 시도하였으나, 바실리우스 2세 "불가록토노스"의 공격을 받아 클레이디온 전투에 패해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은 허망하게 몰락하였다.
제2차 불가리아 제국
이후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185년 동로마 제국이 크게 약화된 틈을 타 독립, 제2왕조를 열었다.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한때는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등지를 차지하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차르 칼로얀과 이반 아센 2세의 시대에 전성기를 맞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을, 클로코트치냐 전투에서 에피루스 공국을 격파하면서 13세기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할 유력한 후보국에 속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불가리아는 시메온 대제 시기와 버금 가는 전성기를 누렸고 불가리아인들은 쇠퇴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대신하여 제국의 수도였던 투르노보를 제 3의 로마라고 지칭할 정도로 큰 자부심을 가졌다.
하지만 이반 아센 2세의 사후 몽골의 침입과 봉건화의 촉진으로 쇠퇴하였고, 이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이바일로를 중심으로 농민 반란이 일어나 한때는 수도 투르노보를 점령당하고 이바일로는 차르 자리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이바일로는 국내 귀족들의 반발로 제거당하였고, 이후 불가리아는 킵차크 칸국의 간섭 하에 들어간다. 그러던 중 등장한 차르 토도르 스베토슬라프 시대에 다시 중흥을 맞아 지방의 독립적인 영주들을 다시 차르에게 복종시켰고, 몽골과의 관계도 느슨한 친선 관계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발칸 반도에서는 새로이 세르비아가 성장하고 있었다. 1330년 차르 미하일 쉬시만은 세르비아의 스테판 데챤스키와의 벨버즈드 전투에서 대패하고 그 자신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스베토슬라프 시대에 안정되는 듯 하였던 불가리아는 다시 봉건 영주들의 할거 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시기에 불가리아를 40년 동안 통치한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의 시대에 불가리아 제국은 제2의 황금기라고 불릴 정도로 경제, 문화적인 전성기를 맞았으나, 외부에서는 새롭게 성장하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이반 알렉산더르는 제국을 스스로 분열시키는 자충수를 두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황후를 수도원으로 보내버리고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은 것. 그리고 첫번째 황후에게서 얻은 아들 이반 슈랏시미르는 이 사건에 반발하여, 독립 왕국을 세워버린다. 게다가 이반 알렉산더르의 뒤를 이어 정통 황제로 즉위한 이반 시슈만은 즉위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데다 유능한 인물이라고 하기도 어려워 강력한 지방 귀족이 도브루자 공국이라는 독립국을 세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제대로 방어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황제를 자칭하고 있는 형 이반 슈랏시미르는 이반 시슈만을 돕기는커녕 그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매일반이었고, 결국 삼분된 불가리아 제국은 하나씩 하나씩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