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13:8-13 / 오직 진리를 위할 뿐. 성도를 위한 축도
(고린도후서 13장)
08.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0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2.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묵상/고후 13:8-13)
◆ 진리를 위할 뿐
(8)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 짧은 말씀을 내 삶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기로 한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내 자존심, 내 체면 때문에 진리를 왜곡하는 일이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거짓말도 불사하는 시대다. 내 체면을 위해서 진리를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동안 내가 주장하던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 앞에서 ‘내 생각이 잘못이었다’고 시인하기란 정말 어렵다. 그것은 체면을 구기는 일이며, 신용을 잃는 일이며, 더 나아가서 욕먹을 각오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실한 성도라면 단호히 체면이나 자존심보다 진리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만일 내가 체면이나 자존심을 살리고 싶어서 진리를 조금이라도 왜곡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나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진리를 위할 뿐’이라는 이 결심을 하게 되면 마음이 담대해진다. 어떤 사람과의 토론도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틀리면 수정하면 되니까! 토론에서 이기느냐 지느냐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마음이 되면 적어도 토론에서 질까 봐 두려워하지는 않게 된다. 모르면 배우면 되고, 잘못 알고 있으면 고치면 되지만, 진리를 왜곡하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다. 정말 삼가야 한다.
겨우 내 이익, 내 주장, 내 체면 세우고자 진리를 왜곡한다면, 나는 정말 쓸모없고 무익한 종이다. 하나님께서 버리셔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이론의 정당함을 주장하려고 교묘하게 성경을 왜곡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본문은 전혀 다른 뜻이건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
오, 주님, 진리를 왜곡하느니 차라리 망신당하는 편에 서겠습니다. 그게 훨씬 더 안전합니다. 저를 보호해주십시요.
◆ 주님께서 주신 권세
(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영어의 JOY는 기쁨을 의미하는데, 누군가 이것을 아주 멋지게 풀이했다. 성도 된 자의 삶의 우선순위는 JESUS(예수님), OTHER(타인), YOU(당신, 곧 자기 자신)라는 것이다. 그 우선순위대로 살 때 JOY(기쁨)가 임한다고 풀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그런 우선순위가 설 자리가 없다. 그랬다가는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러한 삶을 실천하고 있다.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서 오는 우울함보다는 사랑하는 형제들이 든든히 서 있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 주는 기쁨이 더 컸다. 이것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들이 자기가 맡은 사람들을 이렇게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이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바울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권세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권세와 물질적인 복이 모두 형제를 세우기 위해 주신 것임을 기억하자.
◆ 축도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배 마지막에 목사님들이 축도한다. 그 내용이 고린도후서 13장의 이 말씀이다. 사람들은 목사 자격증이 있어야만 이런 축복을 할 수 있다고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거듭난 성도라면 모두 형제들에게 축복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기도다.
이 축복 기도는 단순하지만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무려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나서서 성도를 향해 복을 베푸신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의 대속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은혜다. 죄 사함, 구원, 영생이 바로 대속의 은혜에서 비롯된다. 그뿐인가? 주님께서는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날마다 우리와 함께하시며, 인도하신다. 주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나를 인도하시는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만유인력 법칙처럼 변치 않는 영적 법칙이다. 특히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귀하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보다 행복하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도 믿어야 한다.
<성령의 교통하심>
‘교통하심(fellowship)’이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라고 하는데, 이것은 상호 교류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에 들어갈 수 있다. 성령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지 않고 듣는 것만을 말하시기 때문에(요 16:13)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곧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작은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성령께서는 하늘 보좌에 계신 주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께 그대로 전달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눈을 주님을 향하도록 하신다.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저 멀리 하늘에 계신 분의 음성을 내면에서 들으며, 우리의 기도는 성령을 통해서 우주 너머 계신 하나님께 그대로 전달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하나님께 그대로 전달하신다. 인간적으로 표현하자면, 성령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입이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귀이시며 서로 만지면 느껴지는 하나님의 손과 같다. 성령과의 교통하심이 없이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 만을 쳐다보게 하신다.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손을 들고 축복할 때, ‘있을지어다’라고 하니까 마치 손바닥에서 레이저 광선이라도 나가는 것처럼 힘을 주는 분들도 있다. 명령형처럼 보이는 이 문구는 본래는 ‘여러분과 함께하기를!(Be with you all /NIV)’하고 끝난다. 한마디로 ‘있기를 빕니다’라는 기원의 형식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형제들이 예배를 마칠 때 모두 손을 들고 이 축복 기도를 한다. 서로를 향해 축복하는 이 모습이 참 귀하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 세 가지 은혜가 부어진다면 그 사람은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단연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I shall not be in want./NIV)”(시 23:1)
주님,
날마다 주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성령의 교통하심 가운데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아멘, 아멘.
[출처] 고후 13:8-13 / 오직 진리를 위할 뿐. 성도를 위한 축도|작성자 야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