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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세계 최고문자 새겨진
‘도기조각’ 파키스탄 하라파 유적서 발굴
인류가 기록한 최고의 문자가 새겨진 것으
로 추정되는 도기가 파키스탄의 고대문명
유적지에서 발견됐다고 1999년 5월 4일
영국 BBC방송이 전했다. 문자가 새겨진
도기들은 4천500년전에 번성했던 인더스
문명의 하라파 유적지대에서 발견된 것으
로 표면에는 용기안의 내용물을 나타내거
나 혹은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기호가 새겨져 있다.
도기조각에 새겨진 나무 모양의 삼지창 무
늬기호가 약 5천500년전의 것으로 추정돼
1998년 이집트 남부 전갈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고대 문자(BC3200-3300년)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보고 리처드 메도우 하
버드대학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고대 문자
는 지금까지 발견된 다른 어느 문자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 이전까지는 BC 3100년경의 메소포타
미아 문명을 일으킨 수메리아인들이 기록
한 문자가 최고의 문자로 알려져 왔다.
▶2009년 네팔의 총리 프라찬다가
전격 사의를 표명하였다
▶2009년한국해군,
해적에 쫓기던 북한 상선 구조
북한 상선 다박솔호
소말리아 해역에서 우리 선박 호송 업무를 맡고 있는 청해부대 문무대왕함이 2009년 5월 4일 오전 해적의 공격 위기에 처한 북한 상선을 구조했다.
이날 문무대왕함이 아덴항 남방 37㎞ 해상에서 북한선적 6천399t급 화물선 ‘다박솔(DABAK SOL)’호가 해적선으로부터 쫓기고 있다는 긴박한 구조신호를 포착하고 링스헬기를 긴급 출격시켜 50분만에 해적선을 퇴치했다.
합참에 따르면 한국시각으로 이날 오전 11시 40분쯤 5차 호송임무를 마치고 아덴항 인근 국제권교통항로 상에서 감시와 정찰활동을 하던 문무대왕함에 “해적으로부터 쫓기고 있다”는 북한 다박솔호의 긴급 구조 신호가 포착됐다. 당시 다박솔호는 아덴항 남방 37㎞, 문무대왕함으로부터 96㎞ 거리였다.
문무대왕함은 신호를 포착한 지 10분 만인 11시 50분쯤 링스 헬기를 출동시켰고, 헬기는 30분만인 12시 20분쯤 다박솔호 상공에 도착했다. 해적선이 다박솔호를 불과 3㎞ 거리까지 추격해온 위험한 상황이었다.
링스헬기는 위협 기동을 하는 동시에 탑승하고 있던 저격수들이 해적선을 향해 사격자세를 취하자 해적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결국 링스헬기가 현장에 도착한 지 10분만인 낮 12시 30분쯤 해적선은 항로를 완전히 변경해 달아났고, 헬기는 해적선이 북한 선적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위협기동을 계속했다. 링스헬기는 오후 1시30분 문무대왕함에 복귀하기 전까지 110분간의 작전 비행을 통해 북한 상선을 지켜냈다.
당시 해적 모선에는 상선에 접근할 수 있는 자선은 물론 사다리까지 비치돼 있어 조금만 시간을 지체했어도 북한 상선이 해적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다박솔호는 철강을 싣고 이집트에서 홍해를 지나 인도로 향하던 길이었다.
해적선이 멀리 도주하고 나서도 문무대왕함은 쫓기느라 항로를 이탈했던 다박솔호와 3차례에 걸친 교신으로 항로를 제대로 찾도록 안내하면서 보호하는 등 끝까지 임무를 다했다. 북한 상선은 통신망을 통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몇 차례 거듭했으며 “우리를 더 보호하겠습니까” “좀 잘 지켜주십시오”라는 말로 고마움을 표했다고 합참은 전했다.
피랍위기에 처한 선박은 국적을 불문하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지원하도록 되어 있는 유엔해양법에 따라 진행된 이날 우리 군의 작전은 한국이 북한상선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해준 첫 사례로 기록됐다.
▶2003년미국 우주비행사,
러시아 우주선 타고 첫 귀환
지난달 말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도킹했던 러시아 소유즈 우주선이 임무를 마친 3명의 우주비행사를 태우고 4일 지구로 귀환했다고 러시아 우주통제센터가 밝혔다.
러시아 우주통제센터는 지난달 28일 ISS에 도킹한 소유즈 TMA-1호가 이날 새벽 2시43분 ISS로부터 분리에 성공했으며 오전 6시19분에 낙하산을 이용, 카자흐스탄의 초원지대에 착륙했다고 말했다. 이로써 미국의 케네스 바워삭스, 도널드 페팃, 러시아의 니콜라이 부다린 등 3명의 우주비행사는 5개월여간의 ISS 생활을 마치고 무사히 귀환하게 됐다.
또 바워삭스와 페팃은 외국 우주선을 통해 귀환하는 첫 미국인 우주비행사로 기록됐다. 이들은 당초 지난 3월 지구로 귀환할 예정이었으나, 지난 2월 발생한 미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 폭발사건의 여파로 귀환 일정이 늦어졌다.
▶ 2002년 오늘,
미그19전투기로 월남한 #이웅평 (李 雄 平)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국군수도병원 에서 사망(1954년 평안남도 대동 에서 출생~)
1983년 2월 25일 당시 조선인민군 공군 상위(대한민국 공군의 대위에 해당)였던 그는 미그 19 전투기를 몰고 월남하였다. 1995년 공군 대령으 로 진급했고 이후 공군대학 정책연구위원 및 교관으로 활동했다.
▶2001년시인 이성선 타계
▶1999년뉴욕 대형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
창사 130년 만에 첫 뉴욕증시에 상장
▶1999년 성결교회와 역사연구소 창립
▶ 1999년 세계최고문자 새겨진 `도기조각` 파키스탄 하라파 유적서 발굴
인류가 기록한 최고의 문자가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도기가 파키스탄의 고대문명 유적지에서 발견됐다고 1999년 5월 4일 영국 BBC방송이 전했다. 문자가 새겨진 도기들은 4천500년전에 번성했던 인더스 문명의 하라파 유적지대에서 발견된 것으로 표면에는 용기안의 내용물을 나타내거나 혹은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기호가 새겨져 있다.
도기조각에 새겨진 나무 모양의 삼지창 무늬기호가 약 5천500년전의 것으로 추정돼 1998년 이집트 남부 전갈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고대 문자(BC3200-3300년)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보고 리처드 메도우 하버드대학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고대 문자는 지금까지 발견된 다른 어느 문자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 이전까지는 BC 3100년경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수메리아인들이 기록한 문자가 최고의 문자로 알려져 왔다.
▶1998년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요르단
강서안 일부지역서 병력철수동의.
▶1998년 교황 경호 최고책임자 근위대장
알루 아 에스테르만 피살.
▶1997년 르완다 난민 200명,
송환열차서 압독일방송 보도.
▶1997년 강남중앙침례교회
분당지역을 위한 지 성전으로입당.
▶1996년 미국, 북한에 달러 위조 강력 경고.
"해 결안되면제재완화 불가능’
▶1997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만델라대
통령이 주선한 자이르 모두투과 반군 지도
자 로런트 카빌라의 평화회담이 자이르 내
전을 종식시킬 다소간의 희 망과 함께 끝남
▶1994년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와 예리코시에 대한 자치협정 서명
앙숙관계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1994년 5월 4일 카이로에서 이스라엘 점령 요르단강 서안의 예리코시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자치를 출범시키는 역사적인 협정에 서명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다시 자유를 돌려주는 첫번째 조치가 된 이 협정으로 이스라엘 점령 가자지구와 예리코시에서 지난 1967년 중동전 이후 27년간 계속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군정은 부분적으로나마 막을 내리고 제한된 범위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시대가 열리게 됐다.
팔레스타인 경찰은 5월 12일 가자지구의 자치권을 넘겨받았고 아라파트 PLO 의장이 7월 1일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환했으며 10월 26일 이스라엘은 요르단과 평화협정을 맺어 시리아에 대한 골란고원의 반환의사도 밝혔다.
▶1989년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호에서
금성궤도선 마젤란 발사
▶1986년일본 동경서 제12회
서방7개국 정상회담 개막
▶1984년폴란드 주교단 정치범 석방촉구
▶1983년이란 공산당 해체
▶1982년아르헨티나 공군 엑소세미사일로
영국 구축함 격침
▶1982년대검 이철희,
장영자 부부를 외환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1982년 5월 4일 거액의 어음사기사건으로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군림해온 장영자와 남편 이철희를 구속했다. 권력의 후원을 내세워 1981년 2월부터 1982년 4월까지 6,404억원에 달하는 거액의 어음사기행각을 벌인 이들 부부는 대화산업이란 회사를 차려놓고 자금이 필요한 기업을 대상으로 연리 20-22%로 비교적 낮은 금리에 2년 거치 3년 분할 상환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는 대신 견질어음을 대출액의 3-4배 요구, 이를 다시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또 다른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등 거액의 사채놀이를 해왔다.
건국후 최대규모의 금융사기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은 사회전체에 엄청난 충격과 파문을 일으켜 공영토건, 일신제강 등의 기업이 도산하는가 하면 조흥은행장, 상업은행장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씨 등 30여명이 구속됐다. 또한 이 파동으로 국무총리 등 4부장관이 모두 해임됐다.
재판결과 이철희, 장영자 부부에게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에 미화 40만달러, 일화800만엔 몰수, 추징금 1억6,254만원이 선고됐다.
▶1980년네팔관광성 한국의동국대산악
회가 세계 5번째로 마나슬루봉 정복
(4월 28일)했다고 발표
▶1980년티토 유고대통령 사망
▶1979년쿠르트 발트하임 유엔사무총장 내한
▶1977년일본 요미우리신문
서울 지국 폐쇄 및 국내 배포 금지
▶1974년엑스포74 미국서 개최
▶1970년미국 주 방위군, 반전운동 시위
벌이던 켄트대 학생들에 발포해 4명 사망
▶1966년북경 시장 팽진,
일체의 공직에서 해임
▶1961년폼페이 유적 발견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한순간에 멸망한 폼페이의 유적이 19세기에 들어 발굴된 곳이다. 드러난 유적은 고대 로마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현지인들은 폼페이 유적을 스카비(Scavi)라고 부른다. 유적지의 입구는 마리나 문(Porta Marina)으로, 당시 마을에서 항구로 통하던 길의 성문이다. 이 부근에는 폼페이에서 가장 큰 건물인 바실리카, 아폴로 신전, 주피터 신전 등이 있다. 중앙광장인 포로(Foro)에는 도리아식 원주가 서 있고, 포로를 왼쪽으로 돌아나가서 마첼룸을 지나면 주요 건물 유적들이 있다. 파우니의 집, 베티의 집, 큐피드의 집 등 당시 부유한 귀족들의 저택들이 늘어서 있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회화, 조각 등은 나폴리 북쪽의 국립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60년정부 일본인 기자의 무제한 입국 허용
▶1958년서머타임제 실시
▶1955년영국-프랑스 원자력 정보교환 협정 조인
▶1951년`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 발표, 전시연합대학 설치
정부는 1951년 5월 4일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을 발표하여 `전시연합대학`을 부산, 전주, 대구, 광주, 대전, 제주 등에 설치 운영하는 한편 대학생에 대한 징집연기 조치를 취했다. 전시연합대학은 1950년 11월과 12월 두 달간 500여명을 대상으로 서울에서 운영된 적도 있었으나 학생들의 징집, 전쟁의 장기화 등으로 계속되지 못했었다.
1951년 2월 18일 다시 부산에서 문을 연 전시연합대학의 법적인 근거를 마련한 것이 이날 발표된 특별조치령이었다. "전화로 인해 정상 수업이 불가능한 대학생은 타 대학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고, 정상 수업이 가능한 대학은 사정이 허락하는 한 그 학교 소재지로 옮겨온 타 대학 학생의 취학을 허락해야 한다."는게 그 요지였다. 경비는 서울과 부산의 국립대 예산에서 충당했다.
부산, 광주, 전주, 대전에 설치된 4개 대학에 수용된 학생은 6,455명, 동원된 교수는 444명이었다. 전시연합대학은 가교사를 짓고 점차 자리를 잡아갔지만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든 1952년 5월 31일자로 해체됐다.
세계교육사상 전례가 없는 전시연합대학은 백낙준 당시 문교부 장관이 "전쟁 중이라해서 교육을 중단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비롯됐다. 오늘날의 지방 국립대학은 대부분 전시연합대학이 모체가 되어 설립된 것이다.
이처럼 6·25전쟁 중에도 교육열은 식지 않았고, 피란지의 노천학교, 야외학교의 모습은 눈물겨웠다. 다음은 당시 미국의 뉴욕타임스지 보도. "남한에서는 정거장, 약탈당한 건물안, 천막, 묘지에서까지 수업을 하고 있다. 어느 시골에 가도 나무 밑에 학생들이 모여 앉아 나무에 흑판을 걸고 책을 돌려가며 공부하고 있다."
▶1951년이란, 석유 국유화법 성립
▶1949년`육탄 10용사` 사건
1949년 5월 4일 새벽 3시경 북한 인민군 2천여명이 개성시 인근의 아군 산악초소를 기습점령했으나 아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격퇴됐다. 아군 10여명은 폭탄을 휴대하고 적진에 돌입, 자폭함으로써 아군고지를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무훈을 세웠다.
파주 통일공원에 있는 `육탄 10용사상`
18연대 소속 서궁덕 상사 등 용사 10명은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아군초소를 탈환하기 위해 폭탄 한 개씩을 짊어지고 낮은 포복으로 적군에 접근해 일제히 토치카 안으로 돌입, 토치카를 폭파하고 그 자리에서 모두 산화했다. 이를 국군에서는 `육탄 10용사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이 와중에 장병 3백여명이 표무원 소령의 거짓 정보에 의해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표 소령은 장병들에게 "적에게 포위됐다. 투항 만이 살길이다"며 월북을 종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4년휴일에도 학교수업 실시하기로 함
▶1929년미국의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 출생
1992.9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소말리아를 방문하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오드리 헵번의 이 말은 전 세계 신문에 헤드라인이 되었고 세계적인 기부문화를 불러 일으켰다. 유니세프 친선 대사가 된 후 굶주린 어린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간 오드리 헵번은 배우로 살았던 때보다 더 많은 정렬을 짧은 시간 동안 세계 구호 운동에 쏟아 부었다.
은막의 스타를 뛰어 넘은 진정한 스타
1988년 유니세프 친선 대사가 된 후 그녀는 세계 곳곳의 구호지역을 다니며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녀가 구호활동을 위해 간 곳은 수단, 에디오피아,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 곳이 넘었다. 1992년 9월 오드리 헵번은 소말리아에 있었다. 소말리아는 그녀가 방문했던 그 어떤 지역보다 더 비참하고 참혹한 현장이었다. 대부분의 어린이가 죽어가고 있었으며 죽은 어린이들은 쇼핑백만한 자루에 담겨 묻혔다. 오드리 헵번은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충격을 받았으며 마음 깊이 함께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 소말리아 어린이들에게 더 많은 구호의 손길이 가도록 호소했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 쌓은 명성과 인기를 아낌없이 구호활동을 위한 기금 모집에 이용했지만, 구호 현장에서는 절대 스타로 처신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아이를 둔 어머니로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인간 오드리 헵번으로서 어린이들을 대하고 사랑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기꺼이 어린아이들을 보듬어 안았으며 아픈 아이의 눈썹위로 기어가는 파리를 내쫓았다. 전쟁지역과 전염병 지역도 위험을 무릅쓰고 방문했으며 아이들 속에서 누구보다 밝고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보여준 헌신과 노력은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단지 왕년의 스타로 그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진심 어린 구호활동에 감동했고 새로운 기부활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작지만 큰 울림이 되었다. 그녀 이후 많은 명사들이 진심이든 혹은 가식이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명성과 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느끼고 기부와 자선 활동에 뛰어 들었다. 젊은 시절 은막의 스타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오드리 헵번은 그 사랑을 제대로 되돌려 줄줄 아는 진짜 스타였다.
유럽의 숙녀에서 할리우드의 스타로
오드리 헵번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계였으며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유서 깊은 남작 가문의 딸이었다. 그녀의 본래 성은 러스턴으로 헵번가와는 먼 친척 뻘이긴 했으나 그다지 관련은 없다고 한다. 그녀가 헵번의 성을 가지게 된 것은 다소 사회적으로 불안정 하던 그녀의 아버지가 자주 이름과 성을 바꾸면서 먼 친척 뻘인 헵번을 러스턴 앞에 붙여 헵번-러스턴이라는 성을 쓰게 되면서 부터였다. 오드리 헵번의 부모는 당시 유럽에 유행처럼 번지던 우익 파시즘의 신봉자들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곧 파시즘의 문제점을 깨닫고 빠져 나왔지만, 아버지는 깊이 관여 하고 있었으며 결국 오드리 헵번이 6살 나던 해 가출해 사라지고 말았다.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는 가출 후 나치에 적극 동조하다가 영국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였고 이후는 아일랜드에 정착하여 과거와 가족을 숨기고 살았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존재는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녀가 [로마의 휴일]로 스타덤에 오른 이 후 오드리 헵번과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전력이 세상에 알려져 스캔들이 될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오드리 헵번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연락을 오드리 헵번에게 숨겼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을 일약 스타로 뛰어 오르게 한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
오드리 헵번은 6살 이후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와 영국을 떠돌며 살았다. 어린 시절은 외가의 재력과 어머니의 능력으로 그다지 곤궁하지는 않았지만, 곧이어 유럽대륙이 독일 나치의 영향을 받으면서 가세가 급속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가난은 2차 대전 중에 극에 달했으며 이 와중에 오드리 헵번은 거의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그녀를 구해 준 것이 유니세프의 전신인 국제 구호 기금이었다. 이때의 기억이 훗날 그녀가 유니세프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 이유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좋아했던 오드리 헵번은 발레리나가 되길 원했지만 170cm에 달하는 그녀의 큰 키는 발레리나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 후에도 계속된 가난은 그녀가 헛된 꿈을 꿀 여유를 주지 않았다. 발레로 다져진 우아한 몸매와 귀엽고 발랄한 외모를 가졌던 오드리 헵번은 영국에서 연극과 영화에 단역배우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무명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의 진가를 알아본 소설가 콜레뜨가 자신의 작품을 각색한 브로드웨이 연극 [지지]에 오드리 헵번을 전격 캐스팅했고 할리우드에서는 미국적이지 않은 유럽풍 숙녀의 이미지를 가진 여배우를 찾고 있었다.
1953년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한 영화 [로마의 휴일]에 공주로 출연한 오드리 헵번은 그야말로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졌다’를 실감할 수 있는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 한편으로 그녀는 유행의 중심이 되었고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녀는 전세계 여성들의 우상이었으며 남성들의 연인이었다. 이후 오드리 헵번은 승승장구 한다. [사브리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등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은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프랑스 디자이너 지방시와의 만남으로 그녀는 ‘오드리 헵번 스타일’ 이라는 자신만의 패션세계도 구축해 나갔다.
평탄치 않았던 두 번의 결혼
어릴 때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충격 때문인지 오드리 헵번은 늘 안정적인 가정을 원했다. 그녀는 배우로서의 명성보다는 한 남자의 아내로 헌신하는 삶을 희구했다. 그녀는 [로마의 휴일]로 스타덤에 오른 지 1년 만에, 세상의 스포트라이트가 온전히 그녀 혼자만의 것일 때 영화배우 멜 퍼러와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1954년 결혼 당시 오드리 헵번은 25세였으며 배우자 멜 퍼러는 이 결혼이 세 번째였고 오드리 헵번보다 12살이 많았다. 결혼은 오드리 헵번의 영화배우 경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녀는 멜 퍼러의 충실한 배우자였지만 여전히 뛰어난 흥행 여배우였다. 남편 멜 퍼러는 배우이기도 했지만 제작자였고 프로듀서, 감독이기도 하였다. 오드리 헵번은 멜 퍼러와의 사이에 아들 숀을 얻었고 멜 퍼러가 제작하거나 연출하는 작품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14년 결혼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부부에게서 종종 발생하는 열등감이 오드리 헵번 부부를 힘들게 했다. 멜 퍼러 자신도 유명한 영화 배우였지만, 오드리 헵번의 눈부신 명성 앞에서는 늘 기가 죽었다. 여기에다 매력적인 남자였던 멜 퍼러가 외도의 유혹을 뿌리 칠 수 없었다는 점도 부부 생활에 문제가 되었다.
[전쟁과 평화] 출연 당시 남편 멜 퍼러와 오드리 헵번
어린 아들 숀을 위해서라도 이혼만은 피해보려 했던 오드리 헵번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1968년 이혼을 하였다. 평온하고 안정된 가정을 꿈꾸던 오드리 헵번의 가장 중요한 희망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혼의 충격을 달래 준 것은 우정 관계였던 이탈리아의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였다. 그녀보다 9살 연하였던 도티는 멜 퍼러와 이혼 후 혼란스러운 오드리 헵번과 그녀의 아들 숀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둘 사이에서 사랑이 싹트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머니와 단출하게 살아온 오드리 헵번에게 도티의 따뜻한 가족과 친척들은 새로운 세계였다. 이듬해 오드리 헵번은 스위스에서 안드레아 도티와 결혼식을 올리고 로마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배우로서의 삶을 접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돌아가려고 했다. 멜 퍼러와의 결혼 기간 동안 유명 여배우였기 때문에 발생한 가정생활의 갈등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드리 헵번의 오산이었다. 청소년 시절 [로마의 휴일]에서 아름답게 빛나던 오드리 헵번을 사랑했던 도티는 그녀가 그저 평범한 아내로 머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도티는 평범한 여인 오드리가 아니라 배우 오드리 헵번을 사랑했던 것이다. 도티와의 사이에 아들 루카가 태어났다. 그러나 이 결혼 역시 오드리 헵번에게는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안드레아 도티는 이탈리아 남자답게 외도에 거부감이 없었고 오드리 헵번의 남편으로 그의 외도는 번번히 가십기사로 다루어졌다. 결국 도티와의 결혼 생활도 1979년 이혼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안드레아 도티와 이혼 후 오드리 헵번은 진정한 소울 메이트인 로버트 월더스를 만나지만 다시는 결혼하지 않는다. 오드리 헵번은 월더스와의 사이를 ‘결혼이 서로에게 얻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추가하지 못할 만큼 사랑으로 충만’하다고 말했다. 로버트 월더스는 오드리 헵번을 만난 이후 그녀의 구호 활동을 도왔으며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곁을 지켰다.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되다
오드리 헵번의 구호 활동은 의뢰가 아니라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결정되었다. 1988년 오드리 헵번은 특별 초대된 마카오의 음악 콘서트에서 자신의 명성이 자선기금 모집에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경험을 하였다. 조용히 은둔하며 왕년의 스타로서 흠 없이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던 그녀에게 이 경험은 매우 특별했다. 자신의 인기와 명성이 그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그것도 매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오드리 헵번은 흥분했다. 유니세프 쪽이 아니라 오드리 헵번 측에서 먼저 의사를 타진해 왔다. 구호를 위한 기금 모집이 절실했던 유니세프는 오드리 헵번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그녀는 즉시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녀 외에도 많은 유명인 친선 대사가 있었지만 오드리 헵번의 참가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게다가 오드리 헵번은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지 않았기에 소속사도 없었고 까다롭게 스케줄을 조정할 필요도 없었다. 오드리 헵번은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그곳이 오지든, 전장이든, 전염병 지역이든 어디든 갔다. 일 년에 보수가 단지 1달러이며 출장지로 가는 경비와 숙박비 외에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고 사무실조차 내주지 않는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에 오드리 헵번은 열성적으로 매달렸다. 처음에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자선기금을 모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그녀의 구호 활동은 현장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차 깊이를 더해갔다.
구호지역에서 어린이와 함께 웃고 있는 오드리 헵번
구호의 메시지를 알리기 위해 그녀는 배우 시절에도 잘 하지 않던 인터뷰를 자청했다. 오드리 헵번의 노력으로 전 세계인들은 구호활동에 대해 새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명사들뿐 만 아니라, 누군가 훌륭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구호 운동에 일반인들도 작은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의 정열적인 유니세프 활동은 구호지역의 많은 생명들을 살리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는 나날이 쇠잔해지고 있었다. 60세가 넘은 나이를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일정과 현장에서 받는 슬픔과 정신적 충격은 오드리 헵번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1992년 9월 소말리아를 방문하기 직전부터 오드리 헵번의 건강은 적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 곳이라도 더 방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며 건강 때문에 소말리아 방문이 취소될까 봐 노심초사 했다. 그리고 무리해서 방문한 소말리아에서 아랫배에 강렬한 통증을 느끼고 진통제로 고통을 참으며 일정을 소화해냈다.
스위스 톨로세나에 있는 오드리 헵번의 무덤(photo by Alexandra Spiirk)
소말리아에서 돌아 온 이후에도 구호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각종 인터뷰와 행사에 쫓기며 그녀는 진통제를 달고 지냈다. 마침내 어느 정도 일정이 마무리 된 1992년 11월, 오드리 헵번은 로스엔젤레스의 병원에서 직장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했지만 경과는 좋지 않았다.
그녀에게 앞으로의 시간은 단지 3달만이 허락되었다. 병원 치료가 무의미해진 오드리 헵번은 은퇴 후 오랫동안 살았던 스위스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생의 마지막을 고요하게 보냈다. 그녀가 죽기 직전 맞은 크리스마스에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유언처럼 읽어 주었다.
“...기억하라. 만약 네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을, 네가 더 나이가 들면 두 번째 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은 사랑하는 가족과 소울 메이트 로버트 월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1993년 1월 63세를 일기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사랑했던 스위스의 집이 바라다 보이는 동산에 동료와 전세계인들의 애도 속에서 묻혔다. 오드리 헵번 생전의 정열적이고 진심 어린 구호활동은 이후 유니세프와 민간 구호 단체가 함께 제정한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통해 그 뜻이 이어지게 되었다.
오드리 헵번의 대표적 영화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1953년작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은 앤공주로 분해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영화 속 그녀의 의상과 헤어스타일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이 작품으로 오드리 헵번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오드리 헵번의 또 다른 기념비적 작품이다. 고급 콜걸인 홀리로 분한 오드리 헵번은 이 작품에서 [문리버]를 직접 불러 그 매력을 발산했으며 [문 리버]는 이후 그녀의 주제곡이 되었다. 보석상 [티파니] 앞에서 초라한 아침을 먹으며 화려한 보석을 감상하는 그녀의 모습은 또 하나의 세계적 연인을 탄생시켰다.
버나드쇼의 원작 [피그말리온]을 뮤지컬 영화로 만든 조지 큐커 감독의 1964년작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오드리 헵번은 무식한 거리의 꽃 파는 아가씨에서 우아한 숙녀로 변모하는 돌리틀로 분해 그녀의 매력을 다시 한번 확인 시켰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9년작 [영혼은 그대 곁에 (올웨이즈)]에서 오드리 헵번은 주인공을 돕는 천사 역할로 출연한다. 이 작품은 오드리 헵번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다. 비록 조연이지만 말년의 오드리 헵번의 성숙하고 단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드리 헵번은 이 작품의 출연료 대부분을 유니세프의 기금으로 기부하였다고 한다.
▶1929년일본군 산동 철수
▶1928년이집트의 군인,
정치가 무바라크 출생
▶1919년중국 5.4운동 발발
중국 북경의 13개 대학교 학생 약 3천명이 1919년 5월 4일 천안문 앞에서 집회를 가진후 가두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5.4운동의 시작이었다. 이들의 시위는 1차 대전이 끝난 후 전승국인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이 파리 회의에서 패전국 독일이 갖고 있던 중국 산둥성에 대한 특권을 일본이 계승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대한 항의에서 출발했다.
베이징 거리에서 한 학생이 민중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에 분격한 베이징대학 학생들은 `밖으로 국권을 쟁취하고 안으로 국적을 징벌하자` `21개조 취소` 등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베이징의 군벌 정부가 군경을 파견하여 학생 30여명을 체포하자 학생들은 이에 항의, 총파업을 결의하고 전국적인 항의시위를 벌였다. 파업은 천진, 상해, 남경, 무한으로까지 파급되어 민족 위기를 호소하고 국산품 장려, 일본 상품 불매 등을 외쳤다. 6월 3일 군벌정부는 다시 대규모 탄압을 감행, 학생 약 1,000명이 체포됐다.
▶1918년전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 출생-
대규모 정치 스캔들인 `록히드 사건`의 핵심인물
▶1912년성(性)이 특정 염색체에 의해 결정됨을
최초로 발견한 미국의 생물학자 스티븐스 사망
▶1904년파나마 운하
(길이 81km 폭 30∼60m) 착공
▶1899년 국내최초로 동대문-흥화문 간 전차 개통식
1899년 5월 4일 서울 장안이 온통 술렁였다. 이날 오후 3시 동대문과 흥화문 사이로 전기를 먹는 수레가 기어가기 시작했다. 전차가 첫 선을 보인 것이다. 정부의 고관귀족들이 멋을 한껏 부린 채 시승했고, 갑남을녀들이 홀린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봤다. 철로 주변에는 군인 3백명과 순경 2백50명이 행여 발생할 사고에 대비해 경계를 서는 풍경이 펼쳐졌다.
전차의 등장으로 대중교통에 새로운 혁명이 불었다.
전차는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이 고종에게 건의하면서 설치가 허락됐다. 궁에서 출자액의 반을 부담하기로 하고 첫 구간은 동대문에서 흥화문까지로 정해졌다.
장안 한복판으로 시속 8km로 들어온 전차는 대중교통의 혁명을 몰고 왔다. 갑오경장 이래 소개된 인력거나 자전거는 전차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40인승 두칸으로 연결된 이 전차는 밖을 내다볼 수 있게 유리창을 달았고 내부는 방과 마루로 구성됐다.
전차는 개통 후 보름동안 점검을 마친 뒤 20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오전 8시부터 오후6시까지 `땡땡`거리며 운행한 전차는 어느 골목에서나 승객이 손만 들면 태워주었다. 물론 청량리까지 엽전 닷돈 등 구간에 따라 요금의 차등이 있었고 차장도 있었다. 경향각지에서 전차를 한번 타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어 하루 평균 승차인원이 2천1백70명(당시 서울인구는 약 2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개통 후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5월 26일 첫 사고가 일어났다. 파고다 공원 앞을 지나던 전차가 다섯 살 난 아이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사고를 낸 것이다. 그해 봄 유난히 극심했더 가뭄이 전차 탓이라는 유언비어가 돌고있을 무렵이었다. 흥분한 군중들은 사고 전차의 운정원을 끌어내려 몰매를 가했고 전차는 뒤엎어 불살라버렸다.
반대편에서 오던 전차까지 파괴한 군중들은 동대문의 발전소까지 몰려갔으나 콜브란이 직원들을 무장시키고 발전소 주변 철조망에 600V의 전류를 흘려보내며 방어한 덕에 무사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일본인 운전원과 기관사가 귀국하는 바람에 한동안 전차운행은 중단되었다.
이후 전차 운행이 본격화 되며 노선도 늘어나 그해 말 종로 네거리에서 남대문까지, 다시 이듬해 1월 남대문에서 구 용산(원효로 4가)까지 선로가 연장되었다.
▶ 1825년 영국 생물학자 T.H.헉슬리 출생
▶ 1814년 나폴레옹, 엘바섬으로 유배
▶ 1776년 과학적 교육의 창시자인 독일의 헤르바르트 출생
▶ 1654년 청나라 2대 황제 강희제 출생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솦트리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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