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렸을 적 보름이나 되어 시뻘건 달이 앞산 등성이 어디쯤에 둥실 떠올라 허공 중천에 걸리면 어머니는 야아 야 달이 째지게 걸렸구나 하시고는 했는데, 달이 너무 무거워 하늘의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다는 것인지 혹은 당신의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그립게 걸렸다는 말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이 말을 시로 만들기 위하여 거의 사십여년이나 애를 썼는데 여기까지밖에 못 왔다. 달은 아직 그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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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영청이라는 말
이 상 국
휘영청이라는 말 그립다
어머니가 글을 몰라 어디다 적어놓지는 않았지만
누구 제삿날이나 되어
깨끗하게 소제한 하늘에 걸어놓던
그 휘영청
내가 촌구석이 싫다고 부모 몰래 집 떠날 때
지붕 위에 걸터앉아 짐승처럼 내려다보던
그 달
말 한마디 못해보고 떠나보낸 계집아이 입속처럼
아직도 붉디붉은,
오늘도 먼 길 걸어
이제는 제사도 없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의 타관객지를 지나 떠오르는
저 휘영청
휘영청이라는 말
* 휘영청 : 달빛 따위가 몹시 환하게 밝은 모양을 나타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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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밤
이 상 국
지난밤 신라 여자의 브래지어 속에 공화국의 지폐를 넣어주고 그녀의 탬버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옛 달이 능 너머로 이울고 왕들은 주무시는데 노래를 너무 크게 부른 건 아닌지
나는 왜 나에게 그렇게밖에 못했는지
그때도 도성에 노래하는 여자가 있고 술 마시는 사내들이 있었으리. 자정이 넘어 노래방을 나와 곤하게 누운 황남동* 능길을 걸었다. 노래는 덧없고 밤은 푸르렀다.
* 경주 고분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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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민박
이 상 국
무청을 엮던 주인이 굳이 뭐 하는 사람이냐고 해서
시 만드는 사람이라고 일러주었으나
노는 가을 며칠을 거저 내주지는 않았다
세상의 시인이 그러하듯 오늘도
나 같은 게 있거나 말거나
주인 내외는 근사하게 차려입고
읍내로 잔치 보러 가고 나는
지게처럼 담벼락에 기대어
지나가는 가을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나를 잘아는 건 없었으나
별로 해준 게 없었다
돌아가면 이 길로 지구를 붙잡아매든가
아이를 하나 더 낳았으면 좋겠다
스승은 늘 분노하라 했으나 때로는
혼자서도 놀기 좋은 날이 있어
오늘은 종일 나를 위로하며 지냈다
이윽고 어디선가 시커먼 저녁이 와서
그쪽으로 들오리떼 폭탄처럼 날아간 뒤
나는 라면에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땀을 흘리며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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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도둑
이 상 국
도둑이 뛰어내렸다.
추석 전날 밤 앞집을 털려다가 퉁기자
높다란 담벼락에서 우리 차 지붕으로 뛰어내렸다.
집집이 불을 환하게 켜놓고 이웃들은 골목에 모였다.
- 글쎄 서울 작은 집, 강릉 큰애네랑 거실에서 술 마시며 고스톱을 치는데 거길 어디라고 들어오냔 말야.
앞집 아저씨는 아직 제 정신이 아니다.
- 그러게, 그리고 요즘 현금 가지고 있는 집이 어딨어. 다 카드 쓰지. 거 돌대가리 아냐? 라고 거드는 피아노 교습소집 주인 말끝에 명절내가 난다.
한참 있다가 누군가 이랬다.
- 여북 딱했으면 그랬을라고…….
이웃들은 하나 둘 흩어졌다.
밤이슬 내린 차 지붕에 화석처럼 찍혀있는 도둑의 족적을 바라보던 나는 그때 허름한 추리닝 바람에 낭떠러지 같은 세상에서 뛰어내린 한 사내가 열나흘 달빛 아래 골목길을 죽을 둥 살 둥 달려가는 걸 언뜻 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