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가능한 프로젝트
바빌론 술사들은 정말 황당했습니다. 임금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라도 알면 그 해석은 어떻게든 둘러서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꿈의 내용까지도 알아내라고 하니 잘나가는 요술사, 주술사, 마술사들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이건 마치 시험관이 “내가 꼭 내가 싶은 문제가 있는데 너희들이 그 문제가 뭔지 맞혀봐라. 그러고 나서 그 문제의 정답도 말해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말 기가 찰 일입니다.
그러자 점성가들이 아람 말로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를 빕니다. 이 종들에게 꿈을 말씀하여 주시면 저희가 그 뜻을 밝혀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점성가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의 뜻은 확고하다. 너희가 내 꿈과 그 뜻을 나에게 설명해 주지 못하면, 너희 사지는 찢겨 나가고 너희 집들은 쓰레기더미가 될 것이다.”(2,5)
그런데 이때 점성가들은, 임금이 꿈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듯합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임금을 겪어 본 사람들입니다. 당장 상황을 모면하려고 아무 꿈이나 말한다면 그 자리에서 살아남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임금 앞에서 오답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오히려 이들의 가엾은 몸부림이 임금의 심기를 더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엉뚱한 말이 임금의 명령에 대꾸하는 듯 여겨졌습니다.
임금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놓고도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그들과 그들의 집안 전체를 몰살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당시 절대 권력자였던 임금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임금은 사지를 찢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당시 바빌론에서 흔히 시행하던 사형법으로, 문자 그대로 사지를 잘라 처형하는 것입니다. 사태가 너무나 심각해졌습니다. 특히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무자비한 정복자로 명성이 자자해서 자신이 한 번 입으로 뱉은 말은 반드시 시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임금의 잔혹함을 알고 있는 바빌론 술사들은 사시나무 떨 듯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꿈과 그 뜻을 밝혀 주면, 내가 선물과 상을 내리고 큰 명예를 누리게 해 주겠다. 그러니 그 꿈과 그 뜻을 밝혀 보아라.”(2,6)
임금은 협박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꿈도 맞추고 해석도 해내는 자에게 엄청난 상급을 약속했습니다. 이 불가능한 프로젝트를 하느님의 사람인 다니엘이 해내게 되고, 이로 인해 다니엘은 임금이 약속한 ‘선물과 상과 명예’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네부카드네자르이 꿈을 통해서 다니엘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길 원하셨습니다. 말도 안 되는 요구의 배후에는 하느님의 엄청난 주권적 섭리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이 유다 변방의 포로 출신이라는 정치적 한계를 극복하고 순식간에 세계 제국 바빌론의 최고위직에 오를 수 있던 결정적 동기가 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위기가 있지 않고서는 포로 출신의 다니엘이 바빌론 궁중의 그 무서운 텃세와 인종차별을 한순간에 잠재워버리고, 하루아침에 대제국의 고위공직에 오르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에게 위기는 변장하고 오는 축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절대 안 된다고 할 때가 하느님의 사람이 비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점성가들이 다시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이 종들에게 꿈을 말씀해 주시면, 그 뜻을 밝혀 드리겠습니다.”(2,7)
점성가들은 임금에게 꿈의 내용을 말해줘야 자기들이 해석할 수 있다고 필사적으로 다시 간청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임금의 분노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대답하였다. “너희가 나의 뜻이 확고함을 보고서 시간을 벌려고 한다는 것을 이제 내가 분명히 알았다. 너희가 꿈을 설명해 주지 못하면 너희가 받을 판결은 하나밖에 없다. 너희는 사정이 바뀔 때까지 내 앞에서 거짓되고 그릇된 말을 하기로 모의하였다. 그 꿈을 나에게 말해 보아라. 그래야 너희가 그 뜻을 밝힐 수 있는지 내가 알 수 있을 것이다.”(2,8-9)
임금은 그들이 시간을 끌어서 위험한 순간을 적당히 넘어가려 하거나 다른곳으로 도망가려는 술책이라며 무섭게 질책했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임금은 그동안 총애하던 술사들과 점성가들을 의심의 눈으로 추궁하기 시작합니다. 이때까지 그들이 거짓됙고 그릇된 말을 하기로 모의하여 적당히 그 자리를 지켜온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간의 임금과 술사들과 점성가들의 관계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술사들은 임금의 최측근 자문위원이라는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선왕 시절부터 호의호식하며 온갖 권세를 다 누려온 사람들이엇습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임금은 백성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그들을 곁에 두었습니다. 바빌론 신들의 계시를 전하는 그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민심이 술렁이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북극성 주위의 별이 빛나는 것을 보니 나라가 크게 부강해질 조짐입니다.”라는 한마디면 임금의 지지율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대 임금들은 그들에게 많은 재물과 권력을 실어 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동서양의 모든 왕조의 역사를 보면 정치와 종교는 서로 공생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사정이 달랐습니다. 그 꿈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는 네부카드네지르 임금의 온 신경을 짓누를 만큼 난해하고 엄청났던 것입니다. 임금은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영적인 늪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에게는 아부하거나 백성들이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아첨의 말이 아닌 100퍼센트 진실하며 정곡을 찌르는 영적 실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영적인 실력을 보여주어야 하는 중요한 순간에 그동안 왕실이 준 엄청난 혜택을 받아온 술사들과 점성가들의 밑천이 다 드러나 버렸습니다.
이때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나이로 혈기라 왕성했으며 집권 초기가 모든 것이 불안해서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터였습니다. 결국 그간 쌓인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그러나 화가 난 건 임금뿐이 아니었습니다. 임금이 무섭게 몰아붙이자 점성가들도 아주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점성가들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그것들을 밝힐 수 있는 이는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실 아무리 위대하고 강력한 임금이라 할지라도, 이와 같은 일을 어떠한 요술사나 주술사나 점성가에게 물은 적이 없습니다.”(2,10)
결국 자기들은 누구도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무능력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임금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무서운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들이 자신들의 목숨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다는 것을 직감하고, 죽을 각오로 따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바빌론 임금과 바빌론 신의 계시를 전하는 술사들은 악어와 악어새처럼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공생해 왔습니다. 서로가 다 맘에 들지는 않아도 필요했기 때문에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넘지 않으며 서로의 자존심과 체면을 지켜주면서 아슬아슬하게 함께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임금도 술사들을 봐주었지만, 그것은 술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임금이 단점투성일지언정 신들이 임금을 세웠다는 계시를 계속 전함으로써 백성들 앞에서 임금의 지위를 세워주었습니다.
술사들에게는 자신들이 민심을 안정시켜주지 않으면 나라가 유지될 수 없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젊은 임금이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군신(君臣) 사이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습니다. 오랜 세월 충성스럽게 왕실을 보좌해 온 그들을 아무 쓸모없는 존재처럼 모욕한 것입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목숨이 아까워서 임금의 눈치를 살폈지만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을 무용지물(無用之物)이라고 여기는 것은 바빌론 신들을 모독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임금이라도 험악해진 민심을 다스리기 어려울 터였습니다. 궁지에 빠진 쥐가 고양이를 물 듯, 자신들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한 그들은 서슬 퍼런 임금에게 날카롭게 대들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매우 흥분한 나머지 아주 재미있는 고백을 합니다.
“임금님께서 물으신 것은 너무 어려워, 인간과 멀리 떨어져 사는 신들 말고는 그것을 임금님께서 밝혀 드릴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2,11)
그들은 자신들이 임금의 꿈을 해석할 수 없는 이유를 솔직히 말합니다. ‘인간과 멀리 떨어져 사는 신들 말고는’, 다시 말해 바빌론 신들보다 훨씬 더 위대한 신들 말고는 그 꿈을 해석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바빌론 신들이 그만큼의 능력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바빌론 제국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술사들과 점성가들이 임금의 꿈을 전혀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오직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절대 주권자이신 하느님만이 미래의 역사에 대한 계시를 주실 수 있으며, 임금들을 다스리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한 어떤 존재도 그 계시를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진짜 영적인 위기 앞에서 네부카드네자르는 바빌론 왕실이 섬겼던 우상 종교가 결국 무력하기 짝이 없는 정치적인 쇼(show)에 불과했음을 확인한 셈입니다. 이것은 훗날 그가 다니엘의 하느님만이 참 하느님이심을 고백하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