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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성탄 낮 미사
요한 1,1-18
자기처럼 될 것을 믿지 않으면 구하러 내려가지 않는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께서 내려오신 이유는 우리를 올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어둠에 속한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2-13)
그렇다면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이들이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당신처럼 높여줄 분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루마니아의 14세 소년 크리스티안 마리안 베키아노(Christian Marian Vecchiano)의 이 이야기는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예를 보여줍니다.
아주 좁은 우물 파이프에 세 살 아기가 버려진 우물에 빠졌습니다.
구조대가 도착하였지만, 아기를 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우물 입구가 30cm로 어른은 들어가 아기를 데리고 올라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아기는 줄을 붙잡고 올라올 수도 없었습니다. 깊이가 15m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파이프를 깨면 아기 생명이 위험했습니다. 굴착기로 11시간 동안 팠지만, 15m 깊이까지 주위를 파며 내려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경찰들이 모여있는 이곳을 구경하러 온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이 다리를 묶고 거꾸로 내려가 아기를 잡고 올라오겠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어른들은 말렸지만, 그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그 어둡고 좁은 통로로 내려가 아기를 데리고 올라옵니다.
부모는 기뻤고 크리스티안도 행복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마을의 영웅이자 루마니아의 영웅이 되었고 현재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잘살고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크리스티안은 이 일로 국가의 보조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내려오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동등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8).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땅의 어둠으로 사람이 되어 내려오셨다면 분명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인간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면, 인간도 당신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수 있음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1-12)
그런데 누가 하느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아들일까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만큼 자신도
올라갈 수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이 되고 하늘에 살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이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둠에만 갇혀있어야 하는
존재라면 하느님께서 왜 인간을 위해 이 어둠 속까지 내려와야 하셨을까요?
가톨릭 교리서(460항)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셨으니, 이는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이야기를 많이 봅니다.
또 난간에 걸린 아기를 목숨을 걸고 구한 영웅들도 많습니다.
이수연 씨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남의 나라 땅에서 선로에 쓰러진 취객을 도우려다 숨지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믿었던 것은 하나뿐입니다.
‘나도 살 수 있고, 저들도 나처럼 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구함으로써 자신이 사는 곳에 살 자격을 얻기도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2018년에 한 불법 체류자가 5층 높이 난간에 매달려 있는 아기를 구하기 위해
벽을 타고 올라가 아기를 구했습니다.
대통령은 그를 프랑스에 살 자격이 있다고 하여
프랑스 시민으로 삼고 직장도 구해주었습니다. 우리도 낳을 수 있어야 살 자격도 얻습니다.
6살 워커라는 아이는 4살 자기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얼굴에 90바늘을 꿰매야 하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셰퍼드와 싸웠습니다.
이는 자신도 회복될 수 있고 여동생도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가족의 일원이 될 자격을 스스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동의하여 예수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이것을 ‘착한 뜻’이라고 합니다.
아기가 무엇보다 엄마의 손을 잡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아는 것처럼, 우리도 창조자 하느님 구원의 손을 잡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아는 사람만이 하느님 자녀가 되어 영원히 살게 됩니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착한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 12. 25. 성탄밤 미사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늘 새롭게 탄생하십니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밤,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저희 수도자들도 이토록 외진 시골에서, 저희끼리만 지내면, 세상 울적한 분위기일 텐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 가족 같은 동네 주민들, 먼길 마다하지 않고 와주신 피정객들과 함께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어렵고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또다시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돌아왔습니다.
이번 성탄 아기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극심한 고통과 깊은 상처 그 사이로
분명히 탄생하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며, 우리를 더 나은 길로 인도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만사형통할 때도 함께 하시지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 질 때도,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비참하다 해도, 오늘 우리가 아무리 큰 죄 속에서 산다 할지라도, 이런 우리를 어여삐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새롭게 탄생하십니다.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오늘 이 대축제를 만끽해야 하겠습니다.
한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은 너무나 소중하고 엄숙한 순간이어서, 그에 걸맞는 예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유능한 의료진이나, 그도 아니라면 탈 없는 출산에 도움을 줄 분들의
보살핌 아래 태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요, 인류의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의 탄생 여건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출산에 도움이 될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런 경험이 없는 요셉 성인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소와 말들이 이게 뭐지 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지극일 호의적이지 않은 출산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너무나 독특하고 이해되지 않는 육화강생의 방식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대체 무엇일까 고민해봅니다.
제가 자주 타고 다니는 모닝 승용차가 27만 킬로를 육박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달리고 있는데, 꼭 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저도 수도 생활 40년째로 폐차장 가기 직전 중고차인데도,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아직 잘 달리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참으로 우울하고 서글프기 마련입니다.
여기저기 시름시름 아프고, 고장 나고, 매일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우리네 삶 한가운데도 탄생하시고 길이 머물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연세 들었다고 우울해 할일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늘 새롭게 탄생하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지금 큰 고통 속에 계신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에 허덕이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어디 가서 하소연 할 곳 없어 답답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여러분들의 힘겨운 일상 그 한 가운데 매일 탄생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여러분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과 쓰라린 상처 그 사이에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그러니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고통이 다가올 때면 즉시 탄생하신 구세주의 이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탄생하신 분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란 의미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이름 임마누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주님이란 의미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성탄 대축일 낮미사 강론>
(2024. 12. 25. 수)(요한 1,1-18)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5.9-14).”
1)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이 믿음이 없는 종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이거나 이단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복음서 저자의 신앙고백으로 시작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으로 마무리되는 책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18절에서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라고 말하는데, 이 말에서도 역시 가장 중요한 말은 ‘하느님이신 그분’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요한 14,8-9)”
2) 혹시라도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냥 하느님을 잘 믿으면 되는 것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우리 구원에 직결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을 하느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날입니다.
옛날의 위대한 예언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그런데 하느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탄절은 바로 지금 이곳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오신 날이고, 우리가 성탄절을 경축하는 것은 그 하느님께서 ‘나에게 오심’을 경축하는 것입니다.>
3)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말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라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4-15.17).”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굳이 사람이 되지 않으셔도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로 내려오신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내려가 주는 것.”이고, 또 “사랑이란, 같아지는 것”입니다.>
4) 만일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내려오신 것으로 끝났다면, 그것은 그냥 허무하게 끝나버린 일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려오신 다음에는 다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를 데리고 올라가기 위해서...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