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느님(마르 10,45)
* 내 마음의 마구간
예수님은 온 인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사람이 되셨고, 마구간이라는 낮고 천한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에 이 말씀에서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얻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똑똑한 사람, 상류 계층, 지성인, 성공한 사람들만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계 인류를 볼 때 미국이나 일본, 유럽의 여러 나라, 이런 소위 선진 국가로 분류할 수 있는 나라의 국민들은 전체 인류의 19%밖에 안 됩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국이나 인도, 아프리카 같은 나라에서 배고프고 절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초라한 이들을 위해, 아니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를 위해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저는 이러한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혹시 사업이나 인생에서 실패하셨습니까? 육신이 병들었습니까? 인간 관계에서 좌절을 겪었습니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셨습니까? 모든 것이 싫어져 자살하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런 당신을 위해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맞아들이십시오. 빨리 그분의 품으로 오십시오. 주님이 우리들을 편히 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냄새나고 더러운 우리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 위해 우리의 수치를 가려 주시고 우리의 저주를 막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실패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제겐 이 사실이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모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이란 벅찬 감동입니다. 사랑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 그 사랑의 감격 때문에 밥을 먹을 수가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식사를 더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던 중에 벌떡 일어나서 사랑하는 제자들 발 밑에 꿇어 앉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주님이 없는 세상에 제자들이 걸어 가야 할 고난의 여정을 생각하셨기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예수님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것과 똑같이 우리들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에는 끝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피 흘리는 사랑, 자기 살을 찢어주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또한 사랑이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입니다. 희생이 따르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존심에 상처받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고 어떻게 사랑을 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침묵하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고, 주장하고 강요하는 것이 많습니다. 만일 사랑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으면 섭섭해 하고 화를 내며 마침내 갈라서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사랑입니다. 즉 우리의 사랑은 타인을 지배해야 만족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랑은 져 주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침묵하고 용서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왜 세상에 오셨을까요?” 마태오복음에서는 죄인을 위해 오셨다고 했고, 마르코복음에서는 섬기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루카복음 19장 10절에서는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잊혀진 사람, 잃은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잃은 이들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성경엔 잃은 이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물었던 돈 많은 부자 청년, 종교 특권층이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그렇습니다. 특히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독차지했던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하느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세리와 병든 이들, 자포자기한 사람들, 짐승만도 못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참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그들을 찾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십이간지’로 분류되는 ‘띠’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근거로 운명이나 성격을 알아보기도 하고, 결혼할 때 궁합도 봅니다. 누가 저에게 당신은 무슨 띠냐고 물으면, 저는 ‘사람 띠’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왜 사람을 짐승에 비유했을까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다 짐승처럼 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지 못할 때, 인간은 짐승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어진, 사랑을 받기 위하여 태어난 존재입니다. 인간 안에는 하느님의 DNA가 있기에 우리는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짐승이 기도하는 것을 봤습니까? 우리가 기도를 안 한다면 점점 짐승을 닮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기도하고 찬양하며 사랑과 생명의 언어로 말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