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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계에 착심하라
잠 23:12-19
12 훈계에 착심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13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14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15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16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17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18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19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잠 23:12-19 / 너를 꾸짖는 말 한다고 해서 듣기 싫어하지 말고 귀담아 들어라. 깨달음에 다다르는 길을 일러주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3) 매질을 한다고 해서 아이가 죽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매로 때려서 키워야 한다. 14) 그렇게 키우는 것이 곧 아이를 살리는 길이란 사실을 명심하여라. 15) 얘야, 네가 슬기롭다면 어찌 이 아비의 마음이 기쁘지 않겠느냐? 16) 네가 올곧은 말만 한다면 어찌 이 아비가 흐뭇하지 않겠느냐? 17) 못된 짓만 일삼는 죄인들이 떵떵거리며 잘 산다고 해서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에는 마음 쓰지도 말고 오직 여호와 무서운 줄 알아 날마다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야 한다. 18) 이것 보아라. 앞날이 있지 않으냐? 희망이 가득찬 미래 말이다. 네가 그토록 바라던 일이 어찌 허사로 돌아가겠느냐? 어찌 물거품처럼 사라지겠느냐? 19) 얘야,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래야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네 마음을 바로 가져 무슨 일이든 신중하게 생각하고 해야 한다.
지혜자는 “훈계에 착심하며”(12) 라고 말합니다. 11절 말씀을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지혜의 가르침에 집중하라는 의미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아이를 훈계하라(12-14) 자녀를 지혜의 말씀으로 훈계하라는 것은 잠언의 주제인 만큼 거듭 반복되는데 훈계에는 교정을 목적으로 하는 징계가 포함됩니다. 12절에는 채찍으로 징계를 묘사하고 있는데, 자녀의 고집이나 불순종에 대해서는 징계가 효과적인 방법이기에 자녀를 훈계할 때 징계를 적절히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징계가 포함된 훈계는 자녀를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수단입니다. 온전한 징계는 감정에 근거하지 않고, 비인격적이지 않습니다. 징계는 자녀를 향한 진실된 사랑이 있는 선생과 부모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훈육의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집스럽게 불순종을 거듭할 때마다 하나님은 징계하셨고,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따라서 징계가 필요하다고 판단 될 때는 주저하지 말고 징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징계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분노로 표현되지 않도록 스스로 살피고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15-19) 자녀의 출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혜롭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부모를 가장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모를 즐겁게 하는 것을 우리의 문화에서는 ‘효’라고 합니다. 부모로서 자녀의 성공과 출세보다는 자녀의 정직과 지혜를 위해서 기도하며 양육해야 부모를 즐겁게 하는 ‘효’를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도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17).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죄로 인한 형통에는 장래가 없고, 소망이 없습니다.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때 지혜자의 삶에 장래가 있고,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장래와 소망은 현실이 아닙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적용: 부모로써 자녀에게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녀에게 어떤 훈계와 징계를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비둘기는 어미가 나무 가지에 앉으면 반드시 그 새끼는 삼간 아래에 앉는다고 합니다. 절대로 어미보다 높은 자리에 앉거나 같은 자리에 앉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포지효’(反哺之孝 까마귀 새끼가 자란 후에 먹이를 물어다가 제 어미를 먹인다.) 는 옛말이 있습니다. 까마귀도 늙은 어미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어미를 봉양하는데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동분서주해야 하고 자식 교육을 위해서 허리가 휩니다. 우리 사회는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돈 때문에 부모도 자식도 형제도 보이지 않는 사회풍조가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고 인간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부모들아
잠 23:12-14 / 이성희 목사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에게 어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버이 주일에 어버이의 은혜를 다시 새기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모든 부모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연로하신 모든 부모님들이 여생이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님의 모든 수고는 조금도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먼저 들려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 링컨의 이야기입니다. 링컨은 구두 만드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상류사회 출신들은 당황스러워 했고 은근히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통령이 구두 수선공 아들이라는 것이 부끄럽고 자랑스럽지 않았습니다. 링컨이 상원에서 대통령 취임연설을 하던 날이었습니다. 그가 단상에 서자 한 나이 많은 귀족 출신의 의원이 링컨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습니다. “미스터 링컨, 어쩌다 당신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예전에 당신이 당신의 아버지와 함께 우리 식구들의 구두를 깁기 위해 우리 집을 드나들곤 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기 바라오. 또한 여기에는 당신의 아버지가 만든 구두를 신고 있는 상원의원들이 있소. 그러니 당신의 출신을 절대 잊지 마시오.” 이 때 링컨은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내가 상원에서 첫 연설을 하기 직전에 나에게 아버지를 생각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매우 멋진 창조적인 예술가였습니다. 내 아버지보다 더 아름다운 구두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정치를 하든, 내 아버지가 위대한 예술가였듯이 그런 위대한 대통령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나는 결코 나의 아버지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들 귀족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일 나의 아버지가 만들어 드린 구두가 여러분의 발에 잘 맞지 않거든, 나도 아버지에게서 배운 기술이 조금 있으니 나에게 말씀하십시오. 나는 훌륭한 제화공은 아니지만, 최소한 여러분의 구두는 수선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연락만 주십시오. 그러면 언제라도 여러분의 집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이 때 상원의원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졌습니다.
둘째는 영국의 위대한 수상 윈스턴 처칠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차대전 후 영국 연립내각의 수상이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냄으로써 국민적인 영웅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영국에서 그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런던의 한 신문이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처칠을 가르쳤던 교사, 교수들을 취재하여 ‘위인을 만든 스승들’이란 제목으로 보도해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기사를 본 처칠은 신문사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귀 신문의 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 한 분이 빠졌습니다. 그분은 나의 어머니입니다.”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가장 존경하는 대상입니다. 어머니는 가장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우리의 머리에 항상 아버지, 어머니가 자랑스런 분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목사님은 지난 달, 한 달 사이에 아버지와 장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상가에 문상을 갔을 때에 그 목사님은 저의 인사를 받으시고 하시는 첫마디가 “이제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없어” 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는 한없는 슬픔과 아쉬움이 녹아 있었습니다. 아직도 아버지라고,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효도하십시오. ‘부모효도 10계’라는 걸 보았습니다. 그 내용에는 “가능한 한 많은 대화를 하라”, “어른들이 할 일감을 드려라”, “취미를 가지게 해 드려라”, “가급적 많은 여행 기회를 드려라”, “어른을 이해하려고 애써라”, “가족 외출 시 동행하라”, “작은 병이라도 병원에 모시고 가라”, “일정한 용돈을 드려라” 등이었습니다. 효도는 머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효도 10계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녀라면 부모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적어도 자녀가 부모에게 최소한의 해야 일을 효도라고 합니다. 부모에게 효를 다 해야 하지만 부모에게도 하나님의 명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명을 부모님들도 잘 듣고 좋은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모든 아이를 자녀처럼 여기는 마음을 요구합니다.
성경에는 “너희 자녀를”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꼭 내가 나은 자녀뿐만 아니라 모든 자녀들을 의미합니다. 모든 자녀들을 내 자녀같이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옛 말에 “한 다리가 천리다”는 말이 있습니다. “똥은 촌수 가린다”는 말도 있습니다. 특히 인척 관계를 중시하는 혈연사회인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남의 자녀를 나의 자녀처럼 여기는 마음이란 참 어려운 마음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친부모뿐만 아니라 남의 부모와 상전과 윗사람들 전체를 의미합니다. 모든 윗사람에 대한 공경을 요구하는 계명이 십계명 5계명입니다. 디모데전서 5:1에는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라고 권합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라는 말은 연세 드신 어른에게 잘못이 있어 꾸짖을 일이 있어도 꾸짖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아가서 연세 드신 어른들께는 부모에게 하듯 하라고 합니다. 요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사회가 옛날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아버지 때와는 다르다고 합니다. 어머니 때는 옛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사는 원리는 변치 않습니다. 우리는 사회가 변했다는 핑계로 인간의 기본 원리마저 저버리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 성경은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라고 합니다. 모든 젊은이가 형제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모든 어린이가 내 자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실제로 보세요. 모든 자녀가 다 잘 돼야 내 자녀가 잘 됩니다. 모든 주위의 자녀들이 전부 못되었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러면 자연히 내 자녀도 못된 물이 든다는 말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나무라거나 책망하면 봉변 당하기 일수입니다. 그래도 옳은 일은 일러주어야 합니다.
작년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남녀 고교생 10여명이 학교에서 스승을 폭행했습니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늦게 들어온 학생을 나무라던 선생님을 집단 폭행한 것입니다. 또 어떤 학교에서는 61세 되신 교사에게 욕하는 학생을 젊은 선생이 한차례 때렸다고 이 젊은 교사를 집단 구타하였습니다. 하필 이날은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이 학교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스승의 날에 학생들이 주는 꽃다발을 거절하는 등 스승의 날 행사를 취소하였습니다. 이런 비인륜적 사건들이 우리 주변의 요즘 살아가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 최근에는 버스 기사 폭행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버스 기사를 얼마나 때렸던지 기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밤에 술에 취한 승객이 자리에 앉지 않고 왔다갔다하니 위험하다고 자리에 앉으라고 기사가 말한다고 기사에게 시비를 걸고 발로 버스의 앞 유리를 차서 깨트렸습니다. 한밤의 버스 기사들은 이런 위협을 늘 느끼면서 운전을 한다고 합니다. 자기 형님 같은 운전기사를 폭행하고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함부로 내뱉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기본 원리를 지키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시는 그렇지 않게 중형으로 다스렸으면 좋겠습니다. 젊은이를 훈계하고, 나무라고, 나쁜 것이 있으면 정말 내 자녀같이 가르치고, 젊은이는 가르침 받을 줄 아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도무지 이렇게 살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아이를 키우는데는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만 자녀를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사회적 존재로 자랍니다. 온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자녀처럼 키워야 합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교회가 나서야 합니다. 어른들이 나서서 신앙적으로 모범이 되고 인격적으로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아이들을 내 아이같이 소중히 여기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소예배실 앞의 남자 화장실에 들어서면 참 마음이 뚫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지난겨울에 방충망이 뚫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두 군데에 구멍을 냈습니다. 아마 막대기로 찌른 것 같습니다. 몇 주일 후에는 구멍이 약간 커졌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에는 아예 구멍에 손을 넣고 당겼는지 니은 자로 찢어졌어요. 그 방충망을 찢어서 속이 시원할 게 뭐가 있습니까? 어제는 보니 그 화장실에 모기가 한 마리 들어와 있어요. 찢겨진 방충망을 통하여 찢겨진 우리 아이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요. 또 아이들이 화장지에 물을 적셔서 벽과 유리창에 던져 종이 뭉치가 붙어 있게 만듭니다. 그걸 보고 예쁘게 느낄까요? 예쁘지도 않는 일이 재미가 있다면 이것이 아이들의 비뚤어진 마음입니다. 깨끗한 것이 예뻐야 하고, 질서 있는 것이 아름다워야 하고, 잘 정돈된 것이 기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질서의식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가르치기는 해야 하겠는데 제가 화장실에 가서 한번도 현행범을 보지 못했어요. 보면 꼭 훈계할 것입니다. 잠언 23:13-14에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합니다. 우리 자녀를 훈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 훈계가 아이들을 구원합니다.
둘째, 부모는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비들아 너의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라고 합니다. 격노란 말은 난폭하고 노여운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에베소서에 있는 말과 흡사합니다. 6:4에는 “또 아비들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자녀에게 난폭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자녀에게 노여운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에게 노여움을 주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비교의식과 지나친 엄격함과 편애 때문에 자녀들이 노여움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제일 노여워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누구 집 아이는 잘 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누구 반만 해라”, “너는 누굴 닮아 그 모양이냐?”는 말이 아이들에게 가장 노여움을 일으키게 합니다. 이 말을 하면 아이들은 속으로 “누굴 닮아 엄마 닮았지!” 라고 할 것입니다. 아이들을 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말고, 절대적인 관계에서 원리적으로 훈계하세요. 비교해서 얘기하면 아무리 좋은 얘기라도 안 들리는 법입니다. 편애도 그렇습니다. 편애는 아빠 엄마가 편갈라서 아이 사랑하기입니다. 이것도 자녀들을 노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이삭의 가정을 보세요.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에서편, 어머니는 야곱편이었습니다. 마치 두 아들이 부모의 대리전을 치르는 양상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복을 주려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눈치 작전을 폅니다. 아들들이 작전의 선봉에서 행동대원이 됩니다. 이런 부모의 편애는 결국 두 아들이 서로 시기하고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게 가정을 어렵게 하는 이유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 부모의 짝진 사랑 때문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이 둘을 하나씩 편갈라 곤란하게 만들지 마세요. 편갈라 대리전을 치르게 하지 말고 화목하게 하십시오. 대리전을 치르는 아이들에게는 하나같이 노여움이 있습니다. 이 노여움 때문에 대리전은 치열하게 변해 가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난 요셉을 편애하였습니다. 그에게만 유별난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요셉의 무례한 말과 행동도 응석으로 받아주었습니다. 이것이 형들에게 노여움이 된 것입니다. 형들이 양을 치고 있을 때에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갔습니다. 그 때 형들의 분노는 폭발합니다. 꿈쟁이 요셉이 그들에게 왔을 때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 했습니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구덩이에 넣어 혼자 죽게 하려고 하였고 마침 지나가던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는 아들들의 노여움을 일으켰고 결국 야곱 자신이 아들이 죽은 줄 알고 비통함 가운데 살아야 했습니다. 아들에 대한 편애의 대가는 야곱 자신이 받아야 했습니다. 서양 격언에 “편애는 어리석은 자를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부모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입니다. 자녀가 좋은 성품 가지지를 원합니까? 보모가 사이좋게 사십시오. 자녀가 공부 잘 하기를 원하십니까? 부모가 사이좋게 사십시오. 자녀가 좋은 가정 이루기를 원합니까? 부모가 사이좋게 사십시오. 부부 사이에 모든 가정의 해법이 숨어 있습니다.
셋째, 부모는 자녀가 낙심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성경은 “낙심할까 함이라”고 합니다. 자녀를 격노케 하면 자녀가 낙심하게 됩니다. 낙심이란 “무기력하여 정신적 성장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격노하게 되면 무기력하고 정신적 성장을 못하게 낙심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우울증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린 자녀의 우울증도 심각합니다. 우울증이란 “우울병증세가 있어 생기가 없고 모든 생활이 늘 우울한 병증”이라고 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면 결과적으로 자녀가 무기력하고 우울증 같은 정신적 장애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는 하나님이 지으신 존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가 낙심하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무기력하게 사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것을 슬퍼하십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무서워하고 싸우지 않고 요단강 건너지 않는 갓자손과 르우벤자손을 책망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민 32:7). 하나님의 백성을 낙심케 하는 것은 책망 받을 일입니다. 하나님은 낙심케 하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그 조상들은 어떠했습니까?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12 정탐꾼을 뽑아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 10사람은 돌아와서 백성들을 낙심하게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을 책망합니다. “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민 32:9). 이스라엘 자손들을 낙심하게 한 죄가 얼마나 큰지 아시지요?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낙심케 한 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만큼 중한 죄입니다. 낙심케 하는 것은 일의 의욕을 상실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심하게 하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비하하여 자신감을 상실하게 하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메뚜기 같다고 비하합니다. 사람이 낙심하면 자신이 작게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존감과 일의 자신감을 상실하고 살아갑니다.
다윗을 보세요. 작은 아이였지만 위풍당당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감을 길러주었습니다. “어떻게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사람을 조롱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골리앗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물맷돌 한 방에 끝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에게 낙심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사무엘상서 24장과 25장에는 나발이란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그는 완고하고 성품이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나발에게 전쟁 비용을 부담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비용을 줄 마음이 있었지만 나발은 총명하지 못하여 다윗의 청을 무시하였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나발은 어느 날 포도주에 취하여 집에 들어왔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음 날 아침 나발이 깨기를 기다렸다가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나발에게 하였습니다. 그 때 일을 사무엘상서 25:37-38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낙담은 사람을 죽게 합니다. 사람을 낙심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낙심하게 하는 것은 자녀를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절대 자녀를 낙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오래 전 미국의 한 잡지에 실린 설문조사 결과가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여섯 살 된 아이 100명에게 “텔레비전과 아버지 중 어느 쪽이 집에 있는 것이 더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92명이 텔레비전을 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거실에 텔레비전이 있고, 부엌에 엄마가 있고, 뒤뜰에 강아지가 있는데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죠?”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누구의 잘못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가실 때에 뒤를 따라오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에 대하여는 우리가 울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 쓰고 죽자(Die Broke)’의 저자 스티브 폴랜은 “다 쓰고 죽자, 인생을 즐겨라, 자녀에게 돈 대신 즐거운 추억을 남겨줘라”고 합니다. 자녀에게 돈 보다 더 중요한 유산이 있음을 유념하십시오.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남겨주십시오. 아이가 평생에 잊지 못할, 이것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그 것을 전수하십시오. 이것이 지혜로운 부모의 현명한 유산입니다. 존 웨슬레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물어보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네게 준 시간을 어떻게 썼느냐?”, “내가 네게 준 재물을 어떻게 사용했느냐?” 그리고 “내가 네게 맡겨준 자녀를 어떻게 양육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어보실 때에 자녀를 잘 양육하여 이렇게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사랑과 훈계의 채찍
잠 23:12-14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의 요점을 우리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자녀의 훈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서는 "훈계에 착심하라" 하며, 13절에서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둘째는, 자녀의 훈계를 위해 필요하다면 매를 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3절 하반절은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함으로써 자녀들에 대한 과보호로 인하여 교육을 포기하게 되는 잘못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자녀를 훈계하는 궁극적 목적은 그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14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하지 않습니까? 구약성경에서 "스올"이란 죽음의 장소, 무덤, 죽음의 상태, 형벌과 멸망의 장소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오늘은 우리 나라에서 어린이날로 정해진 날이기도 하고, 교회에서는 어린이주일로 지키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어린이날은 일년에 하루 어린이들에게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놀게도 해주고 갖고 싶은 것 다 사주는 날로 잘못 인식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억눌리지 않고 자라게 하는 것은 어린이날 하루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고, 어린이를 가진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한 부모로서의 교육적 책임감을 새롭게 하며, 국가는 나라의 어린이들이 미래사회의 건전한 일군들이 되도록 육성할 국가적 책임감을 새롭게 하는 데에 어린이날의 참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에게 천국의 진리를 가르치시고 어른들의 교만과 강퍅함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어린아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좋은 특징들을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어린아이들은 완전무결한 존재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의 상태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될 것임을 자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고 말하는가 하면,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고 하기도 하고,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4:14)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린이들이란 때묻지 않은 많은 좋은 면에도 불구하고 아직 성장해야 하며 양육 받아야 할 존재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했습니다. 어린이들은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할 대상이며 그 책임은 부모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시127:3에 따르면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입니다. 모든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의 부모들에게 맡기신 생명들입니다. 따라서 부모들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할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을 우리가 어떻게 양육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자녀교육에 관한 유익한 말씀들을 많이 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사랑의 매" 또는 "훈계의 채찍"에 관한 언급들은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13:24),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29:15),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29:17)는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집니다.
우리 나라 부모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성과 자녀교육을 위한 희생적 헌신은 아마 지구상에서는 비교할 상대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극성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져왔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서 오늘날 이 땅의 교육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날 이 나라의 교육은 죽었다고 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반작용이 조기유학이니 교육이민이니 하는 것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계 제일의 교육적 열성을 가졌다면 세계 제일의 교육을 만들어놓았어야지 왜 교육의 죽음을 초래했습니까?
한편으로는 역대정권들이 교육자들이 순수하고 소신있게 교육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애쓰기는커녕 교육을 정권연장의 도구로 이용하려고만 했고 참된 교육발전에 대한 진지한 관심도 일관성 있는 비젼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들 즉 자녀를 가진 부모들의 이기심에도 그 원인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내 자식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욕심이 나라교육을 병들게 하고 결국은 자기 자식까지도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다른 아이들 돌아다니며 때리고 못살게 할 때 선생님이 야단치시면 쫓아가서 우리 귀한 자식 기죽인다고 선생님 뺨을 때리거나 여선생님 머리채를 휘어잡는 몰상식하기 이를 데 없는 그 극성이 우리의 학교와 교육을 황폐하게 했고 세계에서 제일 버릇없는 아이들을 만든 것입니다. 제 새끼밖에 모르는 그 심보가 제 새끼도 망치고 자기가 사는 사회도 살지 못할 사회로 만든 것입니다. 이제는 학교에 찾아가서 선생님들에게 "내 자식에게 손대지 말라"고 호통칠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 좀 때려서라도 학교교육을 바로 세워달라고 부탁해야 할 때입니다.
학교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아이들을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정말 자녀를 사랑한다면 필요할 때 훈계의 채찍을 들어야 합니다. 앞서 읽은 잠언 말씀 가운데 13:24에서는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했습니다. 자녀사랑과 훈계의 채찍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은 자녀들이 부모의 훈계의 채찍을 맞아도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맞아 죽기는커녕 오히려 그래야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본문 14절에서는 말합니다.
끝으로 오늘 우리는 이 본문 14절의 말씀에 특별히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교육이 그저 세상적인 출세와 부귀영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 되지 않게 해야 함을 보아야 합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목적이 그저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채찍으로 때리면서까지 자녀를 양육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영혼의 구원, 달리 말하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향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종종 그리스도인 가정에서조차도 고2나 고3 된 자녀들을 주일에 교회 안 보내고 학원에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처럼 잘못된 것 없습니다. 대학 들어간 후에는 교회 열심히 보내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교육받은 아이들이 대학 들어가면 교회 잘 나오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맘대로 안 될 것입니다. 대학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교회 안 보내는 것은 그 후로도 무슨 급한 일이나 힘든 일이 생기면 우선 교회 나가는 것부터 멈추고 보도록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고3이라고 자녀 교회 안 보내시는 분들 당장 다음 주일부터 교회 나오게 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주일 바로 지키는 것이 최우선임을 확실하게 가르치는 것이 복 받는 길이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일에 교회보다 도서관이나 학원에 나가야 한다는 궤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제7일에는 쉬라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쉬어도 먹이시고, 쉬라는 명령을 어기고 제7일에 한 수고는 헛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주일을 어겨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은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며 욕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거짓된 삶은 당장 내다버려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그런 거짓된 삶을 가르치지 마세요. 그런 거짓된 삶을 가르쳐서 자녀들을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바른 믿음 위에 서서 바른 믿음으로 자녀들을 양육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린이주일을 맞아 우리가 다짐할 일입니다. 그것을 다짐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어린이주일의 참 의미를 살리는 일일 것입니다.
믿는 부모와 자녀
잠 23장 12-25절 / 박조준 목사
믿는 부모와 자녀에 대해서 주신 말씀을 통해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1 2절 말씀에 훈계에 착심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13절에는 아이를 훈 계하지 아니치 말라 고 하면서, 잘못이 있을 때 자식을 때리는 일이 있는데 물론 이것이 자식에게 나 부모에게 괴로운 일이지만 사실은 자식에게 큰 유익이 되는 일이라며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 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고 했습니다. 17절에는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지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따라서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자녀를 통해서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가령 어린이들의 예쁜 얼굴을 보는 부모의 기쁨이 있습니다. 요사이 산과 들에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핍니다만 꽃이 어린이들의 얼굴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어머니는 자기 아이보다 예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 장에서 보면 어린아이가 다 예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좀 더 예쁜 아이가 있고 좀 그렇지 못한 아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그러나 그 아이의 어머니는 자기 아이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다 예뻐 보입니다. 어느 아이 어머니나 아이를 낳으면 찾아간 손님에게 아기를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자기에게는 더 없이 예뻐 보여서 그럽니다. 그런 경우 그런 아기를 보면서 아기 참 잘 생겼네요. 아기 너무 예쁘네요 라고 말해 주는 것이 예의 아니겠어요. 제가 아는 어느 가정에서는 결혼해서 4∼5년 동 안 어린아이가 없어서 무척 기다리다가 딸 아이를 하나 낳았습니다. 젊은 부모는 기다리던 애를 낳으니까 얼마나 기뻐하는지 몰라요. 더구나 얼마나 그 애를 예뻐하는지요. 그런데 부모가 아닌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 예쁘다고 말하기는 좀 그래요. 저뿐만 아니라 업고 나 가면 아기 참 예쁘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제가 언젠가 목회 경험이 많으신 목사님한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교인 가정 에서 어린아이를 낳고 그렇게 기뻐하고, 그렇게 예뻐하는데 예쁘지 않다고 하면 실망할 것 같아서 야, 이 아기 참 Baby구나 라고 말씀했대요. 무슨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아무리 보아도 예쁘게 생 기지 않은 아기를 예쁘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고, 그렇다고 남의 아기, 더구나 부모가 그렇게 예 뻐하는 아기를 밉게 생겼다고 하면 실례가 될 것 아닙니까? 어린아이 엄마에게는 자기 아이가 제일 잘 생기고 제일 예뻐 보입니다. 더구나 몇 달 지나 히죽 히죽 웃기 시작하면 웃는 아기 얼굴처럼 귀엽고 예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좀 더 자라서 저 혼 자 뒤집기를 하게 되면 그것도 귀엽습니다. 배밀이를 해서 앞으로 나아가면 그것도 사랑스럽니다. 벌렁벌렁 기어 나아가면 그것도 볼 만합니다. 어린아이의 동작 하나 하나에서 부모들은 기쁨을 가 집니다.그러다가 이 어린아이가 좀 더 자라서 엄마, 아빠 하게 되면 그 목소리를 듣는 부모가 얼 마나 좋아합니까?
그래서 이때쯤 되면 엄마들이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많이 합니다. 아이 엄마들 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재미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아이가 더듬거리면서 말 몇 마디 하면 아이 엄마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합니다. 우리 애는요, 벌써 못하는 말이 없어요. 그저 말 몇 마디 하는 것 같아도 엄마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스러워서 그래요. 그리고 백일이 되면 백일잔치 하느라고, 돌이 되면 돌잔치 하느라고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모릅니다. 아기 엄마는 아기에게 젖 먹이는 재미도 대단히 좋다고 합니다. 아기를 업고 다니거나 안고 다니거나 유모차에 끌고 다니는 기쁨도 크다고 합니다. 전에 어느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시다가 떠드는 어린아이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으니까 말씀 증거를 중단하고 저 떠드는 어린아이 어머니는 아이를 업고 밖으로 나가세요 라고 지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그때 얼마나 서운했는지 그 교회에서 아예 나가 버 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아기 데리고 오시는 부모님들을 환영합니다. 사실 아기 데리고 교회에 오시는 것이 얼마나 정성인지 모릅니다. 교회에서는 아기를 데리고 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자모실을 따로 마련합니다. 아이들끼리 좀 떠들어도, 아이가 없으신 분들은 이해를 하기 어려워도 아이를 데리고 오신 분들은 이해를 하시거든요. 그리고 영아부를 두어서 어린아이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영아부에 맡기고 예배드리고 예배 끝난 후에 영아부에 가서 아이들을 찾아가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의 어린애 엄마들은 아이들 을 특별히 예뻐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영아부에 맡기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꼭 자기가 데리 고 다닙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영아실을 만들어 어린아이를 맡길 수 있는 분들은 맡기게 하고 맡길 수 없는 분은 자모실에서 어린아이들과 같이 예배드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가 손님 목사님이 오시면 설교를 안 하니까 여러 방에서 예배드리는 형편을 살펴보면서 자모실에 들려 보 곤 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부모님들의 모습이 그렇게 명랑할 수가 없습니 다. 사실 자모실에서는 강단이 보이지 않아도 예배드리는 데 별로 지장이 없을 것 같아요. 가만히 보면 어머니들은 강단을 별로 보지 않고 아이들에게만 그 시선이 가 있어요. 좀 분주하기는 하지 만 어린이 방에서 예배드리면서 얼굴 찡그리는 어머니는 거의 없습니다. 어린이들은 이렇게 아름 답습니다. 그러다가 애가 점점 자라서 유치원에 가면 얼마나 예쁩니까? 가방 메고 엄마 유치원 갔다 오겠 습니다 하며 인사드리고 유치원을 향해 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유치 원에 가서 그림 하나 그려 오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천재 같습니다. 뭐든지 다 잘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린아이는 피아노, 미술, 노래, 영어, 태권도, 무용, 축구 교실, 암기 학 원까지 해서 여덟 가지 과외 수업을 한다고 합니다. 너무 장해 보이고 무엇이든지 다 잘 할 것처 럼 보여서 그럽니다.
그래서 소위 조기교육을 시킨다고 합니다. 이 아이가 초등 학교 가면 얼마나 귀엽고 자랑스럽습니까? 혹시 상장이라도 하나 타 가지고 오 면 얼마나 훌륭해 보입니까? 그래서 아이 방에다 사진틀에 넣어서 다 걸어 놓습니다. 흔히 학생들 엄마들 사이에 치맛바람 이란 말이 있는데 왜 그런 말이 들리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 다. 애들이 너무너무 예뻐서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도 보고 싶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관 심이 있고 해서 여기저기 분주히 다니다 보니까 자연히 치마에 바람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어린이는 가정에 화평을 가져옵니다. 부부가 같이 잘 살아가다가도 어떤 때는 의견이 잘 맞지 않아서 의견의 충돌이 생기고 언쟁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한 방에 있으면서도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 말도 하지 않고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가도 애가 학교에 갔다 오면서 아빠 엄마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할 때 화가 나서 얼어붙었던 부모의 얼굴이 봄동산의 눈처럼 녹아 버립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부부 싸움이 좀 심해서 나는 이런 집에선 못살아 하면서 부인이 보따리를 싸가 지고 문밖으로 나갑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자존심도 있으니까 갈 테면 가라, 가. 자기가 가면 어 디를 가? 하면서 버티고 앉아 있습니다. 이쯤 되면 남편이 따라나와서 붙들 줄 알았는데 붙들지 않고 앉아 있습니다. 그러니 부인은 더 화가 납니다.갈 곳도 없이 한참 가는데 밖에서 놀고 있던 어린아이가 엄마, 어디가? 하고 달려오는데 엄마는 가는 데가 있어야 대답하지요. 머뭇거리면서 얼굴만 시뻘개져 있으니까, 아이들 눈치가 더 빨라요. 엄마 못 가, 엄마 나하고 살아 하고 울면서 매달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붙드는 사람이 없어서 그저 가고 있었는데 아이가 붙드니까 못 견디는 척하고 더 가지 못하고 집으로 들어옵니다. 이혼 방지하는 데는 가정법원 판사보다 어린아이가 낫 다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이가 있는 가정보다 아이가 없는 가정이 더 많이 이혼하는 것 같 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할 때도 부모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렇게 어려운 대학에 입학할 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이 있지 않습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 얼마나 흐뭇합니까? 결혼해서 가정을 이뤄도 부모에게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 이처럼 자녀는 부모에게 많은 기쁨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 15∼16절에,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 겁겠고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했습니다. 그리고 24∼25절에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했습니다. 신약성경 요한삼서에 보면 사도 요한이 이렇 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소식을 듣는 중에 무슨 소식이 가장 기쁜 소식입니까? 사업에 성 공했다는 말도 귀하지요. 기다리던 손자를 낳았다는 소식도 기쁘지요. 아들이 진급했다는 소식도 즐거운 것이지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는 말을 들을 때 제일 기쁘 다고 했습니다. 진리 안에서 행한다 는 말은 참된 신앙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죄 를 멀리하려고 애쓰는 생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 그 계명을 지키려고 힘쓰는 생활, 범사에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생활, 성결과 겸손과 진실과 충성, 절 제와 사랑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교회 일은 적극적으로 합니다. 열심으로 복음을 전파합니다. 교육하는 일에 힘씁니다. 봉사하는 일에 참여합니다. 국가 와 민족을 위해서도 정성껏 일합니다. 무슨 일을 맡았든지 책임성 있게, 성실하게 일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이 얼마나 부모에게 기쁨이 되는 일입니까? 믿는 부모로서 제일 큰 기쁨, 목회자로서의 제일 큰 기쁨이 무엇입니까? 내 아들과 내 딸이 신앙으로 사는 것을 볼 때 입니다. 목사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교인의 가정이 사업에 성공하고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것도 기 쁘고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기쁜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을 볼 때입 니다. 어려움이 닥쳐도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이겨 나가는 것을 볼 때 그것처럼 흐뭇한 것이 없습 니다. 저는 지방에 가서나 외국에 가서 우리 갈보리교회 식구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갈보리교회에서 오신 그 아무개 교인 정말 신앙생활 잘하십니다. 교회 봉사에도 앞장서시고요, 모 든 성도에게 모범이 됩니다 라고 칭찬할 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보람입 니다.왜 이것이 그처럼 큰 기쁨이 됩니까? 이것은 기도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사사가 될 때 그 어머니 한나가 얼마나 기뻐했을까 상상해 보세요. 한나가 그 아들 사무엘을 위해서 얼마 나 간절히 기도했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교육의 열매이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가정교육이나 교 회 교육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 르치고, 기도를 가르치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수고의 보람이기 때문에 기쁩니다. 내 자녀가 믿음으로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부모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고 없이 되는 일은 아무것 도 없습니다. 훌륭한 자녀가 있습니까? 그 배후에는 훌륭한 부모님의 수고가 있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거스틴이 어거스틴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부모의 수고가 있었고, 이 수고의 열매로 귀한 사람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신앙의 계승이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내가 살았을 때는 내가 십자가의 깃발을 들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십자가의 깃발, 이 배턴을 놓을 때가 옵니다. 그런 데 내가 이 깃발을, 이 배턴을 물려주어 나대신 그 깃발, 그 배턴을 잡고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기쁨이 크겠습니까. 그 기쁨이야말로 하늘 나라의 영원한 기쁨을 의미합니다. 하늘 나라에 가서도 온 가족이 모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나만이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 아니 고 내 아들과 내 딸이 같이 면류관을 받을 것을 생각할 때 영원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삼서의 말씀을 거꾸로, 반대로 읽으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치 아 니한다 하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슬픔이 없도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부모의 가장 큰 슬픔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다윗의 일생을 기억하시지요.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슬 픔의 장면이 언제였습니까? 그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하고 역적 행동을 해서, 요샛말로 하면 아들이 아버지를 반역해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한때 다윗이 쫓겨난 적이 있었습 니다. 이런 아들 압살롬이 결국은 대세가 불리하게 되어 도망을 치다가 그 머리카락이 나무에 걸 려 죽게 되었습니다. 반역자, 반란자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 놈 못되게 굴더니 종래 죽었구나. 제 죄값이지. 잘 죽었지. 이렇게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에 보세요.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네 대신 죽었으면 좋을 뻔하였구나 하면서 대성통곡했습 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녀가 진리 안에서 행하지 아니할 때 믿는 부모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출세하고, 공부 많이 하고, 돈 많이 벌고, 명예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진리 안 에서 행하지 않는 자녀는 결국 부모에게 가장 슬픔을 안겨 주는 것입니다. 진리 따라 믿음으로 살 지 아니하게 되면 결국은 신앙의 대가 끊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의 깃발을 높이 들고 열심히 달렸고 이제 내가 이 깃발을 놓을 수밖에 없는 때가 오는데 이 깃발을 나 대신 들고 갈 사 람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뿐만 아닙니다. 내 자녀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부모에게는 영원한 슬픔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가서도 온 가족이 모이지 못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지만 내 식구가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나 혼자 얼마나 외 롭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젊은 분들이 많으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젊은이가 많은 것을 자랑으 로 생각합니다. 젊은이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내 부모님께 어떤 자녀인가? 기쁨을 주는 자녀인가, 아니면 슬픔을 주는 자녀인가? 내가 부모님께 언제나 웃음을 주는 자녀인 가, 아니면 나 때문에 부모님이 눈물을 흘리신 적은 없었는가? 만일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자녀라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더 드릴 말씀이 없습 니다.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힘써 옳은 길을 걷고 주님의 일에 힘써 봉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그렇지 못한 분이 혹시 계십니까? 분명히 들으세요. 이런 분은 믿는 내 부모에게 가장 큰 슬픔을 가져다주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곧 불효입니다. 그러므로 회개 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는 부모님들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어떤 자녀입니까? 진리 안에 행 하는 자녀입니까? 그렇다면 가장 큰 기쁨을 소유하고 계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이 혹시 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참된 신앙 생활을 하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그렇지 못한 자녀를 가지신 분이 계십니까? 이런 부모님에게 저는 중심으로 동정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상심되시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시지 마세요. 계속해서 기도하시고 힘쓰세요. 언젠가는 반드시 여러 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고 열매 맺게 될 것을 믿습니다. 내 생전에 안 이루어지면 내가 천당에 간 다음에라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 심하지 마시고, 포기하지 마시고, 계속 기도하세요. 꼭 그 기도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입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성경을 말씀하 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살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 있는 부모와 그 자녀
잠 23장 12~25 / 박조준 목사
오늘 봉독한 잠언의 말씀은 믿음있는 부모와 그 자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정 주간 을 맞이해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령 12절에 보면 부모의 훈계에 착심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녀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13절에는 부모로서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고 하면서 혹시 잘못이 있을 때 자식을 때 리는 일이 있는데, 물론 이것이 부모에게나 자식에게나 괴로운 일이지만 사실은 자식에게 큰 유 익이 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 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도로 인 도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넣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운 것이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24 - 25절) 여기서 우리는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따라 서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예쁜 얼굴을 보는 부모의 기쁨이 있습니다. 암만 꽃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어린 아이들의 얼굴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더구나 어머니의 생각으로는 자기의 애보다 더 예쁜 것은 이 세상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어린애들도 가만히 보면 더 예쁜 아 이가 있고 좀 그렇지 못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 어머니는 자기 아이가 제일 예쁘다 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 어느 권사님과 그 따님을 우연히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권사님네 따님하고 우리 딸하고 이름도 같은데 얼굴도 비슷하게 생긴 것 같아요. 하고 말했더니 권사님 대답이 그 래요? 하시는데, 그 순간 아, 내가 실언을 했구나. 나는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그랬는데 권사님 께서는 속으로 목사님은 딸이 무던히 예뻐 보이는 모양이지? 사실은 우리 딸이 훨씬 낫지. 하신 것 같아 부끄럽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엄마나 자기가 낳은 아기를 예뻐합니다. 그래서 손님에게 자랑을 하고 싶어합니 다. 그러므로 아기를 보고 참 예쁘다, 참 잘 생겼다 고 칭찬하는 것이 예의라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 원로 목사님한테서 들은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이 결혼 주례를 한 어느 젊은 부부가 여러 해 동안 애가 없어서 몹시 기다리다가 결혼한 지 6년만엔가 어린애를 낳았는 데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두 달이 지나자 마침 세례식이 있어서 유아세례를 받고 찾아와 서 인사를 하더랍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어린애, 이제 목사님께 유아세례까지 받았으니 너무 감격스러워서 어쩔 줄 을 모르면서 그저 좋으니까 한다는 말이 목사님, 우리 아기 예쁘지요? 하면서 그렇게 좋아하더 래요. 그런데 목사님이 애를 보니까 그렇게 예쁘게 생기지는 않았더래요. 그렇다고 거짓말할 수 는 없고, 그래서 얼른 하신다는 말씀이 야, 이 아기 참 베이비구나 했다고 합니다. 어린애 엄마에겐 자기 아이가 제일 잘 생겨 보입니다. 더구나 애가 몇 달이 되어서 히죽히죽 웃기 시작하면 웃는 아기 얼굴처럼 귀엽고 예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린애가 좀더 커서 뒤집게 되면 그것도 귀엽고, 배밀이를 하게 되면 그것도 자랑스럽고, 벌렁벌렁 기어다니면 그것도 훌륭해 보입니다.
어린 아이들 동작 하나 하나 에서 부모들은 기쁨을 가집니다. 그러다가 이 어린애가 좀 더 자라서 자기 혼자 서고, 걷게 되면 부모들은 박수를 치며 어린애 를 격려하고 좋아합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 하는 말을 듣게 되면 얼마나 기뻐합니까? 그래서 이때쯤 되면 엄마들이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흔히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애 엄마들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애들이 말 몇 마디 하게 되면 부리나케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을 합니다. 우리 애는 벌써 못하는 말이 없어요. 그저 말 몇 마디 겨우 하는 것을 본 엄마는 이렇 게 말합니다. 왜요?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서 그럽니다. 전에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예배당에 나올 때 아기를 업고 오면 너무 시끄러우니까 예배 당에 올 때는 애를 업고 오지 말라고 광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광고를 들은 아기 엄마들의 불평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아기 데리고 오지 말라는 광고를 아예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아기 업고 오시는 엄마들을 예배 시간까지 업고 계시려면 너무 힘이 드실 것 같아서 탁아부를 두어서 어린애들을 될 수 있는 대로 탁아부에 맡기라고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어린애들을 아직 습관이 잘 되지 않아서 엄마 떨어지기를 싫어하고, 엄마들 은 역시 애들을 특별히 예뻐하기 때문에 탁아부에 맡기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 꼭 자기가 데리고 다닙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우리 선교관 하층을 준비했습니다. 여기를 많이 이용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가끔 어린애들을 데리고 예배 드리는 부모님들을 보면 아주 명랑합니다. 어린애를 보는 엄마 의 얼굴에는 명랑한 기분이 가득합니다. 사실 어린애와 엄마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장소에는 강 단이 안 보여도 별로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보면 애 엄마들은 강대를 별로 안보고 아기 얼굴만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좀 분주하기는 하지만 어린이 방에서 얼굴 찡그리는 어머니 는 별로 없습니다. 어린이는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그러다가 애들이 점점 커서 유치원에 가면 얼마나 예쁩니까? 유치원에 가서 그림 하나 그려 오면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까? 국민학교 가면 얼마나 귀엽습니까? 혹시 상장이라도 하나 타 가지고 오면 얼마나 훌륭해 보입 니까? 그래서 그 상장을 사진틀에 넣어서 방에 걸어 놓습니다. 장해 보여서 그럽니다. 흔히 학부모들 사이에 치맛바람 이란 말이 나오곤 하는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생각 해 보니 애들이 너무 예뻐서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따라가고, 여기저기 분 주히 다니다 보니까 자연히 치마가 바람에 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자녀는 가정에 화평을 가져옵니다. 어떤 때는 부부간에 말다툼을 하고, 시퍼래서 앉아 있다가도 애들이 학교에 갔다고 엄마, 아 빠 하고 돌아오면 성났던 것도 봄동산의 눈처럼 사라집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부부 싸움이 심각해져서 나는 이런 집에서는 못살아 하면서 보따리를 싸가지 고 부인이 문밖으로 나갔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고집을 부리며 부인이 나가는 것을 보고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사실 부인의 속셈은 내가 이러고 나가면 남편이 붙들겠지 했는데 붙들지 않 으니 나갈 수밖에요.
한참 걸어가는데 어린애가 밖에서 놀다가 엄마, 어디가? 보따리를 보니 어린애 눈치에도 심상 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엄마, 못 가! 나하고 살아! 하면서 매달리니 그만 아이 손에 끌려 집에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린애가 이혼 방지 하는데도 가정법원 판사보다 낫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할 때도 기쁨이 있습니다. 취직을 해도 기쁘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어도 기쁨이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많은 기쁨을 가져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내 아들아 만일에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만일 네 입 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했습니다. 24 - 25절에는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 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고 했습니다. 신약성경 요한 삼서에 보면 사도 요한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 에서 행한다 하는 것을 듣던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믿음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서 여러 가 지 다른 소식 듣는 것보다 그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는 말을 들을 때에 가장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는 것은 참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죄를 멀리하는 생활,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생활, 그 계명을 지키는 생활, 범사에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생활, 성결과 겸손, 진실과 근면, 충성과 절제 그리고 사랑 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교회 봉사에 적극적으 로 합니다. 복음을 전파합니다. 교육에 힘씁니다. 봉사하는 일에 참여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 해서도 정성껏 일합니다. 이 얼마나 부모에게 기쁨이 되는 일입니까? 믿음 있는 부모로서 그 자녀에 대한 제일 큰 기쁨, 목회자로서 제일 큰 보람과 기쁨이 무엇인 지 아십니까? 내 자녀가, 내 성도가 그 믿음이 점점 자라서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봉사의 열매 를 맺을 때입니다. 왜 이것이 그처럼 큰 기쁨입니까? 기도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사사가 될 때 그 어머니 한나가 얼마나 기도했을까요? 모세가 믿음으로 장성하여 바 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해서 나서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세의 어 머니 오게벳의 믿음의 기도로 맺어진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모니카의 기도는 어거스틴을 낳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육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가정 교육이나, 기독교 학교의 교육이나, 교회 학교의 교육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진리 안에 서 행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를 가르치고, 설교를 하는 것 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수고의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쓰임 받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 부모가 수고한 보람이 나타나기 때문입 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는 우리 가정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뿌리는 수고 없이 거 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슨 책임을 맡았든지 성실히 수행할 때 큰 축복을 얻을 것입니다. 예배 시간마다 늘 참석을 잘하는 분이 가장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한 주일에는 168시간이 있습 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몇 시간이나 주를 위해 바치십니까? 신문 읽는 시간과 성경 읽는 시간 중 어디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십니까? 많은 부모들은 자녀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강요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학교 가는 것을 꼭 원해서 보냅니까? 공부를 해야겠으니까 싫어해 도 보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병원에 가는 것을 좋아해서 병원에 갑니까? 필요하기 때문에 가기 싫어해도 데리고 가는 게 아닙니까? 우리 가정의 자녀들에게는 교회가 꼭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 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 (딤전 4 : 8)고 말했습니다. 물론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해리 A.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완전한 교회를 발견하면 그 교회에 다니 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교회를 더럽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여러분의 교회에서 그릇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녀 들 앞에서 교사와 목사, 지도자들이나 교인들에 대해서 비판하지 마세요. 부모의 생각 없는 비 판의 말을 들은 여러분의 자녀들은 은연중에 교회를 허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실제적인 실패자는 교회가 아니라 부모와 그 자녀들입니다. 교회를 비판하기보다 팔을 걷고 나서서 결점을 변화시키도록 힘쓰십시오. 교회는 가장 취직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기관입니다. 누구나 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렇게 교회를 봉사하면 놀라 운 심령의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만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없 습니다. 우리의 봉사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뿐만 아니라 그 심령을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자세히 보십시오. 대학교 총장이나, 은행 총재나, 기업체의 회장이나, 군의 장성이나, 누구나 교회에서는 사회적 지위의 차별이 없이 봉사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월 넷 째 주일을 봉사 주일로 정하고 생활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조금씩 돕는 일을 합니다. 예배당 뜰의 여러 곳에 봉사함을 놓고 봉사금을 모금합니다. 제가 예배를 끝내고 선교관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봉사함을 붙들고 행여 어느 교인이 봉사금을 넣어 주실까 하는 부동 자세로 서 계시는데 그 집사님이 군에서 사단장을 지내신 장군이십니다.
교회가 아니면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겠어요? 보기만 해도 은혜가 됩니다. 요즈음 참여 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대하여 할 일입니다. 우리 다 함께 일함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업에 동 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를 양육하는 일 다음으로 가장 보람된 일이 가르치고 봉사하는 일입니다. 물론 세상에 완전한 부모란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완전하지 못합니다. 성령을 받은 후에도 우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하나님은 완전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러나 우리 믿음 있는 부모에겐 기도의 권능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마 21 : 2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 (눅 18 : 1)고 했습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 : 6)고 했습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약 5 : 16)고 했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 : 11)고 했습니다. 믿음있는 부모는 자녀를 위해 특별히 위기에 처할 때 기도의 권능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기도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부모들은 기도를 통해 능력을 얻습니다. 우리 자녀 가운데 믿음이 없어 마음에 짐이 되시는 분 계십니까? 낙심 마시고 계속 기도하세요. 현세에 안 이루어 주시면 여러분이 하늘나라에 가신 후에라도 꼭 이루어 주십니다. 끝으로, 영적으로 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우리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입니까? 혹 그렇지 못합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 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하십니까? 혹 근심거리 되는 자녀는 아닙니 까? 내가 부모님의 신앙을 물려받았습니까? 부모된 우리가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고 있습니까? 이를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고 힘쓰고 있습니까? 믿음있는 부모, 믿음있는 자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회에 유익하고, 교회에 덕 세 우고, 가정에 행복 주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그냥 넘어 갈 수 없는 세가지
잠언 23:13 – 20 / 김학우 목사
요한 웨슬리는 “우리가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세 가지 질문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네게 준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느냐?” 둘째는 “네게 준 돈을 어떻게 썼느냐?” 셋째는 “네게 준 자녀를 어떻게 가르쳤느냐?”라는 것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지혜서”인 잠언을 통해 우리가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 것인지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받겠습니다.
1. 자녀가 거짓말에 했을 때,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16절) [양치기 소년 동영상]
오늘 지혜서는 부모는 자녀가 거짓말을 하였을 때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모르는 척 하고 지나치면 안 된다.”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16절)“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정직한 말의 반대말은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란 두 가지 뜻을 가진 것으로, “섞었다.”란 뜻으로 음식물이 부패하거나 섞었다고 할 때에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부패된 음식물을 먹게 되면, 구토를 일으키게 되듯 거짓말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아프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파울”(Foul)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구에서 타자가 친 공이 정해진 선 밖으로 빗나갔을 때 파울이라고 부릅니다. 거짓말이란 “빗나간 말”입니다. 거짓말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빗나가게 만들기 때문에 그냥 넘어 갈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13-14절)“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지혜자는 거짓말을 중단 시키는 방법으로, 훈계, 채찍을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2011년 3월까지 간접 체벌을 허용하다, 현재는 거의 체벌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은 1985년부터 금지되었고, 미국은 과거 채벌을 금지해 오다 지금은 오히려 19개 주에서 체벌이 부활되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마18:4)“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말씀이 오래 동안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양보하고, 겸손한 것을 보았습니까? 자기 밖에 모르며, 부모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잘난 척 하고, 영악스럽기 까지 한 아이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을까?
혹 “예수님 당시 아이들은 지금 아이와 달랐겠지?”라고 생각도 할 수 있지만 그럴 리 없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허술한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 이것은 어린아이의 겸손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어린 아이는 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어린 아이가 겸손한 상황에 있을 때에, 바로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구약 열왕기나 역대기 왕들의 치적을 평가하는 기준이 정직이었습니다. 주로 이런 식이었습니다. (왕상15:11)“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왕상 15:5)“이는 다윗이 헤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일 외에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정직했고 이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왕이 많은 사람 중 요셉을 총리로 삼은 것이나, 거짓된 아합과 이세벨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실한 오바댜를 신하로 둔 것이나, 느부갓네살이 다니엘과 세 친구를 총리와 장관으로 삼은 것은, 거짓이 통용되는 곳에까지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을 요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정직은 세상의 풍조와 상관없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통용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우리 자녀를 진실 되게 양육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일시적인 손해가 있다고 해도 우리의 자녀에게 정직을 가르쳐야 합니다.
2. 자녀가 불신앙의 길로 갈 때에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17절)
성경에 자녀가 불신앙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 그냥 내 버려두었을 때, 어떻게 되는 가를 생생하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엘리 제사장의 경우입니다. 엘리에게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장차 아버지를 이어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해야할 자들이었지만, 아버지는 그들이 잘못을 바르게 고쳐 주지 않았습니다.
두 아들들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탈취했을 뿐 아니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을 했습니다. (삼상2:14)“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2:12)“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불량자가 누구입니까? 예배를 무시하는 자가 곧 불량자입니다.
그럼에도 엘리의 태도는 방관했으며, 아주 미온적이었습니다. (삼3:13)“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아들의 잘못을 훈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삼상3:34)“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의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부모가 매를 드는 기회를 놓칠 때 훗날 자식은 부모에게 큰 올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잠29:15)“자식을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부모가 나이 들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이 노인네가 무슨 잔소리냐”며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보고도 매를 때리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대신 매를 드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매를 드시기 전에 먼저 부모가 매를 들어야 합니다. 지혜자는 (17절)자녀들이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보살필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자녀와 가정에 대하여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 가정을 보라, 저 집 아이를 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가 믿음이 좋고, 경건하다고 반드시 그 자녀가 믿음 좋은 자녀가 되는 것도 아니며, 부모가 믿음이 없어도 그 자녀들이 얼마든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자녀를 내 버려 둘 때 그 혼란은 막대합니다. 엘리 제사장은 그의 두 아들을 내버려두었을 때 불량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의 자녀를 어떤 경우에도 불신앙 가운데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지만,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나쁜 친구가 있는 것을 알면서 묵인해서 안 된다. (20절) [탕자의 동영상]
흔히 친구를 보면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도 이 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당 정문에 새겨 놓은 말씀입니다. (잠27:17)“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근묵자흑” 이란 말과 같이 나쁜 친구를 가까이 하면 결국 우리의 자녀도 나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있는 레위를 향해 “나를 좇으라.”고 했을 때 레위는(눅5:27-28)“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을 때 버려야 했던 것들이 참으로 많았을 것입니다. 그중 과거 가까이했던 친구들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레위가 세관을 떠나려고 했을 때 주변 친구들이 “많은 사람들이 탐내는 이 자리를 버리고 어딜 가려느냐?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친구들을 포기하지 않고는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사에 잘 알려진 어거스틴이 30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방탕생활을 한 것은 나쁜 친구를 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버린 후 비로소 하나님께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오늘 성경은 술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20절)“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이것은 방탕생활을 하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고전15: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나쁜 친구로부터 자녀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은 좋은 믿음의 친구를 만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것만큼 안전한 것이 없습니다. 교회 가는 것이 시간 빼앗기고 것이나, 공부하는 데 지장 된다는 생각은 편협한 생각입니다.
지금 우리 자녀들의 주변 환경은 참으로 열악합니다. 자녀들의 정신과 마음을 해치는 독극물들이 깔려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행동과 태도를 수시로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 자녀들이 거짓말 하는 것을 보고도 그냥 모른 채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불신앙의 길로, 세상의 길로 빠져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안 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쁜 친구를 사귀고 있는 것을 알면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세상 유혹과 악의 길에서 우리 자녀들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길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잘 자랄 수 있도록 우리 부모가 모범을 보일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녀에게 꼭 가르칠 것들
잠 23:13-14 / 김홍도 목사
어느 사형수가 죽기 전에 어머니를 꼭 한번 면회하게 해달라고 간청해서 면회를 시켜주었더니 창살 안에서 어머니를 가까이 오라고 해서는 코를 물어뜯더랍니다. 그 이유는 “왜 내가 어려서 남의 것을 훔쳐오고 나쁜 짓을 할 때 못하게 말리지 않아서 내가 오늘날 큰 죄를 범하고 사형을 당하게 했느냐”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키운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부모님들이 자식을 바르게 양육했으면 이 세상은 훨씬 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이 공산화의 위기에 처한 것도 부모들과 교회가 책임 있게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한 까닭입니다. 특히 우리 크리스천 부모들이 책임지고 꼭 가르쳐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좋은 음식 못 먹이고 좋은 옷을 못 입혀도 또 일류 대학을 못 보내도 이것들만은 꼭 가르쳐야 그 자식들의 미래에도 축복이 되고 교회와 국가의 미래도 밝고 축복이 될 것입니다.
1. 진실과 정직입니다
그 사람이 진실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면 아무리 일류대학을 나오고 재주가 좋고 수완이 좋아도 그것은 깨어진 그릇과 같아서 귀한 그릇이 못 됩니다. 다른 것이 좀 부족해도 우선 진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려서부터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 이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진실이란 거짓이 없는 마음의 상태라 할 수 있고 정직은 모든 일을 공평하고 바르게 하는 행위와 관계된 것입니다.
① 진실은 거짓이 없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 받고 인정
받으려면 무엇보다 거짓이 없고 진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강도나 창녀나 도적놈이나 다 받아주시고 구원해주셨지만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자, 위선자들은 저주했습니다(hypocrite). 한마디로 거짓된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하고 경건한 것 같은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썩은 송장으로 가득한 회칠한 무덤 같았습니다. 한마디로 진실성이 없는 거짓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경고하시면서 양의 가죽을 쓴 이리라고 했습니다. 진실 되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진실무망하신 분이며 사탄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닮기 원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면 진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어떤 죄인도 예수님을 믿으면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받지만 그 다음부터는 진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 악령은 거짓의 영입니다. 이단은 사탄의 영, 거짓의 영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12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성경은 말씀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몹시 사랑하며 칭찬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때부터 하나님을 섬겨온 것과 디모데후서 1장 5절에 기록된 대로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디모데가 이처럼 거짓이 없는 진실한 믿음을 가진 것은 그 외할머니 때부터 그 어머니까지 진실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듣고 배운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5절에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고 했습니다.
요사이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논문이 거짓말로 조작된 것이라고 한 것이 드러나자 온 국민에게 큰 실망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한국 사람의 논문이 외국에서 다 의심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정확무오해야 할 과학자의 논문이 거짓과 조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궤변 철학자, 디오게네스(B.C.412)가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 다니면서 진실한 사람을 찾고 다녔다고 했는데 얼마나 세상에 진실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으면 그런 행동을 했겠습니까?
알렉산더 대왕의 가정교사(tutor)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거짓으로 얻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더니 “그가 진실을 말할지라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잠언 12장 22절에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라고 했고 10계명에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20:16)고 했습니다. 거짓말은 심판을 받게 되고(마12:36-37), 유황불못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계21:8). 진실한사람의 첫째 열매는 약속을 잘 지키는 것입니 다. 사람에게 한 약속이나 하나님께 한 약속이나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②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진실”은 거짓이 없는 마음 상태라면 “정직”은 모든 일 처리를 곧고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서 앞에 올 것을 뒤에 놓거나 칭찬할 사람을 헐뜯거나 하는 것은 모두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한 말씀은 수도 예루살렘에 사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심판하고 말겠다는 말씀입니다. 잠언 20장 10절에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23절에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행동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 본 서부활극 영화 중에서 큰 인상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도 잊고 줄거리도 모르지만 이것만은 기억합니다. 한 갱단의 두목이 자기 아들과 다른 청년이 총 쏘기 대결을 하는데 약속대로 몇 걸음 걸어가서 신호에 의해서 돌아서 쏘기로 되어 있는데 자기 아들이 약속을 어기고 총을 쏘려고 할 때 갱단 두목인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총으로 쏴서 죽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록 갱단 두목이지만 얼마나 의리가 있고 정직합니까?
레위기 19장 35~36절에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무슨 일 하든지 곧고 반듯하고 바르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안창호 선생은 “꿈에라도 거짓되었거든 통회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기도 많이 하는 것을 원하고 다 성령 받고 방언하기를 원하지만, 기도를 장작 패듯이 잘하고 물 흐르듯이 방언을 잘해도 거짓말을 잘하고 남을 속이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그 믿음을 의심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일류대학에 못 가도, 돈을 많이 못 벌어도, 사회생활에 성공하지 못해도,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십시오. 부자 되고 성공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저는 4남매를 키우면서 한두 번은 몹시 때린 적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말을 하거나 정직하지 못하게 행동했을 때입니다.
미가서 6장 8절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고, 6장 10~11절에 “악인의 집에 오히려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은 혹 마귀 유혹에 빠져서 범죄하더라도 회개하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2. 드리는 법과 베푸는 법을 가르치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성도들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하나님이 다 책임져주실 것이기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염려는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고 입히시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워 불타버리는 들의 꽃도 입히시는데 너희 하나님의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어 피 흘려 죽으시게까지 하신 하나님이 육신이 필요한 음식이나 의복을 주시지 않겠느냐며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크리스천들은 하나님 뜻대로 살고 예수님만 잘 믿으면 이 세상에서 육신에 필요한 모든 것은 덤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앞날을 위해서 저축하느라고 하나님께 드리지도 못하고 남에게 베풀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산상수훈 말씀을 하시다가 마태복음 6장 19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그리고 나서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을 많이 쌓아두고 100년, 1000년 오래오래 걱정 없이 편안히 살려고 하지만 부도나고, 사기당하고, 뜻하지 않은 병으로 다 날아가거나 다 땅에 쌓아둔 채 버리고 떠나게 되는 날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가난과 궁핍을 면하려면 어려운 중에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리고 베푸는 생활을 하면 놀랍도록 채워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헌금생활은 밭에 종자를 뿌리는 것과 같아서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둔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가난할수록 어려울수록 후하게 드리고 넉넉히 베푸는 생활을 하면 훗날에 자신이나 자손 대에 가서 천 배, 만 배, 거두게 하십니다.
여러분, 자식들에게 집이나 재산 물려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서 하늘에 보화를 쌓고, 용돈을 후히 못 줘도 십일조 하는 법과 하나님께 드리며 베푸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그것이 자식들에게 더 큰 축복이 됩니다.
저는 자식들에게 이것을 열심히 가르치느라고 했습니다. 등록금을 못 내도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감사의 생활, 베푸는 생활을 가르쳤더니 다 한결같이 간증하는 것을 듣습니다. 처음에는 힘든 것 같지만 그 고비를 넘어서니까 이상한 방법으로,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궁핍하지 않고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복 받는 사람들이 되기 원하면 꼭 드리는 법과 베푸는 법을 가르치십시오.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온전한 십일를 말씀하시면서 “나를 시험해보라”고까지 하셨겠습니까?
3. 겸손을 꼭 가르치십시오
며칠 전, 한국 혼혈아 하인즈 워드(Hines Ward)가 미식축구에서 MVP 상을 타고 상금만도 몇 백억 원을 탔다고 전 세계 신문이 대서특필로 보도했는데 그 어머니가 늘 아들에게 “겸손하라, 겸손하라”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예수님 믿는 냄새가 나는데 그런 기사가 없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2월 24일 신문에 그들이 크리스천인 것을 밝혔습니다. 워드를 교회에서 가르친 고등부 교사가 국민일보에 전해왔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렇게 신앙생활 잘하고 기도를 많이 했다고 기도의 응답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겸손하라, 겸손하라”라고 늘 강조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부자가 되었어도 교만하고 건방지면 꼴 보기 싫어집니다. 하나님도 미워하시고 사람도 멸시합니다. 잠언 16장 5절에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이 차버리십니다(약4:6).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떠나지 않기를 원한다면 은혜 받을수록, 직분이 올라갈수록, 돈을 많이 벌수록 자신을 낮추고 겸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3장 12절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바른 사람
잠 23:15-19 / 김철현 목사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는 말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마도 이 말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은 사라지지 않을 말일 것입니다. 영영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다 알아낸다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다른 모든 보이는 것들은 언젠가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마음은 알려고 해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마음을 궁금해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부가 평생을 살면서도 가꿈씩 ‘정말 날 사랑하는 걸까?’, ‘얼마나 사랑하는 걸까?’ 하고 그 사람의 마음이 궁금한 것입니다.
마음이란 곧 생각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궁금하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하다는 것이요, 그 마음을 알아야겠다는 것은 결국 그의 생각을 알아야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이란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기도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곧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과 생각이 육체에만 머물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생각하며 눈만 뜨면 종일 이 고민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머리로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의 세상 살아가는 방식은 언제나 계산적입니다. ‘내게 유익이 되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만 골똘히 생각하고 연구하며 삽니다. 그래서 그 생각의 중심에는 언제나 ‘내가 살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은 무엇일까?’ 만 있습니다. 반면에 따뜻한 가슴으로 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람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하늘을 품고 가슴으로 이 모든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마지막으로 남는 결국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내 인물이 남겠습니까? 아무리 잘 생긴 사람도 죽으면 끝입니다. 아니면 죽은 후에 비석을 세워놓는 것이 영원히 남는 것입니까? 내 육체는 썩어서 이미 흙이 되었는데 그깟 돌덩이 하나가 무엇이 대숩니까? 결국 그 사람의 사상, 그 사람의 생각 즉그 사람의 마음이 세월이 흘러도 길이 남을 뿐입니다.
사람은 그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또한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에 따라서 그 미래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형태를 보면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생각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불평이나 원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안 된다는 일이 없습니다. 언제나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사고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부정적인 방향으로의 생각 속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삶은 늘 우울합니다. 어둡습니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며 폭력적입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테러리스트들이 되고 맙니다.
사람이 어떤 마음을 먹는다는 것과 무슨 생각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마음과 생각의 그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옳은 마음과 생각은 지켜 나가야 할 것이지만 잘못 된 생각은 빨리 버려야합니다. 잘못된 마음은 빨리 고쳐먹어야합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을 부여잡고 버리지 못하는 고집이 문제입니다.
현대는 얼마나 자기생각이 분명한 시대인지 모릅니다. 아이들도 자기생각이 한 군데로 굳어지면 끝까지 우겨댑니다. 지식에도 그렇습니다. 잘못된 지식은 버리고 옳은 지식은 받아들여야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봐도 잘못된 지식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정답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옹고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억지가 아주 심하게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만을 굽히지 않고 우기는 사람을 옹고집이라고 부릅니다. 가끔씩 이런 대책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가령, L. A와 Los Angeles가 다른 도시라고 우기는 사람, 으악 새가 새의 이름이라고 끝까지 우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으악 새는 억새의 방언이라고 가르쳐 줘도 받아들이지를 않고 자기가 알고 있기는 “으악 새는 새 이름” 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이 사람하고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어떤 사상에 마음이 굳어지거나, 어떤 이론에 생각이 굳어지게 되면 이렇게 옹고집이 되어 버립니다. 이 고집을 되돌릴 수 없게 될 때는 참으로 힘이 듭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본능대로만 살지 아니하고 본능을 제어할 줄 아는 데 있습니다. 짐승은 본능을 제어하거나 조종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생각이 없이 본능대로만 살면 짐승에 지나지 않습니다.
까치는 5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똑같은 집을 짓습니다. 까치집이 달라지는 것 봤습니까? 왜 그런지 아십니까? 생각하고 연구해서 짓는 집이 아니라 본능대로 짓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똑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짓는 집을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집들이 지어져갑니까? 해마다 정말 살아보고 싶은 집들이 얼마나 많이 지어집니까? 생각하고 연구하기 때문에 발전하고 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 중의 특권이 바로 생각하는 지성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생각하는 데 따라서 그 삶이 달라집니다. 잠언23:7에 뭐라고 합니까?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 그랬습니다. 그 마음에 따라서 사람됨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선하면 선한 사람이요, 마음이 악하면 악한 사람입니다. 시편 39편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다시 말하면 깊이 생각할 때에 불이 붙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생각을 오랫동안 깊이 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가슴에 불이 붙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러니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좋은 생각도 그렇고 나쁜 생각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십니까? 생각은 알과 같습니다. 비둘기 알을 오래 품고 있으면 귀여운 비둘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독사의 알을 오래 품고 있으면 마지막에는 독사 새끼가 나옵니다.
[클레멘트 스톤]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고 했습니다. 마음의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야말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중대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오늘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어디로 향하여야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억해야합니다. 17절입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이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귀로 모든 소리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세상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숱한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만 그 많은 생각들을 신앙적인 측면으로 정리해보면 결국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은 어떠해야합니까? 성경말씀대로입니다. 땅에 살지만 하늘에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특성입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불가입성의 원리(不加入性의 原理)> 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공간에 두 물체가 동시에 들어갈 수 없다.” 는 원리인데 이런 원리를 말합니다. 빈 병 속에 들어있는 공기를 내보내려면 맑은 물을 병 안에 가득 넣으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공기는 밀려나가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면 더러운 생각, 깨끗하지 못한 마음은 자연히 밀려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게 되면 자연히 땅엣 것은 밀려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과 세상, 신앙과 불신앙 두 가지를 존재하게 할 수 없는” <신앙적 불가입성의 원리(信仰的 不加入性의 原理)>입니다.
오늘 성경을 다시 한 번 보세요. 마음의 생각을 여호와 하나님께 두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18절입니다.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비록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마음의 생각이지만 그것을 하나님께서도 보시지 못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의 생각을 보시는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생각의 시작과 과정과 마지막까지 살피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생각이 올바르고 마음이 온전해서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고 생각이 잘못된 데 머무르고 마음이 악한 곳에 있어서 망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작은 종이 한 장 차이일 수 있으나 그 결과는 영원히 만나지 못할 극단으로 치닫고 마는 것이 마음의 생각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며 사십니까? 진정 우리의 생각이 거듭났습니까? 혹시 그 동안 너무 세상 것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23:19절의 말씀처럼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지혜를 얻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이 바른 길로 인도 받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만사형통
잠언 23:15-19 / 최지승 목사
지난 주일에 ‘잘 되는 삶’ 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잘 되는 삶은 결국 만사가 형통한 인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만사형통이 세상에서 말하는 만사형통과는 다름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잘됨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 속에서 그의 삶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사형통을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일이 잘 진행되지 않고 고난의 수렁에 빠져 허덕일 때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 없이 사는데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건강하게 살며 장수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성도들이 딜렘마에 빠져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에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몇가지 예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잠언 23장은 지혜의 왕 솔로몬이 인생의 경험을 통해 얻은 삶의 지혜를 아들에게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잠언23장은 인간의 탐욕에 대하여 조심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이며, 그 중에 오늘의 본문은 죄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간곡한 당부와 순종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는 태초부터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지난 주일에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 복되고 형통한 사람이라 말씀드렸던 것처럼 참된 지혜를 따라 사는 사람 역시 주 안에서 복되고 형통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잠언의 지혜자가 말합니다.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이 마음은 곧 자녀들을 향한 모든 아버지들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18층 옥상에서 떨어진 벽돌에 맞아 한 사람은 생명을 잃었고 또 한 사람은 중상을 입었는데 범인을 잡고 보니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었다고 밝혀졌습니다. 아이들 말처럼 정말로 낙하실험을 했는지 장난으로 던졌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3학년의 연령이면 그 정도 분별력은 있는데 어떻게 그런 끔찍한 행동을 할 수 있느냐 하며 법적인 처벌에 대한 논란이 대단합니다.
철없는 행동을 한 아이들도 문제지만 결국 그 책임의 화살이 가정에서 아이들을 바르게 교육시키지 못한 부모들에게 돌려집니다. 자녀의 마음이 지혜로우면 아버지의 마음이 즐겁고 그 입술이 정직하면 아버지의 속이 유쾌하다 했는데 이번 사건에 관련된 부모들의 마음은 죽을 지경입니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정직한 입술로 말하는 것까지 할 수 없도록 부모가 잘못 가르쳤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세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르치는 지혜로운 마음은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아들은 또한 그 입술로 정직한 것을 말할 것이니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즐겁고 유쾌하게 만드는 지혜로운 아들의 순종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그냥 ‘죄인을 부러워하지 말라’ 했는데 우리말 성경에서는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번역했습니다. 죄인을 부러워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겁도 없이 죄를 짓고 양심도 없이 못된 짓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떵떵거리며 잘 사는 위인들을 볼 때 그것이 형통함으로 보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사가 형님으로 통한다는 말이 나오게 했던 권세가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잠언은 자기 뜻대로 살면서 하는 일마다 술술 풀리는 죄인들이 은근히 부러워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갖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 대신에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했습니다. 그리하면 분명히 너의 장래가 있을 것이며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약속합니다. 죄의 유혹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지만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면 인생의 결말이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것이며 장래에 대한 소망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장래가 보장된 삶 이것이 바로 만사가 잘되는 형통이 아닐까요? 거짓으로 형통한 세상과 사람에게 소망을 두면 언젠가는 멸망으로 떨어지지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교훈을 새겨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하라고 재삼 당부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 말씀을 바탕으로 악인의 형통함과 의인의 형통함이 어떻게 다르며 우리가 걸어야 할 바른 길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합니다.
지혜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악인의 번영을 은연 중에 부러워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성도들 중에서도 그런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방황했던 적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73편은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함에 대한 문제를 다룹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결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살았지만 종일토록 재앙과 고통 중에 지내야만 했던 시인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질투심이 생겨 거의 실족할 뻔했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고난이나 재앙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더 교만하여 약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억압하며 거만하게 눈을 치켜뜨고 다니면서 함부로 말합니다. 악인들이 이렇게 하고도 아무 일 없이 형통하니 하나님의 사람들까지 그들에게 몰려가 영향을 받아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아시겠는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세상의 일을 다 아시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합니다. 일이 그러하니 정직하게 살려는 시인은 이런 일을 이해할 수 없었고 실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악인의 최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멸망하게 될 것이며 아침이 되면 악몽이 사라지듯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잠시잠간이었지만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며 질투할 때는 마음이 쓰리고 창자가 끊어지듯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께서 이처럼 어리석은 나를 붙잡아 넘어지지 않게 하심을 감사드리며 이렇게 찬송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다윗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행 13:22) 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특별한 빽을 업고 만사형통한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은 그의 인생 여정 가운데 험난한 길을 무수히 통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후 그의 이름이 높아질 때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광야의 도망자 신세가 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의 목숨을 노릴 때 왕궁을 버리고 맨발로 도망치며 울어야 했던 기막힌 일도 경험했습니다. 형제처럼 아끼던 동료와 신하들에게 배신을 당한 것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다윗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도 흔치 않습니다.
이런 다윗이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교훈하는 시가 시편 37편입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며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며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1-7)
악인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그들은 잠시 후에 없어질 것이니 자세히 살펴봐도 없을 것이며,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할 것이며,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신다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길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시기 때문이라 했던 다윗의 고백은 그의 인생 경험에서 얻은 생생한 교훈입니다.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시37:38-40) 했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을 위한 위로와 응원의 말씀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악인과 의인 모두에게 햇빛과 단비를 공평하게 공급하시는 것처럼 악인도 세상에서 하는 일마다 잘되고 근심 걱정 없이 평안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라’ (잠21:4)고 하신 말씀과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잠16:4) 하신 말씀도 꼭 기억합시다. 악인은 이 땅에서 번성할수록 그의 죄를 왕성하게 기르는 것이며 그가 뿌린 모든 악의 열매를 거둘 심판의 날을 분명히 맞이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신29:9), 모세의 뒤를 이어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갈 책임을 맡은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수1:8)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의 인생에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오는 것일까요? 형들의 손에 팔려 노예로 끌려갔던 요셉의 삶을 예로 들어봅시다. 요셉은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이 그 집에서 하는 모든 일이 잘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집 주인 보디발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가 하는 모든 일마다 잘되게 하시는 것을 보고 그를 신임하여 가정의 모든 일과 소유를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이 상황을 설명할 때 형통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는 말을 한 번 더 사용합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종으로 팔려왔습니다. 아무리 부잣집이고 대제국 애굽의 고위 관리의 가정총무가 되었다 해도 노예는 노예일 뿐입니다. 성실하게 일하여 주인의 신임을 얻어 노예 중에서도 고급직으로 승진을 했지만 주인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는 이유 때문에 성추행범으로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고통스런 과정을 겪은 요셉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말할 수 있습니까?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이 그 구덩이 속에서 형님들 제발 나를 살려달라고 얼마나 애원했겠습니까? 17세의 어린 나이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는 두려운 순간에 형들에게 얼마나 매달렸겠습니까? 말도 통하지 않는 애굽에 끌려와 이루 말할 수 없는 멸시와 천대를 견디며 가정총무의 자리까지 오른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모두 망쳐버렸습니다. 주인의 노를 사서 현장에서 즉결처분 당하지 않고 감옥으로 보내진 것은 불행 중에 다행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갈 때 나이가 이제 20대 후반인데 언제 보디발의 마음이 변해 옥중에서 사형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기막힌 운명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거칠고 험한 요셉의 삶을 가리켜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요셉이야말로 운이 없어도 지지리 없고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당사자 요셉이 그런 자신을 형통한 사람이라 생각했을까요? 자신은 물론 요셉의 억울함과 일이 꼬이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 중에 아무도 그렇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한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를 요셉도 모르고 그의 부모형제와 이웃 사람들도 몰랐을 때는 형통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이 드러났을 때 비로소 요셉은 범사에 형통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형통함과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함의 다른 점입니다.
형들은 꿈쟁이 요셉이 미워 애굽으로 팔아넘겼지만 알고보니 하나님께서 요셉을 미리 애굽으로 보내어 가족들과 만민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준비하셨던 일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에게 날마다 미혹을 당하다가 죄짓는 생활을 하는 것보다 악인의 꾀로부터 격리시켜 감옥으로 보내어 순결한 삶을 살게 하신 것이 요셉의 형통함이었습니다. 노예란 그저 말하는 농기구나 말귀 알아듣는 짐승으로 여겼던 시절에 주인의 말 한 마디면 현장에서 처형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신임했던 보디발이 요셉을 왕의 신하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보낸 것도 요셉을 보호하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감옥에서 바로의 신하들을 만나 그들의 꿈을 해석하게 하신 것도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한 준비작업이었으니 이 모든 일이 형통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은 정직을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주인 보디발을 대할 때나 감옥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처럼 자기 맡은 일에 성실함으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는 말은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합니다.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합니다. 아첨하는 사람처럼 눈가림만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주님을 섬기듯 기쁨으로 하며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습니다(엡6:6-7).
요셉은 하나님을 모르는 보디발과 감옥의 간수장 그리고 애굽의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삶으로 증거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 있을 때에도 그리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도 그가 몸담은 자리마다 범사가 잘 되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숱한 시련의 과정을 통과하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표와 돌보심 속에서 연단을 받고 성장하며 성숙해지는 삶,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며 만사형통한 삶입니다.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행동거지를 관찰합니다. 수군거리고 비방하면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래도 우리와는 다른 무엇이 있을까 기대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우리와 달라야 한다고 기대했는데 똑같이 요령을 피우고 절대로 손해보지 않으려 합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서로 미워하며 비방하고 속이고 적당히 사는 것을 보면서 실망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너희들이라고 별 수 있겠어’ 하며 전체 기독교인과 교회를 싸잡아 비난합니다. 약빠른 듯 하지만 교활하고 이기적이며 정직하지 못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사는 방식이 아닙니다. 어리숙한 듯 하지만 정직함과 성결함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의 형통한 삶을 소개하고 마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말씀한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교우들에게 편지할 때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4:4-5) 당부했습니다. 이렇게 기쁨을 선포하는 바울은 옥중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던 사도 바울이야말로 범사에 형통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요셉도 바울도 옥살이를 했지만 범죄하여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다가 갇힌 자들이 되었습니다. 만사가 형으로 통한다고 했던 전직 대통령들의 형들이 불법을 행하다가 감옥에 간 것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부러워할 대상은 악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거나 권력을 얻어 만사가 형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선과 악이 우리 앞에 항상 있으며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1:1-3) 주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이 항상 내 안에 있어 무슨 일을 하든지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질문하며 악을 떠나 선을 따르는 사람은 만사형통한 성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삶을 힘써 살아가기 바랍니다.
내 아들아
잠 23:15~19 / 이성희 목사
5월은 가정의 달이며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어린이들이 지혜로운 어린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지혜가 많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안고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도 어린이들을 많이 안아주고 복을 빌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어린이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어린이가 되고 우리에게도 사랑받는 어린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 교황의 교황명이 ‘베네딕토 16세’라고 합니다. 인터넷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새 교황이 베네딕토 16세이다. 나하고 나이가 같네. 어쩌면 그 어린 나이에 카톨릭의 수장이 되었을까?” 우리 어린이들이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혜가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라 국가의, 사회의, 교회의 꼭 필요한 인물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마태복음 7:11에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자녀에게 무엇을 줄까요? 자녀들에게 주고 싶은 가장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좋은 것을 자녀에게 주는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 아들아”란 말은 구약에 흔한 표현입니다. 특히 잠언에 많이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원래 이 말은 스승이 제자를 부르는 칭호라고 합니다. 잠언에만 13번이나 나오는 “내 아들아”라는 말은 스승이 제자에게 부르는 칭호 이상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아버지라고 하는 단어는 부모를 지칭합니다. 아들이라고 하는 단어는 자녀를 지칭합니다. 당시의 남성 중심 사회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꼭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말이라고 해도 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을 적은 어느 쪽지를 봤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평범하고 상식적인 말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런 평범한 상식적인 삶을 살고 있지도 못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아들, 딸에게 편지를 써본 일이 있습니까? 있다면 언제였습니까? 요즘은 편지 쓰기도 힘들어요. 편지 쓰기 싫으니 메일이나 보내고,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나 보내지요. 문자 메시지는 21세기의 새로운 공해로 등장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약 8,000만건의 문자 메시지가 전달된다고 합니다. 한번에 20자라고 가정할 때 하루에 16억 글자가 공중에서 떠도는 셈입니다. 문자 메시지도 좋지만 편지 한번 써보세요. 아들, 딸에게 편지로 부탁하고 싶은 말, 위로하고 싶은 말을 써보세요. 아이들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한 농부가 아들들에게 너무 심하게 농사일을 시키는 것을 보고 이웃 농부가 농작물을 키우기 위해 아들들에게 그렇게 심하게 일을 시킬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농작물을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들을 키우고 있소”. 우리의 자녀를 잘 키워야 합니다. 특히 신앙적으로 키워야 합니다. “내 아들아”라는 말씀을 통하여 아이들에게 주신 성경적 교훈을 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지혜를 얻기 원하는 아버지의 소망입니다.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라고 합니다. 자녀의 지혜는 부모님의 즐거움입니다. 요즘의 부모님도 그렇습니까? 요즘 부모님들은 자녀에게 지혜보다 지식을 강요합니다. 공부 잘하고, 명문대에 입학하라고 주문합니다. 지식을 최고로 여기기 때문에 지혜는 자리에서 밀려납니다. 부모가 지혜를 원치 않고 지식 원하는데 자녀가 지혜 얻을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세상을 사는 데는 지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고3보다 더한 것이 고3 어머니 병이라고 합니다. 수능 수험생 어머니들은 1년 내내 고3처럼 생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성적에 따라 자신들 인생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너무 지식만을 추구하고 살다보니 이에 대한 역기능들도 많이 나타납니다. 얼마 전에는 과학고 학생회장이 자살하였습니다. 성적 문제인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는 고3학생이 시험 도중에 투신자살하였습니다. 부정행위 때문에 꾸중을 들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사실은 꾸중이 아니라 성적에 대한 압박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최고의 지혜, 참 지혜는 자신과 하나님을 참되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가련하고 상실된 죄인들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하시려고 열망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혜는 분별력입니다. 지혜란 히브리 단어로 ‘살아가는 기술’이란 뜻입니다. 지혜는 삶의 분별력입니다. 어떤 것이 참 삶인지 분별하는 기술이 지혜입니다. 지혜란 라틴어로 sapere 즉 음미하다 또는 맛보다 라는 뜻입니다. 지혜는 삶을 음미하는 것이고 살아가는 기술을 의미합니다.
지혜는 고난 중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독일 베를린의 막스플랑크 교육연구소는 15년 동안 1천명을 대상으로 나이와 지혜의 연관성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연구를 통해 지혜로운 사람들이 갖는 몇 가지 공통점을 밝혀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역경을 극복했거나 고난을 체험한 경험이 있습니다. 둘째,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경험이 있습니다. 셋째, 일찍 인생의 어두운 단면을 체험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연구소는 결론으로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혜를 얻는다고 발표했습니다. 지혜는 인생을 깊이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혜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자들도 지혜의 삶이란 곧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현대의 예민하고 고상한 이교도들은 죽음으로 들어서는 삶으로 들어가는 자상의 신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살면서도 죽음을 준비하고 압니다. 죽음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준비된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청바지를 입은 예수’에서 “지혜는 침대에서 흔들어 깨워야 하는 사람들을 방문하지 않는다. 지혜는 준비되고 그 음성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과 만나 이야기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지혜는 준비된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이런 지혜가 우리 아이들에게 충만하여 세상을 지혜롭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여호와를 경외하기 원하는 아버지의 소망입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경외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존 파이퍼는 “하나님은 하나님이길 좋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토미 테니의 최근의 책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굶주린 예배자’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모세는 심지어 이적이나 은사도 갈구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하나님을 원했다. 하나님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알기를 갈망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압니다.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사가 아니라 은사 주시는 분을 갈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갈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중심의 삶이어야 합니다.
경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경외하는 말은 성경에 170번 나옵니다. 경외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경건한 두려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을 깨달았을 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시편 34:9에는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합니다. 잠언 19:23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시편 128:4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경외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경외는 복의 비결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복 받으리라고 합니다. 부족함 없으리라고 합니다. 생명에 이르리라고 합니다.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건지시리라고 합니다. 도와주시리라고 합니다. 언약을 보이리라고 합니다. 살피리라고 합니다. 주께 돌아오게 하리라고 합니다. 칭찬을 받게 하리라고 합니다. 경외하는 자에게는 한결같이 나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경외하여 얻는 것은 수십 가지에 달합니다. 경외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쏟아집니다. 이런 축복이 있는데 어찌 신앙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라지 않겠습니까? 자녀가 하나님을 잘 경외하기를 바라세요. 성경에 열거된 그 복만 받아도 세상 사는데 걱정이 없겠습디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대통령은 “이웃이 일자리를 잃으면 경기 침체지만 자신이 잃으면 공황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여호와 경외만 하면 경기 침체, 경제 공황 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런 세계적인 문제는 문제도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이런 형통함이 있습니다.
셋째, 바른 길로 인도하기 원하는 아버지의 소망입니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고 합니다. 지혜를 얻으면 바른 길로 갑니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바른 길은 바른 곳으로 인도합니다. 지혜로운 아이는 이렇게 바른 길을 갈 줄 압니다.
바른 길을 가는 것은 가야 하는 길을 아는 것입니다. “길이 아닌 곳에 가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엉뚱한 사람들은 길이 아닌 곳이 더 재미있다고 합니다. 지난번 이집트에 갔을 때 사막에서 오프 로드로 달려보니 그 것 참 재미있습디다. 이것이 인간의 그릇된 본능인 듯싶습니다.
토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만 이미 약속된 길을 걸을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도 사람들의 인정 여부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갈 길을 가셨습니다.
도덕적 길은 명확한 길입니다. 상식이 통하여 모두가 공감하는 길입니다. 길을 묻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안내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 길을 따라 200미터 정도 내려가지 말고요. 그런 다음 모퉁이의 주유소에서 왼쪽으로 돌지 말고요.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면 슈퍼마켓이 있어요. 거기서 왼쪽으로 돌지 말고요”. 우리들 대부분은 무엇을 하겠다 보다는 무엇을 하지 않겠다는 전제하에 일하려고 고집한고 합니다.
신문을 볼 때마다 경악스런 일들이 늘 있습니다만 지난 주간엔 정말 엽기 부인 이야기가 났습니다. 20대의 이 여인은 남편의 눈을 찔러 살해했습니다. 둘째 남편도 눈을 찔러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보험금 6억을 타내어 마약에 탕진했다고 합니다. 길을 잘못 가도 한참 잘못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른 길은 영적인 길입니다. 노무라 마사키의 ‘내 하루의 도둑맞은 58분’이란 책에 보면 술자리에서 악마의 유혹만큼 위험한 세 가지 ‘더’가 있다고 합니다. “한 잔만 더, 한 집 더, 한 곡 더”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더’라는 말이 나올 때가 가장 기분 좋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늘씬하고 예쁜 여인을 의미하는 사자성어가 무엇인지 아세요? “쭉쭉빵빵”이랍니다. 이 말이 할머니에게 해당되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왜 할머니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젊은 여성에게 해당되는 말입니까? 쭉쭉빵빵은 얼마 못 간다는 말입니다. 얼마 못 간다는 말은 지혜로운 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지혜롭게 선택합니다.
디모데후서 2:1에는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라고 합니다. 지혜는 은혜 가운데 강하게 합니다. 강하게 하는 것은 지혜 밖에 없습니다. 지혜로 강한 우리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 론
뉴욕의 한 에이즈 병원이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세운 병원입니다. 젊은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 죽음을 기다린다고 하여 수녀가 가 보았더니 그의 눈은 생을 마감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제 아버지의 용서를 받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수녀는 수소문하여 아버지가 있는 곳을 알아내어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병실에 들어온 다음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내 아들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를 외쳤습니다. “아버지, 저를 용서해 주세요”. 두 사람은 서로 부드럽게 안았습니다. 두 시간 뒤에 그 젊은이는 눈을 감았습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변화시킵니다. 내 아들에게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내 아들이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내 아들이 바른 길 가기를 바랍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에게 사랑으로 권면하므로 우리 자녀가 지혜가 풍성하게 자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라
잠 23장 15~26절 / 김명환 목사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교육시킴으로 행복하고 축복 받는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일찍이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부모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너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이 좋은 친구도 생기고, 세상에서도 존경받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명령입니다.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기까지 부모의 영향을 받고 살아왔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 만큼 가정은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함에 틀림없습니다. 인간이 부를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복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요, ‘어머니’일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은 여러분 가운데에는 육신의 부모님이 이미 고인이 되셔서 사랑하는 부모님의 이름을 다시 부를 수 없는 분도 계시겠지만, 우리는 항상 부모님의 얼굴에서 주름살을 펴드리고 잃어버린 웃음을 회복하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지만 동시에 “사랑을 나눠주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늘 사랑만 받고 자란다면 남에게 베풀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모 된 우리가 자녀들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22:6)고 했습니다. 또한 자녀가 잘못할 때에는 엄하게 훈계해야 합니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언23:13-14).
이 시대의 부모들은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지 못한다는 미안함 때문에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려고 합니다. 잔소리는 많이 하지만 엄하게 훈계하여 바른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사랑의 매를 들지 못합니다. 성경은 사랑의 매를 들게 될 때에 자녀의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의 바른 훈계를 받고 믿음과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만큼 부모님에게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요한3서 4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부모님을 즐겁게 행복하게 하는 자녀는 어떤 자녀인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승리하는 자녀입니다(17절).
잠언서 전체의 주제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얻는 복과 은혜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언1:7). 왜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별히 하나님을 경외하라 말씀하셨을까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가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섬기지 말아야 할 대상을 섬기게 될 것을 아시고 각별히 명령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필요한 물질을 섬기든지, 권력을 섬기든지, 쾌락을 섬기든지, 인생은 무엇인가를 섬기며 살아가도록 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섬기든 진정 섬길 대상이 아닌 대상을 섬긴다면 그로 인해 인생이 불행해지고 더불어 가정과 사회까지도 부서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가 항상 여호와를 경외함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우리는 마음의 경영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부모님의 교훈을 따라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부모님들은 우리 자녀들에 대해 마음 든든하고 흐뭇해하실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삶의 원칙이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남들이 다 넓은 길을 택한다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이 가신 좁은길을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삶의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진리와 훈계와 명철을 끝까지 붙잡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 부모님들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와 자손들을 바라볼 때에 ‘믿음의 사람이구나’라는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쁘게 기대하실 수 있는 부모님이 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왜곡된 가치관 속에서도 믿음의 정도를 걸어갑시다.
이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자녀의 길인 것입니다.
2. 대인관계에 성공하는 자녀입니다(20-21절).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 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우리의 부모들은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고 있습니다. 자녀의 성공이 나 자신의 성공보다 더 기뻐하시는 분들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결코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술을 즐겨하는 자, 탐식하는 자, 게으른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사람들은 육적, 영적으로 황폐하게 될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인관계의 품격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가족이나 영적 지도자 어느 누구에게도 떳떳하게 소개할 수 있는 사람들을 사귀십시오. 피해야 할 대상이 또 있는데 성적으로 유혹하는 음녀를 피하라고 말합니다. (27-28절).
성적인 유혹은 가정을 허물고 인생을 깊은 수렁에 빠뜨려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가정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사단의 전략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있어 우리의 가정을 믿음과 사랑으로 건강하게 지켜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자녀의 길인 것입니다
3. 부모님을 존중하는 자녀입니다(22절).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예로부터 우리나라에는 ‘60 먹은 아들도 80 노모 앞에서는 재롱을 피워 즐겁게 해드린다’는 말이 전해 옵니다. 그만큼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자녀로서 부모님을 좋아해야 합니다. 부모님에 대해 따뜻한 마음으로 따르고 좋아하는 마음은 그분들을 즐겁게 해드리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이 멀어져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본문 26절 말씀에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26절). 부모는 자식들에게 잊혀진 존재, 떠밀려진 존재가 아니라 자식들의 마음에 소중하게 자리잡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부모님의 사랑에 깊이 묵상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먼저의 사랑, 끝까지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존중받아 마땅한 분들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조롱하며 순종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식은 그 인생이 실패하고 파멸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잠언30:17).
부모를 존중한다는 것은 부모님의 생각을 존중하고 그 존재에 대해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자녀된 우리는 부모님이 높은 자존감과 자녀들에 대한 한없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이 그의 모친 모니카의 기도를 통해 늦은 나이에 회심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참회록’에 “나는 너무 늦게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부모님께 “나는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에 너무 늦게 철이 들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부모님이 병드신 후에, 돌아가신 후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부모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자녀입니다(26절).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우리는 부모님들의 희생을 통해서 부모님들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부모님들의 사랑을 통해서 부모님들보다 더 많은 삶의 지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들의 헌신을 통해서 부모님들이 살아오신 삶의 수준보다 더 높은 삶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이만큼의 수준까지 이르기까지는 부모님들의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우리들의 성장함을 바라보고 매우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장하는 반면에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그대로 계셨습니다. 아니 그대로 계신 것이 아닌 점점 더 후퇴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고 싶은 것 자식 때문에 하지 않았기에 후퇴하는 삶이었습니다. 잡숫고 싶은 것 자식 때문에 잡숫지 않았기에 후퇴하는 삶이었습니다. 입고 싶은 옷 자식 때문에 입지 않았기에 점점 더 초라해지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인해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하나 알아야할 사실은 우리들의 부모님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가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장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결과로 지금의 우리와 부모님 사이에는 갭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수준차이, 생활의 차이,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부모님들의 수준을 우리들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처럼 부모님들이 생각하기를 요구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이전에 먼저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성육신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을 하나님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이전에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내려오셨음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리고 철저히 낮아지는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낮아짐의 극치가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해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들을 위해 먹을 것을 참으셔야 했던 우리들의 어머님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들을 위해 입을 것을 참으셔야 했던 우리들의 아버님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셔야 했던 부모님들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들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신 부모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효도입니다.
부모님들 앞에서 우리들의 수준은 이제 낮아져야 합니다. 그 분들의 생각으로 우리가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졌던 모든 삶의 수준들은 부모님들 앞에서는 모두 낮아지는 섬김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자녀가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자녀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받아 오래 사는 비결입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자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자녀인 우리가 부모님에게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님이 천국에 입성하실 수 있도록 믿음의 신발을 신겨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문제만큼은 실패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믿음의 신발을 신고 천국에 기쁨으로 입성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자녀의 근본된 도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하듯이 부모님께도 감사해야 합니다. 부모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을 경히 여긴 것이 있다면 회개합시다. 부모의 신앙의 유산을 잘 물려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인생이 됩시다. 우리 모두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자녀가 되어 모든 가정들이 지상의 에덴동산으로 쓰임 받도록 합시다.
부모를 행복하게 하는 자녀
잠 23장 15~28절 / 오정호 목사
인간이 부를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복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요, '어머니'일 것입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은 여러분 가운데에는 육신의 부모님이 이미 고인이 되셔서 사랑하는 부모님의 이름을 다시 부를 수 없는 분도 계시겠지만 우리 예수 믿는 자녀는 부모님의 얼굴에서 주름살을 펴드리고 잃어버린 웃음을 회복하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일반 사회는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고해서 부모를 섬기지 않는 불효자라고 오해합니다. 우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지만 부모의 은혜와 덕을 기리고 추모하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드리는 제사제도는 성경적인 믿음의 관점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부모님의 살아 생전에 효도하고 최선을 다해 섬기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효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지만 동시에 "사랑을 나눠주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늘 사랑만 받고 자란다면 남에게 베풀줄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모된 우리가 자녀들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은 "마땅히 행할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22:6절). 또한 자녀가 잘못할 때에는 엄하게 훈계해야 합니다(23:13-14절). 이 시대의 부모들은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지 못한다는 미안함 때문에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려고 합니다. 잔소리는 많이 하지만 엄하게 훈계하여 바른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사랑의 매를 들지 못합니다. 성경은 사랑의 매를 들게될 때에 자녀의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말합니다(23:14절).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과 진리안에서 행하는 것 만큼 부모님에게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요한삼서 4절).
우리는 본문을 통해 부모님을 행복하게 하는 자녀는 어떤 자녀인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부모님을 존중하는 자녀입니다(22절).
우리는 부모님을 존중하고 부모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부모가 건강하고 재산이 있을 때에는 잘 섬기다가 부모가 나이가 들고 재산을 자식들에게 다 물려준 뒤에는 부모에게서 등을 돌리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의 소원은 넉넉한 용돈이전에 자녀들의 부모 사랑과 섬기는 마음을 원합니다(26절). 부모는 자식들에게 잊혀진 존재, 떠밀려진 존재가 아니라 자식들의 마음에 소중하게 자리잡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존중받아 마땅한 분들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조롱하며 순종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식은 그 인생이 실패하고 파멸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30:17절).
부모를 존중한다는 것은 부모님의 생각을 존중하고 그 존재에 대해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자녀된 우리는 부모님이 높은 자존감과 자녀들에 대한 한없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이 그의 모친 모니카의 기도를 통해 늦은 나이에 회심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고백록'(Confession)에 "나는 너무 늦게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부모님께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너무 늦게 철이 들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삶의 원칙이 분명한 자녀입니다(17절).
삶의 원칙이 분명한 사람은 한탕주의나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24:19절). 우리는 마음의 경영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부모님의 교훈을 따라 바르게 해야 합니다(19절). 그리할 때 우리의 부모님들은 우리 자녀들에 대해 마음든든하고 흐뭇해하실 것입니다.
예수믿으면 삶의 원칙이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남들이 다 넓은 길을 택한다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이 가신 좁은길을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삶의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진리와 훈계와 명철을 끝까지 붙잡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 부모님들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23절). 세상의 모든 왜곡(歪曲)된 가치관 속에서도 믿음의 정도(正道)를 걸어갑시다.
3. 대인관계에 성공하는 자녀입니다(20-21절).
본문은 우리가 결코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술을 즐겨하는 자, 탐식하는자, 게으른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사람들은 육적, 영적으로 황폐하게 될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인관계의 품격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가족이나 영적지도자 어느누구에게도 떳떳하게 소개할 수 있는 사람들을 사귀십시오. 피해야 할 대상이 또 있는데 성적으로 유혹하는 음녀를 피하라고 말합니다(27-28절). 성적인 유혹은 가정을 허물고 인생을 깊은 수렁에 빠뜨려 헤어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가정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사단의 전략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있어 우리의 가정을 믿음과 사랑으로 건강하게 지켜내야 합니다.
4.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승리하는 자녀입니다(17절).
잠언서 전체의 주제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얻는 복과 은혜입니다(1:7절).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을 통해서 우리의 자녀,경제,사회,신앙,내세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승리자가 되십시오.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와 자손들을 바라볼 때에 '믿음의 사람이구나'라는 마음에 확정을 가지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쁘게 기대하실 수 있는 부모님이 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슈미트 라는 여집사님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슈퍼마켓 계산대에 줄을 섰습니다. 슈미트 집사님의 바로 앞에 서있는 어린 남매의 손에는 예쁜 어른신발이 들려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가진 돈이 부족했습니다. "어머니가 너무너무 좋아하실 텐데 이 신을 사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슬퍼하는 어린 남매를 지켜본 슈미트 집사님은 왜 그 신발을 사려고 하는지 남매에게 물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우리 어머니는 몸이 아파 이제 곧 예수님께 가야한대요. 그래서 저희는 어머니가 가시는 천국은 너무너무 좋은 곳이니까 좋은 신발을 신고 가시게 해드리기 위해 이 신발을 사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슈미트 집사님은 자신의 돈을 보태주어 그 어린 남매가 어머니를 위한 신발을 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님이 천국에 입성하실 수 있도록 믿음의 신발을 신겨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문제만큼은 실패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믿음의 신발을 신고 천국에 기쁨으로 입성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자녀의 근본된 도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부모를 경히 여긴 것이 있다면 회개하십시오. 자녀로서 부모를 위로하는 아름다운 도리를 감당하십시오. 부모의 신앙의 유산을 잘 물려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받는 인생이 되십시오. 우리 모두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자녀가 되어 새로남 모든 가정들이 지상의 에덴동산으로 쓰임받도록 합시다.
내게 있는 것
내게는 어머님의 기도소리가 녹아있네 세포 마디 마디 마다
내게는 아버님의 훈계의 음성이 녹아있네 인격의 갈피 갈피마다
이 사실 깨닫지 못했을 때 나는 오직 나인줄 알았다네 어리석은 생각들
내게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가 흘러내리네 영혼의 골짜기마다
내게는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흘러내리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이 사실 깨닫지 못했을 때 나는 오직 내 힘으로 뛰어온 줄 알았다네 어리석은 생각들
내게는 사도바울의 주님 사랑의 열정이 자리잡고 있네 사역의 현장마다
내게는 손양원 목사님의 양떼사랑이 자리잡고 있네 사역 이끝에서 저끝까지
이 사실 깨닫지 못했을 때 나는 오직 역사의 외톨이로 서 있는 줄 알았다네 어리석은 생각들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잠 23:17~23 / 박덕기 목사
오늘 우리 교회 각급 주일학교의 졸업 예배로 드리면서, 먼저 여러분의 졸업을 축하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짤막하게 권면할려고 합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수학자요 철학자였던 파스칼은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1)하나님을 찾다가 발견한 사람이고2)하나님을 찾고 있으나, 아직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고 3)하나님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 첫째 종류의 사람들은 이치에 맞으며 행복한 사람들이고, 둘째 종류의 사람들은 이치에는 맞으나 불행한 사람들이고, 셋째 종류의 사람들은 이치에도 어긋나고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한 불행했던 지식인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전남 대학교 상대 교수였던 오모 교수인데, 대학 시절 총학생회장을 지냈고, 부인은 부회장을 지냈던 사람이었습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경제학에 관한 저서도 출판한 바 있는 전도가 양양한 엘리트 교수였는데, 갑자기 암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가운데 병상에서 목사님을 초청하여 전도를 받고 세례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임종과 장례식은 일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건강할 때의 모습? 장례식-장마철-부패한 시신에서 흘러나온 물-그 냄새 때문에 집에 있던 사모님이 토할 정도였다)그런데 이 분을 불행하다고 하는 것은, 이같은 비극적인 죽음보다는 그가 대학을 마치고, 유학을 하고, 40세가 되기까지 성경도, 예수 그리스도도, 구원의 길도 전혀 몰랐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계속하여 세상 지식만을 탐구하기에 여념이 없다가, 그의 모든 지식이 한 장의 휴지 조각만큼도 쓸모 없게 된 임종이 가까웠을 때에야,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분은 삶의 최종 순간에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세례까지 받고 세상을 떠났으니, 한편으로는 큰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과 비교해 볼 때, 여러분은 이렇게 어린 학창 시절에 하나님을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인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혜와 노력으로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여러분을 찾으시고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솔로몬 하면 무엇으로 유명합니까?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 솔로몬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소서' 라고 간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같은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존영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너로 치리 하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존영도 주리니, 너의 전의 왕들이 이같음이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이같음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잠언 3000을 말하였고, 노래를 1005편 지었습니다. 그리고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논할 정도가 되었고,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역사상 이렇게 박식하고 지혜가 뛰어난 인물이 없을 것입니다. 그토록 지혜로운 솔로몬이 쓴 성경이 바로 잠언서입니다. 잠언을 다른 말로 지혜서라고도 합니다. 잠언은 무궁무진한 지혜의 보고이기도 합니다. 많이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토록 지혜로운 솔로몬이 쓴 잠언, 지혜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그 잠언 중에서도, 으뜸 가는 지혜를 무엇이라 했습니까? 잠 1:7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요'라고 했고, 잠 9:10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시간 그 지혜로 유명한 솔로몬의 권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로 여러분에 간곡히 권고합니다. 따라서 하세요.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여기 '경외' 라고 하는 말은 '공경할 敬'(REVERENCE)자와 '두려워할 畏'(FEAR)자로 쓰여졌는데, 구약에서 신앙이란 말과 동의어라고 할 수있습니다. 신앙이 무엇이냐? 곧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시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백성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듣지 않으시랴' 여러분 다시 한번 이 말씀을 생각해 보세요.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않으시랴'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말씀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의 모든 언행 심사를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하면서 죄짓지 말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7절에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어도 잘만 사는데.....아무게는 불량해도 출세만 하는데..... 저 친구는 주일을 모르고 살아도 공부만 잘하는데........ 아무게는 하고 싶은 짓 다하고, 먹고 싶은 것 다먹고, 마음껏 죄지어도 아무 일이 없는데...... 나는 이렇게 예수 믿는다고 아까운 젊음을 다 허비하는 게 아닌가? 하면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다가는 유혹에 빠지고 타락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악인의, 불신자의 성공이나 출세나 부귀영화를 절대로 부러워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시 92:7에 '악인은 풀같이 생장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흥왕 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고, 대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그 다음에 여러분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합니다. 그가 사귀는 친구를 보아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있습니다. 잠 27:17에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20-21에 '술을 즐겨 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취하고 탐식 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헤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술마시는 자, 탐하는 자, 게으른 자들을 가까이 하지 말고 친한 친구로 사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 22절에 보면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고 했고, 25절에 보면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순서상 부모 공경에 대해서 지금 말하는 것뿐이에요. 하나님 공경 다음에는 부모님을 극진하게 공경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할 줄 모르면, 그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23절에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세상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근 20여년 가까이 돈과 시간과 정성을 다바쳐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지식은 얼마나 귀합니까? 그래서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말은 지금도 진리인 것입니다. 象形文字가 쓰여진 토판(흙판)은 고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헌입니다. 그런데 이 토판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줄 압니까? 고고학적으로 그 가치를 다 측정할 수 없는 귀중한 토판을 부수어 비료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고고학자가 비료 몇 가마니와 바꾸어 차지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요 17:3에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했어요. 여러분! 세상 어떤 책에, 어느 학문에 영생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까?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불변하신 진리 그 자체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예수님과 바꾸지 말라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찬송가 작시자 R. F. Miller 여사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린 에서를 가리켜 '성경은 망령된 자' 라고 했어요.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 버린 가룟 유다의 종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요?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고 했어요.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공부에, 대학교 가는 것에, 친구나, 연인 때문에, 돈 때문에, 술 때문에, 세상의 쾌락 때문에 예수님을 팔지 마세요. 그리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세요. 그리하면 반드시 여러분의 장래가 있겠고, 여러분의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어버이의 즐거움
잠 23장 19~25 / 서정호 목사
시인 피천득씨의 글 가운데 아름다운 글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노래입니다. "30대에 세상을 떠난 내 어머니는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내가 새 한 마리도 죽이지 아니하고 살아온 것은 내 엄마의 자애로운 마음이요, 햇빛 속에 웃는 나의 미소는 내 어머니한테서 배운 웃음입니다. 나의 간절한 희망이 있다면 내 어머니의 아들로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자녀들의 마음은 이렇게 어머니의 숨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풍요로운 사랑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 땅에 살아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며 살 수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세상에서 가장 고마우신 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나누어주신 분입니다. 때문에 내 아버지 내 어머니는 이 땅에서 우리의 공경을 받아 마땅하신 분들입니다. 세상 최고의 스승이 있다면 아마 하나님을 가르쳐 주신 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최고의 스승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귓전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음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어머니요 가장 위대한 스승 아니겠습니까? 내 어머니는 우리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분이시오, 우리 하나님은 내 어머니 같으신 분이십니다.
프랑스에는 역사상 69명의 왕이 집권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세 사람의 왕만이 백성들로부터 한없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공통점은 모두 친어머니의 젖을 먹고 친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난 왕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체험한 왕은 그 사랑 때문에 백성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지요. 그 왕의 마음에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심겨져 있었기에 백성들을 사랑하는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듯 우리 나라도 서구 문화를 반영해서 가족 관계는 급속하게 붕괴되고 부모님을 모시고 효도를 다하며 사는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부모 자식간의 인정과 사랑은 끊어지고 메마르고 가시밭 같은 관계로 변하고 있습니다. 문화는 세련되고 경제적으로는 나아졌지만 좋았던 가족 관계는 급속도로 파괴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던 아름다움은 지난날의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가시고기와 우렁이
부성애를 나타내는 가시고기와 모성애가 강한 우렁이가 떠오릅니다.가시고기는 소설로서 더욱 유명합니다.가시고기는 산란기에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나면 숫놈은 알이 부화될 때까지 신선한 공기를 제공하고 침입자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새끼들이 둥지를 떠날 때 생을 마감하는 작은 물고기입니다.가족을 위해 수고하다 조용히 한 세상을 마감하는 아버지들의 함축된 모습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드라마입니다.또 우렁이는 제 몸에다 알을 낳으며 새끼들은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성장합니다.한 점의 살도 남김없이 새끼들에게 먹이로 주고 빈 껍데기가 되어 조용히 물에 떠내려갑니다.가족을 보호하고 울타리가 되는 아버지의 희생과 살을 깎아 먹이는 어머니의 희생은 어디에서 보상받게 될까요? 성경은“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지만 나이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서서히 짐이 되는 존재로 전락하는 듯 합니다.자녀들이 제 아무리 효도를 다한다 해도 부모의 사랑을 어찌 다 갚을 수 있을까요? 어버이주일에 가시고기와 우렁이를 생각하며 못 다한 효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어버이 주일에는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슴에 새기며 감사하고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다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자녀들은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에 기리며 부모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보다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다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몇 년 전에 삼성생명에서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업광고를 냈던 적이 있습니다.
스물 하나 - 당신은 고개를 두 개 넘어 얼굴도 본 적 없는 김씨 댁의 큰아들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스물 여섯 - 시집온 지 오 년만에 자식을 낳았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시댁 어른들한테 며느리 대접을 받았습니다.
서른 둘 - 자식이 밤늦게 급체를 앓았습니다. 당신은 자식을 업고 읍내 병원까지 밤길 이십 리를 달렸습니다.
마흔 -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당신은 자식이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자식의 외투를 입고 동구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식에게 당신의 체온으로 덥혀진 외투를 입혀주었습니다.
쉰 둘 - 자식이 결혼할 여자라고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당신은 분칠한 얼굴이 싫었지만 자식이 좋다니까 당신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예순 - 환갑이라고 자식이 모처럼 돈을 보냈습니다. 당신은 그 돈으로 자식의 보약을 지었습니다.
예순 다섯 - 자식 내외가 바쁘다며 명절에 고향에 못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동네 사람들에게 아들이 바빠서 아침 일찍 올라갔다며 당신 평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오직 하나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한평생. 하지만 이제는 깊게 주름진 얼굴로 남으신 당신...... 우리는 당신을 어머니라 부릅니다.
한 아버지의 고백
몇 해 전에 신문에 기고되었던 내용인 한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스물 아홉 살에 그는 열 네 시간을 기다려서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라고 말합니다. 그 부인이 산실에 들어가서 산고를 치르고 있을 때, 그는 문 밖에서 무려 열 네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려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른 일곱 살에 그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들어가서 우등상장을 타왔을 때 그 걸 액자를 만들어서 방에 걸어놓고 쳐다 볼 때마다 그렇게 행복해했다, 누렇게 바래질 때까지.
마흔 여덟 살에 자식이 대학을 입학한다고 입학시험을 치르게 될 때, 이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할 수가 없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초조한 시간으로 기억된다하는 얘기입니다.
쉰 세 살에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아버지 내의를 하나 사왔을 때, 쓸데없는 데 돈을 썼다고 일단 나무랐지만 밤이 늦도록 내의를 입어보고 또 입어보고 만져보면서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예순 한 살에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놈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데, 나는 멀찍이 서서 나이 들었지만 처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마음입니다. 그저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귀한 것입니다.
부모님을 즐겁게 하라. 그리고 내 자신이 부모님의 길을 즐거워하라. 기쁘게 해드리라고 말합니다. 역시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일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라고. 존재의 가치를. 그의 지혜, 그의 경험, 그의 사랑 그리고 그 깊은 잔소리 속에 중요한 교훈이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구제의 대상이 아닙니다. 측은히 여기던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효가 아닙니다. 부모는 공경하는 것입니다. 존경이 없는 사랑은 결코 효도일 수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지 마시고 높이 존경하고 그 지혜와 경험과 그 거룩한 본을 우리가 존중해야 됩니다.
또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효할 수 있는 길은 의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아야 됩니다. 부모님의 마음이라는 것은 깊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높은 도덕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언제나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효의 지름길은 내가 의롭게 사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보상해 드려야 하니까요.
또 하나는 지혜로운 자가 되여야 한다고 성경 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듣는 지혜를 가져야 됩니다. 청종하는 지혜입니다.
또 한가지 오늘 성경이 증거하시는 것은 "내 길을 즐거워하라." 고 말합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은 부모님의 길, 그의 선택, 그의 철학, 그의 이상, 그의 살아온 생을 내가 기뻐해야 됩니다. 부모님은 마음속에 지금 무언가 잘못 살았다고 하는 그런 후회가 있습니다만 자식의 행위를 통하여, "아닙니다. 부모님은 잘 살았습니다. 성공적으로 살았습니다. 훌륭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으로 하여금 살아온 생에 대하여 후회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걸 자랑하게 만들 수 있도록 부끄러운 일생을 자식이 보상해 주어야 됩니다.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습니다.
효 그 자체가 복입니다. 효가 있는 가정이 복됩니다. 효가 복의 근본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여러분, 자녀교육을 바로 하고 싶습니까? 효도하십시오. 그리고 내버려둬도 자녀들은 저절로 훌륭하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내 자식 잘 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즐겁게 합시다. 효는 문화의 유산이 아닙니다. 효는 이 나라의 단순한 도덕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적 진리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이 크나큰 원리와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사회에서 노인은 인생 막바지 황혼을 걷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생 안식년으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년에 일을 할 수 없다 해도 심리적인 열등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구약성서나 유대인의 전통에서 노년기는 구원의 희망을 향해 가는 시기요 인간 성숙의 정점인 자기 실현을 위한 안식년에 접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인간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고귀한 목적에 자신을 바치게 됩니다.
사람이 늙으면 세 가지 서글픔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아픈 데가 많습니다.
늙으면 몸이 노쇠함으로 자연히 아픈 데가 많아집니다.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쑤시고 무릎도 아픕니다. 그러나 대부분 자식들의 눈치보느라 아파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어디가 아프신지 관심을 가지고 자주 물어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외로움을 잘 타십니다.
젊었을 때는 바빴지만 늙으면 한가해집니다. 젊어서는 하는 일이 많다 보니 만나는 사람도 많고 외로워할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현역에서 물러나 일손을 놓으셨기 때문에 한가해지고 만나는 사람도 적어집니다. 시간은 많은데 하는 일이 적어 외로운 시간이 많습니다. 시집간 딸 생각, 외국 나간 아들 생각으로 밤낮 자녀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건강한지 늘 궁금해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식들이 자주 찾아 뵙지는 못한다 해도 부모님께 자주 안부 전화를 드려야 합니다.
셋째로, 배고픔을 자주 느끼십니다.
모든 기능이 약해지다 보니 마음뿐이지 많이 잡수실 수가 없습니다. 입맛도 예전 같지 않으십니다. 더구나 많이 잡수시면 탈이 납니다. 그래서 자주 시장기를 느끼십니다. 몸도 허하고 기름기도 없으니 중간 중간 시장하실 때마다 잡수시도록 눈깔사탕이나 땅콩, 과자... 좋아하시는 간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늘 챙겨 드리시기 바랍니다.
효도는 복의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며, 가정이 화목해지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아들 딸도 효자가 될 것입니다. 부모들이 할머니 할아버지께 어떻게 했는지 보고 배웠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 할 것입니다. 어느 분가해간 자녀들은 하나님께만이 아니라 매번 십일조를 부모님께 보내오는 자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하듯이 부모님께도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그래도 그 은혜를 다 갚지 못합니다. 노인에 대한 사랑은 곧 자기의 미래에 대한 사랑 곧 자기 사랑입니다. 노인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노인 되었을 때를 생각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노인을 사랑하면 바로 그것은 장차 올 내 미래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 동안 부모님께 불효한 것은 없는지 생각해보시고 이제부터는 참 효도를 하기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제일 먼저 만난 사람
여러분이 이 땅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부모님이지요. 부모님은 인간관계의 첫 출발점이십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부모님은 우리에게 가장 많이 웃음을 보여주신 분이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서 가장 많이 눈물을 흘려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아플 적에 우리가 병들었을 때에, 우리가 힘들고 괴로울 때에 가장 많이 걱정하고 염려해 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에 어떤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책임지고 그 필요함을 채워주신 분들이 바로 부모님입니다.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위해서 철저하게 희생하시는 분입니다. 부모님은 자녀들을 위해서 끝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의 뜻에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은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강력하게 명령하십니다.
사람은 철이 들고나서야 부모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암전문의로 명성을 날리는 한 의사는 5월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불효자라는 죄책감에 마음이 짓눌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종종 재래시장을 찾곤 하는데 시장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나물을 팔고 계신 할머니를 볼 때마다 고통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런 할머니를 볼 때마다 자신의 어머니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며 참회의 눈물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나는 가난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가난을 벗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막노동을 하셨는데, 막노동을 하던 중에 철근에 깔린 어머니를 구하려고 하다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나물을 캐고 다듬어서 시장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나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요. 어머니는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용돈이라고 내게 기쁜 마음으로 주셨어요. 그런데 나는 그게 싫어서 뿌리치고 달아나곤 했어요. 나는 잘먹고 잘입지는 못했지만 악착같이 공부했지요. 그래서 부자 집 자식들보다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어요. 부자 집 자식들은 그런 나를 미워했어요...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어느 날 4교시 수업이 끝날 때에 친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복도를 보니 낯익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의 어머니가 절뚝거리면서 교실로 들어오시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시장에 내다 팔려고 다듬은 나물 한 봉지를 들고서 찾아오신 겁니다. 그러자 부자 집 아들이 어머니의 절뚝거리는 흉내를 내면서 나에게 '야, 너네 엄마 병신이었냐?' 하며 비아냥거리는 거예요. 순간 교실에 있는 아이들은 '와~' 하며 낄낄대며 웃더라구요. 나는 참을 수 없어서 부자 집 아들을 정신없이 두들겨 패줬지요. 그리고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데, 잘 차려입은 아주머니와 그 부자 집 아들이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며 호통을 치고 있는 거예요."
"아니, 애비 없는 자식은 이래도 되는 거야? 못 배우고 없는 티 내는 거야 뭐야. 자식 교육 좀 잘 시켜. 어디 감히 우리 집 귀한 자식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느냔 말이야. 으응?. 어머니라는 작자가 병신이니 자식 정신이 온전하겠어?"
"부자 집 아주머니가 내뱉은 듣기 거북한 말을 듣고서도 어머니는 연신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느 것 하나 당당하지 못한 어머니의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차라리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렸어요.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수업료를 꼬박꼬박 챙겨주셨지요.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나를 불러 조용히 말씀하셨어요. "ooo야, 네 어머니께 잘해드려야 한다. 그리고 어제 주신 나물 맛있게 먹었다고 전해주거라."...
그후 17년의 세월이 흘렀고 나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처가(妻家)에서 병원도 개업해 주고 너무나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 나는 어머니를 잊고 살았어요. 솔직히 잊고 싶었던 겁니다. 어머니에게는 매달 생활비를 보내드리기는 했지만 한 번도 찾아가 뵙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병원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오는데, 우리 집 앞에서 한 노인과 가정부 아주머니가 싸우고 있는 거예요. 야윈 얼굴에 허름한 옷차림을 한 노인이었는데 다리를 절고 있었지요. 그 노인은 바로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 기뻐하면서 "애, oo아, 많이 좋아졌구나." 하고 다가 오시더라구요. 가정부가 보고 있어서 그랬는지 순간 나는 차가운 말로 어머니를 떠나 보내야 했습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할머니. 저는 oo이가 아니라 최oo입니다." 어머니는 힘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뒤돌아 가셨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자, 가정부는 "별 노망든 할머니가 다 있다"며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 후에 나는 한 달 동안 악몽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나머지 나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갔지요. 어머니는 내가 생활비를 보내주었지만 여전히 시장 한 귀퉁이에서 나물을 팔면서 기침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가만히 곁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았어요. 그때 나물을 사려는 한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할머니, 할머니는 자식이 없나요?"하고 물었어요. 어머니는 "아니여. 우리 아들은 서울 큰 병원 의사여. 자꾸 나보고 같이 살자고 하는디. 내가 싫다고 혔어.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자식 신세를 져. 요즘도 자꾸 올라오라는 거 뿌리치느라고 혼났구만. 우리 아들 같은 사람 세상에 둘도 없어. 우리 아들이 효자여, 효자." 하며 자랑하시면서 나물을 듬뿍 주고 있었어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고도 달려갈 수 없었어요. 곧장 어머니가 살고 있는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집에 들러 방 틈으로 돈 봉투만 넣어두고 돌아왔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1년이 지날 무렵이었어요.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내려 오라"는 부고였습니다. 부고를 받고 시장에 들렀는데, 정말로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어요. 집에는 선생님 혼자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잠시 후에 저를 불렀습니다. "oo아, 내 옆에 와서 잠깐 앉아라." 선생님은 나에게 어머니가 쓰시던 낯익은 보따리를 주시면서 "풀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보따리를 풀어 보니 돈이 있었습니다. "이거, 돈 아닙니까?"
"그래 돈이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다. 그 동안 네가 돌아오면, 혹시나 네가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모아두신 돈이란다. 너 하나 믿고 무슨 미련인지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너를 기다리셨다. 너에게 잘해주지 못해 항상 미안 해 하시더구나. 내가 가끔 네 어머니의 말동무가 되어 드렸는데, 나에게 네 어머니의 유언을 전하도록 부탁하셨단다. 그리고 네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도 함께 말이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나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네가 아주 어렸을 적이었다. 너를 키워주신 부모님이 퇴근길에 집에 오는데, 네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것을 보셨단다. 마침 너의 부모님은 자식이 없던 터라 너를 데리고 가서 키우기로 했단다. 배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었지만 너를 데리고 와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랐다고 하셨다. 어린 너를 혼자서 집에 둘 수 없어서 항상 공사판에 데리고 다녔는데, 네가 무너지는 철근 밑에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뛰어들었단다. 네 목숨이 위험하게 되자, 너의 아버지가 너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셨는데 그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게 되셨단다. 그러니 너는 아버지의 목숨과 어머니의 다리 덕에 살아났다는 거야. 다리를 다쳐 벌이가 시원치 않아 생활이 어려울 거라고 염려하던 주위 사람들이 네 어머니에게 "키워봤자 소용이 없으니 고아원에 보내라"고 했다는 구나.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너를 버리지 않고 당신의 목숨보다 귀하게 키웠다는 거야. 네가 의과대학에 다닐 때에 네 어머니는 암이 걸리셨는데, 그것을 알고도 네 학비를 대기 위해서 병원에 가지 않으셨단다. 그리고 네가 암 전문의가 되어 명성을 날리자, 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너를 보려고 물어물어 서울에 올라가셨다가 집에 내려오셨단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나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허울좋은 인간의 가식에 머리를 들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어머니의 영정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잔잔한 미소로 이 불효자를 바라보시고 계셨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이 불효자를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부모님이 우리의 곁에 가까이 계신 것 같습니까? 아니면 자식들이 부모님 곁에 가까이 있습니까? 사람은 철이 들고나서야 비로소 부모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전문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철이 든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철든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은혜를 알 때 비로소 철이 든 것입니다. 사랑의 깊이를 깨달을 때 철이 든 것입니다. 철들기 전에는 뭐든지 떨떠름합니다. 깊은 맛이 없어요. 철없는 사람에게 사랑은 아래만 보입니다. 내리 사랑만 하는 사람은 아직도 철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철들고 나서야 비로소 위를 바라보는 것 같아요.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것입니다. 철든 신앙인 만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철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철들지 못한 사람은 청개구리처럼 비가 올 때마다 웁니다. 철들지 못한 사람은 어버이날이 다가올 때마다 불효자로서 우는 것입니다. 복은 받았지만 복을 누리며 살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복을 받고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귀한 뜻이 담긴 시 하나를 소개합니다.
오해
우리 어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첫사랑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 몸은 절대 아프지 않는 어떤 특별한 몸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 꿈도 품은 적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 한 가지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짧은 파마 머리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얼굴이 고와지고 몸매가 날씬해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아무 불만도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전화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단 하루라도 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웃는 걸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마냥 기뻐만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외에 아는 여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배가 빨리 불러 와 좋은 음식 앞에서 먼저 일어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양복 입고 넥타이 매는 것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안 주머니에는 늘 돈이 얼마쯤은 들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좋아하시는 운동도 취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깊고 험한 길을 걸어가도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객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와 같은 오해를 오랫동안 해왔던 우리들입니다. 이제는 자녀로서 진정 어버이의 즐거움을 위해 후회 없는 효도를 다짐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축복의 제일 원리
잠 23장 19~26절 / 이한규 목사
< 효도는 축복의 제일 원리 >
누군가의 생일이 되면 사람들은 그를 위해 파티를 열고 생일선물을 줍니다. 그러나 사실 태어날 때 그가 한 일은 없고 그의 어머니가 고생했기에 생일 때는 오히려 어머님을 위해 파티를 열어드려야 합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는 무신론자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람들이 “엄마아빠를 쏙 빼 닮았네.”라고 하면 부모는 더 기뻐합니다. 대학입시 때는 무뚝뚝한 아빠도 소리 없이 기도하고 딸이 시집갈 때는 60이 넘은 아빠도 눈물샘이 젖습니다.
사랑의 표현 방법이 세련되지 못하고 가끔 잘못하긴 해도 부모의 자식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그 사랑을 알고 효도해야 복된 존재가 됩니다. 효도도 없이 복을 바라는 삶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대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대하는 모습을 평가합니다. 효도하면 생각을 초월한 신비한 축복이 신속히 주어집니다.
옛날에 지방을 방문하는 왕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노모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한 효자가 노모를 업고 수십 리 길을 걸어왔습니다. 왕은 그 효성에 감복해 큰 상을 내렸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한 불효자도 상을 노리고 억지로 노모를 업고 돌아오는 왕의 행차를 구경하는 척 했습니다. 왕이 그에게도 큰 상을 베풀라고 하자 동네 관리들이 말했습니다. “폐하! 그는 원래 불효자인데 상을 노리고 효자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그때 왕이 “효도는 흉내만 내도 좋은 것이다.”라고 하며 상을 내리자 나중에 그가 진짜 효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효도는 흉내만 내도 좋은 것인데 진짜 효도하면 얼마나 큰 복이 주어지겠습니까? 십계명을 보면 사람에게 행할 계명이 5계명부터 시작되는데 그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그 계명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입니다(엡 6:2). 효도는 축복의 제일 원리란 말씀입니다. 모든 불행의 제일 원인은 부모 공경의 부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복된 존재가 되려면 효도하십시오.
외국인들은 “한국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의 효자가 많다.”고 합니다. 명절 때가 되면 성묘한다고 교통이 막히고 몇 십만 원이 드는 제사를 차립니다. 어떤 분은 1년에 10번까지 제사를 드립니다. 처음에는 유교를 잘 믿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저도 20대 중반에 논어를 자세히 읽어보니까 사실 부모님 제사는 공자의 뜻도 아니었습니다.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느 날, 계로가 제사를 통해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계로가 한 번 더 물었습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공자의 원래 뜻은 살아생전에 부모님을 잘 섬기는 것이지 죽은 후 제사를 통해 조상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에도 무속적인 기독교가 있듯이 유교에도 변질된 사상이 많습니다. 제사문제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계산적입니다. 부모가 부자이면 자녀들 간에 효도경쟁이 벌어지고 돌아가실 때쯤에는 효도경쟁이 가열됩니다. 반대로 부모들이 가난하면 찬밥 신세입니다. 게다가 생활력도 떨어져 귀찮아지면 구석방으로 내몹니다. 그러다가 부모가 죽으면 언제 구석방으로 내몰았느냐는 듯이 다시 죽은 부모를 위해 열심히 제사를 드립니다.
결국 조상 제사는 조상의 덕을 기리려는 마음보다는 2가지 내면의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죽어 귀신이 된 조상의 은덕을 입으려는 의도와 또 하나는 부모님을 구석방으로 내몬 불효에 대한 벌을 피하려는 의도입니다. 그처럼 조상 제사까지 자기 복의 도구로 삼지 말라고 공자가 “어찌 귀신을 섬길 수가 있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죽기 전에 구석방에 방치해두다가 죽은 후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제사상을 차려 죽은 부모를 제사상 앞의 귀신으로 멋지게 부활시키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그런 제사보다 순수하게 부모의 삶과 교훈을 추모하며 선한 삶을 새롭게 다짐하는 추도예배가 얼마나 좋습니까? 아마 돌아가신 부모님도 추도예배를 원할 것입니다. 돌아가신 후에 제사를 잘 드리려고 하지 말고 살아생전에 사심 없이 부모님을 기쁘게 섬기십시오.
< 부모에게 효도하는 방법 >
효도할 때는 늘 다음 문제를 생각하십시오. 첫째, “누구를 위한 효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한 효도가 아닌 부모를 위한 효도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 “언제 효도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부모님 사후에 효자 노릇 하거나 부모님이 돈이 많을 때 효도경쟁을 하지 마십시오. 부모님이 힘과 재산이 없을 때 효도하는 것이 더욱 뜻 깊습니다. 셋째, “어떻게 효도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효도해야 합니까? 본문을 통해 3가지 효도하는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1. 지혜롭게 바른 길로 가십시오
아들이 지혜로우면 부모의 마음이 즐겁습니다(24절). 무엇이 지혜입니까? 바른 길로 가려는 것이 지혜입니다(19절). 참된 부모는 자녀가 소유와 권세가 많은 것보다 바른 길을 가는 것을 더 원하기에 자녀가 바른 길로 가는 것이 효도하는 것입니다. 시편 90편 12절에서 모세는 날 계수할 줄 아는 것이 지혜라고 했습니다. 날을 계수한다는 말은 매일을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자녀가 매일 성실하게 사는 것도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절제가 없고 욕심이 많고 게으른 친구를 멀리하는 것도 지혜입니다(20-21절). 나쁜 친구와 어울리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부모들은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언뜻 들으면 사랑과 용서를 모르는 편견적인 말 같지만 그 말은 사람을 차별하거나 사랑을 회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멀리하는 사랑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나쁜 친구를 멀리하는 것은 나쁜 친구의 변화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말이 잘 먹히지 않는 친구에게 그런 자극조차 없으면 그가 어떻게 조금이라도 변화되어 더 나은 모습이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친구나 교우나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때로는 선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멀리하기도 해야 작은 깨달음이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잘못된 삶에 대한 교훈을 얻도록 특히 친밀한 사람이 멀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 무언의 교훈은 더 의미 있게 받아들여집니다. 자신이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자녀를 죽인 사형수라도 가까이하려고 하십시오. 그러나 교만한 태도로 자신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려는 사람은 과감하게 멀리하십시오. 그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어설픈 사랑으로 공의를 망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2. 부모의 말을 잘 들으십시오
본문 22절을 보십시오.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효도의 기본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해드려도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으면 효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의 말에 힘써 순종하십시오. 보통 인간관계에서도 잘 듣는 태도는 가장 복된 태도입니다.
어느 날, 사오정이 역사시간에 자꾸 졸자 선생님이 야단쳤습니다. “사오정! 왜 그렇게 졸아!” 사오정이 말했습니다. “저 안 쫄았어요.”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그럼 안중근 의사는 누가 죽였지?” 사오정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안 죽였어요.” 선생님이 속이 터져서 아빠 모시고 오라고 해서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요새 아이가 수업시간에 너무 조는데 집에 무슨 일이 있나요? 안중근 의사를 누가 죽였냐고 물으니까 자기가 안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빠가 말했습니다. “걔가 요새 몸이 아파 가끔 병원은 가도 절대 의사를 죽일 아이는 아닙니다.”
현대인들의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성향을 그렇게 사오정 시리즈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 사오정이 되면 직장에서 45세의 정년을 넘기기 힘듭니다. 잘 듣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고 둘째로 큰 축복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효도는 ‘잘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모의 말에 순종하려는 착한 자녀에게 반드시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3.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십시오
본문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부모님을 즐겁고 기쁘게 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어떻게 즐겁고 기쁘게 합니까? 구체적으로 5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여행을 시켜드리십시오. 옛날에는 부모님 업어드리는 것을 가장 큰 효도로 여겼습니다. 한자의 효(孝)자는 ‘늙을 노(老)’ 자 밑에 ‘아들 자(子)’ 자가 있는 합성글자입니다. 아들이 연로하신 어머님을 등에 업고 외출시켜 드리는 모습을 효도로 여긴 것입니다. 그처럼 여행을 시켜드리거나 어디로 놀러갈 때 같이 모시고 가십시오.
둘째, 용돈을 많이 드리십시오. 요새 연로하신 부모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 1순위가 10만 원짜리 수표라고 합니다. 잘 사시란 백 마디의 공허한 말보다 수표 1장이라도 더 드리십시오. 드릴 것이 없으면 밝은 미소라도 드리십시오. 살기 힘들어서 웃기 어려운 형편이라도 부모님께 밝은 웃음을 드리면 자신에게도 살아갈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웃음과 미소는 부모님께 기쁨을 주고 자신에게는 성공과 행복과 건강을 주는 귀한 축복의 도구입니다.
셋째, 자주 찾아뵙고 전화하십시오. 가끔 할부모의 손자 사랑 때문에 버릇 나빠진다고 할부모와 자녀를 떼어놓으려는 부모가 있습니다. 그러면 지엽적인 버릇은 고쳐져도 전체적인 사람은 버립니다. 연로하신 부모의 외로움을 덜어드리려고 부모님을 모시고 살거나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거나 부모님께 자주 전화를 드리면 부모의 화병과 치매와 각종 질병의 가능성이 크게 떨어집니다. 부모와의 대화가 막히면 하나님의 축복도 막히고 부모님과 잘 소통하면 하나님과의 소통도 잘 이뤄집니다. 그러므로 자주 찾아뵙고 부모님의 말동무가 되어드리십시오.
넷째, 형제간에 사이좋게 지내십시오. 부모님께 다 잘해도 형제간에 싸우면 부모님의 속이 상하게 됩니다. 명절에 부모님 앞에서 “나는 많이 드리는데 너는 왜 적게 드리느냐?”고 싸우면 불효가 됩니다. 부모님 팔순잔치에 자녀들이 돈 문제로 싸우면 잔치 후에 부모님이 병듭니다. 부모님을 위해서라면 항상 돈을 덜 쓰려고 하지 말고 더 쓰려고 하십시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듯이 부모님 사랑도 형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섯째, 자기 건강관리를 잘하십시오. 자녀들이 나쁜 음식에 손대면 부모들은 속상하게 됩니다. 게다가 자녀가 건강을 잃거나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큰 불효입니다.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잘 관리하는 것도 효도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로부터 무엇을 받기보다 자녀가 건강한 몸과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자기로 인해 부모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 속에서 자기 기쁨과 의미와 행복을 찾으려고 하십시오.
< 더욱 효도하며 사십시오 >
본문 2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께서 펼치신 길을 보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원하십니다. 즉 가끔 고통스런 환경도 펼쳐져도 하나님이 그 길을 펼쳐주셨다고 생각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부모님께 마음을 드리고 부모님이 펼치신 길을 즐거워하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십시오. 출애굽기 21장 17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명기 21장 18-21절 말씀을 보면 패역한 아들이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부모가 징계해도 순종하지 않는다고 공개하면 성읍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가 제사도 모르고 효도 모르는 종교라고 하는데 이 교훈보다 강력한 효의 교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물은 혹시 되지 못해도 효자는 꼭 되십시오. 효자가 되는 것은 사실상 가장 큰 성공입니다. 살다 보면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속상한 일도 생깁니다. 불평하는 아들에게는 조바심을 내며 집이나 차도 잘 사주지만 이해하는 자신은 편하게 생각해 아무 것도 주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처럼 부모의 부족한 모습과 잘못된 조치가 보여도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기초가 흔들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생각을 초월한 축복으로 넘치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한 목사님 얘기입니다. 1950년 가을에 아버지가 북한군에게 총살되는 모습을 멀리 산에서 지켜보았는데 총소리가 들리고 세 명이 쓰러졌습니다. 해가 져서 급히 달려가 보니까 두 명은 아직 숨이 붙어있었는데 아버지는 이미 숨을 거두셨습니다. 땅을 치며 통곡할 때 갑자기 주검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놈아! 살아야 효자다! 빨리 이 자리를 피해라!” 그 음성을 듣고 산으로 급히 도망쳤습니다. 그 후 부모님의 주검에서 들린 음성을 생각하며 열심히 살다가 목회자가 되어 많은 영혼을 인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부모는 죽을 때도 자식을 생각합니다. 반면에 자식은 죽을 때까지도 부모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처럼 자식이 온전히 철이 든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제는 조금 더 철이 들어 부모님께 더욱 효도하며 사십시오. 성경을 보면 효자는 모두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불효자가 잘되는 법이 없고 효자가 못되는 법도 없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면 자기 자녀도 두 배로 효도하고 부모님께 불효하면 자기 자녀도 두 배로 불효합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늘 효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인물의 길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