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어디에 거처하는가.
책이나 법전 갈피는 적어도 정의가 머무는 처소가 아니다. 법조문과 법조문 사이, 문자와 문자 사이에 비틀거리면서 서 있을 따름 정의는 문자 자체일 수는 없다.
그 정의가 직립토록 하는 건 건축가도 의사도 아닌 정의를 불러내는 목소리, 곧 사회양심이다.
오직 빵가게 주인 편에 서는 게 정의였다면 ‘레미제라블’을 오늘까지 명작으로 읽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게다.
장발장에게 율법의 오라는 옳았는가. 이 질문은 빵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리하여 정의는 굶주리고 있는 조카들과 훔친 빵 한 조각 사이를 이 순간에도 걸어가고 있다.
레미제라블 레미제라블.........
샤일록의 집은 어디인가. 499년 전 4월10일 ‘개방도시’ 베네치아 칸나레조 지구에 게토(주물공장)가 처음 들어섰다.
3천명의 주거를 허용했으나 대략 5천 유대인들이 머잖아 모여들었다.
층층으로 쌓아올리는 밀집 주택이 본격적으로 이곳에 등장한 것은 주거지 제한이 만들어낸 고통스런 양태였다.
배가 지나다닐 수 있도록 가운데를 들어올리는 도개교로 연결된 이 격리공간을 기독인들은 무시로 건너오곤 했다.
중세 기독사회에서 이자놀이는 죄악이었고 돈 흐름은 활발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금과 은을 맡아주고 돈장사를 하는 집 방카가 있었다.
이베리아의 마지막 무슬림왕국 그라나다 점령 뒤 이사벨 여왕이 취한 유대인 추방령 문구에서 이는 벌써 강제되고 있었다.
‘유대인은 자유롭게 에스파냐를 떠나라. 단, 여왕이 금지한 품목은 제외하고는.’
개종을 마다한 이방 무리들은 교환가치 높은 것만을 양손에 쥔 채 탈출하는 수밖에 없었다.
게토와 이자의 궤적이 대충 들어맞게 되는 내력이다.
대략 그보다 십여년 앞서 셰익스피어는 그 베네치아에 사는 돈장사꾼을 내세워 돈과 양심의 거처를 묻고 있다.
그가 샤일록이다. 샤일록이 베어내고자 했던 것은 단지 가슴 쪽 살 1파운드가 아니라 제 종족에 대한 대중적 능멸이었고, 사람들이 샤일록의 가슴에서 베어내고 싶어했던 것은 금융 이기심이었다.
역사를 통해 오늘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것은 인류가 정작 샤일록의 가슴 반쪽을 닮아왔다는 점이다.
이렇게 자라난 금융자본주의는 잉글랜드 금세공업자 골드스미스들의 손을 거쳐 세계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터를 잡은 곳이 런던 뱅크 지역이다.
요컨대 은행이란 샤일록의 집이다. 은이 드나든다는 뜻에서 나온 은행에 정의가 들락거리기 어려운 건 은행 역사가 곧 땀 묻지 않은 이익인 이자의 역사인 까닭이다.
이마에 흐르는 땀으로 빵의 간을 맞추라고 한 톨스토이의 외침은 이 대목에서 무상할 따름이다.
자유는 어디에 거처하는가.
한국에서는 5만원이면 하루치의 자유를 살 수 있는 곳이 있다.
그닥 중한 죄를 짓지 않은 벌금형 선고자 가운데 한 해 4만여명이 애오라지 돈을 내지 못해 옥 감옥 형무소 교도소 가막소 빵깐으로 끌려가고 있다.
이들과 샤일록의 집은 너무 멀다. 양극화에 도달한 소득 불평등이 형벌 불평등인 사회, 가난이 곧 처벌인 사회에서 정의의 평등 운운하는 언설은 숫제 약자에 대한 우롱이자 기만일 따름이다.
그 4만여명은 무담보 무이자로 대출을 감행하고 있는 무모한 금융기관 장발장은행은 그저 4만여명들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는 벌금형이라는 형벌권의 취지를 한껏 벗어나 돈 없는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신체의 자유 박탈에 대한 항변이자 무담보 무이자를 두려워하는 샤일록의 세상에 대한 충고이기도 하다.
장발장은행은 그 인간 양심의 맨 가장자리에 있다. 돈이 자유를 앗아가는 세상을 한 뼘이라도 밀어내고자 장발장의 현주소를 물으면서.
하나은행 388-910009-23604 장발장은행
장발장은행
현행법상 벌금을 선고 받으면 30일 내에 일시불로 내야 한다. 돈이 없으면 일당을 계산해 벌금 액수만큼 구치소나 교도소에서 노역을 해야 하는데,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가는 사람은 매해 4만 명이 넘는다. 이렇듯 벌금형을 선고 받은 뒤 형편이 어려워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을 대상으로 최대 300만 원까지 무담보 · 무이자로 대출해주는 은행을 일러 장발장은행이라 한다. 도로교통법 위반 등 단순 벌금형이지만 낼 돈이 없어 감옥에서 노역할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대출을 해준다. 장발장은행은 시민들의 기부로 모은 성금으로 운영하는데, 소년소녀가장이나 차상위계층을 우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