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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장 1-12절
상처를 이용하자.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때까지 예수님께도 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상처를 가지고 사셨을까,
또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용서해 주셨을까.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을까.
이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나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하더라도
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표본이시다. 할렐루야!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가짜가 될 수밖에 없고요.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와 은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그 사람도 역시 나중에 변질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크리스찬이었는데
변질돼서 타락하니까 그에게서 공산주의가 나온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크고 작은 상처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있고 그것이 아직도 앙금같이 남아 있는 게 있을 겁니다.
의미 없는 상처는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죠? 상처를 받을 때 의미 없이 상처를 받지는 않습니다.
의미없는 상처는 하나도 없는 겁니다. 우리 몸에 어떤 상처가 생기면 그 흔적이 남습니다.
흉터자국이 남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수많은 채찍질과 구타와 조롱과 멸시천대를 다 받으셨는데,
그렇게 하신 이유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어요.
주님께서 상처받은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창과 칼에 찔리시고 채찍에도 많이 맞으셨습니다.
죄를 지으면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회개해야 되는데,
우리는 합리화시키는 쪽으로 갑니다. 자기 정당성과 자기 주장 쪽으로 갑니다.
그러면 주님은 더 많이 맞으십니다.
한 대 맞으실 거 백 대를 맞으시고, 백 대만 맞을 거 만 대를 맞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습니다.
너, 사랑하는 내 아들 예수야. 김용두 목사가 속썩이니까 너는 더 맞아야 된다.
아무개 성도가 상처받아 실족해서 신앙생활하지 않는다.
너는 더 희롱당해야 된다.
너는 채찍을 더 맞아야 된다.
저 영혼이 정신 못 차리면 너는 침뱉음을 더 당해야 된다.
이봐라, 내 아들 예수를 더 구타해라.
우리는 돌이키지 않고 핑계대며 얼마든지 뒷말도 하고 친한 사람들끼리 이러쿵저러쿵 할 수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주님은 더 맞으십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위험하지 않습니다.
사람들끼리 만나서 영적이지 않고 일반적으로 재밌고 즐거운 이야기를 하기 쉬운데,
그러면 사단이 역사해서 위험한 쪽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더 맞으십니다. 자꾸만 더 상하십니다. 징계를 더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변화되지 않아 허물과 실수도 여전히 많고 기질도 다르고
서로 생각과 관점의 차이가 있어서 주장하는 것도 다 다릅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주님은 더 밟혀버리십니다. 짓이겨지십니다.
우리 평생에 주님이 대신 계속 맞으십니다.
여러분이 누굴 욕할 때마다, 뒤에서 헤아릴 때마다 주님은 더 맞으십니다.
그래, 너 아직도 변화 안 됐구나.
70평생, 80평생, 90평생 살았는데 너는 바뀌지 않았구나.
내가 대신 맞으마. 아직도 내가 변화되지 않으니 주님은 또 맞으십니다.
왜 이렇게 주님이 고난을 받으십니까?
첫째, 사역을 위해서, 사명을 위해서 반복된 고난을 당하신다.
우릴 위해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셔야 하니까 참으시는 겁니다.
죽는 현장에서도 주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 성전을 헐고 삼 일만에 짓는다고 했느냐.
이런 질문에도 주님이 아무 대답을 안 하십니다.
사역자들은 입을 봉해야 합니다.
말을 안 하면 나에게 더 안 좋게 돌아오고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입을 봉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역이 짧아지고 자가당착에 빠져 결국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사명자들은 당연히 많은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사명자입니다.
주님의 일은 말로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일은 입을 봉하고 몸으로 때워서 헌신한다. 주님의 일에는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입장을 대변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더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됩니다.
여러분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이 시험이나 상처에 노출됐을 때
당신이 뭐하는 사람이야, 너 뭐하는 사람이냐. 목회자 아들 아냐.
너도 대를 이어서 사명자의 길로 가야 되지 않아.
기도는 왜 하는데, 예배는 왜 드리는데.
예배하고 뒷말하고 예배하고 뒷말하고 그러면 되겠어.
그건 죄를 더 짓는 겁니다.
그런 죄를 반복해서 지으면 용서도 회개도 잘 안 돼서 양심에 화인 맞아 지옥 가게 됩니다.
수많은 주의 종들이 지옥 가는데, 결국에는 양심에 화인 맞아서 가더라고요.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교회에서 늘 예배하고 그러지만,
정작 주님과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아서 큰일입니다.
신앙양심이 없어지고
교회에서 자기 주관, 자기 가치관, 자기 처세술, 자기 인생관만 나오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 지금까지 난 이렇게 살았는데, 나는 원래 이래, 이런 쪽으로만 가는 것 같습니다. 그건 신앙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천국하고도, 믿음하고도, 주님하고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쓸데없는 고생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얘기할 때처럼 직업이 뭐니, 성격이 대단하니
그런 말을 들으면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 만날 때는 겉모습 가지고 만나는 게 아닙니다.
내 안의 내용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주님을 만나기도 하고 못 만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 내면이 영적인 열매가 없고 싸늘한데 어떻게 주님을 만나겠어요.
겉으로는 똑같은 기름부음이 있고 등불이 있더라도 기름이 서서히 닳아지잖아요.
그러면 밀려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주님께서 살살 하라고 하셨습니까.
요리조리 쥐구멍 찾아서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첫사랑을 가지라고, 사랑을 하되 첫사랑을 하라고, 순수한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할렐루야!
누가 하냐 안 하냐 얘기하지 말고, 내가 먼저 하고 내가 몸 사리지 않고 봉사하는 겁니다.
기도도 내가 먼저 가서 하고 내가 먼저 예비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베소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같은 교회가 됩니다.
마지막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이 점점 눈치꾸러기, 기회주의자가 돼가는 것 같습니다.
순수하지 않고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주님은 오늘도, 나 때문에 오늘도 또 매맞으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 두께가 얇아지고 있습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악쓰는 것 같은데 주님에 대한 사랑은 점점 얇아지고 약해져서 상처를 더 많이 주고받습니다.
작은 일에 피터지게 싸웁니다.
이렇게 상처투성이, 고난투성인데
이것을 어떻게 전화위복 삼아 나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느냐가 진짜 고민거리입니다.
상처는 진실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할렐루야!
상처는 사람을 진실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일로든 상처를 받았다면 이걸 가만 놔두면 안 됩니다.
역으로 가야 합니다. 사람을 찾지 말고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 버리는 겁니다. 할렐루야!
상처는 우리를 굉장히 아프고 민감하게 합니다.
상처를 사람에게 가지고 가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깁니다.
상처를 받았을 때,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
그걸 사람에게 상담하고 이야기하면 일이 커지고 복잡해집니다. 후폭풍이 너무 큽니다.
내가 어떤 문제로 인해서 상처가 났을 때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철이 일찍 들어 성숙한 사람이라면, 앞뒤 전후 상황을 파악할 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면,
사람에게 가져갈 게 아니라 하나님께 엎드려서 기도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소극적으로 가만있지 말고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께 가져가기만 하면 다 끝납니다.
주님께 가져가면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할렐루야! 어떠한 좋은 분위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기다리면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사건이 만들어집니다. 그때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겁니다.
야, 상처를 참 많이 받았겠다, 그런데도 그걸 품고 기도하고 있었다니, 참 신앙이 대단하다,
그러지 않겠어요? 할렐루야! 제가 지금 그런 걸 경험하고 있습니다.
상처를 받았을 때 이 상처를 어떻게 푸느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누가 상담하러 와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주님은 정확하게 짚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수준이 되면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능력자가 됩니다.
다른 사람을 정말로 위로해주는 사람이 됩니다. 할렐루야!
룻은 남편이 죽어서 상처를 크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쌩쌩하고 씩씩했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된다고 했습니다.
룻이 앞을 내다봤는지 안 봤는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믿음으로 표현하고 선포한 것이 그대로 이루졌습니다. 할렐루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의 사람 룻은 제대로 된 사람인 보아스를 만나게 됩니다.
할렐루야! 축복의 사건이 이루어질지어다. 할렐루야!
믿음으로 선포한 대로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환경이든 밑바닥부터 올라갈 생각을 하는 거예요.
어머니, 내가 어머니를 위해서 보리이삭을 줍겠습니다.
아니, 시어머니를 위해서, 요새 그런 며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머니, 저 보리이삭 주우러 가도 돼죠? 어머니, 제가 노가다 하러 갈게요.
어머닌 힘이 없고 늙으셨으니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사랑하는 내 딸아. 너는 며느리가 아니고 내 딸이다 딸.
지금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감동적으로 말을 해야 되고,
며느리도 시어머니한테 감동적인 말을, 효성스러운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감동이 됩니다.
여러분,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통해서 복을 받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주님의 육신의 족보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할렐루야! 서로 잘못한 것만 이야기하면 아름다운 믿음의 가문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좋지 않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해도
은혜스럽게 말하고 긍정적인 사고하며 감사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아. 괜찮아, 뭐든지 할 수 있어.
좀 어려우면 어때. 몸이 건강한데. 룻은 생각이 건강하고 믿음이 건강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만나게 하시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상처를 어떻게 이용하느냐, 내게 주어진 시험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변수로 작용합니다.
행동으로 옮겨야 될 때 기도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내가 움직여야 될 타이밍이라고 생각되면 바로 일어나서 이삭을 주워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옆에 누가 옵니까? 보아스가 왔습니다.
상처를 사람에게 풀면 하나님이 사용하시지 못하게 됩니다. 사단이 사용하게 됩니다.
상처나 아픔이, 실수나 허물이나 죄가 드러났을 때 주님 앞에 엎드려서 회개하고
주님의 능력을 찬양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역사의 한 흐름을 담당하게 하십니다.
자기 자신의 상태를 잘 다스리는 것이 능력이다.
할렐루야! 요셉은 어려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형제들의 미움 때문에 버림을 당했습니다.
야곱은 부인이 네 명씩이나 되고 자식도 많았지만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냈습니다.
구덩이에 던져지고 팔려가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지만,
요셉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력을 길러갔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상처를 줘도 적응력을 기를 줄 알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면 거기서 자살할 게 아니라 면역이 돼야 합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적응을 잘했습니다.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잘 적응했습니다.
보디발 장관의 아내가 유혹해서 성추행범, 강간범으로 누명의 씌웠지만
억울함의 상처에 잘 버텨나갔습니다.
누가 거짓증거하고 거짓말을 할 때 버텨내야 합니다. 할렐루야!
바로왕이 꿈을 꾸는 2년 후가 될 때까지 꿈을 해석해 준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요셉은 잘 적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겠지, 하나님의 때가 오겠지.
어려서부터 상처를 많이 받고 자라서 그 상처를 사람을 죽이는 쪽으로 몰고가는 사람이 있고
믿음의 가문을 세워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할렐루야!
요셉이는 강간미수범이었고 감옥에서도 발목에 차꼬가 채워져 일하는 상처투성이 노예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몸은 비록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그 사람의 말이나 생각이나 인격이나 행동 등 모든 것이 은혜스러워야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할렐루야!
치유가 일어나기 전에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부드럽게 하기 원하십니다.
성령의 불이 여러분에게 들어갈 때도 공기에 맡기듯이,
누군가에게 기대듯이 손을 내밀고 편안하게 있으면 주님께서 부드럽게 임재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머무르면 치유의 능력이 시작됩니다.
바로 왕의 꿈을 다 해석한 요셉처럼, 그 입술에 능력이 나타났던 다니엘처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고 훈련시키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은혜스러워야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할렐루야!
나중에 요셉이 아이를 낳는데 첫 번째 아들은 나의 모든 슬픔을 다 잊어버렸다,
용서한다는 의미에서 므낫세라고 짓습니다.
내 고난, 내 아버지 집에서 있었던 일, 형제 간에 있었던 일, 노예생활 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잊어버렸다.
둘째 아들은 두 배의 결실을 맺게 하셨다고 해서 에브라임이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허물과 상처와 용서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더 맞으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질병이 있습니까? 몸이 아프고 괴로운가요?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다 당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실수를 다 담당하십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할렐루야!
출처:서인천 주님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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