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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의 어원
백중은 음력 7월 보름에 드는 속설이며, 백종, 중원, 또는 망혼일이라고 한다. 백종은 이무렵 여러가지 과실 채소가 많이 나와 백가지 곡식의 씨앗을 갖추어 놓았다고 하여 유래된 말이다. 중원은 도가에서 말하는 삼원의 하나로서 이날에 천상의 선관이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하는데 연유 하였다. 또한 망혼실이라 한 까닭은 망친의 혼을 위로 하기 위해서 술 음식 과일을 차려 놓고 천신을 드린다에서 비롯 되었다.
백중의 유래
입하로 부터 시작 되는 여름은 "녀름 짓다"라느 옛말처럼 밭매기와 논매기 등 농사 일이 한창인 계절이다. 어정 7월, 동동 8월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농촌의 7월은 바쁜 농번기를 보낸 뒤이면서 한편 으로는 가을 추수를 앞둔 다리어서 잠시 허리를 필 수 있는 시기 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백중'이라는 속절을 두어 농사일을 멈추고 천신 위례 및 잔치와 놀이판을 벌여 노동의 지루함을 달래고 더위로 인해 쇠약해지는 건강을 회복 하고자 했다. 백중의 유래의 대해 몇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불가에서 유래된 것으로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국 세시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불가의 중들이 재를 올리고 불공을 드리는 큰 명절로 여긴다. 상고 하면 <형초 세시기>에 이르기를 중원일은 승니. 도사, 속인 들이 모두 분을 만들어 이것을 절에 바친다고 했다.
또 상고하면 <우란 분경>에 목련 비구가 오미 백과를 갖추어 분안에 넣어 갖고 시방 대덕에 공양 한다고 하였다. 지금 말한 백중 일이 백과를 가르키는 것이다. 고려 때는 부처를 숭상하고 이날이 오면 항상 우란 분회를 베풀었다.
오늘날 불당에서 재를 올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백중의 유래는 불가에서 유래 된 것으로 고려 시대에는 우란 분화르 열어 여러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부처님께 공양하고 조상의 영전에 바쳤다. 조선시대 때에는 역불 숭유 정책으로 승려들 만의 불교 의식이 되고 말았다.
또 조선 후기에 간행된 <송남 잡식>의 기록에 의하면 우란 분회 때 승려드리 발을 닦아 발 뒤꿈치가 하핳게 되어 백종이라 한다는 설도 있으나 신빙성이 떨어진다. 한편 제주도에는 백중에 관한 섫화가 전해지고 있다.
진성기<남극의 민속>(하)에 소개 되고 있는 이 설화에 의하면 백중은 농신으로 상정 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주도의 목동이 곡식과 가축을 지키려고 옥황상제의 명을 어겼는데 이로 인해 노여움을 받아 스스로 자결 하였다. 그후 농민들이 그가 죽은 날인 음력 7월을 백중일 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어 그의 영혼을 위로 하였다." 이렇게 볼 때 백중은 본시 우리나라 고대의 농신 제일 이었던 것이 삼국시대 이 후 불교의 우란 분회의 영양을 받아 그 원래의 의미가 상실 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우란분절 [盂蘭盆節]
중국에서 지키는 불교 명절.
불교에서 우란분재(盂蘭盆齋)를 지내는 날을 중국에서 명절화한 것이다. 우란분재는 여름 안거를 끝내고 자자(自咨)를 하는 날인 음력 7월 15일에 지옥에 떨어진 조상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올리는 재이다.
《목련경(目連經)》과 《우란분경》에 보면, 부처는 지금 살아 있는 부모나 7대의 죽은 부모를 위하여 자자를 끝내고 청정해진 스님들에게 밥 등의 음식과 5가지 과일, 향촉과 의복으로 공양하라고 하였다. 이는 신통력으로 자기 어머니가 아귀(餓鬼)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본 목건련(目?連)이 어머니의 구원을 부처에게 청원하여 비롯된 것이다. 이후 불가에서는 자자를 끝내는 날에 우란분재를 올리는 것이 전통이 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양(梁) 나라 무제 때 동태사(東泰寺)에서 처음으로 우란분재를 지냈다고 하며, 그후 당나라 초기에 크게 성하다가 점차 민간풍습으로 축소되었다. 오늘날 중국의 우란분절은 도교 행사와 습합된 것이다.
도교에서는 일년을 상원(上元), 중원(中元), 하원(下元)으로 삼분하여, 천제가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한다. 7월 15일은 바로 도교에서 중원이라고 부르는 날로 초제(醮祭)를 지내는데 이것이 중원보도(中元普度)이다. 우란분절은 우란분재와 이 중원보도가 습합된 종교적 명절이다. 그리하여 중국 사람들은 7월을 귀신의 달이라 하며 모든 의례와 이동을 금기시하고 있다.
우란분절 앞 49재 의미와 유래
염불-독경-사경으로 전생 부모까지 천도
우란분절(음력 7월 15일)은 불교의 5대 명절 가운데 하나로 여름 3개월 동안 안거에 들었던 스님들이 안거를 마치는 날이다. 동시에 돌아가신 부모와 전생의 7대 부모를 위한 천도재를 올리는 날이기도 하다. 사찰에서는 이 우란분절 앞의 49일 동안 선망부모를 위한 천도재나 지장기도를 지낸다.
우란분절의 유래는 『우란분경』에서 찾을 수 있다.
“누구라도 (해제일에) 자자하는 승가에게 공양하는 이는 현재의 부모와 7대의 부모와 육친들이 삼도의 괴로움을 벗어나서 곧 해탈할 것이요, 옷과 밥이 자연히 넉넉할 것이다. 만일 현존한 부모는 백년 동안 복락을 받을 것이요, 이미 돌아가신 부모는 천상에 태어나되 자재하게 화생하여 하늘 꽃 광명 속에서 무량한 쾌락을 얻으리라.”
우란분절을 앞두고 행해지는 49재는 우란분절의 이 같은 의미와 영가천도를 위한 49재가 결합된 형태로, 모든 조상을 천도한다는 점에서 사람이 죽은 날로부터 49일간 행해지는 49재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 스님들의 설명이다. 강화도 선원사 성원 스님은 “우란분절 앞의 49재는 전생의 부모에게도 그 공덕이 돌아가는 기도이며 모든 영가를 천도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강조한다. 또한 지장보살본원경』에서는 ‘돌아가신 분을 위해 성스러운 공덕을 짓는다면 그 공덕의 7분의 1은 망자가 가져가고, 나머지 6은 공덕을 짓는 생자에게 돌아간다’고 설해져 있어 49일간의 기도 동참은 불자 자신에게도 공덕을 닦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49재 기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우란분절 49재, 또는 49일 지장 기도에 입재일은 오는 6월 25일, 음력으로는 5월 26일이다. 이날부터 우란분절인 8월 12일까지 49일간 사찰에서는 7일에 한번씩 천도재를 올린다. 6월 25일에 입재해 7월 1일 1재, 7월 8일 2재 등으로 진행돼 8월 12일 기도를 회향한다. 천도재는 1재~7재까지 일곱 번만 올리지만 49재에 동참한 불자들은 이 기간 동안 각자 집이나 사찰을 찾아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
49재동안 집에서 영가천도 기도를 하는 방법은 각자 선택하는데, 울산 학성선원 조실 우룡 스님은 영가천도 방법으로 염불천도, 독경천도, 사경천도 등을 권하고 있다. 염불천도는 49재 기간동안 불보살의 명호를 꾸준히 부르는 것으로 주로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독경천도와 사경천도는 영가에게 경전을 들려주는 방법으로 주로 「금강경」, 「아미타경」, 「지장경」, 「관음경」 등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우룡 스님은 “어떠한 천도 방법을 선택하든 천도재를 행하는 당사자가 직접 영가를 천도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란분절의 유래와 참된 의미>
① 조상 모시는 의미 - 전통적인 조상 관념
② 불자의 조상모시기 - 불자로서의 조상 모시는 법도와 경전상의 조상숭배
③ 우란분경의 가르침 - 경전의 성립과 내용
④ 우란분회의 의미와 설행목적 - 인도 및 중국에서의 우란분회
⑤ 우란분회와 민속의 만남 - 중국에서 우란분회의 비속화가 갖는 의미
⑥ 우리나라에서의 우란분회 - 조선 이전의 우란분회
⑦ 조선의 우란분절 - 불교와 조상숭배의 결합
⑧ 민간에서 백중 명절의 의미 - 노동과 휴식의 생활주기
⑨ 백중명절과 우란분절의 시기적 일치가 갖는 의미 - 농업절기와 불교명절의 결합
2) 기능면
① 조상모심과 효행의 일치
② 스님에 대한 공경과 공양
③ 민족문화의 전승과 새로운 창조를 위한 노력
여러분, 안녕하셨읍니까? 한여름의 무더움을 이겨내시느라 고생이 많으시지요? 극성스런 모기와 연신 흘러내리는 땀, 그리고 아이들의 철모르는 투정, 이 모든 것이 뜨거운 여름이 우리에게 주는 한 시절의 시련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잠시 한숨 돌리고 생각하면 이 한철의 무더위는 매우 소중한 것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논농사로 말하자면 초벌, 두벌, 그리고 세벌 김매기, 그러니까 만두레를 마치고 나서 따가운 땡볕에 곡식이 영글고 익어가길 기다리는 때가 바로 이 계절이 아닙니까? 한껏 햇님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생명이 그 마지막 결실을 앞두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7월 보름, 그러니까 민속에서는 백중이라 하고 절집안에서는 우란분절이라 하는 연중의 큰 명절입니다. 오늘날 민간의 풍습이었던 백중은 거의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만, 40-50년 전만 하더라도 농사 짓는 백성에게는 정월 다음으로 풍성했던 큰 명절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농사짓던 우리 조상들에게는 이 백중 언저리의 한두 달이야말로 한해 중 가장 넉넉함과 여유를 갖고 생활할 수 있었던 때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논과 밭과 들과 산천에는 갖가지 생명들이 활짝 피어나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말입니다. 한 해 내내 어려운 살림살이와 부족한 양식 때문에 시달림 당하던 사람들에게 7-8월의 풍요로움은 진정 삶을 다시 생각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7월 보름은 스님들이 3개월에 걸친 한 철의 수행을 마치고 수행의 결과를 대중에게 고백하는 자자포살의 날입니다. 만행이 어려운 기나긴 장마철, 길가의 벌레 한 마리조차 그 귀한 생명을 해칠까 두려워하며 산사 수행도량에서 3개월에 걸쳐 수행에 전념하던 스님들이 다시 그 수행의 결과를 대중에게 회향하고자 하산하는 날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아귀도에 떨어져 고통받던 어머님을 어찌하면 구원할 수 있을까 묻던 목련에게 이날을 맞이하여 스님들에 대한 공양의 공덕을 설하시며 이를 권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음력으로 7월 보름은 선망부모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자식의 지극한 정성과 스님들에 대한 공양의 공덕과 세간의 농사 풍습이 하나로 얽혀 있는 대단히 중요한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불가명절인 우란분절과 민간의 풍습인 백중을 주제로 해서 불자 여러분에게 도움 될 만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란분절은 한국불교에서 5대명절 혹은 4대명절의 하나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오신날이나 성도절, 열반절, 출가절 등 다른 불가명절이 모두 부처님 일생 중 중요 사건과 연관되어 있기에 당연히 명절이 되었다고 하나 우란분절이 주요 명절에 포함된 까닭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또 우란분절이 인도나 서역 등에서도 주요한 불교명절이었는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물론 중국에서는 불교 전래 초기부터 우란분경의 번역과 아울러 상당한 규모의 우란분절 행사가 지속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에 국가적 차원에서 성대한 우란분회(會)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도 우란분절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란분절이 우리 민속과 결합하여 민간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오히려 불교를 배척하던 조선시기에 들어와서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란분절은 조선시기에 초파일과 더불어 불교적 명절이 민속화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초파일이 모내기 이후 잠시의 농한기와 시기적으로 일치하였던 것처럼 우란분절이 세벌김매기 이후의 백중과 같은 시기였던 때문으로 추정됩니다만 이처럼 우란분절이 민속명절화한 과정이나 내력이 분명하게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먼저 우란분절 행사의 경전적 근거가 되는 <<우란분경>>의 내용과 인도나 중국에서의 우란분절 및 그 행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 이후 우리나라에서의 우란분절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란분(盂蘭盆)'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인 울람바나(ullambana)라는 말을음에 맞는 한자로 적어놓은 것입니다. 울람바나는 아발람바(avalamba)에서 유래한 말로서 거꾸로 매달려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에 한자로는 도현(倒懸), 혹은 그 상태에서 구원한다는 의미에서 구도현(救倒懸)이나 해도현(解倒懸)으로 적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와 연관된 행사는 보통 우란분회(盂蘭盆會)라고 불립니다.
모든 불가의 행사가 모두 경전에 그 근거를 가지고 있듯이 우란분회도 우란분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신통 제일인 목련존자가 생전에 탐욕과 죄업으로 인해 아귀도에서 떨어져 고통을 받고 있는 모친을 보고 부처님께 구원의 방법을 구하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하안거가 끝나는 7월 15일 자자(自恣)의 날에 오미(五味: 단맛,신맛,쓴맛,짠맛,매운맛을 말하며 여기서는 모든 음식을 말함),백과(百果: 온갖 과일과 음식)의 온갖 맛있는 음식(백중이 한자로 백종 百種이라고도 표현되는 것은 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을 준비하여 분(盆:쟁반)에 담아 많은 수행자들에게 공양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마침내 목련존자가 부처님 일러주신 방법대로 대중 스님께 공양하자 그 공덕에 의해 목련존자의 모친은 물론 지옥에서 고통받던 모든 중생이 다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목련존자의 인연설화를 통해 참된 효행을 가르치고 있는 경전입니다. 이처럼 우란분회는 목련존자의 지극한 효성과 수행자에 대한 공양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 이 우란분회가 설행(設行)되었던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도에서는 지옥에 떨어진 부모를 공양하면 자신의 사후에 그 일체의 공덕을 받는다는 속신은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이 중국에서의 효친사상과 만나면서 우란분회가 돌아가신 부모의 천도법회로서 발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에서 우란분경을 가장 먼저 번역한 것은 서진의 축법호 스님입니다. 또 남북조 시대에도 우란분회가 설행된 것은 중국의 대표적 세시풍속 기록인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등의 기록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우란분회가 가장 성행했던 것은 저 고구려와의 싸움으로 유명한 당나라에서였습니다. 당나라 고종 때 펴낸 <<법원주림(法苑珠林>>이란 책의 <헌불부(獻佛部)>에 보면 우란분회에서 스님들께 바칠 시물(施物)에 대한 문답이 나오고, 이어 매년 국가에서 우란분회를 위해 공양물과 노래하는 악인(樂人)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 공양물은 각종 진귀한 음식과 기기묘묘하고 세밀하게 가공한 장식물들로서 그 성대함이 대단한 구경거리였다고 합니다.
부처님과 승려에게 공양을 올리는 이 우란분회는 중국에서는 선망부모의 추선공양을 중심으로 하는 행사로 바뀌었으며, 때로는 중국의 민속명절인 중원(7월 15일)의 각종 놀이와 결합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상숭배의 관념이 성했던 중국에서 우란분회가 조상천도일로 성격이 바뀐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나, 민속명절과 결합하여 각종 진기하고 특이한 물건이나 장식물을 진열해놓고 백가지 놀이(百戱)를 놀았다는 등의 기록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개 불교의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당나라 시절 이처럼 좋은 뜻을 가진 불교법회가 민속과 결합한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불교의례가 비속화하거나 세속화한 것으로 못마땅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이처럼 우란분절이 조상숭배의식이나 민속과 결합한 것은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일본에서는 우란분회가 7월 13일에서 16일 사이에 조상을 맞이하여 기쁘게 해드리는 민속명절로서 정착되어 있으며, 보통 그냥 본(盆), 혹은 오본(お盆)으로 줄여서 불려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에 우란분경이 언제 전해졌고, 우란분회가 언제부터 설행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으로는 주로 왕실의 불교행사를 많이 기록한 고려사에 의해 예종(2회), 의종(1회), 충렬왕(3회), 충선왕(1회), 공민왕(1회) 등 10회 이내의 우란분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중국과 같이 재를 지낸 절차나 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민간에서도 우란분재가 설행되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우란분재가 성행한 것은 오히려 불교가 억압당하던 조선시대였습니다. 이는 조선시대에 성리학과 주자가례의 도입으로 이전에 비해 조상숭배가 크게 발전했고, 더구나 유학자들에 의해 불교가 조상을 모르는 종교로, 한마디로 환부역조(換父易祖), 즉 부모와 조상을 모른 채 자손을 끊는 종교로 매도되고 있던 상황으로 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조선시대의 스님들은 유학자들의 비난에 맞서서 불교 경전 중 조상숭배를 강조하는 데 가장 알맞은 우란분경을 많이 펴내어 보급하는 한편 유교의 오륜행실도 등과 유사한 우란분경변상도(變相圖)를 대거 보급하는 등 불교의 효행사상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우란분재가 크게 성행했던 것은 중국에서 중원(中元)과 우란분회가 결합한 것과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즉 7월 15일이라는 백중과의 시기적 일치를 들 수 있습니다. 백중은 민간에서 고된 농사를 끝내고 벌이는 칠월의 세시명절로 세벌김매기인 만두레를 끝낸 다음 벌이는 농민과 머슴들의 대동굿으로서 봉건제 시절 농촌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최대의 축제일이었습니다. 김매기가 끝나는 백중이면 농민들은 그동안 잡초를 없애던 호미를 깨끗이 씻어 농청에 보관하고 신명나는 한판 축제를 벌였습니다. 백중은 한자로는 세서연(洗鋤宴), 즉 호미를 씻는 축제 등으로 적었는데, 이는 호미씻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에 불과합니다. 또 이 백중은 농민들이 힘든 농사를 마무리짓고 발 뒤꿈치를 께끗이 씻는다 하여 백종(白踵)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불교에서도 이 백중을 큰 명절로 쳤는데, 우란분절의 조상천도와 연관시키면서 백가지 음식(百種)을 마련하여 고통 속에 빠져 있는 넋을 구제한다고 하여 백종(魄縱)이라고 불렀으며, 또는 스님들이 하안거를 마치고 그 결과를 대중 앞에 고백하는 날이라 하여 백중(百衆)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스님들의 수행을 기림으로써 크나큰 공덕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우리의옛 조상들은 한여름의 풍성한 과일이나 햇곡식을 들고 사찰을 찾아 스님들께 공양하고 조상님 천도를 위해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민간의 백중과 불가의 우란분절이 명칭에서도 뒤섞이고, 실제로도 함께 행사가 치루어졌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칠월칠석에 입제하여 백중에 회향하거나 아니면 사십구재의 예에 따라 49일 동안 기도한 다음 7월 보름에 회향하고 있습니다. 이중 칠월의 민간명절에 따라 법회와 행사의 일정을 잡는 것은 민간의 풍습을 존중하면서 그를 불교의 의식체계 내에 수용했던 오랜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만 오늘날에는 조선시대와 같은 농경생활이 거의 소멸했기 때문에 오히려 조상천도제일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게 부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란분절의 본디 뜻에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란분절은 단순히 조상 천도만을 위한 행사가 아닙니다. 조상님 천도를 위한 자손의, 산사람들의 지극한 정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행에 정진하는 스님들에 대한 존경과 공양이라는 자세와 과정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목련존자에게 어머님 구원의 방도를 일러 주실 때 이를 특별히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란분절 행사의 참뜻을 아는 불자라면 다음과 같은 자세와 실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조상님 천도를 부처님 전에 기원하는 정성만큼 살아 계신 어르신에 대해 공경하고 효도하는 자세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조상님의 천도도 중요하지만 무릇 산사람의 생명만큼 존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의 많은 노인들이 자식에게 버림받거나, 아니면 억지 효도나 겉치레 과시용 효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버림받은 노인들에 대해서는 국가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완벽한 시설을 갖춰 편안히 생을 마감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하겠지만, 이에 앞서 집안에서조차 자손들에게 소외받고 있는 노인들이 의외로 많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형식적으로나 겉치레로 남의 눈이 두려워 억지 효도를 하는 분들은 계시지 않은지 속으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란분절에 자기 조상님의 천도만을 맹목적으로 기원하는 것은 아닌지 되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조상님을 잘 모시면 자기 자손들이 복락을 누리리라는 기대를 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인간사 대부분의 행동이 결국은 자신과 자손의 복락과 번영을 위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우리는 보다 넓은 의미의 조상님들, 즉 오늘날 우리가 여기 이 터전에서 편안히 살 수 있도록 애쓰셨던 모든 선조들과 애국열사들에게도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만이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은 나라를 위해 고민하고 헌신하며, 주변의 아픔에 동참하여 같이 고락을 나누는 기틀을 마련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7월 보름 우란분절에는 민족문화의 앞날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보아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란분절은 바로 백중이고, 백중은 농경민족인 우리민족의 가장 큰 명절중의 하나로서 민족문화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부상조하던 품앗이와 두레의 협동정신과 이를 신명나게 뒷받침하던 풍물과 춤과 덕담과 예술이 모두 이에 담겨져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러한 우리민족 고유의 놀이와 예술이 모두 다 문화재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하여 그 문화를 창조했던 정신까지 보존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밀듯이 들어와 우리의 삶과 정신을 혼란시키는 외래의 상업주의 문화에 맞서 우리의 것을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외래문화나 상업주의 문화조차 보다 넓은 품으로 끌어 안으면서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오늘 조상님 천도를 위한 기도를 회향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어떻게 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올바른 길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작은 것 하나부터 실천할 수 있는 한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합니다.
끝으로 우린분절, 백중을 맞이하여 모든 불자님들이 목련존자와 같이 지극한 효행원력을 세우시길 바라며 각 가정마다 불심과 효심이 넘쳐 패륜과 부도덕이 팽배해져가는 이 사회를 밝고 건강한 사회로 바꿀 수 있기를 부처님전에 두손모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