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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신 ‘축제의 삶’ 살자
카나의 혼인 잔치
영혼과 육신의 축제
먹고 즐기자(루카 15, 23)
사랑하는 동창 신부님이 사제로 수품될 때, 수품 표어로 선택한 성경 말씀이 “먹고 즐기자”(루카 15, 23)입니다. 처음 그 표어를 보았을 때 웃음부터 나왔습니다. 모든 새 사제들의 수품 표어는 실로 경건하고 무엇인가 결의에 찬 성경 말씀을 택하였는데, 먹고 즐기자는 표어라니…,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평생을 세상 어두운 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소명을 지닌 사제가 먹고 즐기기 위하여 그 길을 택하였나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창 신부님의 넓은 포용의 모습을 보면 그 표어를 택한 까닭을 이제는 조금씩 알 것도 같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진정 고난이 많은 민족일수록 노래와 춤과 시가 많다고 합니다. 맺힌 한을 풀어야 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민족도 한이 많은 민족이기에 유달리 춤과 노래가 많다고 합니다.
본당에 있을 때 교우분들과 야유회를 다녀오면 남자 형제분들 보다는 자매님들이 더 많은 노래와 춤을 추십니다. 많이 배우시고 넉넉하신 분들보다는 배움이 적으시고 살기에 빠듯하신 분들이 더 많은 춤을 추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삶에 아픔과 한이 많아서 입니다. 분명 사제, 그리고 교회는 그 한을 풀어 축제의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세상 어느 민족보다도 쓰라린 아픔이 많았던 민족이었습니다.
언제나 전쟁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었고, 늘 나라 없는 백성으로 떠돌이 생활, 불쌍한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물론 자신들의 잘못으로 그 같은 한 맺힌 역사를 살아야 하기도 했지만 그들 주변엔 언제나 너무 많은 강대국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그 한을 하느님 약속의 말씀으로 풀 수 있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 62, 5)
이스라엘 민족은 고난 가운데에서, 수많은 한을 가슴에 품고 사는 처지에서도 분명 그 고난과 한숨과 맺힌 한을 풀어 인생의 가장 큰 축제인 혼인 잔치에로 자신들을 초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고 있었던 민족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마련하신 먹고 즐길 수 있는 구원의 축제를 우리 또한 이 암울한 시대에 한 판 축제의 장으로 희망을 열 수 있어야 합니다.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 24)
성경은 자주 하느님의 나라를 인간 최대의 경사인 혼인잔치에 비유하곤 합니다. 사랑하는 남녀의 결합, 자손의 출생이 시작되는 희망의 날이 혼인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같은 비유로 말미암아 초대 교회의 교우들도, 박해시대의 교우들도 자신들이 세상에서 겪는 그 많은 고난의 시간이 끝나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가리라 굳게 믿으며 질곡의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께서 술 한 잔 따라 주시겠지’라고 희망하였던 것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 6)
카나의 혼인잔치의 또 다른 의미는 단연코 즐거움입니다. 인생의 참된 기쁨이며 흥겨움입니다. ‘르낭’이라는 학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갈릴래아를 두루 돌아다니셨다. 그런데 수세기에 걸쳐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주 이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분명 ‘해방’과 ‘자유’ 때문이셨습니다. 온갖 구속과 억압에서 우리 인간이 참된 자유와 해방을 맛보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때문에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전통과 규범에, 지도자와 기득권자들에게 도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안에서 누리는 참된 축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첫 기적을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행하셨던 것은 인간의 축제에 당신께서도 함께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축제의 흥이 깨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교회의 역사에는 이 축제의 자유를 빼앗고 억압과 두려움의 맹종을 강요했던 슬픈 기억이 있었습니다.
이제 교회는 억눌린 모든 이에게 영육의 축제, 자유와 해방의 축제를 시작해야 합니다. 먼저 카나의 혼인잔치의 연속인 미사성제에서부터 그 축제가 펼쳐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