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컬트 클래식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와 '트윈 픽스'(1990)로 유명한 미국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가 갑작스럽게 78세 삶을 접었다고 영국 BBC가 16일(현지시간) 전했다. 유족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그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알리게 돼 세상에 커다란 구멍 하나가 생겼다"면서 "하지만, 그는 '눈을 구멍이 아니라 도넛에 두라'고 말할 것 같다.... 온통 금빛 햇살과 푸른 하늘을 거느린 아름다운 날"이라고 애도했다.
린치는 지난해 8월 "많은 해에 걸친 흡연" 탓으로 만성적인 폐 질환인 폐기종(emphysema)과 싸우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정확한 사망 일시와 장소, 원인 등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세간의 평가에 아랑곳 않는 '매버릭(maverick)'으로 통하는 고인은 '엘리펀트 맨'(1980)과 '블루 벨벳'(1986), '멀홀랜드 드라이브'로 세 차례나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로 지명됐지만 한 차례도 수상하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메이저 작품은 2017년 방송된 '트윈 픽스: 더 리턴'으로 1990년대 초반 두 시즌 방영됐던 TV 시리즈를 이어간 것이었다.
동료 영화감독 론 하워드는 소셜미디어에 추모의 글을 올려 "마음과 혼을 다해 급진적 실험 정신으로 잊히지 않는 영화를 증명해낸 관대한 남자이자 용감무쌍한 아티스트"라고 돌아봤다. 고인이 연출한 비디오 'Shot In The Back Of The Head'의 주인공이었던 뮤지션 모비는 "가슴 아플 뿐"이라고 했다.
몬태나주 미술라에서 태어나 1960년대 단편 영화를 연출하기 전에 화가 일을 했던 고인의 작품은 초현실주의, 꿈같은 얘기들로 가득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첫 번째 메이저 흥행 작품은 '이레이저 헤드'(1977)였는데 어둡고 혼란스러운 이미지로 가득했다.
린치는 지난해 5월 BBC Radio 3 채널의 'Sound of Cinema' 인터뷰를 통해 먼저 세상을 등진 안젤로 바달라멘티와 함께 자신의 비전을 구축했던 과정에 대해 "그때 난 '아직도 너무 빠르니 no. 충분히 어둡지 않다. 충분히 무겁지도 않고 전조(foreboding)도 없다'고 말하곤 했다"고 돌아봤다.
'트윈 픽스'를 시작으로 고인과 많은 작품에서 인연을 이어간 카일 맥라클렌은 "데이비드는 우주와 주파수를 맞췄으며 자신의 상상으로 인간의 최고 버전처럼 보인 수준을 맞췄다"고 추모사를 올렸다. "그는 답들에 관심이 없었는데 질문들이 우리가 누구인지 정하는 원동력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수께끼 같으며 내면에서 폭발하는 창의력을 큰바다처럼 간직한 직관력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를 알았기에 내 세상은 한층 충일했으며 그가 세상을 등지니 훨씬 공허해졌다."
린치는 배리 기포드의 원작을 스크린에 옮긴 '광란의 사랑(Wild at heart, 1990)'으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2020년 아카데미 위원회는 명예 아카데미상을 수상해 그의 업적을 상찬했다.
고인은 지난해 폐기종 발병이 흡연 습관에 따라 "치러야 할 대가"라면서도 "빼어난 몸 상태"이며 "절대 은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몇 달 만에 용태가 나빠져 지난해 11월 피플 매거진 인터뷰를 통해 걸으려면 산소 공급을 받아야 한다고 알렸다.
'광란의 사랑'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아 스타의 길에 들어선 니컬라스 케이지는 린치 감독의 작품을 본 것이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계기가 됐다고 BBC 월드 서비스의 뉴스아워 프로그램에 털어놓았다. 그는 "고인의 영화 '이레이저헤드'를 보려고 샌타 모니카에 가곤 했다. 그는 내가 왜 영화 만드는 일에 빠져들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군계일학이었다. 대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동료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버라이어티에 전한 성명을 통해 "인간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영화들을 연출한 단 하나뿐이며 비전을 갖춘 몽상가"였다며 "세상은 순정하며 독보적인 목소리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고인은 스필버그 감독의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에 거장 감독 존 포드 역으로 출연, 지평선만 제대로 그려내면 그 영화는 성공한 것이라고 영화감독을 꿈꾸는 젊은 샘 파벨만에게 떠벌였다. '광란의 사랑' 주연이자 이웃이었던 로라 던이 스필버그 감독에게 다리를 놓아준 것으로 알려졌다.
프랭크 허버트의 공상과학(SF) 클래식을 스크린에 옮긴 '사구(Dune, 1984)'도 고인의 작품 가운데 빼놓을 수 없다. 4시간이 넘는 편집본을 제작자가 멋대로 2시간여로 잘라 상영하는 바람에 엉망이 됐다. 그 전에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가 연출하겠다고 수락했는데 16시간 짜리로 만들고 살바도르 달리를 출연시킨다는 말도 안되는 계획 때문에 린치에게 넘어갔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드니 빌뇌브가 티모시 샬라메와 젠데이아를 기용해 연출한 '듄'(2021)과 '듄 파트 2'(2024)가 튼튼하게 만들어진 이유 중 하나로 린치 감독의 실험 정신이 자리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