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서로 일찍 들어온 저녁. 거실에 널어놓은 빨래를 개다 “나 결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냐?” 심드렁하게 답했다. 놀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그랬다. “그럼 올해 안에 하는거냐?” “아마도 그래야 할 거 같네” “그럼 당장 집이 문제구나.” “그러게 말이다”
집에서 대학을 다녔다. 졸업 후 1년 뒤 나와 살게 됐다. 부모님이 서울을 벗어나 살아야 할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 동아리에서 만나 단짝이 된 친구의 자취집에 얹혀살았다. 1년이 넘도록 친구는 방세도 받지 않고 내 몸 누일 곳을 내어주었다. 친구의 형과 동생이 살림을 합치게 될 무렵, 마침 취업에 성공해 독립을 했다.
하지만 월세 35만원 원룸은 부담이 됐다. 우연찮게 또 다른 친구 녀석이 자신의 자취집에 방 한 칸 남는다며 같이 살자고 했다. 회사와도 가까웠다. 월세도 25만원을 줄일 수 있었다. 그렇게 녀석과 반 지하 집에서 살다 올해 5월 서로 보증금을 보태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30만원인 방 두 칸짜리 다세대 주택 3층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하늘이 내다보이는 조그만 방은 마음에 들었고 조용한 동네 분위기도 좋았다. 어차피 서로 장가갈 계획이 없었던 때라 앞으로 2년은 이곳에서 터를 잡고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독신주의자로 살겠다고 천명했던 것은 친구 녀석이었다. 몇 번의 연애 끝에 녀석은 연애와 여자에 심드렁해져있었다. 적어도 내가 녀석의 반 지하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그랬다. 그때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져 앞으로 연애는 그만해야겠다고 먼저 말했던 것은 녀석이었다.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장가갈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나와 독신주의자를 자처한 녀석과의 동거는 그래서 안정적이고 탄탄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친구는 몇 달 뒤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만난 여자와 연애를 시작했고 결국 그 처자와 결혼을 약속하게 됐단다. “사람일은 알 수 없는 거잖냐” 내심 미안한 듯 내게 던진 녀석의 변명이다.
집안의 종손에 서른 둘 이라는 나이, 그리고 여자의 나이도 서른을 넘었기에 친구가 결혼을 서두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기에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녀석의 결혼으로 인해 지금의 안정된 내 일상에 변화가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한 지붕 아래서 햇수로 2년을 함께 살아온 친구의 급작스런 결혼소식 자체가 충격이기도 했다. 내 인생과 직접적인 비교가 되어서다.
집에서 나와 살면서 주거비용과 생활비용을 절감하는데 동거만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서울에서 전셋집을 구할 여력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에 필요한 수천만원의 돈이 쉽게 모일 리 없다. 부모님 형편이 넉넉하다면 걱정이 없겠으나 그건 상위 몇 퍼센트의 사람들의 처지일 뿐이다.
결국 2년을 약속했던 녀석과의 동거는 길어야 4개월 후면 끝날 듯싶다. 친구는 평생의 반려자와 새 출발을 할 테고 나는 여러 가지 대안 중에 하나를 택해 불가피하게 지금의 안정된 일상에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이렇듯 인생은 우리가 계획한대로 혹은 예상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이런 깨달음의 순간 다음에는 약간의 허탈함과 막막함이 뒤따라온다. 인생의 불확실성을 체험한 뒤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 두려운 인생을 사랑하는 이와 함께 헤쳐 나가겠다고 약속을 한 독신주의자 친구의 변절은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이고 부러운 일이다.
녀석은 동거의 끝에 신혼생활이 시작될 테고 나는 동거의 끝 이후에 어떤 삶이 시작될지 아직 모른다. 향후 몇 년간 누군가와 또 동거를 할 확률이 높겠지만 문득 동성이 아닌 이성과의 동거는 어떨까 궁금해진다. 그것을 체험할 용기나 능력도 없기에 요즘 방영되는 MBC 주말 드라마 ‘9회말 2아웃’이나 보며 맥주나 마시련다. 극중 난희 같은 여자가 어찌 30년간 여자로 보이지 않았을까 라는 설득력 없는 설정에 혼자 분개 하면서.
첫댓글 대사가 마구 자세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너랑 친구 먹고 싶어서 일부러 연애도 안걸었는데..'라는 형태의 고백으로 억지스레(!!) 상황 이해가 되던데...:) 삼순이가 정말로 뚱뚱하고 안 예쁘다고 믿으라 강요하는 것과 똑같은 그런 설정에 분개하다니.., 아직 멀었어요 ㅋ; 이젠 슬렁슬렁 연애도 하고 결혼이란 걸 해도 앱노멀한 상황이라 수군거릴 사람 아무도 없다지요:) 화이삼^^
분개하시는 분이 있으면 그 드라마 일단은 성공^^
바로 몇개월전에 이 같은 상황을 똑같이 겪었으니.. 전 꼭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결국 지금은 독신자 아파트로 옮겨와 혼자서 잘 살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다오.
우정보다는 사랑이라는 명백한 증거?^^ 평생을 함께 살자고 결혼해놓고 친구랑 같이 살기 위해 이혼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선, 법적으로도 위의 명제를 옹호하는 듯 하네요^^ 같이 사는 이성친구라....친구는 친구죠. 아주 특별한 친구^^
그 친구분이 블로그를 통해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듯이...월영님도 세상사 모르는 일...이곳에서 님에게 반한 분을 만나시길 바래요 ^^;;진심
제가 재벌집 아들이라면, 당장 월영님에게 5천만원 무이자 투자할텐데..^^ 혹시 압니까? 이런 사례들이 모여들면....아랑카페 왼쪽 메뉴에 실시간 '후원계좌'가 만들어질지^^ 그렇게 된다면, "회사와 공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라는 식의 질문은 사라지겠죠?^^ 쿠^^
참....친구의 결혼으로 많은 것을 깨우칩니다...하기사 원효대사는 물 한 모금에 돈오를 얻으셨다죠...ㅋㅋ
독신주의자로 산다는 사람치고....정말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던(자신의 의지로) 사람이 있다면, 인간극장감이지 않을까요?^^ 하기사 있기는 하네요. 앙드레모씨..자신의 의지로 독신 맞나 모르겠지만....또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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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렇네요. 당장 1시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우리가 뭘 어떻게 알겠어요. 앞이 캄캄합니다만, 그래도 뭔가 방법이 있을 거예용. 꼭. -.-... 힘내요.
월영님의 글을 볼 때 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떠오릅니다. 뭘 하고 사는 지 궁금하기도 하고, 잘 지내리란 믿음도 갖게되는. 제가 그 사람에게 갖는 막연한 믿음처럼 월영님도 멋진 시작을 하실꺼라 믿습니다 ^^
동거라고해서 남녀간의 그런 관계를 생각한 것은 저뿐일까요? 부끄러워라..ㅡ.ㅡ;;
저.. 저도 클릭할땐 그랬어요;;ㅋㅋㅋ
모처럼 혼자 일찍 들어온 저녁. 거실에서 우동이 된 라면을 먹다가 “나 방 뺀다”는 전화를 받았다. “디질래?” 심드렁하게 답했다. 반가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그랬다. “그럼 이번 주 안에 꺼지는거냐?” “아마도 그래야 할 거 같네” “그럼 당장 새 룸매가 문제구나.” “그러게 말이다” 올해 4월 최악의 룸매와 헤어지고 들어온 새 룸매. ........역시나 완벽한 룸매란 없는 법.-_-..이 글 읽다가 뜬금없이 제 옛 룸매가 생각나서 그만;;
나도 동거인(?) 찾고 있는데...글쓴 님과 같은 처지인지라 긴(?) 글이 후딱 읽히더이다.
진짜 글 짤 쓰시네요. 월영님 팬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습작을 해보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