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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신 화백의 그림편지 8. 아름다운 뒷모습
- 퇴계(退溪)선생의 귀향길
그야말로 꽃비가 내립니다.
천지의 기운이 상서로운 춘풍가절,
청풍문화재단지의 4월 중순(2019.4.17) 아침.
청풍호 뱃길로 가는 길목에 갓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행렬이 특별합니다.
벚꽃이 흩날리는 꽃길에는 개나리와 진달래, 그리고 복사꽃도 고개를 내밉니다.
저도 그 길을 따라가며 앞산을 우러르니
어제 머물렀던 한벽루(寒碧樓)가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언덕에는 수많은 신록의 아우성이 파스텔톤 빛으로 찬연합니다.
이 풍광은 ‘봄날은 간다’의 아쉬움 보다는 나부끼는 깃발 속에 ‘축복의 길’로 설레는 마음입니다.
깃발에 새겨진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450주년 재현-위대한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의 길입니다.
사연인즉 지난 4월10일에 서울 봉은사에서 출발한 재현단은
걷기11일차에 걸쳐 4월21일 안동 도산서원에 이르는 장도의 여정입니다.
(1569년 음3.5~음 3.17)
그 중 7~8일차(4.16~17)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 각별한 만남은 특별한 인연의 해후입니다.
제가 30년 전부터 사형(師兄)으로 모시는 권기윤 화백(안동대 미술과 교수)과
그의 벗 안병걸 교수(안동대 동양철학과)의 초청에 화실을 비웠지요.
일행은 진주의 정헌식 선생(한국차문화역사관 원장)으로 그의 차에 신세지며 떠나 온 길입니다.
안교수는 20년 전 서울 학고재 개인전 때부터 알고 지내며,
정선생은 제가 산청으로 귀촌 후 의기로 소통해 온 분입니다.
해서 어제의 청풍문화재단지의 한벽루(寒碧樓)가 떠오릅니다.
고려 때(1317) 건축으로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지요.
그 옆의 관아건물인 응청각(凝淸閣)도 함께 그린 것은 퇴계선생이 머문 곳이라는 기록이 있어서입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수학한 서울 팔판동의 한벽원(寒碧園)미술관은
월전 장우성 화백이 생전에 짓고 손수 쓴 현판을 걸었지요.
그리고 말씀하기를 “선비정신의 차고(寒) 푸른 기운(碧)이 깃들기를 바라는 곳이기를 바란다”고 하셨지요.
하여 한벽루를 그리며 떠오르는 단상입니다.
이 누각에 모처럼 갓 쓴 학자들과 수강생들이 모여 들었어요.
맑은 햇살과 푸른 풍광 속에서 안병걸 교수와 조용헌 박사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선생의 귀향길 행사 리플랫과 자료집을 받았습니다.
지금 세상은 물질적으로 풍요한 것 같지만
실상은 어느 때보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갈수록 인성이 황폐해지고 삶은 더 팍팍해지는 이 상황에서 우리가 기댈 언덕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답게 사는 학문으로 인격을 완성한 성현을 통해 그 분명한 기준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와 가까운 시대, 가까운 지역에 그런 분이 계신다면
우리의 마음이 더 쉽게 위로받고 쉽게 바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450년 전인 1569년 음력3월,
따뜻한 봄날 퇴계선생은 69세의 연세로 은퇴를 하고 마지막 귀향길에 오릅니다.
언제까지나 곁에 두고 멘토로 삼고 싶었던 선조임금도
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선생의 강한 귀향 의지를 존중하여 허락하였습니다.
조정을 텅 비우고 나온 동료들과 한강변에 운집한 백성들도 매우 아쉽지만 떠나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생께서 어떤 마음으로 8백리 귀향길에 올랐는지 되새겨 보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도 중요한 통찰을 줄 것입니다.
(후략)
2019. 4.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단 단장 김병일(도산서원 원장.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이 인사말을 통해 그려지는 선생의 귀향풍경이 사뭇 그립습니다.
그리고 머무는 곳 마다 시문을 남기고 주고받은 사연이 뭉클한 인간애로 다가옵니다.
경복궁을 나와 배를 타고 봉은사로 향하는 길에 쓴 송별시는 심금을 울립니다.
하루 전 날인 1569년 음력 3월4일,
선생은 임금과의 마지막 입대에서
“어진 선비를 보호하고 소인들을 물리치라.”는 조언을 하였고,
학문을 좋아하는 신하로서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1527~1572)을 추천 하였다고 합니다.
고봉이 누구입니까?
주지하다시피 선생과 ‘이기론(理氣論)’으로 사단칠정(四端七情)을 8년간이나 논쟁했던 장본인이지요.
누대로 나이와 직위를 초월한 학문과 학자의 표상으로 회자되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 시점에서 오늘을 떠올리면 참담해집니다.
상대의 입장과 뜻을 존중하지 못하는 시대가 부끄러워집니다.
존중은 커녕 정계 지도자의 말로는 비참하기 그지없고
그 여파는 정쟁의 소용돌이에 끝없이 표류하는 현실이기에...
이윽고 선생의 인격을 흠모한 고봉은 선생과 함께 탄 배위에서 먼저 송별시를 짓습니다.
한강수 도도히 밤낮으로 흐르는데
선생의 이번 걸음 어찌하면 만류할꼬
백사장 가 닻줄 잡고 머뭇거리는 곳
이별의 아픔에 만 섬의 시름 끝이 없어라
이에 선생의 답시가 이러합니다.
배에 나란히 앉은 이 모두가 명류들
돌아가려는 마음 종일 붙들려 머물렀네
원컨대 한강물 떠서 벼루에 담아 갈아서
끝이 없는 이별의 시름 써내고 싶어라
백사장의 배 닻줄을 잡고 이별을 애달파하는 고봉의 마음,
그리고 한강물로 벼루를 갈아 끝없는 이별의 안타까움을 전하고 싶다는
선생의 심경이 파도가 되어 가슴을 칩니다.
인연에 대한 감사와 존중, 이별의 미학이 이처럼 아름다운 사례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선생의 뒷모습을 따를 수 있다고 여깁니다.
다시 이 길을 마련해준 선생의 후학들이 모인 저녁.
450년 세월을 넘어와 잔을 기우리니 모두 귀한 만남입니다.
김병일 단장을 비롯하여 이광호, 허권수, 안병걸, 조용헌 선생과 퇴계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였습니다.
특히 허권수 선생은 진주에서 왔는데 남명(南冥)선생 연구에도 깊은 학자요,
익히 친견한 분이라 반가웠지요.
해서 이번 행사에 동갑내기였던 퇴계와 남명의 만남과 조화가 이루어진 셈이라고 하자
안교수는 새로운 시각으로 정리해 주었습니다.
“학문은 서로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 묘리가 있다고 봅니다.
통합을 추구하기보다는 학설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각자에게 더욱 충실할 때에 함께 발전하는 것이지요”
한편 함께 온 정헌식 선생은 퇴계와 남명은 ‘경(敬)’과 ‘의(義)’의 관계요,
‘차(茶)’와 물(水)‘의관계라고 합니다.
즉 삶의 본질과 실행의 경우를 예를 들며 피력했습니다.
함께 숙박한 다음날 아침, 청풍호로 가기 전에 모여 인사를 나눕니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왼손을 올린 합장인사를 상읍례(相揖禮)라고 합니다.
이어 단장님의 말씀과 일반 참가객들의 소개가 있었습니다.
이후 깃발을 든 이를 따라나서는 일행이 부두로 가는 길에 꽃비가 내립니다.
귀향을 반기는 아우라가 되어 사방천지에서 물결칩니다.
마침내 승선한 2층 뱃머리에 화첩을 펴고 앉은 나는 11년 전의 가을(2008)날이 떠오릅니다.
‘강에서 띄우는 그림편지ㅡ한국의 5대강 순례(내일신문 기획특집)’의 인연으로 이 강물을 따라갔지요.
오늘은 봄기운 속에 금수산 아래 펼쳐진 푸른 강이요,
옥순대교를 지나자 옥순봉(玉筍峰)과 구담봉(龜潭峰)이 우뚝합니다.
퇴계선생이 예전에 이곳을 지나며
‘비온 뒤 솟아난 옥빛의 대나무 순처럼 어여쁘구나’하여 옥순봉 이름이 유래 한다고 합니다.
선생은 이후 귀향길인 1569년 음력 3월 12일 청풍에 도착하여
13일 구담(龜潭)을 지나면서 청풍군수 이지번(李之蕃)과 시를 주고받았습니다.
아마도 그날은 비가 뿌렸나 봅니다.
의연히 구담은 은성을 둘러쌌는데
산인(이지번)은 지금 나와 동행 하는구나
지팡이 짚고서 함께 유람한 곳 찾아 가려는데
어이할거나 갑자기 비 내려 산 앞이 어두워지네
『퇴계집』 5권 속내집 (이상하 번역)
이 명승지인 구담봉 일대의 이야기로는 이번 여정에 함께한 조용헌 박사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1517~1578)의 공부처’로 밝혀 놓았습니다.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은 이지번의 아우로 그가 이곳에 머물며 득의했다는 의견입니다.
...토정은 아홉 살 위인 친형(이지번)에게서 기본적인 과목을 배웠으며,
화담(花潭,서화담)문하에서 추가 공부를 하였지만,
40세 무렵부터 몇 년간 단양 구담봉 일대에서 집중 수련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청풍, 단양, 제천, 영춘은 ‘사군산수(四郡山水)’ 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시인, 도사, 학자들이 가보고 싶어 했던 지역이다.
이지번이 청풍군수를 맡았던 것도 절친했던 퇴계 선생의 권유가 작용하였다고 한다.
청풍의 그 유명한 한벽루에 올라 주변 산세를 감상하니
호수의 수(水) 기운과 주변 바위산의 화(火)기운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2019.4.22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중에서
출렁이는 뱃머리에서 겨우 화첩을 접고 나자 장회나루에 배가 닿았습니다.
이른 중식 후 귀향일행은 단양향교로 떠나고
정선생과 저는 다른 일정이 생겨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어요.
이 미련은 화실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모든 일정을 미루고 퇴계선생을 만나기로 했어요.
여전히 진행 중인 귀향길 재현단을 저는 붓길로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나흘이 지난 후 마침내 일행이 안동의 도산서원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그리고 뜻 깊은 폐막 후 뒤풀이시간에 기획을 담당했던 안교수의 감회어린 목소리에 감읍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감축하며 짧게나마 동참의 기회를 주신 인연에 감사했지요.
한편 그림숙제 기간에 우리시대에 이루어진 이 선비정신의 행보가
훗날 역사적인 사실로 기록되리라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한편 오늘에도 선생처럼 당대에 존경받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분을 그리워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풍토가 조성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나아가 오늘의 이 여정이 선생의 후학들에 의해 이루어진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마침내 붓을 씻으며 선생을 흠모하며 일어난 한 생각,
그대 아름다운 뒷모습이여!
2019. 4. 27.
글과 그림. 이 호 신
▶ 퇴계 선생의 후학들(퇴계 선생 귀향길 재현단), 60x92cm, 한지에 수묵, 2019년.
▶ 한벽루 스케치(화첩)
▶ 제천 청풍의 <한벽루와 응청각>, 46x60cm, 한지에 수묵채색, 2019년.
▶상읍례(相揖禮- 아침인사 나누기)(화첩)
▶ 퇴계 선생 귀향길 재현단, 60x46cm, 한지에 수묵채색, 2019년.
▶ 옥순봉 스케치(화첩)
▶ 구담봉 스케치(화첩)
▶ 구담봉과 옥순봉, 92x60cm, 한지에 수묵채색,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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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시대의 진정한 선비정신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요
선비정신이 왜 맥을 이어가야 하는지 이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뜨겁고도 복잡해진 가슴을 냉철하게 지켜줄 시대정신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