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2월21일 [(자) 대림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 아가 2,8-14
복음 루카 1,39-45
◈ [서울] 12월 21일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성탄을 앞두고 판공성사를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사를 보는 분들이
많아서 성사를 도와줄 신부님들을 초대하곤 합니다. 저도 초대를
받아서 성사를 도와 드렸습니다. 성사를 마치고 함께 온 신부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작은 기쁨입니다. 28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대화의 주제가 조금씩 바뀌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좌 신부 시절에는
휴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일학교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름 행사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첫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는 성당 신축을
이야기했습니다. 신자들이 얼마나 좋은지 이야기했습니다.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습니다. 모두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20년이 지나면서는
조금씩 건강 이야기를 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부모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 이야기도 했고, 요양 병원에 계신 부모님 이야기도
했고, 아프신 부모님 이야기도 했습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격려해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목은 이어달리기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시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보다 먼저 사목을 하셨던 선배 신부님들이
고맙습니다. 사목의 열정을 키워가는 후배 신부님들을 보는 것도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인사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노년의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축복해 주었고, 젊은
마리아는 노년의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갔습니다. 두 분의 만남은
설렘과 기쁨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만남도 그렇게 설렘과
기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있어서 세상의 모든 강물이 모일 수 있습니다.
바다는 깨끗한 강물만 선택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더러운 것,
오염된 것들도 말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만큼 깊고 넓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커다란 배를 움직이게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남을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바다에서 모든 생명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산해숭심(山海崇深)’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이 바다와 같이 넓고 깊었으면 좋겠습니다.
높은 산처럼 품위를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통합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바라보기보다는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속상한 일, 화나는 일, 원망이 생겨나면 그것과 싸우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귀의 고삐를 잡고 당기면 나귀는 내 곁에
머물게 되듯이, 원망, 분노, 미움의 고삐를 내가 계속해서 잡고
있으면 결코 자유롭게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의 고삐를 놓아 버리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수련이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제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들에게 평화!’
라고 노래를 합니다. 주님의 성탄은 ‘번뇌와 갈등, 욕망과 미움’의
고삐를 놓아 버리는 사람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수련과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이제 곧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현실이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서울] 2018년 12월21일(금) 태아들의 교감에 놀랐어요.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1~45)”
70대 언니가 20대 동생에게 이런 말 한 것이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시간이 문제 아니라 세월 뛰어 넘은 대화라 어안이 벙벙할 뿐입니다.
남자로서 읽으니 태중아기 뛰논다는 거와 태아들의 교감에 놀랐어요.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의 자세와 표정을 상상하면서 하늘 봅니다.
계시로 태어날 두 아기의 영혼들이 인류 미래문제 교감하는 장면을요.
세월 시간과 공간 넘어 안보여도 교감하며 사신 큰 인물들이었거든요.
가톨릭은 2000년 전과 같고 예수님과 공감하며 사는 신앙인들입니다.
영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런 세상 그리며 인터넷교리로 대쉬해 봅시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타인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사람이 되려면
2018년 다해 12월21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타인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사람이 되려면>
복음: 루카 1,39-45
이무석 교수의 책에서 ‘작은 눈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던 한 여자의
사연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첫 째로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다가 동생이 태어나자 부모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줄어듦을
느꼈습니다. 동생은 눈에 쌍꺼풀이 있고 자신이 없었기에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작은 눈 때문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돈도
많이 버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술집 여자와 부정한 관계를 가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도 자신이 훨씬
많이 벌고 세상에서도 자신이 훨씬 성공한 사람인데 자신과 같은
사람과 살면서 어떻게 그런 데를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남편은 사과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겉으로는 남편을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론
용서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직장에서 퇴근한 남편에게 집을
나설 때부터 집에 돌아올 때까지를 한 시간 단위로 끊어서 무엇을
했는지를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속이는 것일 수 있으니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똑같이 반복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의심을 하고 있다면 이는 남편을 용서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가 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녀의 문제는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생긴 눈 작은 콤플렉스였습니다.
그녀가 남편이 갔다던 술집의 여자를 꿈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눈이 굉장히 컸습니다. 이는 남편이 그런 여자를 가까이 한
이유가 자신이 눈이 작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상처가 결혼생활까지 영향을 주게
되어, 남편이 아버지의 사랑을 채워지기를 바랐지만 남편은 그것을
견디어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을 믿지 못하면 누구도
믿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행복해지려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자매는 사랑받지
못한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상처는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나의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하지만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끼니 땅에 떨어진 자존감을 공부나 돈으로 다시 높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만 알아달라는
그런 여자에게 지쳐갈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해지려면 내가 사랑받을 충분한 가치 있는 사람임을
믿어야합니다. 물론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그 부족했던 사랑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사람일 때는 매우 곤란해집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다 그런
상처로 자신을 인정해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하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다가는 더 큰 상처만
받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해 주실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분은, 당신 자신이 ‘사랑
자체’라고 하신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드님을
제물로 죽여 바치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기만 한다면 우리의 모든
상처는 치유되고 다시 기쁨에 차게 됩니다.
하지만 사랑은 발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전달해 우리를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발을 빌려 알려주셔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발이 되어주셨던 분이 오늘 복음의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 사랑을 당신 태중에 품고
엘리사벳에게로 달라갔습니다.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 당신을 찾아준 것에 대해 태중의 아들과 함께 기뻐 뜁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된 엘리사벳은 이제 태중의 아들 요한도 그런
존재라고 믿도록 키울 것입니다. 요한은 그래서 세상 것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려하는 행위는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요한이
광야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어머니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셔서 행복한 분!”
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를 위해 주실 수 있음을 믿는
사람만이 또 누군가에게 그 사랑을 전해줄 사랑의 발, 사랑의
전달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누구의 자존감도
높여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사랑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나의 태중에 하느님이 계신만큼 나는 귀중한 존재라는
그 믿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준비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저의 죄를 기억하지 마소서.”
주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무슨 죄 말이냐? 난 다 잊었는데. 네가 기억을 되살려 주려무나.”
우리도 고해성사를 보고 찜찜하여 같은 죄를 또 고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니 그만큼밖에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일을 할 수 있는데,
하느님께서 고해성사 본 죄를 계속 기억하고 계시리라고 믿는 것은
하느님을 나의 기준으로밖에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사람밖에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셔서 나를 하느님으로 만들어주셨다는 그
믿음, 그것만이 내가 또 다른 사랑의 발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누구의 애정을
갈구하겠습니까? 그런 자존감을 가진 사람만이 오늘 성모 마리아처럼
또 다른 이의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시켜 줄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참사랑은 조금은 아쉬운 사랑입니다!
2018년 다해 12월21일
참사랑은 조금은 아쉬운 사랑입니다!
구약 성경 안에 참으로 특별한 책이 한 권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
사랑 노래 메들리’라고 할 수 있는 아가(雅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 때, 아가를 낭독할 걸 봐서,
그들이 아가를 얼마나 가치있게 여겼는지 잘 알수 있습니다.
아가서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노래, 특히 한 여인이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연인(戀人)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사랑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가가 다분히 연애시적 성격이 강하다는 이유로 성경에
편입되는데 꽤나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결국 후대 사람들은 아가서에 등장하는 연인 사이의 관계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 하느님과 교회의 관계,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아가서를 읽다보니, 남녀 주인공 사이에 주고받는 표현들이 얼마나
절절한지, 제대로 한번 사랑해본 사람의 쓴 책이 분명합니다. 연인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심정, 연연을 만나기 전까지의 설레임, 연인을
발견했지만 차마 나서지 못하는 안타까움, 연인이 가까이 다가왔지만
알아채지 못한 아쉬움, 엇갈린 운명에 대한 탄식으로 가득합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본답니다.”(아가서 2장 8~9절)
가만히 생각해보니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형태 역시 비슷합니다. 불철주야 애끓는 심정으로 연인을
찾아다니지만,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탄식하는 여인의 모습이,
하느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우리와 어찌 그리 비슷한지요.
때로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고 심오하기에, 작고 아둔한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듯 합니다. 결국 아가의 스토리는
우리 각자의 스토리입니다. 우리가 마음 먹은 데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품안에 넣고 영원히 독차지했으면 좋겠지만, 독차지 후의 사랑은
더 이상 하느님 사랑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참사랑은 조금은 아쉬운 사랑입니다. 어느 정도 여지를
남기는 사랑입니다. 끝장을 보고 난 후의 사랑의 결과는 참담함과
혹독함 뿐입니다.
“인간이 사랑에 매이게 되는 것은, 그 사랑이 주는 ‘기쁨’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한 ‘슬픔’ 때문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기쁘고
설레는 것이지만 동시에 고독과 슬픔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노래 아가는 기쁨의 노래라기보다는 엇갈림과 혼란에 대한
슬픔의 노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어쩌면, 혹시나...하면서 다가가는 그 떨림의 여정이 우리의
일상적 관계임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도 그러한
여정을 그대로 밟으면서 완성되어 가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아가는
우리 삶 전체를 매우 현실적으로 보여준 걸작이라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닌 것입니다.”(김혜윤, 구약성경 통권노트, 생활성서사)
또 다시 성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도 그분 가까이 한 발자국 더
다가서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12월21일(금) -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
오늘은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로마서 6장 18절 말씀에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외칩니다. 그리고 그 자유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어느 누구도 자유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지요.
하지만 보통 우리가 좋아하는 이 자유는 결정적인 하자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책임을 지지 않는 자유입니다. 한마디로
‘나중은 내가 알게 뭐야, 난 몰라!’이러한 자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자유는 다릅니다.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영원히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뿐 아니라 천국에 가서도 책임져
주시고 영원히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 바로 이 자유를
소유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죄에서 놓임 받아 하나님의 의로 해방 되어 영원한 자유를 맞보는
사람은 결코 세상적인 내 중심의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중심으로 모든 짐을 맡긴 참 편안함의 자유! 바로 이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그 짐을 가져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행복하십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다해 12월21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루가1,39-45)
행복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추구하는 방법과 구체적으로
느끼는 형태가 다양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만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유하는 것에서, 어떤 이는 지배하는 것에서,
어떤 사람은 베푸는 사랑에서 만족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11장 27-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결국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세상에서 행복을 찾지만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행복이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실행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재물도 명예도 얻었고 좋은 집에 좋은 차를 가지고
있으며 귀한 자녀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학생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해도 거기에서 행복이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어도,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고 할지라도 때가되면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인생 여정에 있어서 예기치 않는 많은 일들을 접하게 되고 그 안에서
이유도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또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성공과 실패 안에서도 그분이 역사하시고 섭리해 주심을 알기에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알맞은 종류의 행복을 주십니다.
시련과 고난을 겪기 전이나 겪는 중이나 혹은 겪고 난 뒤에 반드시
주십니다”(성 알로이시오 슈월츠).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의 것을 추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행복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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