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바쳐라
백성욱
우리가 불교를 신앙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부처님이 되려는데 있습니다. 또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출현하신 큰 뜻도, 고해에서 윤회하는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님을 만들려는 데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되면 중생이 가지는 일체의 번뇌와 고통과 부자유에서 벗어나 원융과 원만과 자유자재롭게 됩니다. 그래서 성불은 곧 해탈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불은 어떻게 해야 하며 해탈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여기에 대하여 모든 것을 버리시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나를 버리고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음을 버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만과 집착과 아집을 버리고 아상을 떨어버려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매에게 쫓기는 비둘기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육체를 그 매에게 던져주던 부처님처럼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성불은 가능하고 해탈의 길은 열린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아니하고는 윤회의 굴레를 헤어날 수도 없고
또한 피안의 길은 요원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성불과 해탈을 위하여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부처님 앞에 바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마음도 나의 몸도, 탐욕과 진심과 어리석음도 부처님께 바쳐버리고, 기쁨도 슬픔도 근심도 고통도 모두 바쳐야 합니다.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칠 때 평안이 오고, 일체를 바치고 날 때 법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욕(五慾)도 바치고 팔고(八苦)도 바쳐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 주십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을 바침으로써 불타의 가르침은 받아드려지는 것입니다.
중생의 원인이 되는 무명을 바쳐버리면 불타의 지혜가 비춰옵니다. 불타의 광명이 나에게 비추일 때 거기엔 윤회의 바다를 벗어납니다. 생사를 바쳐버리면 거기엔 불생불멸의 영원한 일체의 고통이 따르고 번뇌가 발생합니다. 명예를 자기의 것으로 하고, 재물을 자기 것으로 하고, 여자를 자기의 것으로 하고, 자식을 자기만의 자식으로 하려는데, 중생적인 고뇌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영원한 자기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명예가 어찌 자기와 같이 할 수 있으며 남녀의 사랑이, 재물이, 자식이 어찌 완전한 자기의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중생적인 것은 부처님께 바치고, 무상치 않은 즉 영원히 자기의 것일 수 있는 불타의 지혜와 진리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 모든 것을 바친다함은, 우리가 부처님과 항상 같이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잠시라도 떨어져 있게 되면 번뇌와 망상이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유럽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중앙불교전문(中央佛敎專門) 학교의 교수로 취임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수직을 사임하고 금강산 안양암에 들어가 단신수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1928년 가을, 그 곳에 들어가 수도를 한 이유는 내 자신이 좀 더 부처님 속에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멀리하고는 무엇인가 허전하여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은 처음 3년 동안은 오직 혼자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던 해 금강산에 들어와 수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동재(同在)하기를 간청하는 바람에 그들의 뜻을 물리칠 수 없어 지장암으로 옮겼습니다. 이때부터서는 여러 수도자들과 같이 기도하면서 그들을 지도하기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안양암에서 3년. 지장암에서 7년, 그래서 이 기도는 만일기도였습니다.
그런데 만일기도가 끝나는 1938년 가을의 어느 날 순경이 나를 체포하러 왔었습니다. 이유인즉 사이비종교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는 그네들의 일천황(日天皇) 신앙 외에는 사이비로 몰아 세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압력으로 나의 금강산 수도생활은 더 계속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 중 다행이기도 하였습니다. 수도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던 것은 불행한 일이었습니다만, 목적한 만일기도를 무사히 끝마쳤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때 상황으로는 부처님의 가호가 없이는 만일을 채우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지금 회고해 보면 내 생애의 전반에 걸쳐 금강산 수도생활의 시절보다 의의롭고 보람있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안양암의 단신 수도 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 때의 신심은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기도는 석가모니불 앞의 피나는 정진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부처님 앞에 바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부처님 곁을 떠나는 날이 없습니다. 나의 마음속에, 그리고 나의 생활 속에는 항상 부처님이 계십니다. 나의 이러한 신앙심은 내가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날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변함이 없었습니다. 내가 불교와 인연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 큰집과 외가 사이에 나의 전도 문제를 놓고 의견이 서로 엇갈려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조그만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 나는 서울 근교에 있는 조그만 절에 가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불교와 접촉하게 되고, 결국 1910년 여름 봉국사(奉國寺)에서 최하옹(崔荷翁)선사에게 득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나이 열네 살, 그 뒤 전국 사원의 불교 강원을 찾아다니며 경전을 수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한일합방이 된 직후라 사찰의 강원도 신통치 않았었고 경을 가르치는 강사도 별로 없었습니다만 수소문하여 찾아가서 은밀하게 배우고 가르치는 정도였습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는 경전을 배우기 위하여 전국 사찰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때 천안의 광덕사에 묘향산에서 온 유명한 도승이 있다기에 찾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역시 그 절에는 한 도인이 있었는데, 그는 날마다 기와 조각을 숫돌에 가는 게 소일이었습니다. 그래 우리가 “스님, 기왓장은 왜 날마다 가십니까?”하면 그는 세경(거울)을 만들고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돌이나 쇠를 간다면 모르지만 흙을 구워 만든 기왓장을 백 년 간들 세경이 되겠는가? 그의 그러한 행동에 암시적(禪的)인 교훈도 있겠지만, 그때 세상을 풍자하고 있음이 틀림없었습니다. 이로 미루어보아도 그때 스승을 찾으며 불교공부를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도 나는 이 모든 고통과 정열을 부처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고행을 하였습니다.
또 상해의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 운동을 하다가 유럽으로 유학을 갈 때도 자진하여 어려운 길을 택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에 유학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유럽유학은 적었습니다. 그만큼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유럽은 여러 가지 조건이 어려웠습니다. 내가 유럽유학에 큰 뜻을 둘 때, 전대통령 이승만박사는 유럽은 고학하기도 힘들거니와 여러 가지 사정이 어려우니 미국으로 유학하는 것이 어떠냐고, 유럽을 단념하기를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이 어렵기 때문에 더욱 그 길을 택하겠다고 고집하고 1920년 불란서 행 배를 탔던 것입니다.
물론 불란서와 독일에서의 유학은 쉽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호를 믿고 있는 나에게는 모든 고행을 인내해 갈 수 있었습니다. 역시 유럽 유학도 부처님께서 보살펴 주신 은혜로 무사히 마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고행은 나의 지식을 위한 것도 아니고 어떤 공명을 얻고자 함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치려는 수행의 과정이었고 구도의 행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我)라는 아만심, 내 것이라는 집착심을 털털 떨어내어 부처님 앞에 바쳐봅시다.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란 바로 이런 소식입니다. 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即見如來)’라 하였습니다. 그 범소유상, 그리고 유상이 아닌 모든 것까지도 부처님께 바칠 때 여래는 현현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부처님께 바친 자리, 그 텅 빈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입니다. 나(我)라고 하는 놈은 무엇이든지 하나를 붙잡아야지 그냥은 못 배기는 놈입니다. 그래 그놈 때문에 우리가 윤회의 중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두들 부처님 앞에 바쳐버리면, 거기에는 아만도 아집도 없읍니다. 그렇게 되면 시기도 질투도, 명예를 위한 다툼도, 사리나 이권을 위한 싸움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칩시다.
(null) 「법시(法施)」 / 1974. 8.
출처 :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문회
작성자 : chandra
작성자 : 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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