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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6070 낭만길걷기 원문보기 글쓴이: 미션
벗의 소중함
- 스승이 못되면 친구도 될 수 없다.
유대인하면 무조건 돈만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길 수 있다. 물론 그들은 돈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그런데 다른 민족과는 달리 이들은 돈을 많이 버는데 목적을 두기보다는 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이 많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경제관념이나 경제지식이 상당하다. 이런 유대인중에 대표적인 부자가 워렌 버핏과 빌게이츠이다.
이 둘의 나이차이가 25살 정도 나는데, 이들의 우정이 상당하다. 억만장자들이지만 빌게이츠는 워렌 버핏이 자신과 아내 멜린다 게이츠의 삶을 많은 면에서 바꾸어 놓았으며, 빌게이츠는 워렌 버핏을 ‘아버지이자 스승 같은 존재’라고 불렀다.
빌게이츠는 젊어서부터 경영적인 측면이나 인생의 어려울 때면 자주 “워렌 버핏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면서 자문하면 최선의 해답이 나왔다고 한다. 이들의 25살의 나이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의 경우 퇴계 이황(1501~1570)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우정을 들어볼 수 있다. 이 둘은 퇴계 선생이 타계한 1570년까지 12년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라는 유학의 가장 중차대한 논쟁을 중심으로 편지를 주고 받았으면, 세계 유학사에 전례가 없는 논쟁과 우정을 펼쳤다. 이들은 각자의 학문세계에서 맞수같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러면서 서로를 존중하였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 되었고, 학생이 되었고, 친구가 되었다.
이스라엘에도 이런 우정의 스토리가 여럿 존재한다. 랍비들중에도 토라와 탈무드를 가지고 격렬한 토론을 하면서도 그 토론이 자칫 싸움으로 가지 않고 도리어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우는 결과를 갖게 한 스토리들이 존재한다.
지난 시간에 논어의 친구와 비슷한 개념인 붕우(朋友) 라는 단어를 인용하였다.
유(有)붕(朋)자(自)원(遠)방(方)래(來) 불(不)역(亦)낙(樂)호(好)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물론 지기(知己)라는 말도 붕우나 벗, 또는 동무와 비슷한 의미이다. 그런데 붕(朋)은 무엇이고, 우(友)는 무엇인가?
붕(朋)이라고 함은 스승이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한자로는 동(同)사(師)라 부른다. 붕은 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여러 명을 가르킨다. 한 스승아래 여러 명의 학문동기가 있는 것이다. 단수개념이 아니라 복수개념이다. 우(友)는 벗이라고 하고 늘리면 교우(校友) 또는 학우(學友)의 개념이다.
우(友)는 뜻이 같은 사람을 말한다. 즉 지(志)동(同)이라고 부른다. 우(友) 자라는 한자를 보면 재미가 있다. 왼손 좌(屮)자와 오른 손 우(又)가 합쳐진 단어이다. 이는 왼손과 오른 손이 같이 합력하듯 친하게 지내며 돕는 사이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의 친구라는 개념이 한자의 우(友)와 거의 대동소이하다. 벗이라는 말이 잘 이해가 안되면 순수한 우리 말인 동무가 있다. 동무는 듣기가 참 좋은 단어이다. 글을 같이 읽으면 글동무가 된다. 길을 같이 가면 길동무가 된다. 말을 같이 나누면 말동무가 된다. 그리고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면 어깨동무가 된다. 요즘에는 이런 동무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북한의 공산주의의 영향이 강하여서 그렇다고 보여진다. 북한에서는 높은 사람이라도 ‘동무’라고 부른다. 나는 한국이 이런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아쉬움이 있다. 앞으로 여행동무, 독서동무, 트렉킹동무, 산행동무 등의 말이 나왔으면 좋겠다.
한국의 실학자중에 언어의 연금술사인 연암 박지원이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벗이란 동거하지 않는 아내요, 동기가 아닌 아우다” 라는 말을 하였다. 벗이라는 의미가 단순한 친구 이상임을 보여준다. 같이 학문을 연마하고 토론을 하여도 벗과이 토론은 기쁨 그 이상의 희락과 만족을 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벗은 제 2의 나’라고도 표현하였다.
추사 김정희 선생께서는 ‘벗은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불렀다. 추사의 고모부가 되는 담헌 홍대용 선생께서는 벗을 향하여 극찬하였다. “그대와 나눈 대화가 10년 독서보다 낫소”라고 하였다. 벗과의 ‘사랑과 영혼의 대화는 천상의 기쁨을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담헌 홍대용 선생은 중국의 항저우의 선비인 엄성과 각별한 사이였다. 그 둘 사이를 천애지기라고 불렀다. 천애지기(天涯知己)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를 알아주는 각별한 친구라는 뜻이다.
이런 친구들이 있으면 천하에 무엇이 부럽겠는가?
최근에 읽은 이덕무 선생의 책이 있다. 이덕무의 [문장이 온도]라는 책이다.
이덕무 선생은 박제가, 유득공, 박지원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가장 많은 독서를 한 간서치(看書癡)로 알려진 인물이다. 정조 대왕이 가장 많은 독서를 한 왕이기도 하지만, 친히 이덕무 선생에게 배움을 요청할 정도로 이덕무 선생은 당대 최고의 독서가요 문장가였다. 그의 문장을 보면 너무나 아름다워 현란할 정도이다.
“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 손수 오색실을 물들이리라. 열흘에 한 가지 빛깔을 이룬다면 50일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룰 수 있으리. 따뜻한 봄볕에 말린 다음, 아내에게 부탁해 백 번 정련한 금침으로 벗의 얼구을 수놓게 하리라. 그런 후 귀한 비단으로 장식으로 오래된 옥으로 축(軸, 두루마리)을 만들어 높은 산과 양양히 흐르는 강물 사이에다 펼쳐 놓고 말없이 바라보다가 뉘엿뉘엿 해 질 녂에 품에 안고 돌아오리라”
벗과 님을 향한 찬가가 너무나 아름답다.
벗의 소중함은 나이와는 관련이 없다. 얼마만큼 서로의 가치를 높여주는가와 더불어서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가에서 소중함을 찾아볼 수 있다.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더라도 덕성이 더 중요하다. 인격의 힘에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배우고 닮아가려고 한다. 벗의 소중함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자 나의 스승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스승하면 나이든 선생님이나 자신을 가르쳐준 은사분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스승에 대한 관념은 상당히 다르다. 또한 유대인들에게도 스승에 대한 관념이 상당히 다르다. 나이가 어려도 깨달음이 있으면 스승이 될 수 있다. 어떤 랍비는 바벨로니아 지역에서 15살에 랍비가 되었고, 나이가 40이 넘는 제자도 두었다고 한다. 나이를 넘어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놀라운 내공과 신비를 가진 것이다.
다시 논어(論語)로 돌아가본다.
논어에 보면 익자삼우(益者三友) 손자삼우(損者三友)라는 말이 있다.
이는 공자의 말로서 유익함이 되는 세 친구를 말한다. 정직(正直)한 사람을 벗하고, 신의(信義)가 있는 사람을 벗하며, 견문(見聞)이 많은 사람을 벗하는 이들로서 그들과 사귀면 이롭다라는 것이다.
이런 3명의 유익함이 있는 친구를 얻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본인이 바로 이러한 친구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언명(言明)이기도 하다. 이런 친구는 얼마든지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
반면에 해로움이 되는 세 친구는 겉치레(사벽))에 빠져 올곧지 못한 사람을 벗하고, 아첨(阿諂)으로 남을 기쁘게 잘하는 사람을 벗하며, 말만 잘하는 사람을 벗하면 해(害)가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법구경(法句經)이 있는데, 평소 법정 스님이 즐겨 읽었다는 경서중 하나이다.
“나보다 나을 게 없고 내게 알맞은 길벗이 없거든
차라리 혼자 가서 착하기를 지켜라. 어리석은 사람의 길동무가 되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는 스승같은 친구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친구에게서 배우고 가르침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아직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며칠 전 어떤 고향의 초등학교 친구가 한 말이 기억이 난다.
“나는 너라는 친구가 있어서 얼마나 유익한지 모른다. 인생이 동반자로서 너 만한 친구가 없다.”
이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새롭게 조명해야 할 인물이 있다.
얼마 전에 순천향 대학교의 홍승직 교수가 쓴 [이탁오 평전]을 보면서 나는 너무나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탁오는 중국 명나라의 좌파적 양명학자였다. 그가 쓴 말 중에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친구도 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탁오 평전에 나온 명구를 소개한다.
“내가 말하는 스승과 친구란 원래 하나이다
어떻게 두가지 다른 의미가 존재하겠습니까?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친구가 바로 스승인 줄은 알지 못하니, 이리하여 네 번 절한 뒤에 수업을 전해 듣는 사람들은 친구가 바로 스승이지요. 또 스승이 바로 친구인 줄은 모르고 그저 친교를 맺으며 가까이 지내는 자만을 친구라고 일컫습니다. 친구라지만 네 번 절하고 수업을 받을 수 없다면 그런 자와는 절대로 친구하면 안 되고, 스승이라지만 마음속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다면 그를 또 스승으로 섬겨서도 안됩니다.”
이탁오 선생에 대한 글은 추후에 다시 올리겠지만, 이 사람을 보면서 유대인들의 ‘하베르 - 친구’개념이 상당히 대단한 것임을 알게 해주었다. 유대인들에게 친구란 곧 스승 같은 존재이다.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배움이다.
토라, 탈무드, 미쉬나, 게마라, 토세푸타, 랍비문헌 등을 살펴보면 전부가 공통적으로 ‘배우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들은 신의 뜻과 섭리를 하나라도 더 이해해야 신에게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을 알자, 힘써 하나님을 알자’ 라는 소리를 자주 한다.
이들은 배움은 신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신앙생활이자 하나의 큰 대의명분인 것이다.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큰 어른은 바로 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학자나 랍비이다. 이들은 스승이 되려면 [청출어람(靑出於藍)]을 강조한다. 즉 자신을 가르친 스승과 똑같은 모방주의자가 아니라, 스승의 빈틈을 잘 찾아서 자신만의 이론과 학설을 정립하였을 때 비로소 학자(스콜라, 랍비)라는 칭호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의 스승들이나 교수들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제자가 나왔을 때 비로소 스승의 도리를 다 했다고 믿는다.
이들에게 친구는 곧 스승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
스승은 온유하고 인내하면서 스스로를 먼저 가르치는 사람이다. 자신을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다른 이의 스승이 될 수 없다. 그저 그는 지적으로 교만하고 오만한 사람일 뿐이다.
글을 쓰다 보니 자꾸만 보너스를 더 주고 싶어진다.
유대인들을 성공으로 이끈 중요한 요소가 바로 [독서와 질문과 토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 친구란 바로 독서하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서로 수평적이고 평등한 입장에서 질문과 토론이 이루어진다. 이들은 어린 아이라도 질문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래서 어린 아이의 주장에 대해서 바른 자세로 듣고, 바른 자세로 눈높이를 해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베르, 하브루타’ 라는 ‘친구개념’의 폭이 넓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친구하면 같은 나이이거나, 같은그룹에 속한 또래를 친구라고 여기지만, 이들은 자신이 못가진 것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줄 존재이기도 하고, 그리고 공자가 말한대로 상호 유익을 줄 수 있다면 스승같은 존재로서의 친구를 얼마든지 둘 수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도 [해로운 친구들]이 있다. 이들은 이런 친구들은 과감히 멀리한다. 유익한 친구를 스승으로 두고 오래 오래 좋은 관계성과 신뢰를 유지한다.
예루살렘에 살 때,
어떤 이스라엘 엄마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의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자주 깨지고 상처를 입자
그 엄마가 가서 그 아프게 한 아이에게 말한다.
“고맙다. 내 아이를 아프게 해 주어서”
그리고 자신의 아이에게 말한다.
“이제 저 친구랑 놀지 마”
참으로 이상한 것은 상대방 괴롭히는 아이에게는 고맙다고 하고, 자신의 아이에게는 놀지 말 것은 말하는 엄마의 태도였다. 그런데 그 후로 그 아이는 괴롭히지 않았고, 그리고 같이 놀지도 않았다. 이것은 유대인 엄마들의 [과잉보호]이기도 하다. 유대인 엄마들은 자식들을 [과잉보호]한다. 정말로 배울 점이 없고, 교훈할 점이 없다면 가차없이 자신의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분리를 해버린다. 그리하여 이들은 순수하고 본질적인 의미의 ‘하베르, 친구’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보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공부하는 친구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인성이 좋은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것도 보여준다. 지와 덕을 겸비한 친구를 중시여기는 이들의 [교육문화]는 정말 배울만 하다. 지성과 신앙을 겸비한 사람을 목표로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한편으로 무서운 민족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만 우리도 스승이 없다, 어른이 없다, 지도자가 없다고 한탄하지 말고 스승을 찾아 나서자. 그래도 없으면 본인이 스승이 될 만한 재목(材木)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좋은 사람을 만나 탐독하고, 질문하고, 토론하고, 우정을 쌓아나가야 한다. 지적 친교이면서 우정의 만남인 하브루타가 생활화 되어져야 한다.
#탈무드인문학 특강자료 ㅡ 김재훈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