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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처님은 왜 불멸인가?
질문16), 부처님은인도 가비라국에서 출생하시고 구시나가라에서 입멸하신 것이 불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런데도 스님은 부처님은 불멸이라 하시고 영원한 현재성을 말씀하시니 어찌된 말씀입니까?
잘 물으셨습니다. 부처님 믿는 사람은 무엇보다 불타관이 명확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경을 대하거나 믿는다면 흔들리게 됩니다. 사실 고오타마.싯달타, 석가모니 부처님은 약 3천년 전에 인도에서 나시어 그곳에서 입멸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부처님은 열반을 보이되 죽음이 아니며 실로는 항상 현재하건만 범부들이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사의 비유를 들어, 병들은 아들을 구하기 위하여 약을 만들어 놓고 먹을 것을 권하며, 다시 먹게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외지에서 죽었다고 말을 하고, 아들들이 약을 먹고 병이 나으니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비유처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자비심으로 짐짓 멸도상을 나투는 것입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여래는 형상이나 음성으로 볼 수 없다 하시고, 여래는 온다거나 간다거나 생사의 모양이 실로 없다 하시고 <진여가 여래며 불성이 여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래로 부처님에 대한 이해를 분류하여 변화의 몸과 닦아서 이루신 완전한 몸과 법성생명 본래의 몸의 세가지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법성의 몸이시기에 생멸 거래가 상관이 없는 법성진여 그대로의 몸이십니다. 이것이 법신입니다. 부처님의 본래 몸입니다. 법신인 부처님은 원래로 대자대비하시므로 짐짓 닦는 상을 보이시며 성불상을 보이시며 또한 세간의 풍파와 고뇌속에 출현하시어 ㅜ행도 고행도 열반도 보이십니다. 그것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바 보신이나 화신을 통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때로는 보신을 때로는 천백억 화신을 나투십니다. 3천년전에 룸비니에 나시고 구시나가라에서 멸도를 보이신 것도 대비 시현의 변화상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법성으로써 빛나는 지혜와 뜨거운 자비가 막힘없이 자약하시며,산너머 바다 너머 구름 너머 푸른 하늘에 영원한 태양처럼 자재하십니다. 어떤 분은 <법신은 비로자나불이시니 석가모니불이 아니다. 석가모니불은 법신이 아니라 화신일 뿐 >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법신을 여읜 화신이 없고 보신도 없습니다. 화신에서 화신만 본다면 그성은 중생견입니다. 실로 일체 화신은 일찍이 법신을 어의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불은 법신이며 일체불의 대표적 명호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아올 때 부처님은 오직 부처님일 뿐이며 그 이름은 석가모니불이라 하고 석가모니불의 화신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뜻은 법화경 수량품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처님은 3천년 전에 돌아가신 과거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위대한 교훈을 남기시고 먼 곳으로 떠나고 마신 영원한 인류의 스승만은 아닙니다. 오고 가시는 부처님이 아니시고 생사열반에 자재하신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처님은 영원한 현재성으로 영원한 공간에서 우리 모두의 절대적 주체성에서 가장 가까운 나의 생명의 원형으로 이해되고 파악되며 또한 그런 것이 영원한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 가장 자비롭게 우리 생명을 키우고 살피시는 부처님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은 경에도 말씀하셨습니다.<너희들이 맑고 곧은 마음으로 일심으로 나를 찾으면 곧 내가 앞에 나타나서 '나 여기 있노라'하리라.> 이 믿음을 갖고 수행하는 모든 사람이 생생한 부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2)불교는 철학 사상인가 ?
질문17), 부처님은 29세에 출가하시어 35세에 성도하시고 80세에 열반에 드셨으니 우리는 오늘날 부처님 안계신 때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부처님의 말씀의 기록과 행적을 따라서 부처님을 우러러 보기도 하고 가르침을 따라 수행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교학체계, 사상체계를 따라서 가파른 길을 닦아 올라가는 듯한 적막감과 외로운 감정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옳은 생각이겠습니까?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신앙이 그렇게 허술해서는 안됩니다. 경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부처님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몸이 아닙니다. 항상 머무는 몸이시며 허물어지지 않는 몸이시며 밥을 잡수셔서 유지된는 몸이 아니십니다. 금강의 몸이시며 진리의 몸 법신이십니다. 불자는 모름지기 <부처님은 법신이다>하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법신이시므로 불생불멸 부증불감 하시고 영원자재 하시고 원만구족하시고 대자대비 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래가 멸도의 모습을 보이지만 실로는 멸하지 않고 너희들이 곧고 바르고 간절한 마음으로 찾으면 언제나 네 앞에 나타나 '나 여기 있노라'하시고 >법을 설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부처님은 법신이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법신이신 까닭에 인간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습을 하시고 인간계에 태어나 인간과 더불어 고뇌하시면서 해탈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면 인간들이 부처님을 알 수 없고 해탈인연을 만나지 못하고 해탈의 뜻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천상중생을 제도하실 때는 하늘사람 모습을 나투시어 법을 설하십니다. 육도중생 앞에 천백억 화신의 몸을 나투시지만 실로 그 모습은 변화신이며, 중생을 위한 응화신이십니다. 부처님 자신은 일찍이 오신 바도, 가신 바도, 변화하신 바도, 열반에 드신 바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필요에 따라 바다에 갈 때는 수영복을 입고 산에 오를 때는 둥산복을 입으며 예식자리에 나아갈 때는 예복을 입고 달나라에 갈 때에는 그에 적합한 우주복을 입되 옷을 입은 주인공인 우리들 자신은 조금도 변화도 손상도 없는 거와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또는 열반에 드시는 모습을 보였다 하여 부처님이 온 것도 아니며, 간 것도 아니며, 멸도에 든 것도 아닙니다. 항상 법신으로써 여여할 뿐입니다. 대자대비하시고,대지혜이시고,대위신력 충만하신 부처님은 영원히 그대로이십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여래는 간 바도 없고 온 바도 없다.>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현재로서 일체처 일체중생 앞에 항상 나타난 계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법신인 도리를 안다면, 언제나 자비하시고 따뜻하시며 끝없는 은혜로 감싸주시는 부처님을 알게 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어느 때나 흔들림없이 대자비 위신력에 의지해서 역경을 이기고 창조적 생화를 열어가게 됩니다. 끝없이 자비로우시고 영원 자재하신, 법신인 부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불교를 철학사상이니, 운리종교니, 교주가 죽은 적막종교니 하고 비방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거듭 기억해 두십시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위하여 열반을 보이시되 실로는 열반에 듬이 아니고 대자비 열반상, 대자비 구족상이 영원 불멸하고 항상 현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부처님은 몇분인가?
질문18), 설법을 듣거나 경을 읽어 봐도 많은 부처님이 계신 듯 합니다. 석가여래부처님, 아미타불, 미룩불 그밖에도 퍽 많습니다. 우리는 서가모니불을 본사라고도 하는데 또 미타경에서는 아미타불을 믿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사방에 많이 계셔서 서로 찬탄하시면서 그 가르침을 배우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결국 우리들은 여러 부처님을 다 배워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 점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좋을지요.
말씀하신 바와 같이 경에는 여러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연등불이 계시고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미륵불도 계십니다. 국토에 따라 여러 부처님이 계시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의 근원은 둘이 없습니다. 법인 부처님이 계실 뿐입니다. 참으로 부처님을 보는 사람이면 법을 본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전에서도 <법을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법을 보느니라>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또 <여래는 나고 죽는 몸이 아니며 음식을 먹어 지탱하는 몸이 아니라 금강신이며 항상 머무는 몸이며 법의 몸>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본 몸은 법이고 법은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법인 까닭에 그 수명이 한량이 없고 또한 한량없는 국토에서 중생들을 교화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법화경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성불한 이래 무량무변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다. 나는 항상 사바세계에서 설법 교화하였으며 그밖에 다른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국에서 중생들을 교화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나는 연등불에게서 법을 얻었다고 말하고 또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방편으로 분별한 것이다. 나는 중생들의 근성을 관찰하여 그에 마땅한 바에 따라 제도하였으니 여러 곳에서 말하는 이름이 같지 않고 나이가 각각 다르며 열반에 든다고도 말한다.> <내가 성불한지는 매우 오래이고 한량없는 아승지겁 동안을 항상 머물러 멸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을 살펴보면 결국 부처님의 근원은 법이고 법인 부처님의 근원인 석가모니불이라 하여도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석가모니불이란 이름이 석가족에서 난 성인이라는 역사적 의미도 있어서 마땅하지 않은 점도 있으나 경전의 말씀을 비추어 그렇게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됩니다. 부처님은 필경, 일불이고 일불이 일체불인 것입니다. 중생을 위하여 나시는 국토나 때가 다르고 명호가 다르지만 그것은 중생을 위하여 발편을 따를 뿐이고 원래 부처님은 한 부처님이라 하겠습니다. 대반야경에는 <반야바라밀이 세존이고, 세존이 반야바라밀이다.>하셨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근원부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법으로써 영원하시고, 법으로써 항상 현재하시며, 법으로써 대자대비하시고,법으로써 원만구족하신 부처님을 볼 뿐입니다. 가시지 않고 오시지 않고 언제나 법성으로 원만하시고 자재하시고 자비하신 은혜의 부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부처님은 일불인 동시에 다불이고 다불인 동시에 일불이시나, 법이신 부처님은 유무에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다 둘이다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 것을 알겠습니다.
4)부처님의 가피력
질문19), 우리들의 본래 생명은 불성 자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로운 가피력을 미칠 수 있는지요?
훌륭한 말씀입니다. 부처님은 불성자체로 계시며 우리의 본성이 또한 불성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우리의 본성과는 둘이 아닙니다. 주고 받을 것이 없습니다. 더하고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우리의 본분을 잊고 있습니다. 망념에 사로잡혀 엉뚱한 경계를 짓고서 그에 빠져 삽니다. 우리의 본분 생명이 부처님과 하나이면서도 부처님 경계와는 아주 딴판인 경계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범부중생들의 경계는 실지가 아니고 허망한 것이어서 몽환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꿈세계에서 깨어나 본분세계에 돌아갈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꿈속에서마저도 욕심을 구하고 안락을 추구합니다. 이런 때에 부처님께서는 큰자비와 큰지혜로써 방편의 문을 여시어 우리를 제도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몽환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부처님은 방편으로 몽환의 몸을 지으셔 우리에게 접근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타이르고 마침내는 깨달을 수 있도록 온갖 자비 시설을 베풉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자비 방편으로 몽환 속의 우리들은 안락과 기쁨과 성공도 얻고, 노력하고 정진하여 깨달음의 길로 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몽환 속의 범부를 제도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자비심이 얼마나 지중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거듭 말한다면 불성 본분에서는 도움을 주고 받을 것이 없지만 중생을 위하는 부처님의 대비방편에서 가피력이 있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깨달음과 부처님 공덕
질문21), 부처님의 공덕이란 깨달음을 의미합니까? 법과 공덕과는 다른 것입니까?
부처님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진리란 위없는 법입니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은 법이며 진리이며, 진리가 곧 부처님이란 말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을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법을 보느니라>라 하셨는데 이것을 법불일여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공덕이란 진리가 지닌 모든 지혜와 자비와 위덕과 방편시설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완전하시고 무한하시며 원만하십니다. 멀고 가까운 거리도 없고 과거와 미래의 시간에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현재일 뿐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경계는 막힌곳이 없이 어느 때나 어느 곳에나 원만하지만 우리는 미혹하여 망견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그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부처님을 모르고 지냅니다.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믿고 닦아 나아가면 그 마음이 맑아짐에 따라 부처님의 자비하신 위신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범부들은 <부처님 은혜를 입었다. 부처님 공덕으로 성취되었다.>하는 것입니다. 이 뜻을 안다면 우리는 언제나 부처님의 크신 진리를 바로 알고 믿어야 하겠으며 진실을 행하고 마음을 밝혀 일찍이 우리에게 주신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매사에 자신의 것으로 쓰도록 하여야 하게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환희와 창조의 생활을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6)함께 하시는 부처님
질문22), 부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부처님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법이시며, 법을 깨달으심이며, 중생을 위하여 대자대비 방편을 열으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에 두 부처님이 없습니다. 일체불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시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참 몸을 억지로 말하여 법신불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 부처님이 중생을 건지시고자 가지가지 형상을 가진 부처님으로 나투시기도 하고 또한 열반에 드시기도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법 자체이시므로 시간 이전이시며 공간 이전이시니, 우리의 생각이나 논리나 비유로서는 집작하지 못합니다. 이 부처님이 뜨거운 자비심에서 한량없는 원력의 구름을 일으키시어 백천 방편을 베푸시게 되니 우리는 거기에서 부처님 말씀에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부처님이시고 우리의 모든 생활환경이 부처님의 크신 은혜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7)부처님이 복을 주시는가?
질문23), 부처님께서는 <니이다이> 같은 사회 최하계급 사람에게 지극한 자비를 행하셨는데 우리는 복을 비는 신앙만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복은 우리가 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친히 행하여 보이신 절대평등의 자비행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그러나 복은 불보살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에 대하여는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범부들에게는 부처님께서 친히 보신 바 무량복덕세계를 모릅니다. 자기가 지어서 복을 얻는다는 견해는 부처님의 무진장 공덕문을 수용하는 자세가 못됩니다. <내가 짓는다>는 아견이 쉬어야 합니다. 그럴때 이미 주신, 바꾸어 말하면 현재 이미 갖추어져 있는 원만공덕문을 열게 됩니다.다시 말하면 무량공덕을 자유로이 쓰지 못하게 하는 장애 요인을 제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무량공덕의 바다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생활조건과 환경과 뜻하는 바를 만들어내는 창조의 기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짓는다"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아견과 집착을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서 보살의 원을 따라 행을 열어간다면 하나하나의 행에서 무량공덕이 넘쳐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실한 온갖 것<복>은 부처님에게서 오는 것을 알 것입니다.
8)어머니 같은 부처님
질문24), 부처님이 어머니같은 친근감이 언제부터인지 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왜그런지 알고 싶습니다.
나쁜 생각을 지니거나 불법을 비방한 사람은 부처님에게 친근감이 가지 않고 두려운 생각이 들거나 무시하는 태도가 됩니다. 염불을 많이 하고 예경 많이하는 사람일수록 부처님께 친근감이 갑니다. 이것은 전생이나 금생이나 똑 같습니다. 아마도 귀하는 전생부터 염불을 많이 한 것으로 봅니다. 더욱 많이 염불하시고 부처님께 감사하여 부처님이라는 생각의 흔적도 없는 데까지 이르기를 바랍니다.
9)부처님이 무서울 때
질문25), 법당에 들어가면 부처님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친한 감정이 우러나는 방법이 없습니까?
부처님 상호가 무섭게 생겨서 두려운 생각이 날 때도 있겠지요. 그렇지 않고 부처님 상호가 미묘 단정하더라도 단청과 울긋불긋한 원색적 강한 빛깔이 두려운 분위기를 자아낼 때도 있겠지요. 어쩌면 부처님은 선악을 꿰뚫어 보시고 죄있는 사람을 벌해 주는 거와 같은, 신비스럽고 두려운 존재라는 관념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그렇지 않은데 부처님이 두렵게 생각될 때는 좋은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첮째 부처님 앞에 떳떳한 바르고 큰 원을 세울 것이며, 둘째로 부처님은 지극히 자비하신 성인이라는 것을 깊이 믿고 일심으로 끊임없이 염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일체 중생과 자신의 무량겁으로부터 내려오면서 지은 바 모든 악업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만 실천하시면 부처님은 바로 우리의 자비하신 아버지임을 느끼게 될 것이고, 우리의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용서하시고 언제나 조건없이 도와주시는 부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참회하고 부처님과 원을 같이 하는 사람, 지극히 자비하신 부처님을 믿고 일심으로 염불하는 사람, 그 사람은 부처님이 다시 없는 자비하신 아버지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10)부처님과 거리감
질문26), 부처님을 높은 진리를 깨달으신 위엄있는 성인으로 믿고 있으면 거리감이 있기 쉬운데 어떻게 하면 친근하게 부처님을 대하고 거리감같은 벽을 없앨 수 있을까요?
세 가지를 말씀드리지요. 첫째는 부처님의 구세대비원력을 같이 하여야 합니다. 둘째는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오기 전부터 또한 먼 미래까지 우리에게 절대적인 진리의 은혜를 베풀어 키워주고 계심을 믿고 나의 본래 면목이 부처님 진리생명이며 공덕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비하신 부처님 앞에 나의 진실한 소원을 바치고 그것이 지금 순간 순간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사하면서 염불하고 독경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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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
어서오세요
환영합니다.
원공법계 제 중생
자타일시 성불도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
어서오세요
환영합니다.
원공법계 제 중생
자타일시 성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