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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sarati D2 용례
♦ 15. “tathāgatassevesā, bhikkhave, dhammadhātu suppaṭividdhā,
yassā dhammadhātuyā suppaṭividdhattā tathāgato atīte buddhe parinibbute
chinnapapañce chinnavaṭume pariyādinnavaṭṭe sabbadukkhavītivatte jātitopi anussarati,
nāmatopi anussarati, gottatopi anussarati, āyuppamāṇatopi anussarati,
sāvakayugatopi anussarati, sāvakasannipātatopi anussarati —
‘evaṃjaccā te bhagavanto ahesuṃ itipi, evaṃnāmā evaṃgottā evaṃsīlā evaṃdhammā
evaṃpaññā evaṃvihārī evaṃvimuttā te bhagavanto ahesuṃ itipī’ti.
1.15. “비구들이여, 여래는 참으로 법의 요소를 잘 꿰뚫었기 때문에18) 과거의 부처님들에 대해서
'그분 세존들은 이러한 태생이셨고, 이러한 이름이셨고, 이러한 종족이셨고, 이러한 계를 가지셨고,
이러한 법을 가지셨고, 이러한 통찰지를 가지셨고, 이렇게 머무셨고, 이렇게 해탈하셨다.’라고
그분들의 태생도 기억하고, 이름도 기억하고, 종족도 기억하고, 수명의 한계도 기억하고,
두 상수제자도 기억하고, 제자들의 회중도 기억한다.
18) 이하 본경의 §§1.16~3.28까지는 세존께서 직접 꿰뚫어 보신 위빳시 부처님의 일대기가 전개되고 있다.
devatāpi tathāgatassa etamatthaṃ ārocesuṃ,
yena tathāgato atīte buddhe parinibbute chinnapapañce chinnavaṭume
pariyādinnavaṭṭe sabbadukkhavītivatte jātitopi anussarati, nāmatopi anussarati, gottatopi anussarati,
āyuppamāṇatopi anussarati, sāvakayugatopi anussarati, sāvakasannipātatopi anussarati —
‘evaṃjaccā te bhagavanto ahesuṃ itipi, evaṃnāmā evaṃgottā evaṃsīlā evaṃdhammā
evaṃpaññā evaṃvihārī evaṃvimuttā te bhagavanto ahesuṃ itipī’ti.
그리고 신들도 이 뜻을 여래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에19) 여래는 이처럼
과거 부처님들의 태생도 기억하고, 이름도 기억하고, 종족도 기억하고, 수명의 한계도 기억하고,
두 상수제자도 기억하고, 제자들의 회중도 기억한다.
그분 과거의 부처님들께서는 이미 사량분별을 잘랐고, [업의 행로를 잘랐고, 윤회를 종식시켰고,
모든 괴로움을 건너, 반열반에 드셨던 분들이다.
19) 이하 본경의 §§3.29~3.32에서는 정거천의 천신들이 이러한 사실을 세존께 알려드리는 장면이 서술되어 나타난다.
♦ bodhisattadhammatā (DN 14) 보살에게 정해진 법칙
♦ 17. “atha kho, bhikkhave, vipassī bodhisatto tusitā kāyā cavitvā
sato sampajāno mātukucchiṃ okkami. ayamettha dhammatā.
1.17. “비구들이여, 그때 위빳시 보살은 도솔천에서 몸을 버리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어머니의 태에 들어갔다. 이것은 여기서 정해진 법칙이다.20)
♦ “yāvakīvañca, bhikkhave, bhikkhū paccattaññeva satiṃ upaṭṭhapessanti —
‘
kinti anāgatā ca pesalā sabrahmacārī āgaccheyyuṃ, āgatā ca pesalā sabrahmacārī phāsu vihareyyun |
’ ti.
vuddhiyeva, bhikkhave, bhikkhūnaṃ pāṭikaṅkhā, no parihāni.
(7)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개인적으로 각각 마음챙김을 확립해서
아직 오지 않은 좋은 동료 수행자들은 오게 하고,
이미 온 좋은 동료 수행자들은 편안하게 머물도록 하는 한,
비구들은 퇴보하는 일은 없고 오직 향상이 기대된다.
satisambojjhaṅgaṃ
catūsu satipaṭṭhānesu supatiṭṭhitacittā
tā sudaṃ bhagavā sato sampajāno adhivāsesi avihaññamāno.
♦ 169. atha kho bhagavā cāpāle cetiye sato sampajāno āyusaṅkhāraṃ ossaji.
ossaṭṭhe ca bhagavatā āyusaṅkhāre mahābhūmicālo ahosi bhiṃsanako salomahaṃso ,
devadundubhiyo ca phaliṃsu .
3.10. 그리고 세존께서는 짜빨라 탑묘에서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
수명(壽命)의 상카라를 포기하셨다.245)
sato sampajāno uṭṭhānasaññaṃ manasikaritvā.
♦ “puna caparaṃ, ānanda, yadā bodhisatto tusitakāyā cavitvā sato sampajāno
mātukucchiṃ okkamati,
tadāyaṃ pathavī kampati saṅkampati sampakampati sampavedhati.
ayaṃ tatiyo hetu tatiyo paccayo mahato bhūmicālassa pātubhāvāya.
3.15. “다시 아난다여, ③ 보살이 마음챙기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도솔천에서 몸을 버리고
모태에 들 때에 땅은 흔들리고 많이 흔들리고 강하게 흔들리고 요동친다.
이것이 큰 지진이 일어나는 세 번째 원인이요 세 번째 조건이다.”
♦ “puna caparaṃ, ānanda, yadā bodhisatto sato sampajāno mātukucchismā nikkhamati,
tadāyaṃ pathavī kampati saṅkampati sampakampati sampavedhati.
ayaṃ catuttho hetu catuttho paccayo mahato bhūmicālassa pātubhāvāya.
3.16. “다시 아난다여, ④ 보살이 마음챙기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모태로부터 나올 때에
땅은 흔들리고 많이 흔들리고 강하게 흔들리고 요동친다.
이것이 큰 지진이 일어나는 네 번째 원인이요 네 번째 조건이다.”
♦ “appamattā satīmanto, susīlā hotha bhikkhavo.
♦ susamāhitasaṅkappā, sacittamanurakkhatha.
비구들이여, 방일하지 말고
마음챙김을 가지고 계를 잘 지켜라.
사유(思惟)를 잘 안주시키고
자신의 마음을 잘 보호하라.
♦ “sakyaputtova jhānena, ekodi nipako sato.
♦ amataṃ muni jigīsāno , tamahaṃ sūriyavacchase.
마치 사꺄의 후예인 그 성자가
禪을 통해서 일념이 되고
현명하고 마음챙겨서 불사(不死)를 찾듯이
나 또한 나의 태양인 그대를 찾아다닙니다.
tesaṃ, bhante, gopakena devaputtena paṭicoditānaṃ
dve devā diṭṭheva dhamme satiṃ paṭilabhiṃsu kāyaṃ brahmapurohitaṃ,
eko pana devo kāme ajjhāvasi.
세존이시여, 그들은 신의 아들 고빠까의 질책을 받은 뒤 두 명의 신은
그때 그 자리에서 바로 마음챙김을 닦아서 범보천445)의 신의 몸을 받았으며
한 명은 계속 감각적 욕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445) 범보천(brahmapurohita)은 초선을 닦아서 태어나는 색계 천상인 초선천 가운데 하나인데 초선천의 범중천(Brahma-pārisajjā)과 범보천(Brahma-purohitā)과 대범천(Mahā-brahmā) 가운데 두 번째에 속하는 천상이다. 범보천의 purohita는 본서에서 궁중제관으로 옮긴 바로 그 단어로 puras(앞에)+√dhā(to put)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앞에 서는 사람'을 뜻하며 이 단어는 왕의 곁에서 제사를 관장하는 제관을 뜻하는 술어로 베다에서부터 정착되었다. 그래서 중간 정도의 초선에 들어 죽은 자들은 범중천(범천의 일반 대중)보다는 더 높은 범천의 궁중제관 정도의 경지에 태어난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 354.“‘upāsikā cakkhumato ahosiṃ,
♦ nāmampi mayhaṃ ahu ‘gopikā’ti.
♦ buddhe ca dhamme ca abhippasannā,
♦ saṅghañcupaṭṭhāsiṃ pasannacittā.
1.12. “눈을 가진 분[世尊]의 청신녀(淸信女)가 있었으니
나의 이름은 고삐까였습니다.
부처님과 법에 청정한 믿음이 있었고
밝은 마음으로 승가를 모셨습니다.
♦ “‘tasseva buddhassa sudhammatāya,
♦ sakkassa puttomhi mahānubhāvo.
♦ mahājutīko tidivūpapanno,
♦ jānanti maṃ idhāpi ‘gopako’ti.
그분 부처님의 좋은 법 때문에
나는 이제 삭까의 아들이 되어 큰 위력을 가졌으며
큰 광채를 가진 세 가지 천상446)을 얻었나니
여기서는 나를 고빠까라 부릅니다.
446) “세 가지 천상을 얻은(tidivūpapanna)이란 세 천상(tidiva) 즉 삼십[삼]천의 도시(tidasapura)에 태어난”이라는 뜻이다.(DA.ii.708)
여기서 삼십[삼]천으로 옮긴 원어는 tidasā인데 PED에서 밝히고 있듯이 30을 뜻하며 이것은 33천을 줄여서 30으로 표현한 것이다. 『천궁사』에서는 인드라와 함께 한 삼십[삼]천(tidasā sahindaka)으로 언급되고 있으며(Vv.19) 주석서에 의하면 tidasā는 완전히 삼십삼천(tāvatiṃsadeva-loka)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DhpA.i.27~28; VvA.90 등)
♦ “‘athaddasaṃ bhikkhavo diṭṭhapubbe,
♦ gandhabbakāyūpagate vasīne.
♦ imehi te gotamasāvakāse,
♦ ye ca mayaṃ pubbe manussabhūtā.
♦ “‘annena pānena upaṭṭhahimhā,
♦ pādūpasaṅgayha sake nivesane.
그러자 전에 본 적이 있는 비구들을 보았나니
간답바의 무리에 태어나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따마의 제자들이었나니
전에 인간이었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집에서 발을 [씻겨드리는 등으로] 공경한 뒤에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시중을 들었습니다.
♦ kutomukhā nāma ime bhavanto,
♦ buddhassa dhammāni paṭiggahesuṃ .
♦ “‘paccattaṃ veditabbo hi dhammo,
♦ sudesito cakkhumatānubuddho.
[그런데] 이분들이 부처님의 법들을 호지할 때에
참으로 얼굴을 어디다 두고 있었나요?
눈을 가지신 분이 깨달으시고 잘 설하신
법은 참으로 각자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 ahañhi tumheva upāsamāno,
♦ sutvāna ariyāna subhāsitāni.
♦ “‘sakkassa puttomhi mahānubhāvo,
♦ mahājutīko tidivūpapanno.
[그때에] 나는 그대들을 섬겼지만
성자들의 좋은 말씀들을 들은 뒤
이제 삭까의 아들이 되어 큰 위력을 가졌으며
큰 광채를 가진 세 가지 천상을 얻었습니다.
♦ tumhe pana seṭṭhamupāsamānā,
♦ anuttaraṃ brahmacariyaṃ caritvā.
♦ “‘hīnaṃ kāyaṃ upapannā bhavanto,
♦ anānulomā bhavatūpapatti.
♦ duddiṭṭharūpaṃ vata addasāma,
♦ sahadhammike hīnakāyūpapanne.
♦ “‘gandhabbakāyūpagatā bhavanto,
♦ devānamāgacchatha pāricariyaṃ.
그러나 그대들은 뛰어난 분을 섬겼고,
위없는 청정범행을 닦고서도
낮은 몸을 받았으며
[청정범행에] 어울리지 않는 상태로 태어났으니
참으로 보기에 민망합니다.
같이 법을 배우던 동료가 낮은 몸을 받았으니까요.
그대들은 간답바의 무리에 태어나서
신들을 섬기기 위해서 [이곳으로] 오곤 합니다.
♦ agāre vasato mayhaṃ,
♦ imaṃ passa visesataṃ.
♦ “‘itthī hutvā svajja pumomhi devo,
♦ dibbehi kāmehi samaṅgibhūto’.
재가에 머무르던 우리가 성취한
[삼십삼천이라는] 이런 수승함을 보십시오.
그런 나는 여인이었지만 이제 남성의 신이 되어
천상의 욕락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 te coditā gotamasāvakena,
♦ saṃvegamāpādu samecca gopakaṃ.
♦ “‘handa viyāyāma byāyāma ,
♦ mā no mayaṃ parapessā ahumhā’.
그들 고따마의 제자들은 고빠까의 질책을 받고
그것을 잘 이해한 뒤 절박함이 생겼다.
“오, 돌아가서 정진합시다.
우리는 더 이상 남의 하인이 되지 맙시다.”라고.
♦ tesaṃ duve vīriyamārabhiṃsu,
♦ anussaraṃ gotamasāsanāni.
♦ “idheva cittāni virājayitvā,
♦ kāmesu ādīnavamaddasaṃsu.
그들 가운데 두 명은 정진을 시작하여
고따마의 교법을 계속해서 생각하였다.
바로 여기서 마음을 티끌이 없게 한 뒤
감각적 욕망들에서 위험을 보았다.447)
447) “즉 [다섯 가지 장애를] 억압하는(vikkhambhana) 초선을 통해서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위험을 보았다. 그리고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근절(samuccheda)하는 세 번째 도(tatiyamagga, 불환도, 불환도에서 탐욕과 성냄은 완전히 근절되므로)를 통해서도 [위험을 보았다]” (DA.iii.709)
<*
계속해서 생각 sara = sati 마음챙김
anussaraṃ gotamasāsanāni 고따마의 교법을 계속해서 생각 :
dve devā diṭṭheva dhamme satiṃ : 두 명의 신은 … 바로 마음챙김을 닦아서
>
♦ “‘buddho janindatthi manussaloke,
♦ kāmābhibhū sakyamunīti ñāyati.
♦ tasseva te puttā satiyā vihīnā,
♦ coditā mayā te satimajjhalatthuṃ.
“부처님은 인간의 세상에서 지배자입니다.
그분은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는
사꺄무니라고 알려졌습니다.
이들은 그분의 아들들인데 마음챙김을 놓아버렸습니다.
저의 질책을 받은 그들은
마음챙김을 다시 가지게 되었습니다.
<* satiyā vihīnā = muṭṭhassati
vihīna: left; lost; decreased. (pp. of vihāyati)
ajjhalatthuṃ: adhi - lābh
So muṭṭhassati [muṭṭhassatī (sī.)] kālaṃ kurumāno aññataraṃ devanikāyaṃ upapajjati.
그는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죽어서 어떤 신의 무리에 태어난다.
…
api ca kho opapātiko opapātikaṃ sāreti –
‘sarasi tvaṃ, mārisa, sarasi tvaṃ, mārisa, yattha mayaṃ pubbe brahmacariyaṃ acarimhā’ti.
So evamāha – ‘sarāmi, mārisa, sarāmi, mārisā’ti.
그러나 [먼저 그곳에] 화현한 자가 [나중에 그곳에] 화현한 그에게
'존자여, 당신은 기억 하십니까?
우리는 전생에 청정범행을 닦았지 않습니까?'라고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
그러면 그는 '존자여, 기억합니다. 존자여, 기억하구말구요.'라고 말한다.
Dandho, bhikkhave, satuppādo; atha kho so satto khippaṃyeva visesagāmī hoti.
그러면 그에게 느리게 마음챙김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중생은 재빨리 특별함으로 인도된다.
Sotānugatānaṃ, bhikkhave, dhammānaṃ, vacasā paricitānaṃ, manasānupekkhitānaṃ,
diṭṭhiyā suppaṭividdhānaṃ ayaṃ catuttho ānisaṃso pāṭikaṅkho.
비구들이여, 이것이 귀로 들은 것들, 외워서 친숙해진 것들, 마음으로 숙고한 것들,
견해로 완전히 꿰뚫은 것들에서 기대되는 네 번째 이익이다.
>
♦ “svāhaṃ amūḷhapaññassa , viharaṃ sāsane rato.
♦ ñāyena viharissāmi, sampajāno paṭissato.
♦ “imaṃ kho ahaṃ, bhante, tatiyaṃ atthavasaṃ sampassamāno
evarūpaṃ vedapaṭilābhaṃ somanassapaṭilābhaṃ pavedemi.
그런 저는 미혹하지 않는 통찰지를 지닌 분의
교법을 좋아하며 머물 것이니
바른 방법으로 잘 알아차리고
마음챙겨 머물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제가 이러한 감격과 이러한 기쁨을 설하는 세 번째 이익입니다.
♦ 203. “kathaṃ mayaṃ, bhante, mātugāme paṭipajjāmā”ti? “adassanaṃ, ānandā”ti.
5.9.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어떻게 여인을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쳐다보지 말라.”
“dassane, bhagavā, sati kathaṃ paṭipajjitabban”ti? “anālāpo, ānandā”ti .
“세존이시여, 쳐다보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말하지 말라.”
“ālapantena pana, bhante, kathaṃ paṭipajjitabban”ti? “sati, ānanda, upaṭṭhāpetabbā”ti.
“세존이시여, 말을 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 “sato, bhikkhave, bhikkhu vihareyya sampajāno, ayaṃ vo amhākaṃ anusāsanī.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正念正知]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
kathañca, bhikkhave, bhikkhu sato hoti?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 vedanānupassī ... pe ... citte cittānupassī ... pe ...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sato ho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마음챙기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들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 머문다. …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챙긴다.”
206) 이하 §2.13까지의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에 대한 설법은『상응부』「마음챙김 경」 (S47:2)과 꼭 같다.
♦ “kathañca, bhikkhave, bhikkhu sampajāno hoti?
idha, bhikkhave, bhikkhu abhikkante paṭikkante sampajānakārī hoti,
ālokite vilokite sampajānakārī hoti, samiñjite pasārite sampajānakārī hoti,
saṅghāṭipattacīvaradhāraṇe sampajānakārī hoti, asite pīte khāyite sāyite sampajānakārī hoti,
uccārapassāvakamme sampajānakārī hoti,
gate ṭhite nisinne sutte jāgarite bhāsite tuṇhībhāve sampajānakārī hoti.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sampajāno hoti.
2.13.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알아차리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正知] 행한다.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으면서·서면서·앉으면서·잠들면서·잠을 깨면서·말하면서·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알아차린다.
sato, bhikkhave, bhikkhu vihareyya sampajāno, ayaṃ vo amhākaṃ anusāsanī”ti.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
idhānanda,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a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 ... pe ... citte ... pe ...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 머문다. …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 머문다.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evaṃ kho, ānanda, bhikkhu attadīpo viharati
attasaraṇo anaññasaraṇo, dhammadīpo dhammasaraṇo anaññasaraṇo .
아난다여, 이와 같이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idha, bho, bhikkhu
ajjhattaṃ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존자들이여, 여기 비구는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뭅니다.
ajjhattaṃ kāye kāyānupassī viharanto
tattha sammā samādhiyati, sammā vippasīdati.
그는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여 머물면서
바르게 삼매에 들고 고요하게 됩니다.383)
so tattha sammā samāhito sammā vippasanno
bahiddhā parakāye ñāṇadassanaṃ abhinibbatteti.
그는 거기서 바르게 삼매에 들고 고요하게 되어
밖으로 남의 몸에 대해서 지와 견을 가지게 됩니다.
♦ 290. “‘taṃ kiṃ maññanti, bhonto devā tāvatiṃsā,
yāva supaññattā cime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satta samādhiparikkhārā sammāsamādhissa paribhāvanāya sammāsamādhissa pāripūriyā.
katame satta?
삼십삼천의 신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 · 아라한 · 정등각께서는 바른 삼매를 닦고
바른 삼매를 성취하기 위한 일곱 가지 삼매의 필수품을 천명하셨습니다. 무엇이 일곱입니까?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yā kho, bho, imehi sattahaṅgehi cittassa ekaggatā parikkhatā,
ayaṃ vuccati, bho, ariyo sammāsamādhi saupaniso itipi saparikkhāro itipi.
그것은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입니다.
존자들이여, 이런 일곱 가지 구성요소들로 마음이 하나가 되면[心一境性]
이것을 일러 성스러운 바른 삼매는 기반을 가졌다고 하고 필수품을 가졌다고 합니다.384)
384) 여기서도 범천의 관심은 삼매이다. 그래서 8정도의 앞의 일곱 가지를 삼매를 얻기 위한 필수품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처럼 범천의 입을 통해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중요한 가르침들이 모두 삼매의 관점에서 설해지고 있는 것이 본경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8정도 각지(各支)의 설명은 본서「대념처경」(D22) $21과『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277~287쪽과『청정도론』XVI.75~83을 참조할 것.
이처럼 본경에서는 인도인들, 특히 바라문들이 제일의 신으로 믿고 섬기는 범천이라는 신의 입을 통해서 우빠니샤드 등에서 설해지고 있으며 바라문 수행자들이 치중하는 삼매 수행의 관점에서 불교를 드러내어, 불교에도 이러한 깊은 삼매의 경지가 있으며 아울러 삼매의 경지뿐만 아니라 이를 토대로 통찰지를 닦아 도와 과를 증득하는 것 까지도 잘 설해져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20~27에서 보았듯이 불교를 믿는 것(§20의 불·법·승을 믿고 계를 지님)을 바탕으로 네 가지 성취수단(§22), 세 가지 행복의 터득(§§23~25),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26), 팔정도(§27)를 모두 삼매의 관점에서 드러내고 있다.
sammāsatissa sammāsamādhi pahoti, sammāsamādhissa sammāñāṇaṃ pahoti,
♦ mahāvaggapāḷi ♦ 9. mahāsatipaṭṭhānasuttaṃ (DN 22)
대념처경(大念處經)499) 마음챙김의 확립 Mahāsatipaṭṭhāna Sutta(D22)
499) 부처님의 육성이 생생히 살아있는 초기경들 가운데서 실참수행법을 설한 경을 들라면 본경과 『중부』의「들숨날숨에 마음챙기는 경」(Ānāpānasati Sutta, 出入息念經 M118)과 「몸에 마음챙기는 경」(Kāyagatasati Sutta, 念身經, M119)의 셋을 들 수 있다. 물론 『중부』의「염처경」(M10)도 들어야겠으나「염처경」은 사성제의 고성제에 관한 부분만 제외하고는 본경과 그 내용이 일치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세 경들을 초기경들 가운데서 실참수행을 설하신 수행삼경(修行三經)이라 불러도 괜찮다.
이 가운데서 본경은 초기불교 수행법을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의 네 가지 주제 하에 집대성한 경으로 초기 수행법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경이며 그런 만큼 가장 유명한 경이기도 하다. 마음챙김으로 대표되는 초기불교 수행법은 이 경을 토대로 지금까지 전승되어오고 있으며 남방의 수행법으로 알려진 위빳사나 수행법은 모두 이 경을 토대로 하여 가르쳐지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본경은 『장아함』에는 실려 있지 않고 「염처경」(念處經)으로 옮겨져서『중아함』의 98번째 경으로 중국에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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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참의 시작은 念(sati, 기억) 수행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말씀은 念三部經(D22, M118, M119)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出入息念經은 본 경에 소개된 4단계 호흡수행을 身에 배대하고 16단계 중 나머지를 受-心-法에 배대하고 있으며 身至念經도 본 경처럼 4단계 호흡수행 만이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오로지 (色)身의 범위에 속하는 것만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D22, M118과는 달리 色界 4禪도 포함되어 있다. 즉 여기서 身이란 거친 욕계의 色과 미세한 4大의 색계의 色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경(D22)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경문이다. |
♦ 373. “ekāyano ayaṃ, bhikkhave, maggo
sattānaṃ visuddhiyā, sokaparidevānaṃ samatikkamāya
dukkh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yadidaṃ cattāro satipaṭṭhānā.
“비구들이여, 이 도501)는 유일한 길이니,502)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503)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504)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505)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506)이다.507)
♦ 374. “kathañca pan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2.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idha, bhikkhave,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nisīda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so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
그는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atthi kāyo’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eva ñāṇamattāya paṭissatimattāya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526)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527)
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528)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529)
526) “몸이 있구나.'라고(atthi kāyo ti vā pan’ assa)하는 것은 '다만 몸이 있을 뿐이고 중생도 없고 인간도 없고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고 자아도 없고 자아에 속하는 것도 없고 나도 없고 내 것도 없고 어느 누구도 없고 누구의 것도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마음챙김을 확립한다.”(Ibid)
527) “∼ 때까지(yāvad eva)라는 것은 목적을 한정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런 말이다. 이 마음챙김을 확립하는 것은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지혜를 위하여, 계속해서 더 넓고 더 높이 지혜를 키우고 마음챙김을 크게 하기 위해서, 즉 마음챙김과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증장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DA.iii.766)
528) “이제 그는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anissito ca vilharati)는 것은 갈애와 견해에 의지하던 것을 이제 의지하지 않고서 머문다[는 뜻이다.]" (Ibid) 여기서 견해로 옮긴 원어는 diṭṭhi이다. 주석서에서 diṭṭhi가 별다른 설명이 없이 쓰일 때는 대부분 삿된 견해(micchā-diṭṭhi, 邪見)를 뜻한다.
529)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na ca kiñci loke upādiyati) : 세상에서 물질이나 느낌이나 인식이나 의도들이나 혹은 알음알이를 “이것은 나의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움켜쥐지 않는다.”(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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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meva kho, bhikkhave, bhikkhu imameva kāyaṃ uddhaṃ pādatalā
adho kesamatthakā tacapariyantaṃ pūraṃ nānappakārassa asucino paccavekkhati —
‘atthi imasmiṃ kāye kesā lomā ... pe ... muttan’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그리고 머리털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이 몸은 살갗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반조한다.
즉 '이 몸에는
머리털·몸털·손발톱·이빨·살갗·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근막·지라·허파·큰창자·작은창자·위·똥·
쓸개즙·가래·고름·피·땀·굳기름·눈물·[피부의] 기름기·침·콧물·관절활액·오줌 등이 있다.’고.
♦ iti ajjhattaṃ vā ... pe ...
evampi kho,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 “katamo ca, bhikkhave, sammāvāyāmo?
idha, bhikkhave, bhikkhu
anuppannānaṃ pāpakānaṃ akusalānaṃ dhammānaṃ anuppādāya
chandaṃ janeti vāyamati vīriyaṃ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uppannānaṃ pāpakānaṃ akusalānaṃ dhammānaṃ pahānāya
chandaṃ janeti vāyamati vīriyaṃ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an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uppādāya
chandaṃ janeti vāyamati vīriyaṃ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ṭhitiyā asammosāya bhiyyobhāvāya vepullāya bhāvanāya pāripūriyā
chandaṃ janeti vāyamati vīriyaṃ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vāyāmo.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정진[正精進]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644) 사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645)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646)
이미 일어난647)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648) 법(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649) 유익한 법들을 지속시키고650)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고 충만하게 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정진이라 한다.651)
.“disampati kho, bho, rājā kālaṅkato, abhisitto bhavaṃ reṇu rajjena, sarati bhavaṃ taṃ vacanan”ti?
“sarāmahaṃ, bho, taṃ vacanaṃ .
ko nu kho, bho, pahoti imaṃ mahāpathaviṃ uttarena āyataṃ dakkhiṇena
sakaṭamukhaṃ sattadhā samaṃ suvibhattaṃ vibhajitun”ti?
“ko nu kho, bho, añño pahoti, aññatra mahāgovindena brāhmaṇenā”ti?
‘폐하, 디삼빠띠 왕은 임종하였고 레두 존자는 왕위에 추대되었습니다.
폐하는 전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존자들이여,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존자들이여, 그러면 누가 북쪽은 넓고 남쪽은 수레의 앞쪽처럼 [좁은] 이 대지를
일곱 등분으로 공평하게 잘 나눌 수 있겠습니까?'
‘폐하, 마하고윈다 바라문을 제외하고 누가 있겠습니까?"
‘tena hī, bhagini, yadā bhagavā tamhā samādhimhā vuṭṭhito hoti,
atha mama vacanena bhagavantaṃ abhivādehi —
“sakko, bhante, devānamindo sāmacco saparijano bhagavato pāde sirasā vandatī”ti.
kacci me sā, bhante, bhaginī bhagavantaṃ abhivādesi?
sarati bhagavā tassā bhaginiyā vacanan”ti?
'여인이여, 그렇다면 세존께서 삼매에서 나오시면 그대는 내 말이라 전하면서
'세존이시여, 신들의 왕 삭까가 대신들과 측근들과 함께 세존의 발에 머리로 절을 올립니다.'라고
세존께 절을 올려주시오.'라고 [저는 말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그 여인이 세존께 저의 [이름으로] 절을 올렸습니까?
세존께서는 그 여인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abhivādesi maṃ sā, devānaminda, bhaginī, sarāmahaṃ tassā bhaginiyā vacanaṃ.
api cāhaṃ āyasmato nemisaddena tamhā samādhimhā vuṭṭhito”ti.
“신들의 왕이여, 그 여인은 나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나는 그 여인의 말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존자의 마차 바퀴소리를 듣고 그 삼매로부터 나왔습니다.”
첫댓글 우리 회원들은
'아직 본 카페에 가입하지 않은 도반들은 입장하게 하고
이미 가입한 도반들은 편안하게 공부하게 되도록 해야지.' - 라는
('이렇게') 각자가 모두 '기억이 확립(대기/준비)' 되어 있다면
카페 회원들은 퇴보하지 않고 향상될 것이 기대됩니다.
모든 일도.... 모든 경문도 그렇듯이
대념처경도 처음 시작부터 잘못 들어가면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어 있지 싶습니다. - 참고로 봄봄은 실참 경험이 없습니다. = 입으로만^^
초불 역(이하 동일)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 앞으로 혹은 전체적인 수행과정에 대한 기억을 확립(대기/준비)하고서
조용한 곳에 앉습니다.(행주좌와 동일)
그는 (순서나 방법을 혹은 이전에 공부한 것을)
기억한 상태에서 숨을 호흡합니다.
혹은 이 몸은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다고
혹은 이 몸은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하면서
............
이렇게 수행하면 내로 삼매에 들고 외로 지와 견이 생겨난답니다.
그 결과는 마지막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내용입니다.
아는 만큼-기억하는 만큼
혹은 앎의 대상으로만 기억의 대상으로만
신/수/심/법-이 있다.라는
기억이 확고하게 저장됩니다.
무엇에 대해서 신/수/심/법에 대해서.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이라는 것을. = 상락아정이 아님.
(S36:11)
Rahogata-sutta
초선정은 언어의 그침,
이선은 심. 사의 그침,
삼선은 희열의 그침,
사선은 호흡의 그침, 이라고 경전에 말합니다.
그러면 '기억'은 언어적 스토리가 관련 안된다고 말할수 있나요?
...선정은 고요함 즉, 언어와 생각과 희열과 숨 마저도 고요한 상태 이죠.
D22는 사념처를 말합니다.
몸[느낌 마음 법]에서 몸[느낌 마음 법] (의 일어남과 그침)을
분명히 알아차리고(sampajana) 마음에 챙기며[sati] 등의 (찰나 연기된) 법에 대한 확립을 념처(satipatana)에 말하지요.
그래서 사념처 라지요.
여기 념처에는 sati는 있어도 sara의 기억은 없으요.
M36에도 과거 유소년 호흡 명상의 기억을 sara에 쓰고, 그리고 선정에서는 념처를 sati에 분명하게 구별해서 쓰고 있는데도요
...
선정은 고요함...
기억 언어가 주는 스토리 마저도 초선에서 사라진다고 말하는데,
반면에 숙명통은 고요함속에 과거의 '나'가 뜨오르는 신통력이지만 그 숙명통 (천안통)마저도 소멸하고서 사성제 진리에 이르게되고...,
루진통 열반에 도달하는 것...
명상가들에게 기억은 념처 확립을 방해하므로 '나태'의 오개.
<빠띠삼비다마가>에서
마음챙김sati와 확립patthana 즉,
사념처(四念處)의 념처 satipatthana에 대해 그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하는 <빠띠삼비다마가> 빤냐박가의 주석을 인용한 것이다.
//
'처(處)'에 해당하는 원어의 정확한 의미는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patthana'는 'sati'와 결합하여 합성어로 쓰일 때에는 '확립(setting up)'의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확고한 마음챙김' 혹은 '마음챙김의 확립' 으로 변역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챙김의 확립'이라는 말에 대해 PsA(p.298)에서는 'pathana'란 확고히 선다는 것이며, 확립한다는 것이며, 대상을 향해 튀어 오르고 돌진하여 나아간다는 뜻이다.
sati 란 곧 pathana 이며 satipathana 이다. ... 의지하는 바(대상)의 힘에 의해 더욱 더 그러한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는 것이 마음챙김의 확립[념처]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경만을 공부하고 실참하지 않으면 남의 소를 세기만 하는
소치기와 같다 하셨으니,
직접 사념처 수행을 하여 보시고
선과 정을 성취하여
왜 부처님 법이 해탈로 이끄는 외통길인지와
자신을 대륙으로삼고, 법을 대륙으로 삼는 인연을 맺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사념처 수행을 해 보아야 부처님께서 규정하는 법의 의미와
뜻을 즉각적이고 바로 알아차림이 가능합니다.
수행해보지 않으면,
본인이 부처님 법이라 믿는 가르침들에서 여러 오류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니미따나 선정 그리고 나아가 오온과 연기는 사념처 수행을 하여야만
그 분명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선.정을 이뤄야만 해탈 즉 부처님 가르침인 고의 멸을 이루는 확신의 생성이 용이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