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에서 독일과 한 조를 이룬 나라들은 각각 아일랜드와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카메룬이었다. 사실상 대진운은 매우 좋았던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당시 한 조에 속했던 팀들의 실력을 폄하 하고자함이 아니라 내년으로 다가온 유로 2004에 비해서는 적어도 그렇다는 의미이다. 2002년 당시와 같은 좋은 대진운을 이번 포르투갈에서 열리는 유로 2004에서 다시 한번 독일이 받아들 수 있을까?
곧 돌아오는 일요일,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는 대망의 유로 2004의 조 추첨이 거행될 예정이다. 만일 독일이 속된 말로 '아주 재수 없는 경우'에 걸린다면 FIFA 랭킹 2위인 프랑스와 FIFA 랭킹 6위의 네덜란드 등과 한 조에 속하는 것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의 조 추첨 결과는 상당히 운이 좋았던 경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은 현재 FIFA 랭킹 9위에 올라있는 중견 강호지만 최근에 벌어진 친선 경기에서 프랑스와 네덜란드에게 모두 스코어 상으로 완패를 당한 데다, 지난 유로 2000에서 루마니아(1 : 1)와 잉글랜드(0 : 1) 그리고 포르투갈(0 : 3)과 한 조에 속해 조별 예선 탈락이라는 쓴잔을 들어야만 했던 아픈 과거가 있다. 따라서 독일로서는 곧 있을 조 추첨에 촉각이 곤두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떤 나라와 한 조에 속하게 될지는 우선 제쳐두고, 일단 독일로서는 지난 플레이오프를 통해 반가운 소식(?) 한가지를 접했다. 바로 터키의 유로 2004 진출 실패가 바로 그것이었다. 터키인들에게 있어서 유로 2004 본선 진출 실패는 분명 아픈 상처일 테지만 적어도 독일 축구 팬의 입장에서는 반가울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터키가 라트비아를 물리치고 포르투갈 행에 올랐다면 독일은 '1번 시드가 아닌 2번 시드'로 밀려나야 했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유로 2004 본선에 오른 16개국은 톱시드와 1번부터 3번 시드까지로 나뉘어 조 추첨이 거행되는데, 만일 2번 시드로 밀렸다면 1번 시드일 때보다 더 어려운 조 배정을 받을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각각의 시드 배정국은 기사 하단 참조)
"유럽 선수권에서의 모든 조는 다 죽음의 조다." 독일 대표팀의 감독인 루디 푈러는 조 추첨을 앞두고 이와 같은 발언을 한 바 있다.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다. 월드컵에서라면 상대적으로 전력이 쳐진다고 볼 수 있는 아시아권 국가나 혹은 북중미권에 속한 국가들을 만날 가능성이 있지만 유럽 선수권 대회의 경우는 추리고 추려진 16개의 유럽 국가들만의 대결이기에 어느 한 조도 만만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디 푈러 감독은 이러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팀에게는 오히려 이런 압박이 필요할 때이다."라고 말하며 상황을 좋게 해석하려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압박은 현재 독일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분명히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의 조별 예선 통과가 월드컵에서의 조별 예선 통과보다 힘들다는 것이 유럽 국가들 내에서는 공공연히 말해져 오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월드컵보다 힘든 여정이 될 유로에서의 조별 예선 상황을 맞게될 독일에게 이러한 압박은 분명히 앞으로의 전력 극대화를 위해 넘어야 할 산인 것이다.
최악의 경우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만난다는 시나리오에 덧붙여 3번 시드에서 그리스를 만난다면 푈러는 아니 독일은 그야말로 최악의 대진을 받게되는 셈이다. 그리스의 수장이 바로 오토 레하겔이기 때문이다. 레하겔이 누구인가? 그는 분데스리가 40년 역사 속에서 감독으로서 최다승을 올린 명장 중의 명장이다. 감독으로서 최다 경기 출장 기록 또한 그가 가지고 있다. 그는 분데스리가 감독으로서 820회나 벤치를 지켰고, 그 중 무려 387승을 올린 전설적인 인물로 독일 내에서는 "쾨니히 오토(Koenig Otto, 오토 대왕)"로 통한다. 2번째로 많은 경기에 출장한 감독이 569회의 에리히 리벡임을 감안해볼 때 그의 경력이 얼마나 화려한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브레멘과 카이저스라우턴의 감독으로 3차례 리가 정상에 오르기도 했던 그는 이미 잘 갖추어진 팀보다는 약간 전력이 쳐지는 팀을 스파르타식으로 조련해 좋은 성적을 내는 감독으로 유명하며, 96/97 시즌 2부리그로 떨어진 카이저스라라우턴을 맡아 2부리그 1위로 이끌어 1부리그로 승격시킨데 이어 97/98 시즌엔 분데스리가 역사상 전무후무한 승격팀의 다음 시즌 바로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한 바 있다. 그리스가 독일에게 껄끄러운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푈러가 현역시절 브레멘에서 활동할 당시 레하겔이 바로 감독으로 재직했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밑에서 현역 생활을 했던 선수에 대해 속속들이 꿰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 자신의 마인드를 잘 알고 있는 레하겔이 푈러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레하겔과 푈러의 사제 대결이 분명 흥미로운 요소이긴 하지만, 독일로서는 피하고 싶은 대진임에는 틀림없다.
그럼 일요일에 열릴 조 추첨이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알아보자.
일단 각 국가들은 톱 시드부터 3번 시드까지의 4개 조에 각각 4나라씩 나누어져 있음은 전제 사항이다. 이들은 각각 A조부터 D조까지의 그룹을 배정 받게 되는데, 일단 톱시드에 속한 4개국들이 먼저 A조부터 D조까지의 그룹에 차례로 배정된다. 여기서 또 하나의 전제는 개최국 포르투갈은 이미 A조에 편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포르투갈 외에 톱시드를 배정 받은 프랑스, 스웨덴, 체코가 차례로 B조부터 D조까지 추첨된 순서대로 자리하게 되면 다음으로 1번 시드를 받은 잉글랜드와 스페인,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가 A조부터 D조까지 자신들의 자리를 추첨으로 배정받게 된다. 일단 독일로서는 프랑스를 가장 피하고 싶을 테지만 A조에 배정될 경우 포르투갈과 개막 경기를 갖게되는 부담이 생길 수도 있어 그것 역시 어려운 대진이 될 전망이다.
경기 스케줄 역시 조 추첨과 동시에 바로 결정되는데 조를 배정 받은 국가들은 차례로 1부터 4까지의 숫자를 부여받아 이미 짜여진 경기 스케줄에 따라 자리를 찾아 들어가게 되는 방식이다. 즉, 포르투갈은 이미 A1을 배정 받은 상태이며, 1번 시드부터 3번 시드 국가들 중에서 A조를 배정 받은 국가들은 차례로 A2, A3, A4의 번호를 추가로 부여받게 된다. 경기 스케줄에 따라 A1을 이미 부여받은 포르투갈은 A2를 부여받게 되는 국가와 내년 6월 12일 오후 17시에 포르토에 위치한 에스타디오 다스 안타스(Est dio das Antas)에서 개막전을 갖게 된다.
만약 독일이 A2를 배정 받게될 경우 포르투갈의 개막전 파트너로 나서게 되는 것은 분명하며, 만약 A3나 혹은 A4를 배정 받게 되더라도 개막일인 12일 19시 45분에 첫 경기를 갖게 된다. A3과 A4를 각각 배정 받은 국가들은 개막 경기가 끝난 이후인 19시 45분에 파로-로울레(Faro-Loul )에서 첫 경기를 갖게된다. 독일로서는 파로-로울레 구장이 위치한 포르투갈의 남쪽 끝자락, 알가베(Algarve)라는 도시 인근에 베이스 캠프를 차리기로 결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A3이나 A4로 스케줄을 받을 경우 이동거리 등에 있어서는 큰 이익을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유로 2004에 쓰이는 8개의 경기장들 중 6개가 북쪽 지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한편 가장 늦게 첫 경기를 갖게되는 조는 D조로 그들의 첫 경기들은 대회 4일째인 15일이 되어서야 펼쳐지게 된다.
유로 2004 시드 배정 현황
톱 시드 - 프랑스, 포르투갈, 스웨덴, 체코
1번 시드 - 잉글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2번 시드 - 네덜란드, 크로아티아, 덴마크, 러시아
3번 시드 - 불가리아, 스위스, 그리스, 라트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