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지나간 많은 유물들이 있다.
하지만 현재에 급급하며 사는지라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를 잊고 산다.
그래도 어디에선가는, 누군가는 역사적 관점으로 중요하다 여겨질
지난 자료들을 충실히 발굴하고 요즘 사람들에게
다시한번 일깨워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 그런 일을 열심히 하는 유홍준 교수의 기사를 보고 옮겨왔다.
눈이 밝아야 알아볼 가치를 지닌 작품들을 늦게라도 알게 되는 것,
중요한 일이자 삶의 질을 높이고 문화적 가치를 습득하는 일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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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건너온 두 점의 명화'/ 유홍준
지금 국립광주박물관에서는 ‘애중(愛重), 아끼고 사랑한 그림 이야기’가 열리고 있다(12월 10일까지).
이 전시회는 미국에 사는 게일 엘리스 허(Gail Ellis Huh)라는 분이 기증한 고화 4점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 후기 서화 46점으로 꾸민 특별전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미국사무소는 작년 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자신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근무했던 한국인 허경모라는 분의 아내로
결혼 후 시아버님을 찾아뵈러 갔었을 때 그림 몇 점을 선물로 받았는데,
시아버님은 일찍이 1972년에 타계하셨고 남편도 재작년(2021년)에 세상을 떠나
지난 50년간 간직해 온 이 그림들을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싶다는 뜻을 전해온 것이다.
이 전화를 시작으로 게일 여사 소장품의 국내 환수 작업이 시작되었다.
게일 허 여사의 시어버님은 한국은행 초대 부총재를 지내신 허민수라는 분이다.
허민수는 전라남도 진도 출신으로 애향심이 남다른 분이었다고 한다.
진도는 소치 허련 이래 2대 미산 허형, 3대 남농 허건과 임인 허민,
그리고 방계인 의재 허백련 등으로 이어지는 호남 남종화의 종가이다.
그리고 허민수는 의재와 절친이기도 했다.
그래서 허민수는 미국에 사는 아들과 며느리가 한국에 왔을 때 고국의 향기를 느끼며 살라고
소치 허련의 산수화 8폭 병풍과 소나무 대련을 선물로 주었고,
또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아끼고 사랑하라”며 아담한 고화들을 선물하셨다고 한다.
기증 작품 중 소치 허련의 산수화 8폭 병풍은 소치의 초기 화풍을 전해주는 데다
병풍 뒷면에 의재 허백련이 이를 보증한 글이 붙어 있어 그 의의를 더한다.
그리고 소나무 대련은 배경을 생략한 채 힘차게 뻗은 소나무와 소나무를 주제로 한시를 써 넣은 전형적인 소치 화풍이다.
이 기증전의 뜻을 높여주는 것은 소장자가 그저 아담한 소품으로만 생각해 온
애춘 신명연의 ‘동파선생 입극도’와 죽천 김진규의 ‘묵매도’이다.
이 두 점은 비록 당대를 대표하는 대가의 작품도 아니고 크기도 소품이지만 조선시대 회화사의 빈칸을 메워 줄 귀중한 그림이다.
애춘 신명연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가 자하 신위의 아들로,
화조화를 잘 그렸으나 아버지의 이름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였다.
애춘의 화조화는 아주 섬세하면서도 명징한 필치가 특징인데,
이번에 기증된 ‘동파선생 입극도’를 보면 그가 인물화에도 뛰어났음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동파선생 입극도’는 동파(東坡)라는 호로 더 잘 알려진 소식(蘇軾)이 삿갓 쓰고 나막신 신고 옷자락을 걷어 올린 채
조심조심 걷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는 소동파가 말년에 해남도에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살고 있었을 때
어느 날 마실갔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소나기가 내려 삿갓에 나막신을 빌려 신고 어기적대며 걸어오니
동네 아낙네들이 나와서 보고는 웃고 개들도 덩달아 짖어 댔다는 고사를 그린 것이다.
훗날 이 ‘동파선생 입극도’는 새롭게 해석되어 처연한 유배객 모습으로 그려졌다.
제주도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 또한 그런 모습으로 번안되어 소치 허련이 그린 ‘완당선생 해천일립상’ 이라는 작품도 있지만,
그 원래 도상의 유래는 소동파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런 그림이었다.
또 한 점, 죽천 김진규의 ‘묵매도’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작은 새 한 마리를 그렸는데,
노매 줄기에는 웅혼한 기상이 있고 예쁜 새가 아주 사랑스러운 명화이다.
김진규는 본래 뛰어난 문인이지만 초상화에도 아주 능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처럼 문기 어린 능숙한 필치의 매조도가 알려짐으로써 화가로서 그의 기량이 더욱 부각된다.
특히 이 그림에는 석농 김광국의 평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김광국 컬렉션인 ‘석농화원’의 제1권 17번째 면에 실려 있던 작품임이 틀림없어 회화사적 의의를 더하게 된다.
18세기 최고의 수장가인 김광국의 ‘석농화원’은 총 아홉 권으로 수록 작품을 합하면 267점이나 된다.
이 중 약 110 점은 소재가 확인되고 있으나 나머지는 낙질되어 행방을 알 수 없는데 이렇게 또 한 점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석농화원 수록 작품 15점이 찬조 출품되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 특별전인가.
국립광주박물관은 이번 특별전을 열면서 시각장애인도 감상할 수 있게 ‘매조도’를 입체로 재현해 놓기도 하였고,
수능에 지친 우리 수험생들에게 안내할 만반의 준비를 다하였으니 어서 와서 피로를 풀라며 부르고 있다.
예술을 사랑하고 아끼는 전국의 문화인 여러분들, 이 가을 가기 전에 광주에 한 번 다녀오심이 어떠하실까.
(유홍준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