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일 교내에서 열린 ‘공부하기 싫은 날’ 출판기념회. 학생들이 직접 무대에서 자신이 쓴 시를 읽기도 했다. 자신이 쓴 ‘공부하기 싫은 날’을 읽고 있는 1학년 고은지 학생. ⓒ제주의소리 |
제주시 애월읍의 한 중학교 전교생이 동시에 등단(!)했다.
신엄중학교 학생 161명의 시를 엮은 ‘공부하기 싫은 날’이 출간됐다. 작은숲청소년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 시집은 곧 전국 오프라인과 온라인 서점에서 실제로 판매된다.
전교생이 한 명도 빠짐없이 시를 한 편씩 써서 만든 시집도 유래가 없는데다 전문 출판사를 통해 전국 서점에 배포된다는 점은 예사 일이 아니다.
지난 1년간 이 학교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작년 초 신엄중 교사들은 전교생이 모두 시를 쓰는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보통 연말이 되면 교지가 나오지만 여기에는 정말 글 잘 쓴다는 학생들, 수상작 몇 개만 실리는데 여기서 벗어나 모두의 목소리를 담고 싶었다는 것.
고영진 교장은 “아이들의 마음을 무엇으로 들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글로 써서 나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아이들의 솔직히 마음을 듣고 싶어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수업시간에 혹은 수행평가로 또는 ‘자유롭게 써 봐라’라는 긴 과제를 냈다. 1년간 이 과정이 쭉 이어졌다. 시를 쓰고 오면 198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인 김수열 교사, 이경미 교사가 이를 모았다. 작품에는 손을 일체 대지 않았다. 단지 부족하거나 더 잘 쓸 수 있을 거 같은 글에 ‘다시 생각해봐라’라고 말을 했다.
쉽지 않았다. 글을 써 본 경험이 많지 않은 아이들은 어려워했다. 특정한 과제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생각해봐라’라는 김 교사의 말이 아이들에게는 생소했다. 2학년 이치호 학생의 시를 보면 얼마나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했을지 그 모습이 상상이 간다.
‘수행평가로/ 시를 쓰라 하는데/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그래서 이걸 쓴다’ - 뭐 쓰지?
이 과정이 교사들에게는 힘든 프로젝트인 동시에 즐거운 일이었다. 김 교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아이들이 집요하게 ‘어떻게 써야되요’라고 물어보는 걸 보면서 ‘아, 조금씩 자기 얘기를 하려고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일이 커진 것은 지난 여름. 후배 문인인 김 교사의 초대로 신엄중에 문학 특강을 왔던 조재도 시인은 이 학교의 프로젝트를 듣고는 ‘한 번 전국에 정식으로 출판해 보는게 어떠냐’고 제의를 한다. 조 시인이 작은숲청소년이라는 출판사를 소개시켜줬고 이 곳에서도 ‘전국 최초가 아니냐, 한 번 기획을 해보자. 전국에 알리자’고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이번 달 161명 신엄중 전교생의 작품이 담긴 ‘공부하기 싫은 날’이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 시집 ‘공부하기 싫은 날’ 은 전국 서점에서 판매된다. ⓒ제주의소리 |
▲ 5일 교내에서 열린 ‘공부하기 싫은 날’ 출판기념회. 고영진 교장이 학생들에게 책을 나눠주고 있다. ⓒ제주의소리 |
제목이 왜 ‘공부하기 싫은 날’이냐고 물어봤더니 김 교사가 웃으며 “그게 사실이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365일 공부하기 좋은 날이 어디있겠냐”며 “만약 이 책이 공부하기 좋은 날이었다면 선생님들의 시선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 시집 안에는 가공되지 않은 아이들의 마음과 일상이 나타나있다.
‘10분 전/ 시계 한 번 보고 문 한 번 보고/ 어디 보자 어떻게 가야 제일 빠를까/ 동선 계산 완료// 5분 전/ 슬슬 몸을 풀어 볼까나/ 삐거덕삐거덕 부스럭부스럭/ 책 정리도 끝/ 선생님 죄송합니다// 1분 전/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두두두두두두/ 먼저 끝난 반을 미칠 듯 부러워하는데// 마침내 대망의 순간/ 띠로띠로띠로띠로리// 뛰어!’ - 점심시간. 3학년 이승은 작.
자신이 작품을 전 국민이 보게 된다고 하니 아이들도 맘이 설렌다. 한편으로는 뭔가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좋단다.
‘점심시간’을 쓴 이승은 양은 “제가 쓴 글을 누군가 본다니 쑥스럽기도 하지만 좋다”며 “나중에 커서 이 책을 다시 보면 너무 재밌을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수행평가를 위해서 시를 쓴 게 아니라 1년 내내 자유롭게 쓴 것”이라며 “너무 보람 있고 좋은 졸업선물이 됐다”고 말했다.
부모들도 기쁜 마음이다. 5일 학교에서 열린 소소한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학부모 이경자(47.여)씨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대단하죠. 저는 울었어요. 우리 애가 이런 글을 쓰다니 뿌듯해요. 맨날 애기 같았는데, 글을 보니 엄마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컸구나 한 게 느껴졌어요”
이 날 출판기념회에서 김 교사는 환하게 웃으며 아이들에게 말을 건넸다.
“수업시간에 괴롭혀서 미안합니다. 여기에는 잘 쓴 시도 못 쓴 시도 없어요. 단지 내가 쓴 시만 있을 뿐입니다. 전국 어디에도 한 학교 학생 전부가 시집을 함께 낸 일은 없어요. 인터넷에서도 판매됩니다. 여러분 정말 대단한 일을 한 겁니다.”
강봉구 작은숲청소년 대표는 “우리 출판사에 청소년도서 시리즈가 있는데 그 취지에도 맞고, 아이들이 시를 공부하고 가깝게 느끼는 데 책을 출판하는 게 동기부여가 될 거 같아서 하자고 했다”며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일년 동안 계획을 가지고 쭉 실행한 것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5일 교내에서 열린 ‘공부하기 싫은 날’ 출판기념회. 김수열 교사가 학생들을 흐믓하게 바라보고 있다. ⓒ제주의소리 |
- 출처 <제주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