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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7일 [성 요한 사도 축일]
요한 20,2-8
사람은 자기가 믿는 하느님처럼 이웃을 만난다
어제 외국에 있는 큰형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형은 오랜 냉담 끝에 성당에 다시 나가기로 했는데 고해 때 그 사제가 또 냉담할 걸 뭐 하러 고해하러 왔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르신들에게 하는 행동도 마치 깡패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더 죄짓지 않기 위해 다시 냉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본당신부가 바뀌어서 귀국하면 다시 나가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자비이시고 사랑인데, 왜 어떤 신앙인들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일까요? 한 마디로 실제로는 하느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사도 성 요한의 축일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친밀하게 만났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주님, 주님 한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누구든 내가 창조자를 만나는 방식으로 이웃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서 영향을 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은 내가 영향을 받아 성장할 때와 같습니다.
사람은 본 것만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두 발로 걷는 존재를 하나도 보지 못한 아기는 절대 두 발로 걷고 싶은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짐승들에게 키워진 아이들은 하나같이
그것들을 흉내 내지 두 발로 걷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자신이 사랑이 없는 부모에게 길러졌고, 그래서 항상 불안하고 힘들었다고 해서 자녀를 키울 때
그것과 다르게 키울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그래서 엄한 부모에게 자란 자녀는 엄한 부모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내가 불안한 감정과 억압된 감정을 가지면서도 지금처럼 자랐기에 다른 사람들도 성장하기 위해서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영향을 받을 때 느꼈던 감정을
타인에게도 미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자 한다면 선한 창조자를 만나야 합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퀘이커교가 있습니다. 이단입니다.
세례도 없고 성체성사도 없고 성직자도 없습니다. 그런 종교적 형식 없이도 자기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체험한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이들은 세상에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존 울먼(John Woolman)과 루크레샤 모트(Lucretia Mott)와 같은 인물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주요 인물들이었습니다.
자신 안에서 만난 하느님은 자유였기 때문입니다.
또 미국친우봉사회(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와 같은 여러 단체를 설립했는데,
이 단체는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들이 만난 하느님은 평화였습니다.
엘리자베스 프라이(Elizabeth Fry)는 교도소 개혁을 한 여성입니다.
영국 지폐에까지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1800년대 여성이 인권운동을 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못했습니다.
초기의 엘리자베스는 사교 모임을 좋아하고 외적인 삶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으며, 자신이 가진 부와 특권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나눌지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없었습니다.
이런 삶의 방식은 퀘이커 설교자인 윌리엄 세이버리를 만난 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798년, 세이버리의 설교를 들은 엘리자베스는 깊은 영적 각성을 경험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만남 이후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계시며, 그분은 그분의 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진실하게 그분을 찾으면 그분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체험은 엘리자베스를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1813년, 엘리자베스는 처음으로 런던의 뉴게이트 감옥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본 장면은
그녀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감옥은 과밀하고 비위생적이었으며, 여성과 아이들은 비참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죄수들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며, 사회는 그들을 완전히 잊은 듯했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동정을 넘어, 이들이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달았고, 그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녀는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설립하고, 기본적인 위생과 의류를 제공하며, 여성 죄수들에게 재봉과 뜨개질 같은 기술을 가르쳐 출소 후 삶을 준비하도록 도왔습니다. 또한 죄수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영적 지침을 제공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의회 앞에서 감옥 개혁을 주장하며, 영국 전역의 감옥 환경 개선을 목표로 한 1823년 감옥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당시 여성으로서 매우 대담하고 특별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단도 진짜 하느님을 만나면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고 자유롭게 하고 평화롭게
하고 사랑을 해 줍니다.
만약 정상 종교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들보다 못한 존재가 됩니다.
그렇다면 개인적 체험이 중요하고 세례와 성체성사, 고해성사 등은 다 필요 없다는 말일까요?
그들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의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하느님을 만나기 더 쉽습니다.
씨앗을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열매를 찾기는 쉽습니다.
장 발장은 자신에게 촛대까지 내어주는 주교의 사랑에 감동하여 억울한 도둑에서 선하고
정의로운 일을 하는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쫓던 경관은 여전히 도둑은 착해질 수 없다고 믿었고 장 발장에게서 도움을 받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합니다.
종교는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는 도구이지 그 자체가 구원을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가장 하느님을 만나기 좋은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지닌 가톨릭 신자라도 예식에 치중하여 진심으로 가슴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타인에게 안 좋은 영향만 끼치고 맙니다.
반면 하느님을 사랑으로 만난 사람은 오늘 요한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복음: 요한 20,2-8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기쁨을 주고 한시름 잊게 하는...
가끔씩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명대사를 접하면 대본 작가님들의 민중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에 감탄하게 됩니다.
“우리 같은 서민들 하루하루의 삶은 위에 앉아있는 분들이 상상못할 정도로 힘겹답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한 편의 연극이나 드라마를 보며 박수를 치고, 대리 만족합니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잠시나마 기쁨을 주고 한시름 잊게 하는 것이
예인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니 저희 같은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명도 막중한 것 같습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영혼을 돌보는 존재로서 전례나 성무를 더 잘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잘 연습된 아름다운 성가로 교우들이 마음을 활짝 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상처입은 마음들을 부드럽게 위로하고 고통 속에서도 힘차게 살아갈 에너지를 제공하는 멋진 강론도 필요하겠습니다.
한명 한명 교우들과 눈을 맞추고 진심으로 환대하고 경청해야 하겠습니다.
더 많은 사랑을 관대히 나눠야 하겠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요한 복음 사가가 그랬습니다.
사도 성 요한 복음 사가는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주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고, 또한 그 사랑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타이틀을 하나 붙인다면 사랑의 사도입니다.
나이든 그는 만년에 말하기 조차 힘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틈만 나면 외친 단어가 사랑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을 듬뿍듬뿍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 어떤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 체험을 바탕으로 죽음조차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으며, 그 사랑의 체험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건장한 남성이었던 그가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이런 표현까지 썼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이 세상 안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사랑은 언제나 한계가 있고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연인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영원할 것 같던 불같은 사랑도 세월과 더불어 식어갑니다.
마치 산같이 든든했던 아버지의 사랑도 초라하고 구차한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이 있으니 바로 주님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랑, 최종적으로 추구해야 할 사랑은 주님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 불멸의 사랑, 한계가 없는 사랑,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을 사랑, 오직 주님 사랑 뿐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강론>
(2024. 12. 27. 금)(요한 20,2-8)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요한 20,1-10).”
1) 우리는 성탄절 다음 날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을 지내면서 ‘박해와 순교’에 관한 말씀을 들었고, 다시 그 다음 날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내면서 베들레헴 아기들의 죽음에 관한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기들이 이쪽 세상에서는 정말로 억울하게 죽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탄절 뒤로 복음 말씀을 이렇게 배치한 것은,
아무 생각 없이 한 일은 아닐 것이고, 축일들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성탄은 십자가의 시작’이고, ‘십자가는 부활의 시작’이고, ‘부활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2) 각 개인의 신앙 여정도 같습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십자가의 길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고, 부활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을 미리 누리면서, 그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십자가를 너무 고통의 상징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운동선수들이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훈련을 반복하는 것과 같은 일, 학생들이 중요한 시험의 합격을 위해서 꾸준히 공부를 하는 것과 같은 일로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에 얻게 될 영광과 생명을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6-7).”
3) 사도 요한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복음서를 기록해서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쓴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0-31).”
이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와 목적’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생명을 얻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에 기록한 증언들과 고백들을 통해서 우리를 그 생명으로 인도해 주는 사도입니다.
4) 사도 요한은 첫째 서간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고 고백했는데, 이 고백도 결코 간과하면 안 되는 중요한 업적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을 ‘사랑의 사도’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5)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고백은,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라는 증언으로 이어집니다.
이 고백과 증언을 반대로 생각하면, “사랑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것은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다.”가 됩니다.
마음속에 사랑은 없고 이기심과 미움만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부하고 등지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상황에서 누가 옳고 누구 그른지, 어느 쪽이 선이고, 어느 쪽이 악인지는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기준으로 해서 금방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기심과 증오심으로 가득 찬 무리들이 하느님 편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서는 선도 정의도 평화도 볼 수 없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