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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틀리프 & 주희정, 가장 밝게 빛난 별
농구 손대범 농구 공격과 수비의 기본은 맨투맨 플레이입니다. '맨투맨'을 통해 농구팬들이 가장 보고 싶고, 알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경기 전 만난 주희정에게 “힘들면 더 잠이 안 오지 않나?”라 물었다.
“잠이 잘 온다. 수면제 한 알도 모자라 세 알을 먹어야 잠이 들 때도 있다. 집에서는 잘 안 그런데, 시즌 중에는 그렇다.”
“농구하는 것보다 애들 보는 게 더 힘들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행복하다. 그게 낙이다. 아이들과 한강가고, 자라는 모습 지켜보는 게 즐겁다.”
주희정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래도 그 즐거움을 만끽하기에는 적어도 2주 정도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5차전까지 가는 대격전에서 살아남은 팀은 서울 삼성이 됐기 때문이다. 5차전에서 고양 오리온에게 이겼다.
3월 31일부터 이틀에 한 경기씩, 꼬박 10경기를 치른 끝에 그들은 한 시즌의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챔피언결정전 무대에 서게 됐다. 2009년 이후 무려 8년 만이다.
91-84.
0%의 기적을 노렸던 오리온의 도전은 미수에 그쳤다. 4강 플레이오프에서 1~2차전 승리 후 3~4차전 패배, 그리고 5차전으로 간 사례는 2003년 TG-LG 시리즈 이후 처음이었다. 오리온은 그때 LG가 이루지 못한 한을 풀고자 했으나, ‘0%’가 주는 무게감을 이기지 못했다.
삼성은 이상적인 마무리였다. 라틀리프는 트랩수비를 완전히 깨버렸고, 속을 썩이던 외곽슛이 결정적일 때 터졌다. 특히 시리즈 내내 마음고생해온 김태술이 결정타를 꽂았다. “그게 들어갔을 때 끝났다고 생각했다. 안도했다.” 이상민 감독의 말이다.
3승 2패. 삼성은 결승에서 안양 KGC와 대결한다.
▲ 수비에서 잡은 주도권
GAME1 : 4월 11일, 삼성 78-61 오리온
1차전 1쿼터 수비(위)와 2쿼터 수비(아래). 바셋이 나와있을 때면 늘 지역방어 상태에 거리를 두고 수비를 했다. (MBC 스포츠 플러스 중계화면 캡쳐)
1시간 37분 경기가 끝난 뒤, 고양체육관 인터뷰실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인물은 추일승 감독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인터뷰는 패장→승장→수훈선수 순으로 이루어진다. 예상 외 대패에 추 감독조차도 표정관리가 잘 안 됐다. “창피한 경기였다. 이상민 감독의 수비 변화에 우리가 대응하지 못했다. 벤치 미스가 많았다. 좋은 약이 될 것 같다.”
이상민 감독은 경기에 앞서 “수비에 변화를 조금 주었다”고 말했다. 오데리언 바셋에 대한 수비였다. 정규리그 경기 중 항상 ‘미운오리’ 취급을 받았던 바셋이었지만, 삼성 전에서는 유독 힘을 발휘해왔다. 그래서인지 1차전을 앞두고 추 감독 역시 “바셋이 연습 과정에서 대단히안정적이었다. 삼성과 만날 때도 잘 해줬다”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바셋의 출전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니, 길게 가져가지 못했다. 삼성의 지역방어에 당했다. “정규경기 중에는 지역방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마이클 크레익이나 문태영의 수비가 느슨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잘 된 것 같다. 내 의도대로 잘 섰고, 리바운드도 잘 잡았다.”
이상민 감독의 말이다. (그러나 2차전에서 이 작전은 잘 먹히지 않았다. 이상민 감독은 “선수들이 습관을 못 버린다”고 아쉬워했다. 자리를 자꾸 비운다는 것이다. 그 ‘아쉬운 장면’은 2쿼터 오리온에게 3점슛 공격을 허용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그의 의도는 이랬다. 먼저 오데리언 바셋과 상대 가드들을 버렸다. 슛이 들어가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하이포스트 지역까지 내려와 안을 잠근 것이다. 바셋 역시 돌파에 한계가 있었기에 이는 효과적이었다. 바셋은 찬스가 났으니 던져댔지만 림은 꾸준히 그 슛을 외면했다. 1차전에서 바셋은 10점을 기록했지만, 승부가 기울어진 4쿼터에만 나온 점수였다. (추일승 감독은 “연습 때 정말 잘 해서 기대가 컸다. 그런데 1차전을 보고 다들 충격을 받았다. 나는 물론이고 선수들과 본인도 충격이 컸다”라고 돌아봤다.)
삼성은 리바운드 단속(42-28)까지 성공하면서 오리온의 매 포제션을 잘 막아냈다. 애런 헤인즈 역시 부진했다. 마이클 크레익과의 대결에서 평정을 잃었다. 이상민 감독은 “터프하게 수비해주면서 헤인즈가 말렸다. 오늘 굉장히 잘 해줬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삼성은 2쿼터 시작과 함께 주희정의 득점으로 18-16으로 역전한 뒤 한 번도 리드를 놓치지 않았다. 전광판 오리온의 점수가 ‘16’에 멈춰있는 동안 삼성은 ‘24’까지 점수를 끌어올렸다. 1쿼터만 해도 몇 번 트랩에 흔들렸던 라틀리프는 완전히 안정을 찾은 듯 했다. 삼성은 임동섭, 크레익의 연속 득점으로 33-18, 43-22로 쭉쭉 점수를 벌려갔다. 3쿼터, 오리온도 한 번 추격 타이밍을 잡았지만 헤인즈의 무리수로 경기는 순식간에 원사이드가 됐다. 4강 1차전은 30점차까지 벌어졌다.
“집에서나 체육관에서나 상대 트랩 수비에 대한 연구를 굉장히 많이 했다. 억지로 패스 연결시키기보다는 실수 없이 공격을 끌어가려고 이야기를 많이 했다.” 라틀리프의 말이다. “상대 위치를 잘 보려고 한다. 손을 위로 뻗고 있으면 바운스패스를 주는 등 방식을 달리 가져가고 있다.”
‘철인’ 라틀리프의 활약에 임동섭은 고마움을 전했다. “꾸준히 버텨주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고맙다. 나도 보고 배운다.”
▲ 주희정 예찬
GAME 2 : 4월 13일, 삼성 84-77 오리온
시리즈 내내 루키 가드와 겨루었던 주희정. 그는 '노련미'라는 단어가 어떤 뜻인지를 잘 보여줬다. (사진=점프볼)
2차전 3쿼터. 남은 시간은 7분 4초.
전광판을 보니 삼성은 여전히 44점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이 ‘44’점째를 올린 것은 2쿼터 3분경이었다. 크레익의 득점으로 44점을 찍으며 8점 앞서갔다. 그런데 전반이 끝나고 후반이 시작된 지 3분이 지났는데도 이 점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사이 오리온은 점수차를 좁힌데 그치지 않고 흐름까지 뒤집었다. 장재석의 2득점으로 50-44로 앞서간 것이다. 약 6분간 무득점. 비로소 라틀리프가 정적을 깼지만 곧바로 이승현과 오데리언 바셋이 점수를 내리 올리면서 54-46으로 달아난다.
2015-2016시즌의 삼성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경기흐름이 넘어갔을 것이다. 이상민 감독 역시 “정규경기 같았으면 넘어갔을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단단해진’ 삼성은 새롭게 반격을 시작한다. 시작은 수비였다. 중요한 순간에 블록(라틀리프)과 가로채기(주희정)가 나왔고, 이는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반격. 3쿼터가 끝날 때 벌어졌던 8점은 ‘0’이 되어 있었다. 58-58. 승부는 다시 시작됐다.
삼성은 4쿼터를 26-19로 제압했다. 임동섭의 3점슛으로 시작해 4쿼터 첫 3분간 10-3으로 앞섰다. 오리온이 받은 데미지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김준일이 헤인즈의 슈팅 저지는 삼성 상승세의 정점을 찍었다. 주희정은 파울 작전에 영리하게 대처하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더 벌어지는 시점에서 잘 극복했다. 덕분에 시소를 만들었고 달아날 수 있었다.” 한숨 돌린 이상민 감독의 말이다.
이 흐름을 넘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라틀리프와 주희정이었다. 라틀리프는 4쿼터 7점 7리바운드를 비롯해 21점 16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어시스트도 4개였다. 주희정은 27분 17초를 뛰며 8점 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 중 5점을 4쿼터에 집중시켰다. 추격세를 이끈 문태영은 2~3쿼터에 11점을 집중시켰다.
“대단하다고 밖에 표현이 안 된다. (주)희정이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감각이 떨어질 법도 한데, 경험 덕분인 것 같다.” 이상민 감독의 말이다. 임동섭 역시 주희정을 보며 자극을 받는다 했다.
2차전 4쿼터. 양 팀의 슈팅 차트. 왼쪽 파란색이 삼성이고, 반대쪽이 오리온이다. 던진 건 오리온이 더 많았지만, 결국 골망을 가른 공은 삼성쪽이었다. (KBL 통계 프로그램)
사실 주희정은 삼성으로 이적할 때만 해도 ‘은퇴’ 이야기가 나왔던 선수다. 리그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언제, 어떻게’ 해야 영예롭게 은퇴를 할 수 있을지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활약만 보면 ‘은퇴’란 단어는 입에 담기조차 미안할 정도다. 정규리그 출전시간은 평균 9분 55초에 불과했다.
“정규리그에 벤치에 있었지만, 나는 농구를 놓지 않았다. 기회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나름대로 준비했다. 그게 도움이 됐다. 비디오를 보면서 누가 어떤 장점을 갖고 있는지 체크해왔다. 라틀리프, 크레익 활용도 도움이 됐다. 서로 소통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다들 마음을 연 것 같다.”
주희정의 말이다. 시간이 쫓겼을 때도 당황함이 없다. 20년, 1천 경기의 오랜 경험이 안겨준 산물이다. 왜 그라고 실수가 없었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이 시리즈에서 젊은 선수들이 받을 압박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주희정이 있을 때 유독 코트 위 대화가 늘어나는 이유다. “모인다는 것 자체가 분위기 싸움을 위한 것이다. 상대와의 기 싸움이다. 다시 한 번 단단함을 내게 된다. 동섭이, 준일이도 분위기를 타기 때문에 계속 컨트롤 해주려 한다.”
그러나 추일승 감독은 2차전 패배 후에도 문제는 상대가 아닌 자신들에게 있다고 진단했다. “삼성 지역방어가 강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추일승 감독은 “삼성 지역방어는 허점이 있다. 굳이 우리가 준비할 필요성은 못 느꼈다. 헤인즈가 못한 것도 크레익 영향이라 보지 않는다.”
실제로 1차전과 비교해 선수들은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한 번 더, 두 번 더 사이드와 코너의 동료들을 살폈다. 평소 오리온에 비하면 부드러움은 덜했지만, 1차전과 달리 ‘무리한’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바셋도 달랐다. 공을 잡는 위치, 공을 잡은 후 움직임도 개선됐다. 1,3쿼터에 달아나며 분위기를 띄우는 시점도 있었다.
“우리 장점이 잘 안 살아났다. 도리어 삼성 외곽이 더 잘 들어갔다. 그래도 1차전보다 보완이 잘 됐다.”
그들 장점 중 하나는 애런 헤인즈였다. 노쇠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올 시즌 위닝샷을 가장 많이 꽂은 선수이며, 헤인즈가 있을 때 승률이 가장 높았다. 그가 휘저어야 팀도 살아났다. 2차전도 휘젓긴 했다. 다만 무리한 플레이가 있었다. 그의 최종기록은 13점이었다. 야투성공률은 24%. 추 감독도 “이런 식으로 플레이해서는 어렵다”라 말했다. “득점을 잘 할 수 있는 위치에서 멀어져 공을 잡고, 공을 갖고 있는 시간도 길었다. 받아먹는 득점이 필요한데….”
고양의 잠 못 드는 밤은 계속됐다.
0% 확률에 도전한 추일승 감독. 그는 4강 직행보다 6강이 더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점프볼)
▲ 도전은 하라고 있는 거니까
AFTER GAME 2 : 4월 13일, 삼성 84-77 오리온
KBL 플레이오프 역사상 1,2차전을 지고 시리즈를 이긴 팀은 아직 없다. 1차전을 졌을 땐 뒤집기 확률이라도 존재했지만, 1~2차전 패배팀에게 주어진 확률은 ‘0%’였다. 4강만 놓고 보면 5차전까지 끌고 간 사례가 2003년에 딱 한 번 있었다. LG였다. TG와 LG가 붙은 그 시리즈는 ‘원정에서만 이긴 시리즈’라 하여 농구팬, 기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TG는 LG 홈인 창원에서 1~2차전을 잡았지만 정작 홈인 원주에서 해결을 보지 못했다. 3~4차전은 LG가 이겼다. 그리고 동률이 되어 돌아온 창원에서 LG는 맥없이 역전패를 당했다. 제법 큰 점수차로 앞섰으나 4쿼터 시작하자마자 역전을 당해 챔프전 진출의 꿈을 접었다. TG는 그 시즌에 챔피언이 됐다. “도전은 항상 하라고 있는 것이니까.” 추일승 감독은 2차전이 끝난 뒤 덤덤히 말했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지만 않길 바랄 뿐이다.”
▲ 김동욱의 ‘유혹’, 그리고 각성
GAME 3 : 4월 15일, 오리온 73-72 삼성
헤인즈는 3~4차전을 이끌며 체면치레를 하는데 성공했다. (사진=점프볼)
장소는 잠실실내체육관으로 옮겨졌다. 삼성이 전자랜드와의 길고 긴 시리즈를 결정지었던 곳. 이상민 감독과 삼성 선수들은 빨리 끝내고 22일에 시작될 챔피언결정전을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벼랑 끝에 선 오리온은 평온했다. 추일승 감독은 딱 하나의 단어를 강조했다. 자존심. 1년 전, 긴 사투를 극복하고 챔피언 자리에 올랐던 그 기억과 자존심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그 와중에 김동욱 이야기가 나왔다. 1차전부터 계속된 질문이었다. 1차전 앞두고 처음 무릎 상태를 물었을 때 추 감독은 “예정된 건 3주였는데 길어지고 있다. 1주일이 지났는데 아직 안 좋다. 일단 팀 훈련을 한 번도 안 했다. 내보낼 수가 없다”라 답했다. 이 답변은 2차전까지 계속됐다. 지겨울 법도 하지만, 계속 김동욱을 묻는 이유는 단 하나. 그만큼 그가 오리온의 공, 수가 이뤄지는데 있어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오리온이 챔피언결정전에서 ‘PACE & SPACE’로 재미를 본 배경에도 김동욱의 ‘인생 시리즈’가 있었던 덕분이다.
“(김)동욱이 형이 있으면 미스매치가 만들어져 들어가서 할 수 있다. 픽앤롤이나, 패스 센스도 있고, 수비도 좋은 선수다. 그런 선수가 없다보니 팀의 2번 자리가 약화됐다.” 이승현의 말이다. 추일승 감독 역시 “상대가 지역방어를 섰을 때 김동욱이 있었다면 정상적으로 해냈을 것”이라 말했다.
3차전을 앞두고 김동욱은 몸을 풀고 있었다. 열심히 바이크를 타고 있었다.
“오늘 뛸까요?” 코트를 응시던 조상현 코치에게 묻자 그도 명확한 답을 내리진 못했다. “무릎이 안 좋아서 지역방어를 설 때는 모르겠는데….”
추일승 감독은 더 구체적으로 답을 주었다. “웜업을 해보고 안 좋으면 이야기하라고 했다. 안 좋으면 엔트리에서 빼야 한다. 엔트리에 있다 보면 미련만 남으니까….”
결과적으로 이날 경기에서 김동욱은 뛰지 않았다. 경기 후 왜 김동욱을 기용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추일승 감독은 “내일(16일) 운동해보고 결정하겠다”고 답했다. “유혹은 있었다. 하지만 훈련도 안 해본 상황에서 뛰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리온은 김동욱 없이도 탈락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각성’ 혹은 ‘위기 인식’에서 꽃피어난 팀워크 덕분이었다.
수비에서는 애런 헤인즈가 김태술을 마크했다. 밀착마크보다는 거리를 두는 수비였다. 슛은 주겠다는 것이다. 라틀리프에 대한 트랩은 자주 쓰지 않았다. 오히려 초반 지역방어가 삼성 공격을 둔화시켰다. 공격에서는 공 공유가 많아졌다. 1차전보다 2차전이, 2차전보다는 3차전이 볼 흐름이 좋아졌다. 1쿼터를 16-14로 앞선 가운데 2쿼터 시작과 함께 6점을 몰아쳐 22-14로 달아났다.
그러나 크레익-라틀리프 태그팀은 막강했다. 이동엽까지 거들면서 삼성은 3쿼터에 흐름을 바꿔 59-52까지 달아났다. 4쿼터 초반 주희정의 3점슛에 라틀리프의 골밑슛까지 들어가면서 최다 점수차였던 9점차(64-55)까지 벌어졌다. 삼성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문태종이 3점슛으로 반격하자 곧바로 김준일이 어림도 없다는 듯 3점슛으로 맞받아친다. 잠실실내체육관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이때 오리온은 트랩 카드를 꺼내든다. 헤인즈아 이승현이 라틀리프에게 달라붙었다. 제대로 먹혀들었다. 공격권을 가져온 오리온은 헤인즈의 3점 플레이에 허일영의 추가득점으로 경기를 동점으로 만들었다. (이에 앞서 김진유의 3점슛이 터지면서 발판을 깔아줬다.) 남은 시간은 4분 7초. 접전이 됐다. 접전이 이어진 가운데 오리온은 종료 2분여를 남기고 마지막 타임아웃을 사용한다. 문태종의 포스트업 공격은 실패했지만 ‘에너자이저’ 김진유가 공격리바운드를 잡아냈다. 이어진 헤인즈의 득점으로 71-70. 헤인즈는 이후 1분 뒤에도 결정타를 꽂아 73-72를 만든다. 사실상의 위닝샷이었다.
삼성은 조급했다. 마지막 공격을 앞두고 타임아웃을 불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상대에게 수비를 준비할 기회를 주고 만다. 이승현이 임동섭의 슛을 블록으로 저지했다. “(임)동섭이 형이 뜰 것을 예상했다. 파울이 되더라도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4차전을 앞두고 이상민 감독은 이 모든 상황을 자신의 실수였다고 말했다. “마지막 리바운드를 놓친 것도 아쉽지만, 일단은 내 판단미스로 선수들을 더 힘들게 한 것 같다. 끝내야겠다는 욕심 탓이었다. 체력 안배를 해줬어야 하는데….” 마지막 타임아웃에 대해서도 생각을 전했다. “정말 고민했다. 그렇지만 안 쓰면 우리도 작전이 없는 상황이었다. 중간에 안 쓰려다가 힘들까봐 썼다. 돌이켜보면 그것보다는 이전 상황(2번째 타임아웃)에 쓴 타임아웃이 더 아쉬웠다. 그때 안 쓰고 막판에 몰아붙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있다. 이기겠다는 내 욕심이 컸다.” (파울 작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시간이 남고, 타임아웃이 남았기에 파울 작전은 하지 않았다. 그동안 3초짜리, 4초짜리 패턴도 만들었고 연습해왔다. 헤인즈를 더 압박하자고 했었다.”)
▲ 3점슛이 주는 데미지
BEFORE GAME 4 : 4월 17일, 오리온 79-76 삼성
3점슛이라고 다 같은 ‘3점’이 아니다. 상황에 따른 타격도 있고, ‘누가’ 넣느냐에 따른 타격도 있다. 예컨대, 경기 내내 잠잠하더라도 문태종이 꽂는 3점슛은 분위기 반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지난 6강에서 정말 슛이 안 들어가던 한 선수가 나오자마자 3점슛을 성공시키자 기자석의 거의 모든 기자들이 ‘움찔’한 적이 있다. 또, 그 3점슛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때도 있다.
추일승 감독은 3차전 4쿼터, 헤인즈가 김진유에게 건넨 어시스트가 오리온의 불씨를 살렸다고 판단했다. “선수들의 믿음이 집중력을 만들어낸 것 같다”고 말했다. 선수들에 따르면 헤인즈는 3차전부터 더 많이 움직여줄 것을 요구했다. 이승현은 “헤인즈가 ‘내가 공을 잡으면 힘들어도 많이 움직여 달라. 파생되는 부분을 노리자’고 말했다”라 말했다. 장재석, 김진유에게도 같은 주문이 들어갔다. 결국 김진유의 3점슛에서 시작된 추격전은 3차전 승리를 만들었다.
사실, 농구경기에서 꼭 줘도 되는 3점슛은 없다. 어쨌든 실점은 실점이니 말이다. 그러나 5명을 모두 막을 수 없다면 그 실점의 ‘데미지’를 최소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삼성 입장에서는 바셋이 그 대상이었고, 오리온은 김태술이 대상이었다. 당하는 선수는 ‘멘붕’이 된다. 자신감이 떨어져 바로 올라가지 못하게 되고, 드리블을 한 번 더 하는 사이에 이미 밸런스는 무너지게 된다. 헤인즈는 김태술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지만 이미 막아버린 셈이 됐다. (4차전을 앞두고 이 감독은 “오전에 김태술과 면담을 했다. 머뭇거리면 밸런스가 깨지니까 자신 있게 던져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3점슛을 맞으면서 생기는 데미지가 (임)동섭이나 (문)태영이보다는 (김)태술이가 덜하니까, 헤인즈로 하여금 태술이를 견제하게끔 하고 있다.” 추일승 감독의 말이다. 동시에 그는 “완벽한 속공이 아니면 최대한 딜레이 시켜서 체력소모를 줄이자고 했다. 요령 있게 경기를 풀어가되, 4쿼터를 노리자고 했다”라 주문했다.
이상민 감독도 그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야속했을 지도 모른다. “선수들이 태술이가 있을 때, 희정이가 있을 때 상황을 잘 파악하고 움직여줬어야 한다”며 말이다. (“선수들이 슛이 안 들어가다 보니 자꾸 안쪽으로 들어온다. 태영이도 슛이 좋았다, 안 좋았다 하다 보니 안쪽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라틀리프가 패스를 줄 곳이 없었다. 트랩이 들어왔을 때 퍼져 있어야 하는데 그날따라 다들 안쪽으로 들어오니까 라틀리프도 당황스러웠다고 하더라.” - 이상민 감독의 추가 코멘트)
그러나 삼성은 더 큰 고민이 있었다. 체력이다. 3차전에서 끝내겠다는 생각에 플레이오프 들어 가장 적은 선수가 기용됐고, 개개인의 출전시간도 눈에 띄게 늘었다. 이상민 감독은 “끝까지 다 뛴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은 맞지만, 힘들면 싸인을 보내달라고 했다. 단 1분이라도 쉬고 다시 나올 수 있게끔 하자고 했다”라 주문했다.
▲ 승부는 원점으로
GAME 4 : 4월 17일, 오리온 79-76 삼성
김진유의 허슬 플레이가 유독 더 빛났던 4차전. 그들은 시리즈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사진=점프볼)
전반에 오리온은 5차전을 예감했다. 최진수가 불의의 발목 부상을 당했지만, 오리온 입장에서는 만족스런 20분을 보냈다. 삼성이 서서 농구하는 동안 오리온은 활발히 수비를 깨부쉈다.
허일영의 3점슛에 헤인즈의 추가득점까지 터지며 전반이 끝났을 때 스코어는 49-30이었다. 추 감독도 “무리하지 않고 잘 풀어갔다. 욕심을 안 부렸다”라 말했다.
다만 후반은 다른 이야기였다. 이상민 감독은 “쫓아가줘서 고마웠다”라 한 반면, 추 감독은 “수비가 안 되면서 다 흔들렸다”라 돌아봤다.
라틀리프의 위력이 막강했다. 삼성은 라틀리프에게 공이 가는 경로를 다양화했다. 때마침 오리온을 급습한 파울트러블도 그들을 위축시켰다. 조금씩 줄던 점수차는 4쿼터 3분여를 남기고 한 자리가 됐다. 라틀리프이 연속 득점에 7점차(66-73)가 된 것이다. 라틀리프는 삼성의 4쿼터 첫 15점 중 11점을 혼자 성공시켰다. 1분 뒤 점수차는 5점차가 되고, 4점차가 된다. (이날 라틀리프는 43점 16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 커리어하이 기록이었다.)
삼성 입장에서는 점수차를 더 좁힐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헤인즈가 라틀리프를 잡아당긴 것을 심판이 캐치 못하면서 그 기회를 잃어야 했다. 이는 실책으로 기록되어 오리온의 2득점으로 연결됐다. 마지막 2분간 오리온은 겨우 4점을 추가했지만, 그 실책 유도 후 득점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한숨 돌리고 역사에 도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비록 후반을 일방적으로 밀렸지만 오리온은 수확이 있었다. 팀이 단단해지고 있었다. 김진유는 에너자이저로 활약하며 자리를 꿰찼고, 장재석 역시 자신감 있는 공격으로 팀에 기여했다. 오리온 선수들은 ‘0%의 확률’에 대해 “한 번 해보겠다”고 입을 모았다.
▲ 꼬북이, 갤럭시에 가다
GAME 5 : 4월 19일, 삼성 91-84 오리온
한차례 거세게 추격을 당했으나 이번에도 삼성은 한 번 더 단단해진 조직력으로 상대를 떨어뜨렸다. (사진=점프볼)
오랫동안 헤인즈는 ‘믿고 쓰는’ 득점원이었다. 정규시즌 중 8,333점을 넣어 외국선수 중에서는 역대 최다에 이름을 올렸다. 400경기를 넘긴 선수는 그가 유일하다. 장기인 자유투는 2,240개를 시도해 1,1815개를 성공시켰다. 이 역시 외국선수 중 통산 1위다. (국내선수 포함하면 서장훈, 김주성에 이어 역대 3위) 사람들은 그를 여우라 불렀다. ‘장수 비결’도 궁금해 했다.
그런 헤인즈에게 이상 징후가 보였다. 무리한 득점 시도가 시리즈 내내 아쉬움을 남겼다. 4차전에서는 트랩에 걸려 실책을 범하는 보기 드문 장면도 나왔다. (헤인즈는 “나에게 트랩이 오리라는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강하게 왔다. 반대로 틀었지만 이미 늦었더라”라며 4차전막판 실책 상황을 설명했다.)
5차전에서도 이름값에는 많이 못 미쳤다. 3쿼터 11점 포함 27득점을 기록했지만 흐름을 끊는 공격이 자주 나왔다. 비로소 득점력을 되찾았을 때는 장신들이 파울트러블에 걸리면서 트랩 & 로테이션 수비가 완전히 길을 잃은 상태였다. ‘파트너(바셋)’이 변변치 않았던 탓도 있다. 그래서 홀로 책임져야 했던 것도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중앙에서 무리하게 드리블을 시작했다 펌블하는 장면은 헤인즈답지 않았다.
정재홍(17득점 3스틸), 장재석(9득점 3리바운드)의 분투에, 부상서 기적적으로 복귀한 김동욱(14득점 7어시스트)의 활약에도 불구, 오리온의 시즌은 5차전에서 끝났다.
'미스매치 제조기' 김동욱은 짧은 시간에 강렬한 임팩트를 만들었다. (사진=점프볼)
이승현의 5반칙 퇴장도 뼈아팠다. 임동섭이 살려낸 리바운드가 문태영에게 전달됐는데, 그 공 하나가 이승현 5반칙을 끌어냄과 동시에 재역전(73-72)을 이끌어냈다. 공격 리바운드 하나가 흐름이 끼친 영향은 아주 컸다. (이날만큼은 문태종도 아쉬웠다. 5차전 무득점에 그쳤다. 문태종이 25분 이상 뛰고도 무득점에 그친 플레이오프 경기는 KBL 데뷔 후 이날이 처음이었다. 문태종은 4차전에서도 무득점이었는데, 정규경기를 통틀어 2경기 연속 0점을 기록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 시리즈 3점슛 성공률은 23.1%이었다.)
삼성은 원했던 무기가 다 살아났다. 라틀리프가 전반(22점)을 견인했지만 후반은 크레익(3쿼터 7점)과 문태영(후반 16점)이 이끌었다. 크레익의 3쿼터 버저비터 3점슛에 힘을 실은 가운데, 문태영은 라틀리프에게 집중되면서 무너진 로테이션 수비를 틈타 손쉽게 점수를 따냈다.
오리온의 트랩수비가 흔들리고 있음을 가장 잘 나타낸 장면. 문태종이 들어가고, 약속이 어긋나면서 문태영이 재미를 많이 봤다. (MBC 스포츠 플러스 중계화면 캡쳐)
사실, 오리온 입장에서 4쿼터 종료 3분 32초전에 터진 임동섭의 3점슛까지는 극복이 가능해 보였다. 장재석의 득점에 정재홍과 김동욱이 자유투 하나씩을 넣으면서 2점차(78-80)까지 따라갔다.
그러나 종료 55.7초를 남기고 김태술이 터트린 3점슛은 오리온을 회생불가능 상태로 몰아넣는다. 데미지가 가장 적을 것이라 봤던 그의 3점슛이, 끝내 오리온에게 비수가 된 것. 그 3점슛으로 삼성은 85-78, 7점차로 달아나며 승기를 잡았다. 그는 포효했다.
“몸보다 정신적으로 힘든 시리즈였다. 던질 때 들어갈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굉장히 감이 좋았다. 그동안 힘들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힘든 것들이 다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삼성은 통산 3번째 우승에 도전한다. 마지막으로 우승 기회가 있었던 2009년에, 이상민 감독과 이규섭 코치는 선수로 뛰고 있었다. 친정팀 KCC를 상대로 7차전까지 끌고 갔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삼성에 이적할 당시 우승을 이루고 은퇴하겠다는 각오였는데 끝내 이루지 못했다. 삼성에서 선수로 뛰면서 남은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굉장히 힘든 시리즈였다. 나도 선수 때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힘든 부분을 극복한 선수들을 칭찬해주고 싶다.”
이상민과 김승기 감독. 청소년대표시절 선의의 경쟁을 펼쳤던 두 남자가 이제는 챔피언을 두고 격돌한다. 리카르도 라틀리프와 데이비드 사이먼은 2015년 챔피언결정전 이후 각기 다른 팀에서 리턴매치를 갖는다. 만날 때마다 으르렁댔던 문태영과 양희종도 재회한다. 김태술은 함께 우승을 맛본 옛 동료들과 겨룬다. 임동섭은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라던 첫 플레이오프 시리즈 패배를 안겼던 팀을 상대로 만회할 기회를 얻었다. 사연과 스토리가 많은 두 팀이다. 그 대결은 22일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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