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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탕에 대한 경고
잠 23:26-35
26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27 대저 음녀는 깊은 구덩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
28 참으로 그는 강도 같이 매복하며 사람들 중에 사악한 자가 많아지게 하느니라
29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30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32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33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34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35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잠 23:26-35 / 얘야, 내가 이르는 말을 꼭 명심해 들어야 한다. 네 눈을 허튼 곳에 두어서는 절대 안 된다. 내가 가르쳐 주는 길만을 다니겠다고 굳게 마음먹어야 한다. 27) 창녀는 한없이 빠져 드는 깊디깊은 구렁텅이일 뿐이며. 남의 집 계집 또한 좁디좁은 함정이다. 28) 강도처럼 몰래 기다리다가 내리 덮쳐서 신세 망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29) `급살을 맞았구나. 아아, 비참하구나' 하고 외쳐 대는 사람이 누구냐? 투닥거리며 싸움질만 하는 사람이 누구냐? 까닭도 없이 얻어맞기만 하는 사람이 누구냐? `에이, 더러워 못살겠다!' 하고 투덜거리는 사람이 누구냐? 불그스레하게 두 눈이 달아오른 사람이 누구냐? 30) 술이라 하면 정신 못차리고 이술 저술 뒤섞어서 끊임없이 마셔 대는 술꾼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니냐? 31) 포도주란 발그스레 붉어서 먹음직스럽기도 하고, 술잔에서 반짝반짝하여 보기도 좋을 뿐아니라 순하게 넘어가서 먹기도 좋다마는 그것을 거들떠볼 생각조차 하지 말아라. 32) 일단 한번 마셨다가는 마침내 독사처럼 날카롭게 물어뜯는 것이 술이다. 살무사처럼 그 독이 마구 퍼져 나간다. 33) 눈에는 이상한 것들이 보이고 속에서는 헛된 소리만 자꾸 나올 뿐이며 34) 바다 한가운데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잠에 곯아 떨어진 사람과 같고 미친 듯이 불어 대는 폭풍 속에서도 나 몰라라 하고 잠에 떨어진 사람과 같으리라. 35) `남들이 나를 때려도 아프지 않네. 이토록 두들겨 맞았는데도 아무렇지 않네. 이번에 마신 술이 깨거든 또 다시 술을 마시러 나가야지' 하면서 주절대기도 잘하는구나.
지혜자는 방탕한 생활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음녀는 깊은 구덩이요(26-28) 아비 된 자로써 내 길을 즐거워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올바른 가치관에 따라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면 내 길을 따라오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아버지는 지혜를 따라 살아온 아버지이기에 자신의 가치관을 따르고 자신의 삶을 본보기로 삼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26). 먼저 아버지는 성적 방종의 치명적인 위험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깊은 구덩이’와 ‘좁은 함정’이라는 표현은 음녀의 유혹이 계획적이고 교활하여 피할 길이 없음을 암시합니다. ‘구덩이’와 ‘함정’에 빠지면 빠져 나오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합니다. 음녀는 물질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앗아가는 강도와 같습니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29-35) 지혜자는 여섯 가지의 질문으로 술 취함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을 말하면서 술 취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29). 술 취한 자는 제정신을 잃고 절제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 또한 술에 빠진 자는 점점 더 독한 술을 구하게 됩니다. ‘혼합한 술’(30)은 더욱 취하게 하려고 마시는 것이고, 결국 술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포도주의 향기와 색채는 사람의 마음을 유혹합니다(31).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목에서 순하게 내려가지만, 반복될수록 술에 갈증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절제 능력을 넘어서는 순간을 맞게 됩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술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31)라는 말씀은 호기심으로 마시는 것조차 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뱀 같이 물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라는 비유는 술이 맹독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사람에게 고통을 주며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술로 인한 환각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33-35). 술로 인해 이성과 감각을 상실해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술만 찾습니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35) 이렇게 된 자는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적용: 방탕한 삶은 그리스도인들을 파멸의 길로 끌고 가며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앞서 간 사람이 빠진 수렁을 보고도 아무 생각 없이 따르는 이가 사람입니다. 당신은 방탕의 길로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계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95살 이었을 때,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로 손꼽히는 분이십니다. 그런 선생님께서 아직도 하루에 여섯 시간씩 연습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카잘스>는 활을 내려놓고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제가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하루같이 조금씩 노력하는 것은 발전하는 지름길입니다. 무엇이든 평생 동안 하루하루 조금씩 노력한다면 분명한 결실이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며, 말씀을 가까이하며, 주를 찬양하면서 주신 직분에 사명감당하기 위해서 부지런하여 힘쓰면 좋은 결실이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 설 교 >
부모를 즐겁게 하라
잠 23장 25절 / 김근중 목사
현대 문명의 발달로 인해 오는 폐단 가운데 하나는 부모공경의 퇴색입니다. 전에는 부모를 가장 귀중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배우자-자녀-개-부모 순이 되었습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독재시대에서 자유시대로,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탈시대로 바뀌면서 부모의 세대와 자녀 세대의 가치관과 인생관과 세계관의 갭이 좁힐 수 없을 만큼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만큼 갈등과 분열과 충격은 커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10계명 가운데 다섯번째로 주신 계명입니다 (출20:12).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부모에 대한 태도를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경외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레19:32). 레위기19:32에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고 했습니다. 신명기27:15-26에는 12가지 저주받을 행동이 나열되어 있는데 하나님에 대한 범죄인 우상숭배 다음으로 부모에 대한 범죄가 두번째 나옵니다 (신27:16). 마태복음15:4-9에 보면 예수님은 부모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하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고르반 사상을 가진 자들에게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고 책망했습니다 (막7:10-11).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약속되었습니다 (출20:12, 신5:16, 엡6:1-3). 그리고 공경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저주가 경고되어 있습니다 (출21:15,17, 레20:9, 신21:18-21). 잠언30:17에는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불경(不敬)은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공경의 실천원리에서 소극적인 면은 순종하는 것이지만 적극적인 면은 즐겁게 그리고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1. 부모의 세계관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모를 싫어 여기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부모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부모의 생각이 이해가 안가서 부모를 미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가진 세계관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살아온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순전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물로 허기를 채우고 초근목피로 연명을 했습니다. 극동방송에서 김삼환 목사님 얘기를 들으니까 소나무 껍질을 먹어서 변을 보면 안 나와서 손가락으로 잡아 뺐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목구멍이 포도청 이라는 속담과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는 속담이 생겼겠습니까? 그들의 소원은 오직 배부르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인사가 진지 드셨습니까? 입니다. 라디오만 틀면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하는 노래가 나왔습니다. 오직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밥그릇 싸움이라면 피튀기는 싸움을 합니다.
정치적으로 공포 속에서 살았습니다. 일제의 식민 통치와 6.25 동란과 무장 공비의 활동과 군부 독재를 지내 오면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갈등했습니다. 나름대로의 생존법칙을 가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에 대한 배신 속에서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반전될 때마다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어떤 일에도 앞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극적인 삶을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합니다.
문화적으로 속박되어 살아왔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친 유교적 관습 속에서 억눌려 살아왔습니다.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결혼할 수 없었고 아들을 낳지 못하면 쫓겨 나기도 했고 갖은 구타를 핍박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그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고 아부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 지에 표준을 맞춥니다.
신앙적으로 편협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독교 선교의 초기에는 신학자와 선교사들이 교리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에게 배운 목회자들은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다양한 은혜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지키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적 배려와 포용과 협력과 연합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변화를 주려 하면 두려워 합니다. 부모의 신앙관과 우리의 신앙관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신앙관은 바뀌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신앙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분들의 신앙관을 이해하고 인정해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을 오늘날 우리의 환경과 우리의 관념에서 판단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모독이요 폭력인 것입니다.
2. 부모의 소외감에 덜어 드려야 합니다.
2005년 3월 부산대 사회복지과 서정화씨가 제출한 노인 자살 예방을 위한 사회 사업 개입 전략 이라는 주제의 박사 학위 논문에 실은 설문조사를 보면, 부산 울산 경남에 거주하는 60살 이상 남녀 512명 가운데 86.5%(443명)가 자살을 고려해 보았다고 응답했습니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이유로는 전체의 26.8%(137명)가 건강악화 로 꼽았고, 25.2%(129명)가 가족 갈등 으로, 21.3%(109명)가 심한 고독 이었습니다. 가족 갈등과 심한 고독은 심리적으로 비슷한 문제입니다. 응답자 중 72.0%가 매사에 의욕이 없고 우울하거나 슬플 때가 있다 대답해 초기 우울증세를 보였습니다. 그 만큼 외롭고 고독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가지고 살았고 가정에서도 가부장적 권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들은 불합리한 문화 구조 속에서도 자녀 양육권은 있었고 오로지 자녀 양육만이 유일한 낙이었고 소망이었습니다. 이젠 나이가 많아지면서 사회로부터도 냉대를 당하고 심지어 가정에서도 가장으로 인정해 주지 않고 자녀도 남의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족의 구성원들 중 누구도 과거의 지위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거기에다가 말 상대도 해주지 않습니다. 손자들도 대화가 안 됩니다.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오로지 며느리 간섭하고 며느리와 싸울 때입니다. 심한 배반감과 허탈감과 고독함을 가집니다.
부모를 공경하려면 육체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아픈 곳이 있을 때 진료와 치료에 힘써야 합니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잠자는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용돈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노인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이 모멸감과 소외감과 고독함입니다. 실은 며느리를 간섭하는 것도 그런 문제입니다. 부모의 자존감을 세워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치를 확인시켜 드려야 합니다. 부모의 의사와 결정을 존중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들어 드려야 합니다. 무엇이든 설명을 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3. 부모를 즐겁게 데는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부모는 우리를 위해 희생했습니다. 부모는 우리를 낳아 주신 분들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 피를 서말 서되를 흘린다고 했고 기를 때 젖을 여덞섬 너말로 키운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먹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먹였고 입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입혔고 자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재웠습니다. 그들은 공부를 하지 못했으나 허리 띠를 졸라 매가며 우리에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만일 우리 생각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부모에게 그럴 만한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죽어 마땅합니다 (레20:9, 신기21:18-21, 잠30:17).
우리는 그에 비하면 너무 잔인할 정도로 부모에게 희생하지 않습니다. 지금 학생들은 공부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하지만 부모는 직장에서 서류로 머리를 맞아 가고 몸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한 달 백만원 대를 벌어오면 수십만 원짜리 핸드폰 디카 엠피쓰리 쌉니다. 신발 하나를 사도 싼 것은 챙피해서 못 신는다고 비싼 메이커 삽니다. 그래도 부모는 사줍니다. 아이가 왕따 당할까 봐... 우리는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싼 신발 신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왕따 당하는 것이 두렵습니까?
이제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어야 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하려면 희생해야 합니다. 부모가 희생없이 자녀 기를 수 없는 것처럼 자녀도 희생없이 보답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종교적으로 희생해야 합니다. 부모 희생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내가 양보하기 싫어도 부모를 위해 일정부분 양보해야 합니다. 내가 싫어하더라도 부모가 기뻐하는 것이라면 일정부분 희생해야 합니다.
부모는 우리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는 데에 동역한 분들입니다. 부모는 우리를 기르신 분들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서 사용하시기 위해 교육하는 데에 동역한 분들입니다. 본인들이 알았든 몰랐든 모든 인생을 희생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는 데에 동역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들을 통해 생명 주신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분들을 통해 성장시킨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분들을 통해 우리를 행한 뜻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마땅히 부모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마땅히 그 분들을 공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마땅히 그분들을 경외해야 합니다 (마15:4-9, 요일5:3).
어버이를 기쁘시게 하라
잠 23장 25절 / 김홍도 목사
여러분, “어떻게 하면 자식이 잘 되고 행복할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어떻게 하면 내 부모님을 편하게 해드리고 기쁘시게 할까?” 하는 이 두 가지 마음 중에 어느 쪽이 더 무겁습니까? 아마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분이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의 사랑은 변함이 없지만 자식들의 사랑과 효심은 점점 식어만 가는 것 같습니다. 고려장 하듯이 비록 산속에는 갖다 버리지 않으나, 제주도나 해외에 여행 갔다가 부모를 버리고 오거나 양로원이나 기도원에 갖다 버리고 오는 자식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입니다.
피주 공고 교장이신 이영순 목사님의 글 가운데 고인이 되신 한영선 목사님의 “늙은이는 서럽다네” 하는 글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늙으면 섧다네. 눈 어두워 그렇지. 돋보기 안경 쓰고 확대경 손에 드나 그래도 안보여 두 번, 세 번 살핀다네. 늙으면 섧다네. 귀먹어 그렇지. 남의 소리 반타작. 묻기 뭣해 지나고, 재빠른 전화 소리는 정말 듣기 힘들다네. 늙으면 섧다네. 무시당해 그렇지. 수에도 치지 않는 젊은이의 풍조로다. 무언가 저들끼리만 쑥덕쑥덕 하누나. 늙으면 섧다네. 짝 잃으니 그렇지. 백년해로 약속 어겨 어느 한 쪽 먼저 가니 남은 쪽 외로움이야 일러 무엇하리요. 늙으면 섧다네. 병들어 그렇지. 내 몸은 내 몸이나 내 맘대로 못하니 옆에서 돌보지 않으니 꼼짝못해 답답하지.”
이런 넋두리가 몇 년 전만 해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구구절절 가슴에 스며드는 것이 저도 이제는 늙는 모양입니다. 여러분, 머지않아 늙음이 찾아옵니다. 늙으신 부모님의 심정 헤아려 어버이를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모와의 관계는 다른 모든 관계에도 영향을 줍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선량한 직장인이 되고, 선량한 시민이 되고, 좋은 교인이 됩니다. 또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이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서도 나타나는 법입니다. 부모에게 행한 대로 자기도 받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 인륜 관계의 첫 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고, 에베소서 6장 3절에서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고 부모를 멸시하는 사람은 결코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는데, 친족이 아니라 자기 부모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더 악한 사람이겠습니까?
본문 잠언 23장 25절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어버이를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1. 중심에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헤아려 그 뜻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일본 어느 대학에 외아들 대학생이 있었는데 효자로 소문이 난 청년입니다. 한 번은 방학이 되어 집에 가는데 친구 하나가 따라갔습니다. 어떻게 효도하나 살피러 따라갔는데 실망을 했습니다. 인사를 하고나서는 옷을 훌훌 벗고 목욕을 하는데 연세 많으신 홀어머니에게 자꾸 심부름을 시키더랍니다. “어머니, 비누 좀 갖다 주세요.” 또 조금 있다 “어머니, 수건 좀 주세요.”, “어머니, 냉수 좀 주세요.” 그래서 목욕을 다 한 다음에 “나는 자네가 효자라고 해서 어떻게 행동하나 살펴보러 왔는데 실망했네. 자네가 직접 할 수 있는데 홀어머니를 심부름만 시키는 게 어디 있나?” 그랬더니, 그 친구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물론 내가 내 손으로 갖다 쓸 수 있어. 그렇지만 어머니는 내 요구를 들어주시는 것을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셔. 어머니를 기쁘시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걸세.” 하는 설명을 듣고 과연 효자이구나 하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할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식을 기쁘게 하고 자식을 행복하게 하려는 마음의 3분의 1만 생각한다면 아마도 다 효자, 효녀가 될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이 앞서야 되겠지요.
가렵기는 왼쪽 다리가 가려운데 긁기는 오른 쪽 다리를 자꾸 긁어주듯이, 부모의 참뜻을 헤아리지 못하면 참된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전에 저희 모친께서 살아 계실 때 큰 아들네 집에서도 모시려고 하고 둘째 며느리를 좋아하니까 저희집에 계시라고도 하는데 싫다고 하시면서 4형제 아들네 중심되는 거리에 조그마한 아파트를 사달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저희 형제들이 집 가진 형제가 없지만 돈을 모아서 10여 평짜리 아파트를 사드렸더니 기뻐하시면서 제일 고생하는 막내딸 이름으로 해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했는지 그 딸이 그 집을 다 날려버렸는데 또 하나 사달라고 하셔서 돈을 모아 사 드렸더니 역시 그 딸의 이름으로 등기해 주고 몇 해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동생 하는 짓은 밉지만 어머님이 기뻐하신 것을 보며 저희들은 만족했습니다.
형식으로 겉치레 효도보다 중심의 뜻을 헤아려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참 효도라고 봅니다. 부모에게 무관심했던 죄를 회개해야 될 줄 압니다.
2. 공경심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님께 무시하는 태도나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불효막심한 자식입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부모를 구타하고 부모를 죽이는 자식까지 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를 즐겁게 해드리려면 어른을 공경하고(honer) 경외하는(fear)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나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을 마땅히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연세가 많고 경험이 많은 분이니까 공경해야 합니다. 레위기 19장 32절에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말씀했습니다. 부모님뿐 아니라 나이 많으신 노인을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넓은 의미에서 내 육신을 낳고 키운 부모님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가르쳐준 스승도 또 다른 부모와 같은 분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선생님을 사부(師父)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더욱 중요한 우리 영혼의 지도자이신 주의 종, 영의 양식을 공급해주는 목사나 영적 지도자를공경해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神父)라고 하는데 “Father”, 즉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교황”을 “Pope”라고 하는데 “아버지”, “파파(Papa)”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천주교에선 교인이 영세만 받으면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듯이 반말을 합니다.
자식들한테 존경을 받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남에게 존경받는 것보다 더 흐뭇하고 기쁜 일입니다. 재작년에 제 여섯 살짜리 손녀가 주일 오후에 제게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귀에다 대고 “할아버지, 참 훌륭해 보여요.” 하고 웃지도 않고 말하는데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지금까지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또 제 막내아들 정민 전도사가 주일 밤 예배를 다 마치고 밤늦게 와서는 제 손을 꽉 잡고 머리를 숙이고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이렇게 힘든 목회를 어떻게 40년이나 했습니까?” 하는데 못들은 척 하면서도 자식들한테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흐뭇한지 피로가 다 풀리는 것 같습니다. 또 사위 목사들이 주일 설교 끝나면 머리를 숙이면서 “정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외국 사람 설교, 한국 사람 설교 다 들어봐도 역시 아버님의 설교가 깊이 가슴에 와 닿곤 합니다.” 하고 말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요사이 젊은이들이 공부 좀 했다고 건방지게 비판할 수도 있을 텐데 진심으로 인사할 때 참으로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제 아내도 언제나 고개 숙여 은혜 받았다고 인사하면서 설교 대지까지 외우곤 합니다. 한집에 사는 남편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존경을 표시할 때 정말 피로가 다 풀리고 기분이 상쾌해 집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으로 인정받아 그와 그의 가족들까지 방주를 타고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사람이었지만 포도주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고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렇다고 비판하고 흉보던 함은 저주를 받았지만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드린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식을 낳지 못한다고 조급히 생각하여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고 그랄 땅에 이사해 갔을 때 그의 아내 사라가 너무 미인이라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빼앗으려고 할 때 자기가 죽을까봐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성군 다윗은 그렇게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지만 부하 장군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였고,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흉계를 꾸며 충성된 우리아 장군을 일선에서 싸우다가 죽게 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다 허물과 실수가 있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허물과 실수가 있어도, 공부를 많이 못했어도, 자식을 공부 많이 못시켰어도, 부모는 하나님께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신분이기 때문에 존경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3. 대화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님은 연세가 많을수록 고독함을 잘 느끼고 가까움을 잘 탑니다. 그러므로 자주 대화하면 기뻐하십니다. 전에 보면 딸들이 시집갔다가 친정에 오면 밤을 세워가면서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밤을 세워가면서도 피곤해 하시지 않고 그 얘기 듣는 것이 좋아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늙으면 아이가 된다는 말대로 자식들이 장관이 되고, 사장이 되고, 목사가 되었어도 부모님한테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전에 제 후배, 정 목사란 분은 30, 40이 되었어도 시골 부모님한테 가면 아버지 팔을 베고 다정하게 어리광 부리며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 앞에서 어른 행세하려고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하나님도 보잘것없는 우리 인간과 대화하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여호와꼐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보잘것없는 죄인일지라도 오래 대화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속사정 다 털어놓고 하나님께 말씀 드리며 의논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요사이 너무 바빠서 부모님과 자식들과 대화할 시간이 없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4. 감사와 칭찬을 해드려야 합니다.
자식들은 부모의 은공에 감사를 표시하고 칭찬해 드려야 부모의 마음이 기쁜 법입니다. 우리는 흔히 뭐 새삼스럽게 감사하고 칭찬하랴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의 은덕을 감사하고 부모의 장점을 칭찬해 드리는 것을 부모님은 대단히 기뻐하십니다.
저는 사춘기 때 웃기는 얘기를 잘하고 가족의 폭소를 터뜨릴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가족을 웃기기 위해서 아버님의 단점을 들어 웃기는 얘기를 했더니 처음에는 같이 웃으시더니 두 번째 또 이야기를 했을 때는 안색이 달라지시면서 화를 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것도 쉬운 말로 하나님을 칭찬해 드리고 기쁘게 해드리고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송영할 때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하고 두 손들고 부르는 것도 주님을 칭찬하고 기쁘시게 하는 행위입니다.
노아가 비록 포도주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는 실수를 했어도 그것을 들추어내면서 비웃고 흉보던 함은 저주를 받았고 그 허물을 덮어드린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잠언 30장 17절에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은덕에 감사하며 훌륭한 점을 칭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5. 물질로 봉양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신 것같이 역시 어려운 중에라도 매월 얼마씩 형편에 따라서부모께 용돈도 드리고 여유가 있으면 맛있는 음식도 사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파고다 공원에 모인 노인들이나 노인정에 계신 노인들 대부분이 용돈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자식들이 성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가신 다음에는 다 후회가 됩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제 체면을 위해서 소를 잡아 제사 드리는 것보다 살아 계실 때 생선 하나, 닭 한 마리 잡아 대접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입니다. 어려우면 또 이해가 되지만 제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면서 부모 위해 쓰는 것은 어찌 그리 인색한지 모릅니다.
옛날 한풍 곽(郭)씨 가문에 이름난 효자가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밖에서 일하다 들어와 보니 연세 많으신 시아버지가 자기 손자 목을 타 누르고 죽이려고 하더랍니다. 며느리가 “아버님, 뭘 하고 계십니까?” 하고 비켜서게 했더니 “내가 닭고기가 먹고싶었는데 마침 닭이 한 마리 들어왔길래 잡아먹으려고 잡고 있던 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들춰 업고 얼른 암탉을 잡아 삶아드려 잡숫고 있는 중인데 남편이 들어와 보니 분위기가 이상해서 물어보니까 그 사실을 설명해 드리고 어린 아들을 보니까 이미 숨이 넘어갔더랍니다. 그것은 탓하지 않고 남편이 아내에게 엎드려 절하면서 “당신은 하늘이 우리 가문에 내려주신 효부”라고 하니까 그 여자가 “이것은 내가 절 받을 일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렇게 할 수 있었으니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라고 했더랍니다.
가장 큰 효도는 예수님 믿지 않는 부모라면 어서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전도를 안 받으면 일주일, 혹은 한 달 금식하면 다 들으실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도하지 않고 있다가 이 다음 부모님이 지옥불에 들어가시면 영원히 고통 가운데서 원망할 것입니다.
술
잠 23장 29~35절 / 장경동 목사
사람이 사람을 보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봅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로 우리 인생을 경영한다면 실수하기 쉽습니다. 하나로 열을 평가 하게 되면 신앙의 위인들도 형편없는 사람들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도 술 먹고 실수
했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부인을 ‘누이’라고 속이는 실수를 했고 모세도 혈기를 못 다스려 사람을 죽이는 실수를 했고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하는 실수를 했습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식 할수록 쉽게 평가하고 쉽게 판단하고 쉽게 결론을 내리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될 수 있는 존재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온전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온전할 수 없기에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 하나로 그 사람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는 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 믿는 사람이 술 먹었다’는 것은 일단, 실수한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술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실수는 고칠 가능성이 있지만, 잘못된 것은 고칠 가능성이 없습니다. 술 먹고 담배 피우는 것이 잘못된 것을 알고 안하려고 하지만 잘 안됩니다. 이때 자신의 잘못된 점을 인정해야지 그것을 합리화 시키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영원히 그 잘못을 고칠 기회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본 결과 우리나라가 참 살만한 곳이고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안 좋은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통사고’ 입니다.
우리나라는 교통 사고가 세계적으로 많이 일어납니다. ‘술 소비’ 또한 세계적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한이 맺혀서 마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술에 대한 피해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1. 금전적 손실이 큽니다. 잠23:21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헤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술값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얻어먹었다고 거짓말 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2. 자꾸 실수를 하게 됩니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노아가 얼마나 믿음이 좋고 훌륭한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도 술을 먹으니까 실수를 합니다.
3. 건강을 해칩니다. 호7:5 ‘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의 뜨거움을 인하여 병이 나며 왕은 오만한 자들로 더불어 악수하는 도다. 술 때문에 병이 납니다.
4. 사고가 납니다. (음주운전 사고) 신21:20-21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전쟁이 나서 죽은 사람보다 술잔에 빠져 죽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한편, 술의 유익이 조금 있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기분전환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풀어서는 안 됩니다. 근심과 스트레스를 술로 풀면 안 됩니다. 충격이 왔을 때 예수 믿는 사람은 기도하고 믿음으로 이겨 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술로 기분전환을 하게 됩니다. 충격을 술로 이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면, 몸만 망가지게 됩니다. 술 취해서 기분 좋은 것과 성령
충만해서 기분 좋은 것은 아주 다릅니다.
2) 술이 약으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딤전5:23 ‘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기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담석증 걸렸을 때 맥주를 마신다든지 소화 불량일 때라든지 이럴 때 술을 마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좋은 약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꼭 술을 마실 필요는 없습니다.
잠23:29-30‘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라는 말씀은 술 마시는 사람의 비참한 결과를 6가지(세상숫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재앙(재난),근심, 분쟁, 원망,
창상(상처), 붉은눈(눈 충혈)은 술취한 자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술을 보지도 않게 하시고 마시지 않게 하시고 오직, 성령 충만하여 살게 하옵소서.”
잠언 23:29-35
글쓴이 로빈
오늘도 우리에게 새로운 하루를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오늘도 함께 주님의 귀한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먼저 잠언 23장 29절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29절은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재난이 누구에게, 슬픔이 누구에게, 다툼이 누구에게, 재잘거림이 누구에게, 까닭 없는 상처가 누구에게, 붉은 눈이 누구에게 있느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에게 있습니까? 네, 30절 말씀에 나온 것처럼, 오랫동안 포도주에 머무는 자들에게 있고, 섞은 포도주를 구하러 다니는 자들에게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술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재난이 있고, 슬픔이 있고, 다툼이 있고, 재잘거림이 있고, 까닭 없는 상처가 있고, 붉은 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 재난을 당했다고 생각하면서 불평하고 원망한다면 술 취한 사람과 같은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슬퍼하고, 다투고, 재잘거리며 떠들고, 까닭 없이 상처를 입고 서운해 하면 술 취한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재난이 아니라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슬퍼하지 말고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다투지 말고 화평케 해야 합니다. 재잘거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까닭 없이 상처를 품을 것이 아니라,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길을 걷지 못하도록 무섭게 방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술입니다.
3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심지어 술을 바라보지도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어로 포도주가 “wine”이라고 되어 있는데, 성경에서 이 단어는 포도주, 술을 의미하기도 하고, 포도즙, 주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와인”은 포도로 만들어진 모든 음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이사야 65장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포도송이에서 새 포도즙을 찾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을 멸하지 말라. 그것 안에 복이 있느니라, 하는 것 같이 나도 내 종들을 위해 그와 같이 행하여 그들을 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네, 여기서 포도송이에서 새 포도즙을 찾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보시면, “new wine is found in the cluster”이라고 나왔습니다. 포도송이에 와인 술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스, 포도즙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빵”이라고 하면, 누룩을 넣은 빵과 누룩을 넣지 않은 빵 모두를 가리키는 것처럼, 성경에서 “와인”이라고 하면, 발효가 되어서 술이 된 포도주와 아직 발효가 되지 않은 포도즙 모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잠언 23장 31절로 돌아와 보시겠습니다. 여기서는 스스로 똑바로 움직일 때, 그것을 바라보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포도즙이 발효가 되어, 알코올이 되고, 술이 되는 과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포도주스를 그냥 짜두면 포도 식초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거기에 설탕을 넣고, 가공을 하게 되면 발효가 되면서 술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술을 바라보지도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잔은 괜찮은 것이 아니라, 바라보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2절에서는 마침내 술이 뱀같이 물고 독사같이 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33절에서는 술 취한 남자의 눈이 낯선 여자들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또한 마음에서부터 비뚤어진 일들을 말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4절에서는 바다 한가운데 누운 자 같이 되고, 돛대 꼭대기에 누운 자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35절에서는 술 취한 사람이 아픔을 못 느낄 정도로 무감각해지고, 또한 술이 깬 뒤에도 또 그것을 구하고자 하는 중독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래에, 하나님께서 우리 사랑하는 학생들을 술로부터 지켜주시기 원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바로 오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훈련하는 데에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술에 대한 경고
잠 23:29-35 / 박조준 목사
오늘 저녁 읽은 말씀은 술에 대한 경고입니다. 잠언 23장 20절에도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하였습니다.
이사야 5장 11-14절까지를 한 번 찾아서 같이 읽어보십시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며 음부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연락하는 자가 거기 빠진 것이라” 경고하였습니다.
그 다음 같은 장 22-25절 말씀을 읽어 보실까요.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빚기에 유력한 그들은 화 있을찐저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이로 인하여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같이, 그들의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 분토 같이 되었으나 그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 손이 오히려 펴졌느니라.”
‘뿌리가 썩겠고’, 망한다는 말입니다. ‘꽃이 티끌처럼 날리다’고, 꽃은 영광을 의미하는데 티끌처럼 날아가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 분토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돌봐 줄 사람, 죽어도 땅에 매장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시체가 뒹굴다가 그대로 썩어지고 분토가 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혹 어떤 사람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술을 마시는 분들은 흔히 디모데서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아니 성경에도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는데 어디 아주 금했느냐? 교회의 직분을 택할 때도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한 사람’을 택하라고 했지 어디 술을 마시지 말라 했느냐?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먼저 행하신 이적이 가나 혼인 잔치 집에 가셨다가 포도주가 모자라서 어머니 마리아가 걱정하니까 물로 포도주를 여섯 항아리씩이나 만드셨는데 왜 마시지 말라고 하느냐? 고 술 마시는데 대한 정당론을 성경을 인용해서 폅니다. 물론 성경을 읽어볼 때 ‘술 마시면 지옥에 간다’고 직접 기록된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 읽는 성경 말씀들을 보시면 성경의 참된 교훈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주의해 보십시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세상에 재앙을 당하지 않고 근심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중에서도 술에 빠진 사람 술주정뱅이는 재앙과 슬픔 그리고 근심을 스스로 끌어당깁니다. 분쟁 역시 그러합니다. 술에 취하면서 사람의 뇌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에 남과 싸우려는 경향이 큽니다. 술에 취하면 어리석게 대답해 집니다. 그래서 평시에는 마음에 있어도 환경을 생각해서 말 한마디 못하던 사람이 술에 취해서 소위 주정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은 정신없이 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술 취한다고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닙니다. 물론 너무 많이 마시면 술 때문에 거의 마비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주정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술 주정을 하는 사람은 평소에는 큰 소리 한 번 치지 못하고 눌려서 살다가 술이 들어가 흥분이 되면 용감해져서 ‘꽥 꽥’ 큰 소리를 치며 호통을 칩니다 세상에 무서운 사람이 없어 보일 정도로 용감해 집니다. 이것을 소위 만용이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못난 사람은 술 먹고 주정하는 사람입니다. 오죽 못났으면 제 힘으로 말 못하고 술의 힘을 입어서 말을 하고 행패를 부리겠습니까? 가만히 보세요.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자기 책임 바로 감당하는 사람치고 술 주정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낙오된 분들이 대개 그럽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동정도 갑니다.
제가 어제 성수동에 있는 직결 재판소를 다녀왔습니다. 우리 교회에 차가 몇 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과속을 해서 시속 50km를 달려야 할 곳에서 70km를 달려서 20km 초과라고 차주를 고발하는 바람에 교회의 대표자된 탓에 별난 데를 가 보았습니다. 각 경찰서에서 보안 사범과 교통 사범을 수백명 모아 놓았는데 이런 직결 재판소가 서울 시내에 네 곳인데 하루 평균 2,000여명이 직결 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가서 신고를 했더니 순경이 “목사님, 죄송하지만 저기 구치소가 있는데 거기 가셔서 몇 시간 대기하셨다가 판사가 나오면 재판을 받게 되는데 보안 사범을 먼저 처리하고 나중에 교통 사범을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좀 수고스럽겠지만 저 안에 들어가셔서 대기하셔야겠습니다.” 그래 그곳을 보니 철창을 한 유치장인데 수백 명이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자 그러니 한심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기를 들어가야 하나?” 그러나 한편으로 “책임자라는 것이 그래서 어렵다는 것이지. 밑에 직원이 실수했으나 책임은 내가 져야지. 또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죄가 많은 사람인데 벌써 이런 데를 들어갔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담담해져요.
그래서 순경에게 “들어가라면 들어가지요. 법대로 해야 할게 아닙니까? 그런데 몇 시간이나 걸리겠습니까?”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재판은 오후에 하게 될 것이고 구속만 안되면 저녁 여덟시 경에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아침 열시에 출두하라고 해서 갔었는데 10시간 동안 구치소에 있을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의논을 하더니 “영락 교회 목사님이신데 우리가 교회를 나가지는 않지만 영락 교회를 잘 압니다. 목사님이 어떻게 저기 들어가 계시겠어요? 여기 계시는 것보다 밖에 나가 계시면 판사가 오시는대로 연락을 드려서 제일 먼저 재판을 받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우선 한숨이 돌아갔습니다. 밖에 나가서 얼마 있노라니 연락이 와서 유치장을 통해서 판결장에 들어갔습니다. 거기 이미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사람이 지난 밤을 경찰서 유치장에서 지냈기 때문에 세수도 못하고 잠도 못 자고 좁은 방에서 웅크리고 비비댔으니 꼴들이 말이 아닙니다.
판사가 나오시기까지 30분 정도 기다리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서서 있게 하는데 저 더러는 앉으라고 접는 의자를 내주길래 ‘괜찮다’고 몇 번이고 사양했지만 너무 권해서 앉아 있었습니다. 거기 순경더러 “이 사람들은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거의가 다 늦게까지 술 먹고 주정하고 싸우다가 걸려 온 사람이라고 해요. 밤새 술을 먹고 경찰서에서 밤을 지내고 직결 재판소에 나온 그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술 먹으면 자연히 싸웁니다. 그 순경이 저더러 하는 말이 ‘목사님, 이 사람들은 인간 밑바닥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 뜻은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면서 ‘목사님, 이런 곳에 처음 와 보시는 모양인데 좋은 경험이 되실 것입니다’ 그래요.
감사한 것은 특별히 고려해 주어서 판사가 나오자마자 사실의 연유를 묻고 문자 그대로 직결 재판을 하는데 1분도 못되어 ‘선고 유예’ 판결이 내려 감사한 마음으로 오전 중에 돌아왔습니다. 벌금을 2만원 내야 된다고 해서 준비해 가지고 갔었는데 벌금 안 물게 되어 그냥 돌아왔습니다. 세상에 초라한 모습이 술 취했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술 취하면 원망이 나옵니다. 중얼거리고 말다툼이 생기고 욕설을 주고받게 됩니다. 이것으로 그치는 게 아닙니다. 술 취하면 “까닭 없는 창상”이 생기게 됩니다. 술 취하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의 원인이나 이유를 알 필요없이 마구 주먹을 휘두르다 보니까 상대방도 여기 응수해서 결국 ‘부상’을 당합니다. 조국 수호를 위해서 입은 부상은 명예스럽지만 술 먹고 싸우다 받은 ‘까닭없는 상처’는 부끄러움입니다. 그 뿐입니까? 술을 마시면 그 눈이 붉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분노의 증상입니다. 붉은 눈의 세 가지 공통되는 일은 술 먹은 사람, 성난 사람 그리고 미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볼 모양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본문 30절에 ‘술에 잠긴다’고 하였는데 그 뜻은 ‘술 때문에 오래 지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술 마시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술 패거리가 만나서 마시다 보면 1차, 2차, 3차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내일 일이 어떻게 되는 것 상관 않고 마시게 되니까 통행 금지 시간을 넘기가 일쑤라고 합니다.
그리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거 무슨 말인고 하니 요새는 소위 ‘칵테일’ 이라는 말을 쓰는데 고급 술을 자기 구미에 맞게 섞어서 마시는 일입니다. 이 혼합주는 아주 입에는 맞지만 더 잘 취하고 뇌신경을 마비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 입맛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31절에 “포도주는 붉고 잔에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간다”고 하였습니다. 포도주의 품질을 평가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특징 중에도 그 빛깔로써 포도주의 품질을 판단한다고 합니다. 어떤 포도주는 너무 아름답게 보이고 모양이나 색깔이 그럴듯해서 “와서 나를 마셔 주세요” 하는 것 같은 유혹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술은 아주 순하게 내려갑니다. 아가서 7장 9절에 보면 “이 포도주는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을 움직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1절 하반절에 뭐라고 했어요?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우리가 유혹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유혹을 받지 않으려면 될 수 있는대로 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옛말에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보면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사정거리 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낚시질을 해보면 낚시에는 꼭 미끼가 있고 미끼 안에는 낚시가 숨어 있는데요 미끼 근처로 뱅뱅 도는 고기는 꼭 물리고야 맙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하와가 처음에 어떻게 범죄하게 되었어요? 창세기 3장 6절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하였습니다.
금한 것은 아예 보지 않았으면 될 것인데 보니까 마음이 움직이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도 의심하게 되고 그래서 결국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예 멀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요? 32절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안 그렇지만 마침내는 술에게 물립니다. 그러기에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그 다음엔 술이 술일 먹고, 마침내는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매우 뜻있는 말이라고 봅니다. 뿐만 아닙니다. 33절에 술은 사람을 불순하고 무례하게 만듭니다.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명된 것을 발할 것이며”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술 취하면 남자인 경우 이상한 여자가 보이고, 여자인 경우 이상한 남자가 보인다는 말입니다. “Est Venus in Vinis”란 말이 있습니다. 술은 욕정의 불꽃에 대한 기름입니다. 그러므로 술과 음탕은 따라다닙니다. 술 잘하는 사람치고 음탕한 생활하지 않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술을 많이 마시면 혀도 제멋대로 되어 엉뚱한 말을 많이 합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입에 담가도 부끄러운 말을 마구 합니다.
술은 이렇게 사람을 마비시킵니다. 34-35절에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은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사람이 술에 정 취하면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며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저 흔들흔들 합니다. 바다 가운데 돛대 위에 누운 자 같단 말입니다. 일관성이 없이 왔다갔다합니다. 그래서 잠언 31장 5절에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릴까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28장 7절에는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하였습니다.
여러분! 술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해가 얼마나 큽니까? 술 먹고 음란한 일 하고 술 먹으면서 뇌물 주고받습니다. 술 먹고 교통사고 납니다. 술에 취하면 빨간색이 파란색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술 먹고 기계 사고 납니다. 술 먹고 죄 없는 아내를 때립니다. 술로 말미암아 파탄된 인격, 파탄된 가정, 파탄된 사업이 얼마나 많습니까?
탈무드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노아의 홍수 후에 노아가 포도원을 만들었는데 그때 마귀가 몰려와서 포도나무 밑에다 양과 사자, 돼지 그리고 원숭이의 피를 비료로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술을 마시면 처음에는 양처럼 순하고, 다음에는 사자같이 포악하여지고, 그 다음에는 돼지 같이 미련하여지고 마지막에는 원숭이 같이 별 노릇 다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사람은 어디엔가 취하기 마련입니다. 술에 취하지 않으려면 성령에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우는 말할 것 없고 온 국민 5,000만이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이 길만이 이 민족이 살 길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입니다(고전 3:16). 독한 술은 우리의 정신 뿐 아니라, 생활 뿐 아니라 이 몸을 상하게 합니다. 또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더 탑니다. 더구나 술주정뱅이의 자녀치고 잘된 예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금년에 하나님께서 풍년을 허락하셔서 쌀 좀 넉넉하다고 쌀로 막걸리 만드는 것을 대통령이 허락했다는 신문 발표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 퍽 유감스러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