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를 아끼는 사람
내가 자라던 1950년대의 시골에서는 종이가 귀하였다.
호적을 뒤늦게 올리는 바람에 남들보다 늦게 입학하여서, 집나이 아홉 살부터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에 다녔다. 아홉 살이라야 음력 섣달 스물사흘 생이니 불과 일주일 만에 한 살 먹은 것은 공제해야 되겠다.
당시의 일이었다.
질이 아주 나쁜 잡기장(공책)에 누나의 대나무 줄자를 빌려서 공책에 삐뚤게 가로 세로의 칸( 원고지처럼)을 만들었고, 몽당연필에 침을 묻혀서 한 자씩 글자를 눌러 썼다.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행간을 바꾸어서 글자를 썼다.
쌍동이 아들 둘이서 엎드려서 글자를 익혀가는 것을 옆에서 대견한 듯이 지켜보는 어머니는 꼭 지적했다.
'글씨를 띄어 쓰면 공책을 낭비하니, 붙여 써라.'
‘학교 선생님이 띄어 쓰라고 했어요.'
‘핵교 선상님이 무어라고 해도 공책을 낭비해서는 안 되니 너희들은 속으로 알고 있으면 된다. 촘촘이 써라’
라고 일르셨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한테 공책 검사 때에 들켜서 혼 날 것을 알면서도 무서운 어머니의 기세에 눌리여 쌍동이 형제는 글씨를 다닥 붙여 썼다. 마음 속으로는 꼭 띄어 썼다.
1965년대의 고교 시절에도 궁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누런 연습지(A4용지는 아님)를 한 묵음씩 묶어서 연필로 빽빽히 글자를 쓰고 난 뒤 고무 지위개로 이를 전부 지웠다. 연필 자국이 죽죽 난 종이 위에 모나미 볼펜으로 살짝 눌러 썼다. 모나미 볼펜으로 글씨를 아주 작게 살짝 눌러 쓰면 이 주일 정도 쓸 수 있는 통계를 지금에야 밝힌다. 그러니 종이 한 장이라도 허수로히 버릴 수 없이 알뜰히 썼다. 당시의 계산으로도 이렇게 쓰면 일평생 공부하면서 쓴 종이를 전부 모아 쌓아 두어도 내 키만큼은 자랄 것 같지가 않았다.
삼사십 년이 지난 지금이다.
나는 종이의 홍수 속에 산다. 참으로 질 좋은 종이가 사무실 옆에 첩첩히 쌓여 있고 내 마음대로 꺼내서 쓴다. 그득히 쌓여 있는 A4용지라도 지금도 아까워서 함부로 사용하지도 버리지도 못한다. 파지를 책상 서랍 하단에 모아 두고 이면지를 사용해도 파지는 계속 늘게 된다. 이 파지를 한꺼번에 세절기에 넣어서 파쉐해야 되는 때는 바로 보안감사 기간이다. 속으로는 제발 보안감사가 없었으면 하고 희망하기도 한다.
내가 종이를 아끼는 것이 많은 나무를 살리자는 자연환경 보호운동의 차원이 아니다. 어린 시절에 궁핍과 절약으로 몸에 밴 근성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근검절약으로 일생을 점철하는 어머니를 수시로 곁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나로서는 자원의 소중함을 배워서 내 자식에게도 전수해야 할 덕목으로 본다.
그러나 아이들 교육은 실패했다. 아비의 말에 코방귀도 안 뀌는 아이들은 종이를 참으로 낭비한다. 종이 값이 너무 헐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소비가 미덕인 양 홍보하여 대량소비를 유발시키는 세태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본다.
비록 좋은 시대, 풍족한 시대에 살더라도 나는 종이 한 장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삶을 계속한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 한 개라도 소중히 여기는 나로서는 종이를 아끼는 것도 자연을 사랑하는 하나의 작은 실천이다. 그리고 종이 위에 활자한 책은 많이 읽을 것이다. 이것도 종이를 아끼는 또 하나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2000. 9. 22. 씀
만 16년도 더 지난 오늘 읽었다. 그 당시에 쓴 글이 무척이나 어색해서, 이 글 올리면서 살짝 다듬었다.
그 당시에는 한자를 썼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자 몇 개도 지웠다.
2017. 3. 15. 곰내 고침
첫댓글 ㅎㅎ 어린 마음에 정말 난감하셨겠어요. 띄어쓰기를 못하게 하신 어머님 마음 재미있습니다.ㅎㅎ
그렇게 귀한 종이였으니 종이에 대해 더욱 더 남다른 애착이 있으신가 봅니다.
곰내 님 종이 사랑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한편의 동화같은 글 잘 읽었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예 종이를 무척이나 아꼈지요. 예컨대 서울에서 학교 다니면서 4년간 모았던 신문질을 리어커 꾼을 불러서 용산역으로, 철로화물로 시골 보냈고, 시골에서는 또 사람 사고 시골집으로... 근 사십여 년 넘게 창고에 보관했던 신문을.. 재작년이던가요? 텃밭 잡초 위에 덮었습니다. 그 많은 헌 신문. 그 당시에는 문화란 고작 신문지, 책이나.. 지금은 정보, 읽을거리, 핸드폰 속의 영상이 넘쳐나네요.
그래도 종이를 아낀다는 마음은 늘 남아 있습니다. 카페에서도 글 하나 소중히 쓰려고 애를 쓰니까요.
회원 님의 글도 정성들여서 찬찬히 읽고요.
댓글 고맙습니다.
산골순이... 닉이 참하게 이쁩니다.
곰내님 말씀에 저도 모르게 끄덕끄덕해집니다.
저희집베란다 창고 안에 15년도 더지난 화장지가 쌓여있답니다.
욕심쟁이 마눌이 화장지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또 사오고를 반복하다보니 안쪽에 옛것이 누적되어 가네요.
친정에서 어릴때 넉넉하게 못살아 물건을 쌓아두어야 직성이 풀리나봅니다.
잔소리하다가 제가 졌습니다.
마트에가면 쌀이 쌓여 있는데, 쌀도 많이 들여와서 등등...
결과적으로 집을 비좁게 만들어 사네요....
그렇게 46년째 살고 있습니다. ㅎㅎㅎㅎ
아무렇게나 살자. 싸우지만 말고 랍니다. ㅋㅋㅋ
빙그레 웃습니다.
저같은 분이 또 계시군요.
기회가 되면 님의 집 한 번 방문해야겠습니다.
제가 근력껏 빼내야겠습니다.
절약이 늘 좋은 것은 아니지요. 적당히 시기에 물건의 소비가 있어야만 기술이 발전되고, 돈이 흐르는데...
아끼기만 하면 국가와 사회경제는 침체되어 죽지요. 적당한 개인소비는 분명히 필요합니다.
저는 덜 가지고도 살면 되니까요.
댓글 고맙습니다.
@곰내 베란다는 포화상태이고,
방하나도 창고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
@송아지1 ㅋㅋㅋ
선입후출식 소비패턴이네요 쌓아놓고 사는 집들이 대부분입니다
그중 예외가 쫑아입니다
어느날 쌀사야되는데 하다가 타이밍 놓쳐서 쌀없어서 빵먹었다 댓글했다가
어느분께 공격을 당했던 쓰린기억이 ㅎㅎ
그래도 여전히 휑한집입니다
안변하니요
비단 종이뿐만이 아니었지요. 모든 것이 그랬는데 (양말 생각이 나는군요. 전기등을 넣고 어머니가 꿔매준) 요즘 풍족한 생활을 당연시하는 젊은 애들과는 대화자체가 불통이지요. 다른 색갈로 꼬매입은 옷때문에 챙피를 당하고 보따리에 책을 둘둘말아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고 다떨어진 고무신을 질질끌고 다니고 모든 것이 부족했지요.
저는 중고등학교 때에 양말을 재봉틀로 기워서 신었지요. 양말 쯤이야 미싱으로 기우는 것쯤이야...
그런데 지금은 양말 별로 없습니다. 아내 손에 닿으면 없어지네요.
님도 저와 같은 시대사람... 무슨 말 할 것인지를 짐작하겠습니다.
빙그레 웃고는... 댓글 달아주심에 고맙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누런 회포대 종이... 생각이 납니다.
마분지...
저는 그 종이가 아까워서... 지금은 종이가 너무나 흔합니다. 모든 것이... 이래도 되는지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대학에서 전자계산학(현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저는 아직도 컴퓨터 키보드 두들기는것보다
종이위에 쓰는것을 좋아합니다.
달력 한장을 뜯어낼때 그 뒷쪽의 하얀면이
웬지 아까워 뭔가를 써보고 버리고...ㅎ~
저도 그렇습니다. 낙서 많이 하지요. A4용지에... 어디서든지 긁적거리면, 그게 다 소중한 메모가 되기에...
컴 관련 업무에 종사하셨군요.
댓글 고맙습니다.
이미 풍요의 시대에
아껴라 한다고 말빨이 먹히지 않지요
기술력으로 한줄서기를ㅡ대표적으로 번호표
기술력으로 기름을 아끼고
종이도 아끼게 만드는 수 밖에요
수없이 서울 대구 오가지만
기차도 고속버스도 승차권발급 받은지 오래되었습니다
머지않아ㅡ통장사라지고
영수증도 스마트폰으로 들어오면서ㅡ그렇게 절약도되어지겠지요
문서도 넷상으로 많이하고 있구요
연필ㅡ필통에 이뿌게 깍아 가지런히 채워주던건 아버지였습니다 ㅠㅠ
연필필통에 연필을 깎아 준 아버지가 계셨군요.
저는 제가 연필을 깎았지요. 산골아이라서 낫질을 잘 했기에, 낫으로도 깎고, 부엌칼을 날카롭게 숫돌에 간 다음에 깎고...
연필 하나만큼은 정성들여서 깎았지요. 예술저럼. 그런데 공부는요? 지지리 못했지요. ㅋㅋㅋ.
댓글 이쁩니다.
님의 글에 공감 하며 끄덕 끄덕 한표 .....모든님이 적절히 표현 하셔서 ㅋㅋ
교과서 받으면 닳지말라고 누런 종이에 싸던 기억이 새삼 스레 ....ㅠㅠ
맞아요 잊고 있었는데 누런 종이에 싸던 기억~
저도 그랬지요. 누런 종이(마분지) 그거 무척이나 투박하지만 질겨서...
나중에는 비닐로 책 표지를 싸았는데...지금은 전혀... 이따금 책이 쉽게 망가진다는 아쉬움으로 남고...
댓글 고맙습니다.
종이한장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말이 의미가 깊습니다.
저가 초등2.3정도 됐을까 한참 한글을 배울때라 자주 필기도구와 공책을 사야했던시절에 생각납니다,
한치의 빈공간도 허락하지 않았던 궁핍했던 어린시절이었지만
절약해야한다는 좋은습관은 아버지께 배웠으니 오히려 감사해야 하겠죠
어린시절 아버지와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스쳐지나갑니다.
그때가 물질은 귀했지만 마냥 행복했던것 같습니다~~^^
예전, 모두 가난했고, 물자가 부족한 시절에 살았기에 누구나 다 이런 경험이 있겠지요.
제가 더 궁상을 떨었졌지만 그래도 모두가 물건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에 오늘의 국가경제와 가계가 살이 쪘겠지요.
댓글 고맙습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라... 부럽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회포대란 비료를 담았던 큰봉지같은건가요?ㅠㅠ
사전에는 안나오고
네이버군은 옛날이야기속에서만 ㅠ
@정 아 예, 비료푸대.., 양회푸대 등...
비닐코팅 바깥쪽에는 여러 겹의 질긴 종이/누런 종이가 있어서... 그것으로 책을 싸면 엄청나게 질기지요.
@곰내 아 맞네요 ㅎㅎ
그걸 회포대라고 했군요
왜 회였는지ㅠㅠ 여튼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무실에서 이면지를 쓴다는 댓글에.. 꾸벅꾸벅.
@정 아 비료푸대는 아니고 장판지는 아니면서
두꺼운 색이 누런거를 팔았지요
예전 육영수여사도 외국 방문길에 선물 포장지를 못 구해서벽지에 샀다는말이있을 정도로그런게 없던시절이지요 ㅎㅎ
@산애 아~~~시멘트재료가 들어있는 포대군요 ㅡ그래서 회포대
에그 어럽네요
예전에는 시멘트작업도 손수해서 그런게있었나봅니다
@산애 최고의 교육입니다
말로 훈육하듯 아껴라 잔소리는 반항심만 키우지만
말없이 행하는 그런모습은
조금씩 흉내내다 닮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부부의 모습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쫑아입니다
@수정, 1960년대를 기억하는 나.
서해안 바닷가가 보이는 고향 뒷산, 야트막한 산에는 도토리나무 등 키 작은 활엽나무가 많았다. 이 도토리 상수리 잎을 하나 둘씩 정성스럽게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이삼일에 오는 수집상한테 넘겼다. 일본으로 수출했다. 일본 도시락용으로. 머리카락이 긴 처녀들의 머리는 가위로 싹뚝 잘랐다. 수집상이 저울로 달았다. 외국에 수출된다고 했다. 산에서 칡줄기를 낫으로 잘라 집에 가져온 뒤 칡줄기를 큰 통에 넣어서 썩혀서 칡껍질을 벗겼다. 청홀치.
그 칡껍질르 피륚 짰다. 일본으로 수출했다. 이런 이야기가 줄줄이 나올 것 같습니다. 제 기억 속에는...
@곰내 예전... 시골집 똥수깐(소망, 변소, 화장실이란 점잖은 용어도 있지만)에 변을 보고는 짚 몇 가락을 추려서 손아귀에 넣고는 7센티 정도 길이로 여러 번 접지요. 그것으로 밑을 닦으면 왜그리 쓰리고 아프던지...
나중에 신문지가 생겨서 손바닥 크기만큼씩 가위로 썰어서 학문을 닦았지요. 소망에서 학문을 닦았다니까요!
지금은요? 두루마리 화장지가 넘치네요.
종이가 흔천만천한 세상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