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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삶 ->김현철(그레고리오)오타와 주임사제의 사순절 特講 2016년3월15일(화)오후7시-8시30분 몬트리올 한인성당 소성전 십자가의 삶 우리들의 인생 자체가 고해이다. 우리 모두는 고통스러움속에서 태어난다. 산모는 애기를 낳는 고통을 겪지만 뱃속의 애기도 빛을 보기 위하여 몸부리치는 고통을 겪어야만 태어 날수 있다. 태어나서도 걷기 위하여 3000번의 넘어짐의 고통속에서 겨우 한걸음의 발걸음을 띨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그러한 삶의 과정을 겪어 왔고, 그러므로 우리 모두의 삶은 십자가를 짊어진 삶이라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십자가는 좋은 의미의 것이 아니고 고난,고통,아픔의 상징으로 인식 되어져 있다. 우리의 삶 자체가 늘 아픔의 고통을 담고 있지만, 그 속에는 가치있는 의미의 행복도 동시에 담겨져 있다. 우리의 인생 -매일 24시간,1달,1년 12달 내내 늘 고난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그 나날 속에는 행복,웃을 수 있는 일,감사할 일도 동시에 담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 십자가는 예수님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십자가는 오직 흉악한 죄인들을 벌하는 수단,형틀로만 사용되어 졌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에 있는 그 십자가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매일 보아온 십자가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 왔으며,어떻게 이 십자가를 질 것인가? 를 같이 숙고(熟考)해 보기로 하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회적,정신적,도덕적..등 많은 측면에서 타락,황폐화 되어 가고 있으며, 예수님이 살았던 시대나 지금이나 ,타인에 대한 시기,부정부패,정신적인 타락...도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실례로 한국에서의 부모가 아이를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비 인간적인 행위, 캐나다에서의 청소년들의 마약,살인,강도 .. 탈선 행위 사회의 부정 만연,살인 폭력행위... 세계 도처에서 이러한 비인간적인 행위들이 자행되어 지고 있다. 참다운 사회로의 변화는 모든 인류가 바라고 목표하는 바이지만 잘 이루어 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가끔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 잠시 해소 되는 듯 하지만 지속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인 현상으로 지나가 버리고 만다. 이러한 참다운 사회는,돈,권력,과학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낼수 없는 일이다. 혹 ,인공지능이 발전되어 인간의 능력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이 현실화 될 수는 있다. 인공지능 알파고의 능력이 이세돌의 뛰어난 재능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자신이 처해진 위치, 존재 가치,인간의 존엄성,한없는 사랑의 베품,나약한 이들의 돌봄,힘없는 노인들의 보호, 똑똑한 사람,다스릴줄 아는 사람들이 밀려나는 세상... 이 세상의 현실과 방향도 감안하면서, 양심적인 행동을 하며 살아갈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여,참다운 인간적인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야 하겠다. 각자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안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며,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 협력하여 더욱 사랑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일구어 내야 한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변화,회개를 가져오는 것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 각자 각자는 그 방향을 향하여 최선을 다해 노력하려는 자세의 변화는 꼭 필요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기적, 여러가지 베풀어 주신 기적만으로 이 세상이 완전히 변화 될 수 있을까? 많은 효과는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볼때 그 효과는 지속적으로 오래 가지는 않았다. 하느님의 권능과 능력을 그토록 나타내 보여 주셨지만, 결국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마저도 한 순간에 등을 돌리고,배신하고, 떠나고 말았으며. 심지어는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태 9-34)는 매도행위마저 저지른다. 지금도 예수님은 끊임없이 기적을 보여주시고 계시지만 마찬가지로 그 효과는 길지는 않다. "이 시대의 인간의 변화를 위하여 보여 주실 수 있는 것의 선택이 바로 십자가이요. 고난속의 죽음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감동을 받을 때 변화될 수 밖에 없으며 , 이 십자가 상에서의 고난의 죽음이야말로 지속적으로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있는 하느님이 아드님을 통하여 베풀어 주신 최고의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진심어린 사랑의 행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과 감사와 행복을 안겨 줄 수 있다. '벗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미천한 인간을 벗으로 생각하시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신 하느님의 크신 사랑,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겸손함과 낮은 데로의 임하심, 당신의 마지막 사랑행위를 십자가에 못박아 보여주시고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 위대한 사랑의 실천...!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져 줘야 하는 소명, 당신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하여야만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고 계셨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치욕과 고통스러움을 감안하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 길을 가실수 밖에 없으셨다. 모든 인간 인류가 멸망의 길을 가지 않게 하신 뜻이 이 십자가에 담겨 있고, 죄의 모든 어두움과 죽음의 고통을 다 받아 안으신 깊으신 뜻이 이 십자가에 담겨져 있다. 에수님은 하느님이 지니신 힘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 힘은 하느님의 전능하신 권능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의 힘이다. 사랑의 힘으로 모든 죄와 고통의 죽음을 껴안으시고, 보내시고,없애 버리시고,낮추어 ->비워 버리셨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시며 보여주신 사랑의 결정체이다. 혹간의 신학자는 예수님을 "당신은 사랑때문에 미치셨다"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심과 권능으로 세상을 바꾸셨을지도 있으셨겠지만,하느님은 이 방식을 택하시지 않으셨다. 하느님의 권능에 의한 방식은 존재의 사랑에 가치가 없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아들까지 십자가의 고통의 죽음에서 비참하게 내 버려 두시고,버리시면서까지 인류를 구원하시는 이 "사랑때문에 미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구원 방식이 바로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지표가 되어야 하겠다. 독일의 신학자 '볼트만'은 <불타는 사랑>이라는 저서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침묵속에서 모든것을 믿고 의탁할 수 있는 힘과 전구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모든것을 몸소 다 겪으셨고 안고 계시기 때문이다"라고 설파하고 있다. 십자가는 사랑의 극적인 표현이며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신앙인들은 그 십자가안에서 깨달음을 얻어 다시 태어나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上記에 설명된 것과 같지만 과연 우리들 각자의 십자가는 ?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십자가를 신앙안에서 받아 들이고 기꺼이 지고 가고 있는가? 그것이 아무리 무겁고 힘겨운 십자가 일지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기꺼이 메고 가야한다. 많은 영성가들은 '삶의 고통스러운 십자가들의 고난들은 도리어 우리에게는 은총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소화하여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의 변화와 믿음이 있을때에만 가능해 지며, 그렇치 아니하면 이 십자가의 고난은 고통 그 자체로 끝나고 만다. 우리들의 십자가는 가족이 될 수도 있고,가난,부유,공동체 안에서의 반목자,내 성격, 언어적 습관,주변환경..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주님의 고통의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며,자신을 다듬고 겸손하게 기도할 때에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부여안고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시며, 사랑의 주님께서는 용기를 갖게 힘을 불어 넣어 주시고, 그 고통의 십자가가 바로 은총임을 깨닫게 하여 주신다. 세상은 기가 막힌 고통을 부여안고,이 고통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존스 홉킨스 의대의 한국 출신 재활 전문의(50세)가 되신 자매님의 체험담을 들어보기로 하자. 8세에 미국으로 이민, 황인종의 설움과 언어의 어려움의 난관을 극복 하고자 기계체조 선수로 재능을 발휘->국가 대표 선수까지 되고 올림픽에서 금메달 유망주로까지 여겨지던 순간 1983년(18세) 되던 해 연습 도중 실수로 턱으로 착지, 척추 신경이 마비되어 모든 꿈이 사라지게 되고, 어찌 나에게 이런일이 발생 했을까?하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심한 우울증으로 몇 번이나 인생을 포기하고자 했다. 다행히 훌륭한 선교사를 만나,새로운 꿈을 펼치기 위해 공부에 전념, 장애를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라 생각하고 극복하여 미국의 명문이라 일컬어 지는 하바드 대학 수석 졸업,콜롬비아에서 석사학위,다트머스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환자를 돌보기 위해 재활전문의 자격을 획득, 오늘도 자신의 거의 마비된 손에 낀 장갑이 헤어 지도록 열심히 온 힘과 정성을 다하여 자신의 직분에 충실히 임하고 있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 각자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계시며,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 갈때에 뜻하지 않는 고통을 안겨 주시기도 하시지만 그 안겨 주시는 고통 마져도 하느님의 잘 짜여진 계획속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이 여의사는 이것을 깨닫고 이와같은 극심한 장애의 고통을 극복하고 인간승리를 쟁취하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몸소 겪으신 우리의 좋으신 주님께서는, 우리들 각자 각자가 겪는 고통들, 무너지는 마음의 쓰라림을 너무나 잘 아시고 계신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만 한다. 우리를 세상에 존재케 하심과 동시에 너무나 어려울 때에 견디고 감당할 힘도 같이 주셨다. 이 여의사의 깨달음과 같이 우리들의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 들이는 마음의 자세가 바뀌어 고통을 은총으로 승화 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매우 어려운 시련이 닥칠때에, 이 어려움은 하느님께서 무언가 나에게 주시려는 계획이라 생각하며,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계획을 수긍하며 받아 들이는 노력을 하면서. 하느님께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심을 기도하며 사랑의 교감을 나누어야 한다. 이러할때에 우리는 이 여의사와 같이 새로운 꿈을 갖게 되며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이 여의사는 이 사실을 깨닫고 들어,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힘을 갖게 하고 도움을 주는 열정적인 삶의 자세로 되돌아 오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세계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위대한 총리 처칠은 "비관주의자는 어떤 기회에서도 어려움을 보며, 낙관주의자는 어느 어려움속에서도 기회를 본다."라고 설파하고 있다. 그렇다! 부정적인 삶은 우리들을 어두움속에 머물게 하며 비관주의자가 되게하고, 긍정적인 삶은 우리에게 좌절과 절망을 극복하여 낙관주의자가 되게 한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십자가는 짐,고통이 될수도 있고, 반대로 삶의 동기 부여와,열정적인 자세로 변화 시킬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통을 통한 구원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를 통해 모든 것을 너그럽게 이해하는 마음과 자신이 처한 어려운 처지를 극복하면 고통을 기회로 승화 시킬 수 있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보는 관점이 나를 결정 짓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삶의 행동과 상황을 전환 시키면 행복은 찾아오게 되어 있다. "각자의 십자가는 피할 수 없으면,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져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노 聖人은 말한다. 이러한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 짐이,자신의 삶을 더욱 활기차게 만들어주는 동기가 됨을 확신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요한복음 12장 24-26절) 우리는 자신의 땀과 희생으로 가족을 살리고 먹인다. 예수님의 말씀을 확신하고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삶과 그냥 어영부영 살아가는 삶은 다르다.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겉도는 삶으로 인생은 끝나게 된다. 밀알의 삶은 가족에게 하는 것과 같이,자신에게 하는 것과 같이 자신의 희생을 바치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다. 과연 나에게 주어진 이 십자가가 나를 힘들게 하는 십자가 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고통,하느님의 크나 크신 사랑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자세로 임하면, 이는 거룩한 희생으로 전환된다. 습관적인 행위가 아니라,하나하나에 하느님의 사랑과 희생으로 행해져야, 그 행위들 하나하나가 큰 보상으로 이어져,가치있는 삶으로 변화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고져 하시는 계획이 실현 될 수 있도록 받아 들여 져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영성이 바로 밀알의 영성이다. 단 한번에 걷는 아기는 없다. 수천번 넘어지고 일어나는 포기하지 않는 행위를 계속 함으로써 결국 한 걸음을 띠게 되고 걷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밀알의 영성을 가지고 매일의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받아 들이고,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면서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안고, 하느님의 계획에 순응하며,하느님을 따라야만 한다. 인생은 좋은 삶만이 전개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짊어지는 삶의 자세의 변화가 필요하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제대로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다. JOKE: 천국에서의 3가지 논쟁 1. 어떻게 왔지 저 사람이? 2. 안 보이지 왜 그사람은? 3. 내가 어떻게 천국에 왔지? 십자가는 가장 핵심적인 영성이며 구원의 길이며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이다. 매일 신앙의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며,우리 각자 각자의 아픔을 잘아시고 계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이 계획 하시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희망을 가지고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기꺼이 신앙적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이 은총의 사순시기에 십자가를 바라보며, 아무죄도 없이 그 조롱과 고통속에서 고난의 십자가를 메고 가신 예수님의 희생,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아드님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사랑에 감사드리자. 십자 성호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아 멘!" 은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행위이며 축복하는 행위이다. 매일 매일 정성껏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축복과 구원과 굳센 믿음을 청하고 약속 드리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성모님과 같이 동행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무엇을 위해서?,누구를 위해서?, 인가를 묵상 하면서 14처를 걸으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어, 그분은 바로 나를 위해서 존재 하신 분,나의 길을 열어 주시는 분, 임을 깨달아 신앙의 눈이 활짝 열리게 된다. 우리 모두 주님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 몸소 겪으신 죽음의 고통을 생각하며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들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사업에 기꺼이 동참하여, 다가오는 부활절 대축일, 하느님의 자비 축일과 2016년 자비의 특별 희년 내내 하느님의 慈悲로운 恩惠와 사랑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充滿히 내려 주님의 크신 사랑의 힘으로 우리 모두가 구원 받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 아 멘 ! 2016년 3월15일(화) 십자가를 바라보며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베드로 문 속기 |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아 멘!
몬트리올,캐나다 漏家에서
청송(靑松)카페<http://cafe.daum.net/bluepinetreesenior >지기
베드로 문(Peter Moon)이 2022년3월19일(토)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