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좋아하는 산에서 밀려난 이들의 말년은 어땠을까? 지난해 봤던 영화 '여덟 개의 산' 주인공은 깊은 산으로 사라지고 마는데 앞의 질문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무려 38년 5개월 설악산 화채능선(대청봉에서 화채봉 거쳐 권금성을 잇는 능선)의 끝 권금성 산장을 운영했던 털보 유창서씨가 전날 오후 5시쯤 강원 속초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17일 전했다. 향년 87.
1938년 10월 30일 서울 종로에서 광산업자 부친의 셋째로 태어난 고인은 1954년 배재중에 다닐 때 암벽 등반에 입문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억센 힘과 털을 물려받았다고 했다. 9남매 가운데 유독 그의 몸에만 털이 수북했다고 한다.
동국대 산악부 초기 멤버로 활약했다. 1963년 도봉산 선인봉 측면 등반에 성공했고, 같은 해 안국화재에 입사해 산악 조난사고 구조에 몰두했다. 1969년 1월 설악산 토왕성폭포 첫 등반 시도를 했다. 다음달 한국산악회의 '설악산 죽음의 계곡 10동지 조난사고' 수습에 나선 것을 계기로 같은해 가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1971년 1월 15일부터 2009년까지 38년 5개월 권금성 산장을 운영했다. 불법 산행을 조장하지 않겠다며 숙박은 받지 않고 최소한의 음료와 물품만 팔았다. 술이나 음식도 팔지 않았다. 1973년 산장에 찾아온 황국자씨와 결혼해 아들 유석준 씨를 뒀다.
1976년 대한적십자사 설악산 산악구조대를 창설해 초대 대장이 됐고, 수많은 인명을 구조했다. 1983년 2월 19일 연합통신 기사에 따르면 이때까지 구조한 사람만 440여명에 이르렀다.
대한산악연맹이 매년 여름과 겨울에 개최한 '설악산 등산학교'의 교관으로도 활동했다. 당시 '토왕폭 사나이'란 별명으로 유명했다. 한때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에델바이스 서식지 다섯 군데를 찾아냈고 크낙새와 산양 등의 서식 실태도 알아냈다. 1994∼1998년 한국산악동지회 2대 회장을 지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2003년 화채능선을 법정 탐방로에서 제외하면서 산장 철거를 통보하자 2008년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이듬해 산장 문을 닫고 속초로 거처를 옮겼다. 2015년 국립산악박물관이 그를 초청해 토크 콘서트를 열었다. 권금성 산장 현판 등 소장품은 국립산악박물관에 기증했다. 산장을 찾은 이들이 남겨놓은 메모의 사연을 엮어 책 '바람이여 구름이여 설악이여'(1990), '산장에 남긴 사연들'(1992)을 펴냈다.
산악인이기도 한 백승기 전 시사인 기자는 "설악산에서 눈사태를 맞고 산장에 갔다가 많이 혼났다"며 "깐깐하지만 반듯한 분이셨다. 후배들에게 바른 모습만 보여주려고 노력하셨다"고 말했다.
1981년 많은 인명을 구한 공로로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서훈하는 전두환 대통령이 화를 낼테니 수염을 밀고 오라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듣고 곧바로 돌아서 산으로 달아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빈소는 속초의료원 3층 특실, 발인 18일 오전 6시, 장지 천주교성모동산. 033-630-6016
위 사진의 다섯 사람 모두 고인이 됐다. 유창서씨의 형인 유용서씨는 1971년 지어진 무인 산장에 1973년부터 들어가 관리인으로 일했다. 당시만 해도 좋은 직장이던 여겨지던 석탄공사를 그만 두고 산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 산장은 1974년부터 한국등산학교 교육장으로 이용됐는데 유씨가 1993년 암으로 타계한 뒤 공단이 산장을 직영하겠다고 했으나 서울시산악연맹 산하 등산학교로 쓰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윤두선씨는 1992년 노고단 산장 지기 함태식씨가 자리를 옮겨 관리하던 피아골 산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마침 함씨가 출타 중이어서 세상을 떠난 지 일주일 지나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산장지기들을 존경하고 좋아했던 김근원 작가도 2000년 하늘로 떠났다. 함씨도 2013년 생을 달리했다.
월간 산에 따르면 유용서씨의 부인으로 도봉산장에서 맛있는 커피를 끓여 내주던 조순옥씨도 지난해 9월 18일에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산장에서 지내다 뇌출혈로 쓰러졌고, 곧 병원으로 이송돼 한 달 입원했으나 회복하지 못했다. 고인의 뜻을 좇아 이화여대 해부학 교실에 시신이 기증됐다. 아들 유근호씨가 도봉산장에 머무르고 있는데 2019년 부지를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매입해 자영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퇴거 계고장이 발부된 지 오래다. 그동안 기여한 공을 인정해 조순옥씨가 사는 동안은 법적 조치를 실행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른다.
공원공단이 행정력을 가해 산장들이 문을 닫고 있다. 피아골 산장도 사라졌다. 노인봉 산장도 사라졌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백운산장과 중청대피소도 허망하게 없어졌다. 산이 좋아 산과 친구가 된 이들이 산 위에서 떠밀리듯 내려와 도시에 살다 인생을 닫는다. 얼마나 갑갑하고 처연할지 상상도 못하겠다.
알프스와 이탈리아 돌로미티 등을 돌아보면 가족이 운영하는 산장들이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좋은 음식, 맛있는 맥주를 판매하면서도 자연을 지키고 건강하게 산장 문화를 가꿔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산장들의 문을 닫으라고만 내몬다.
위 인물들이 1세대 산장 지기라면 2018년 국제신문에서 이원복이 집필한 책 '백두대간을 뛰어서 돌파한 시대의 기인 노인봉 털보'의 주인공 운파 성량수(71, 실제 나이는 두 살 더 많다)는 그 세대의 막내라 할 수 있다. 1986년 오대산 노인봉 산장 지기 일을 시작해 2006년 하산했다. 성씨는 2008년 북한산 실종자 수색 중 추락해 중상을 입었다. 26개월 동안 26종의 막장 노동을 전전하다 2014년 국토 이동 양봉 일을 했다. 그리고 2017년부터 강원 춘천 삼악산의 산막에 머무르고 있다. 국토순례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기도 하며, 2002년 백두대간을 단번에, 18일 만에 종주한 일이 전설처럼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