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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의도서 180평 규모 지하벙커 발견
2005년 5월 5일 서울 여의도에서 180여
평 규모의 지하벙커가 발견됐다.이 벙커는
1976년쯤 대통령 경호 및 비상시 대피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서울시
가 여의도에 버스환승센터를 세우려고
2005년 4월 측량작업을 하다가 굿모닝
신한증권 앞 도로 밑에서 벙커를 발견했다.
발견당시 벙커에는 분산된 3개의 출입구와
2개의 화장실, 샤워실, 소파 등이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출입구의 존재는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이를 단순한 공동
구(통신용케이블이 지나가도록 돼 있는
작은 터널)로 생각해 시에서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1976년 당시 공사를 맡았던 건설사의 전
임원은 “1976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지하차도 공사를 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경호용 비밀벙커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의 요청에 의해 관련
기록을 모두 삭제해 문서화된 공사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여의
도에서 국군의 날을 비롯한 각종 행사가
열릴 때 현재의 굿모닝신한증권 빌딩 앞쪽
에 대통령을 비롯한 요인들이 이용하는
단상(壇上)이 놓여졌는데, 그 아래 유사시
대피할 수 있는 벙커를 만들었다”고 덧붙
였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 관계자도 “D건설사
직원이라면서 1976년 무렵 벙커공사에
참여했던 기억이 있다는 이메일 제보가
3건 접수된 것으로 미뤄 사실로 보인다”며
“영등포구청에 근무했던 직원 중 1980년
대 초 이 비밀벙커를 청소했던 기억이 있다
는 사람도 나왔다”고 밝혔다. 여의도에서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린것은 1972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십여년 동안이었다.
지하벙커가 경호용 벙커라는 점은 이 벙커
가 국방부가 관리하는 군용벙커 명단에
들어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서울시는 벙커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기
관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 이곳에 환승센터
를 만들면서 벙커에는 교통카드 판매소와
매점 등을 만들어 환승센터 이용 시민들의
편의시설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2011년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극작가 로렌츠 별세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로 기억되는 극작가 아서 로렌츠(Laurents·93)가 5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라디오 작가로 출발한 로렌츠는 1957년 레너드 번스타인이 작곡하고 제롬 로빈스가 연출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의 극본을 써 브로드웨이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을 재해석한 이 뮤지컬은 그의 손을 거치며 맨해튼의 우범 지역에 사는 가난한 백인 청년 토니와 푸에르토리코에서 갓 이민 온 마리아의 사랑 이야기가 됐다. 이 작품에서 작사가 스티븐 손드하임을 만난 로렌츠는 1959년 ‘집시’ 로 다시 의기투합했고, 1962년에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출연한 뮤지컬 ‘당신께 떨이로 드릴게요‘ 로 연출에 데뷔했다.
로렌츠는 2009년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리바이벌 공연을 직접 연출할 정도로 말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1968년 ‘할렐루야, 베이비!’, 1984년 ‘새장 속의 광인들’ 로 토니상을 받았다. 그가 쓴 영화 시나리오로는 로버트 레드퍼드가 주연한 ‘추억’(1973), 앨프리드 히치콕이 연출한 ‘로프’(1948) 등이 있다.
▶2010년 전영록 어머니
'원로가수' 백설희씨 별세
▶2009년 산악인 엄홍길씨,
네팔의 오지 마을 '팡 보체'초등학교기공식.
▶2008년 ‘토지(土地)’의 작가 박경리씨 별세
▶2007년 114명 탄 케냐항공 소속
737-800기 카메룬 남부에 추락
▶2005년 고려대학교 개교 100주년.
▶ 2005년 여의도서 180평 규모
지하병커 발견
2005년 5월 5일 서울 여의도에서 180여평 규모의 지하벙커가 발견됐다. 이 벙커는 1976년쯤 대통령 경호 및 비상시 대피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 여의도 옛 중소기업전시장 앞 도로
밑에서 발견된 지하벙커. 위의 사진은
출입구이며, 밑에 사진에는 화장실과
소파가 보인다.
▶2005년 백과사전이 설립되었다.
▶2004년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
역대 최고 경매가 낙찰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 (Boy with a Pipe)'
역시 피카소였다. 2004년 5월 5일 20세기 천재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1905)이 미술 경매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파이프를…’은 이날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역대 최고가인 9300만달러에 낙찰됐다. 여기에 수수료를 포함, 작품 가격은 1억416만8000달러(약 1200억원)에 달했다.
그간 최고 기록은 지난 1990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일본 제지회사 회장에게 팔린 고흐의 ‘의사 가셰의 초상’(1890년작·8250만달러)이었다.
이날 경매서 ‘파이프를…’은 5500만달러에서 출발, 예상가 7000만달러를 훌쩍 뛰어넘었고 치열한 막판 경합 끝에 전화로 응찰한 익명의 인물에게 돌아갔다.
피카소가 스물네 살 때 그린 이 작품은 화가가 파리 몽마르트르에 있던 작업실 주위에서 만난 소년이 모델이다. 왼손에 파이프를 든 소년이 등장하는 이 그림은 피카소의 ‘장미 시대’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날 경매는 존 헤이 휘트니·베시 휘트니 부부가 세운 ‘그린트리’ 재단이 공익사업을 위한 기금마련을 위해 내놓은 작품 34점으로 진행됐다. 지금은 고인이 된 휘트니 부부는 20세기 미국서 가장 유명한 컬렉터. 휘트니 부부는 ‘파이프를…’을 지난 1950년 3만달러에 구입했다. 존 헤이 휘트니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회장·영국대사 등을 지냈다. 자선사업가로도 유명한 부인 휘트니 여사는 1998년 작고 당시 미국 미술관 4곳에 총 3억달러어치에 달하는 미술품을 남겼다
▶2004년 산악인 엄홍길,
히말라야 8000m급 15좌 정복에 성공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앞에 선 엄홍길씨.
산악인 엄홍길씨(한국외대 중국어과3)가 2004년 5월 5일 해발 8505m인 얄룽캉봉 등반에 성공,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5좌 정복의 쾌거를 이뤘다. 한국 외국어대는 이날 개교 50주년을 기념, 세계 5위의 고봉인 얄룽캉 정복에 도전했던 ‘2004 한국 얄룽캉 원정대’(등반대장 엄홍길)가 이날 오후 6시23분(한국시각) 정상에 올랐다고 밝혔다.
엄씨는 이날 오전 6시30분쯤 7800m 지점을 출발, 12시간에 걸친 산행 끝에 정상 정복에 성공했다. 얄룽캉봉은 히말라야 14좌 중 하나인 캉첸중가봉의 서쪽 위성봉. 그동안 14좌의 주변 봉우리로 여겨졌으나 최근 세계 산악계에서 점차 독립된 봉우리로 인정하는 추세다.
▶2004년 이탈리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 ‘최장수 총리’ 기록 경신
▶2003년 승용차 1 천만대 돌파.
▶2002년 네팔, 반군 550여 명 사살.
▶2002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재선
▶2001 년 미국, 프린스턴대에 첫 여성 총장.
▶2000년 미국 실업률 30년만에 최저.
▶2000년 이란, 총선 결선투표서도
개혁파 압승.
▶2000년 조선일보 국내 일간지중 최초로
ABC 인증마크 게재
▶1996년 중국 시인 애청(아이칭) 사망
▶1995년 세계 최대의 광학망원경
`케크Ⅱ망원경` 준공
▶1992년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 개최(서울)
▶1984년 교황청 매년 9월 20일을
한국성인의 날로 결정 밝힘
▶1983년 중국 여객기 피랍되어
춘천에 불시착
춘천에 불시착한 중국 여객기
승무원과 승객 1백5명을 태운 중공민항총국 소속 트라이던트 여객기 1대가 심양을 떠나 상해로 향하던 중 권총으로 무장한 중공인 6명에게 1983년 5월 5일 오후 1시55분경 납치돼 춘천 부근 미군기지에 불시착했다. 범인들은 대만으로의 망명을 요구하며 오후 9시경 투항,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풀려났다.
그동안 외교관계가 없었던 한국과 중국은 이 하이재킹사건 처리를 위해 직접교섭하기로 결정, 중국은 심도 민항총국장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특별기편으로 보내, 피랍 기체 및 승객의 송환에 합의했다. 양국은 기존의 호칭 `중공` `남조선` 대신 `중화인민공화국` `대한민국`이라는 정식호칭을 처음 사용했다. 납치자 6명은 검찰에 의해 우리법원에 구속 기소됐다.
▶1983년 한국-오만, 항공협정 체결
▶1981년 아일랜드공화국군(IRA)
보비 샌즈 의원 옥중 단식 사망
▶1973년 어린이대공원 개원
▶1962년미국 나토(NATO)군에
핵무장폴라리스 잠수함 배치 발표
▶1961년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 남북
학생의 판문점 회담을 5월내 열기로 결의
▶1961년 미국 머큐리호 세계최초의
유인탄도비행에 성공. 15분간 비행
▶1961년 미국 세파트 중령
인간탄도로케트 시승 성공
▶1958년 중국 공산당 제8기 전국대회
제2차회의 개최, 대약진운동을 결정
▶1958년 중국 수정주의와의 투쟁선언
▶1957년 제1회 소파상 시상
▶1957년 대한 어린이헌장 제정 선포
▶1956년 경무대 어귀서 시위군중과
경찰 충돌
▶1956년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후보 급서
제3대 대통령후보로 나선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1956년 5월 5일 호남지방으로 유세를 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했다. 연일 강행군한 강연과 유세 등이 그 원인이었다.
해공 신익희는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1945년 광복 때까지 일관되게 임시정부를 지킨 독립운동가였다. 1945년 12월 임정요인의 2차 환국 때 귀국해 초기에는 김구와 함께 반탁운동을 선도했지만 곧 임시정부세력의 `남북협상론`보다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정(單政) 불가피론`을 수용해 이승만 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이승만과 제휴해 대한민국 건국에 힘을 쏟은 신익희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2대 의장에 오르면서 임정계가 주축을 이룬 한국독립당 동지들과는 더욱 멀어졌다. 1948년 제헌의원선거 때는 경기 광주에서 무투표 당선됐으며 이승만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돼 대통령 이승만과 호흡을 맞춰나갔다.
이후 1948년의 5·10총선을 거부한 임시정부세력과 한독당 인사의 기용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승만과도 멀어졌다.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나선 신익희는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로 선풍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의 한강백사장 연설에는 30만명이 운집하는 등 신익희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희망이었다.
신익희의 유해가 경무대 근처 효자동 자택으로 운구되던 중 흥분한 시민들이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경무대로 돌진하면서 경찰과 충돌해 7백여명이 검거되기도 했다. 대통령선거 결과 이승만이 재집권했지만 신익희의 추모표가 전국적으로 185만 8,200표(전체 투표자수900만명)나 나왔으며, 서울에서는 이승만의 지지표 20만표보다 많은 28만여표나 나왔다.
▶1955년 미국, 영국, 프랑스 파리협정비준서
기탁-서독 주권 회복. 짜르 협정 발효
▶1950년 한국은행법 법률 제138호로 공포
▶1949년 해병대 발족
▶1946년 `어린이날` 제정
1946년 `어린이날` 제정
소파 방정환을 주축으로 한 '색동회'가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어린이들을 위해 제정한 '어린이 날'!
제1회 기념식은 1923년 5월 1일 열렸고 1927년부터 5월 첫째주 일요일로 바뀌었다.
1937년부터는 일제에 의해 기념행사가 금지됐다가 광복 이듬해인 1946년부터 ’어린이 날’이 바로 5월 5일로 확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마다 5월 5일 '어린이 날'이 되면 소년소녀 가장 초청 행사와 모범 어린이 포상식, 연극공연, 글짓기 대회 등 정부와 민간이 주최하는 각종 행사가 열린다.
어린이날
미래 사회의 주역인 어린이들이 티없이 맑고 바르며, 슬기롭고 씩씩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어린이 사랑 정신을 함양하고,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자 제정한 기념일로, 매년 5월 5일이며, 법정 공휴일이다.
3·1운동 이후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을 중심으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고자 하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해 1923년 5월 1일, 색동회를 중심으로 방정환 외 8명이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기념행사를 치름으로써 비로소 어린이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27년부터 5월 첫째 일요일로 날짜를 바꾸어 계속 행사를 치르다가 1939년 일제의 억압으로 중단된 뒤 1946년 다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 1957년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을 선포하고, 1970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5037호)에 따라 공휴일로 정해진 이래 오늘에 이른다.
▶1936년 만주에서 조국광복회 조직
▶1932년 상해에서 중국 일본 정전협정 성립
▶1924년 샤넬 No.5 탄생
마를린먼로는 잘 때 No5 몇 방울만 입고잔다는 말을 했다.
샤넬의 추구는 "여성의 향기가 나는 여성의 향수"
"여자는 사랑 받고 싶은 곳에 향수를 뿌려야한다."
“Chanel No.5.” 잠잘 때 무엇을 입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마릴린 먼로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샤넬 No.5’가 세상에 첫선을 보인 게 1924년 5월 5일이었다. ‘샤넬 No.5’는 샤넬과 그의 파트너 조향사(調香師) 에르네스트 보가 80가지가 넘는 꽃향기에 합성한 화학물질을 섞어 만든 최초의 인공향수로 향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 자랑이었다.
샤넬 NO.5
조향사가 번호 1∼5, 20∼24가 적힌 10개의 샘플을 내놓았을 때, 샤넬은 그중 ‘5’를 선택했고 그것은 곧 상품명 ‘샤넬 No.5’가 됐다. ‘5’는 샤넬이 평소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어온 숫자. 5월 5일 발매를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샤넬 No.5의 디자인은 아무 장식 없는 투명한 크리스털병이었는데 단순한 형태에 이름까지 기계적인 느낌을 주다보니 너무 난폭하고 남성적이라는 악평이 쏟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도 전 세계에서 30초마다 한 개가 팔려나가는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버나드 쇼가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명의 여성”으로 퀴리부인과 함께 꼽았던 20세기 패션 혁명가 가브리엘 보네트 샤넬의 본업은 디자이너였다. 단순하면서 실용적이고, 편안하면서 우아함을 잃지 않는 스타일, 샤넬이 추구해온 패션철학이었다. 여성의 허리를 옥죄던 코르셋을 벗기고, 재킷과 핸드백에는 주머니와 어깨끈을 달아주었다.
부와 명예를 쥔 샤넬이었지만 성장기는 고단했고 인생의 절정기는 고독했다.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샤넬을 고아원으로 내버렸다. 샤넬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건 스무 살 되던 해였다. 낮에는 보조 양재사로 꿈을 키우면서 밤에는 뮤직홀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애칭인 ‘코코’는 이때 그가 즐겨부른 노래 ‘코코를 아시나요’에서 나왔다.
▶1923년 감옥의 명칭을 형무소로 개칭
▶1921년 손문 광동에서 대통령 취임
(제2차 광동정부 수립)
▶1918년 시인 오장환 출생
▶1912년 소련 볼셰비키당 기관지
`프라우다` 창간
소련 공산당의 전신인 볼셰비키 기관지 `프라우다`가 1912년 5월 5일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창간됐다. 러시아는 이 날을 기념해 5월 5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했다.
논설 집필은 스탈린이 담당했다. 러시아어로 `진리`를 의미하는 `프라우다`는 1914년 제1차 대전의 발발로 정간되었다가 러시아 2월 혁명후인 1917년 5월 복간된 바 있다. 1991년에도 정간되었다 얼마뒤 기관지가 아닌 일반신문으로 복간했다.
이처럼 `프라우다`는 정치적 격변과 맞물려 부침을 거듭했다. 혁명 후에는 당과 함께 모스크바로 이주해 그곳에서 급속히 성장,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서 부수를 늘려나갔다. 또 기사와 논설중 많은 부분이 모스크바 방송과 타스통신을 통해 소련내외로 광범위하게 전달됐다.
옛 소련 시절에는 한때 최고 1,100만부까지 발행됐으나 소련이 해체된 후 `프라우다`의 역할도 감소해 최근에는 명맥만 유지해오다 1998년 11월 6일 제호를 ‘슬로보’(말, 단어)로 변경했다.
▶1911년 독립운동가 안규홍 순국
전라도 일대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벌인 머슴 출신 의병장 담산 안규홍 선생이 1911년 5월 5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1879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선생은 열 살 때부터 20년간 머슴생활을 하다가 나라를 지키고 농민을 살리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전남 순천의 강용언 의병부대에 투신, 활동하던중 의병장이 민폐를 끼치자 그를 제거하고 의병부대를 장악한 뒤 1908년 전남 보성군 동소산에서 토착농민과 관동 의병, 해산 군인 등으로 구성된 의병을 일으켰다.
일제와 친일세력, 탐관오리를 제거하겠다는 기치를 내건 선생의 의병부대는 보성과 순천 등 전남 지역 일대에서 활동하며 세금 징수원을 공격하거나 탐욕스러운 토호의 소작료를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또 의병을 일으킨 이후 1909년 10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일본수비대-토벌대-순사대와 26차례나 교전, 파청대첩과 진산대첩 등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9년 전남지역 의병을 상대로 한-일제의 대토벌 작전이 거세지자 선생은 훗날을 기약하며 의병부대를 해산,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광주감옥에 수감됐다가 대구감옥으로 옮겨져 1911년 5월 5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2001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로 선정했다.
▶1905년 보성전문학교 설립
▶1904년 일본군 요동반도 상륙개시
▶1904년 사이 영,
메이저리그 최초의 퍼펙트 경기
보스턴 레드삭스 투수 사이 영이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의 퍼펙트 경기를 달성했다.
사이 영은 1904년 5월 5일 대 필라델피아 아틀랙티스전에 등판해 무사사구, 무안타의 피칭으로 전 이닝을 3자범퇴로 처리, 연27명의 타자중 한 사람도 진루하지 못하게 했다.
사이 영은 완벽한 투구와 타자심리를 꿰뚫는 데 정평이 나있고 1892년에는 36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44세에 은퇴할 때까지 22년간에 걸쳐 906경기에 등판 511승을 기록했다.
▶1901년 경부선 철도회사 설립
▶ 1891년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 출생
▶ 1885년 독립운동가 이규선 출생
▶ 1852년 이탈리아의 추기경 가스파리 출생 - `교회법전`을 편찬
▶ 1846년 폴란드 작가 셍케비치 출생
▶ 1821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사망
공화국이 위험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권력에서 물러나겠다, 나폴레옹1세
1810.4.2 조제핀과 이혼 후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루이즈를 황후로 맞이하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나폴레옹은 이 말로 잘 설명된다. 그는 프랑스령의 외딴 섬 코르시카 출신으로 가난과 설움 속에서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뛰어난 능력으로 프랑스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30대 초반에 프랑스 황제로 등극해 유럽의 절반을 제패하고, 교육, 종교, 문화, 법률 등 오늘날 프랑스의 초석을 남긴 인물이다. 지난 세기 프랑스 위인열전에서 항상 1등의 자리를 고수한(그도 결국 20세기 드골에게 선두 자리를 내 준다.) 위대한 인물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하나 나폴레옹
“위대한 군 지도자 히틀러와 나폴레옹이 자주 비교되긴 하지만, 그러한 비교는 허상에 불과하다. 히틀러는 12년간 권력을 행사한 뒤 군대를 제외한 분야에서는 독일에 해골과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남겼다. 반면 나폴레옹은 단 한 번도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프랑스에 남긴 행정체제와 시민개혁만으로도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하나로 평가될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앨리스테어 혼의 나폴레옹 평가이다. 오늘날까지 영웅의 아이콘인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은 매우 다면적인 사람이다. 정복자로서, 정치인으로서, 군인으로서, 그리고 황제로서 각 방면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에 대한 책이 60만종이 넘는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가 프랑스와 유럽에 미친 영향력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애리스테어 혼은 나폴레옹에 관한 저서를 여러 권 썼는데, <나폴레옹의 시대>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어떤 시기가 나폴레옹 시기인가를 놓고 고민을 할 정도이다. 그는 생몰연대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애리스테어 혼은 나폴레옹의 시대를 1795년 젊은 장군이 정치권을 행사하던 시기부터 1820년 ‘위태로운 왕정복권시대’로 끝낸다고 일단 설명한다. 나폴레옹은 모든 위인들의 이름이 그러하듯, 시간을 초월해서 아직도 생생한 이미지로 우리들에게 남아, 한 인간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찬양과 폄하를 오가고 있다. 그는 아버지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와 어머니 레티치아 라몰니노 사이에서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
"승리하여 귀국하는 그 순간에 나는 내가 어떤 인물이 될지 예측했다"
프랑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 코르시카의 가난한 한 소년이 프랑스 혁명으로 왕이 물러난 자리에 다시 황제가 되어 왕정복권을 이루어낸, 말 그대로 한 인간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어떻게 올라가게 되었을까? 우선 군인으로서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군들에게는 영웅이었다. 나폴레옹은 1785년 브리엔의 사관학교를 졸업하던 16살의 나이로 장교로 임관했다. 작은 키와 빈약한 몸매 때문에 수학자라는 별명을 얻는 이 소년장교는 8년 후인 1793년인 툴롱에서 천재적인 전략으로 영국군들을 몰아냄으로서 무기력했던 프랑스 혁명군의 영웅이 되었다.
아크롤 전장의 나폴레옹(왼쪽), 브뤼메르 쿠데타를 지휘하는 나폴레옹(오른쪽)
그리고 25세의 나이로 소장으로 진급, 마음속에 찬란한 별을 품고 이탈리아 국경군의 포병장군이 되었다. 1795년에는 프랑스 국민공회에 반대하는 반란을 진압하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나폴레옹은 정치권력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폴 바라스는 당시 27살의 나폴레옹이 급성장할까봐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앨리스테어 혼은 당시 나폴레옹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당시 병사들은 월급도 받지 못하고 굶주린 데다 무기마저 빈약해서 거의 반란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스탕달은 <파르므의 수도원>에서 장교 세 명이 신발 한 켤레와 바지 한 벌, 셔츠 세 장을 공유했다고 소개했다. 또한 나폴레옹이 로디 다리에서 영웅적으로 군대를 이끌었을 당시 한 프랑스 장교가 ’전쟁터에서 구한 병사들의 모자로’ 구두창을 달았다고 전한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여겼던 이유(훗날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속았다면서 이러한 생각을 버렸지만)는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된다. 그는 오합지졸의 군대를 단 며칠 만에 최정예 부대로 변화시키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1797년 10월까지 16만 명의 포로와 2천대 이상의 대포를 전리품으로 주머니에 넣고 귀국한다. 프랑스의 영웅, 우상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 나폴레옹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 순간에 나는 내가 어떤 인물이 될지 예측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가기라도 하듯이 이 땅덩이가 벌써 발 밑에서 달아나는 것 같았다.”
"공화국이 위험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권력에서 물러나겠다."
이후 이집트 원정에서의 승리, 팔레스타인과 레반트 지역에서의 잔혹한 정벌로 이어지면서 그는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철저히 한다. 그리고 혁명 이후 위태롭던 집정부를 브뤼메르 쿠데타를 통해 무너뜨려 버리고 1799년 11월 9일 집정부의 시대에 마감도장을 찍어버렸다. 나폴레옹의 등장을 본 프랑스 국민들은 “공화국 만세! 나폴레옹 만세!”로 화답했다. 나폴레옹은 집정부의 지도자들을 위선자와 사기꾼들이라고 몰아붙이고, “공화국이 위험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권력에서 물러나겠다.”는 선언을 하고 스스로 절대 권력인 제 1통령의 권력의 자리에 앉았다. 훗날, 샤토브리앙과 더불어 나폴레옹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던 프랑스의 지성 스탈 부인도 이 순간에는 나폴레옹을 지지하고 즐거워했다.
말렝고 전투 이후 귀국 길에 나폴레옹은 공식적인 환영의 자리를 피하기 위해 새벽 2시에 몰래 파리시의 정문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이 영웅의 귀가를 환영하기 위해 더 일찍 모여 폭풍우 같은 기쁨의 환성을 터트렸다. “앙리 4세 이후 어떤 정복자도 그렇게 환영 받은 적은 없다.”고 한 역사학자는 현장을 기록했다. 말렝고는 나폴레옹이 파리를 완전히 정복했다는 걸 의미한 것이었다.
1804년12월2일 파리 노트르담 사원에서의 대관식.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왕관을 수여하고 있다.
그리고 1804년 12월 황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탄생했다. 나폴레옹은 절대 권력을 통해서 프랑스 사회의 대변혁을 추구했다. 이 부분이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빛나게 했다. 그는 종교의 신성도 정치에 이용했다. “그는 종교에 대해 냉소적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보다는 하느님이 그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를 물었다.”라는 문장은 그가 종교를 국가 통치의 한 수단으로 이용한 면을 잘 설명한다. 나폴레옹은 말한다. “한 국가가 종교의 도움 없이 어떻게 잘 통치될 수 있겠는가? 사회는 불평등한 재산을 제외하면 존재할 수 없고, 불평등한 재산은 종교 없이 유지될 수 없다.” “나는 카톨릭 신자가 됨으로서 방데 지역을 진정시켰다. … 유대민족을 통치했다면 솔로몬의 성전을 재건했으리라.” “나는 당신들을(성직자들)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종교를 재정립하고자 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후 공포정치가 몰락 한 후, 도덕, 군사 정치적으로 패닉 상태에 빠진 프랑스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프랑스는 활기차고 교회의 종소리는 다시 울려 퍼졌다. 나폴레옹의 권력 아래서 사람들은 음주가무를 즐겼다.
"나의 영광은 마흔 번의 전쟁 승리가 아니라 내가 만든 법전이다."
가장 믿었던 자들에게 배신당해 화려한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외롭게 머물면서 자신의 영광을 회고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읽는다. 그는 우선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목표는 단 하나다. 모두 다시 합치고 모두 화해시키고 모든 증오를 잊고 모두를 하나로 모으고 여러 이질적인 요인들을 통합하여 새로이 하나의 프랑스와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혁명의 원칙과 성문법과 관습법에서 보존해야 할 부분들을 하나의 문헌으로 작성했다. 모두 102번의 법률 회의에서 전쟁을 하느라고 바쁘신 몸인 나폴레옹은 57번 이상을 참석했다. 그가 프랑스 민법전(속칭 나폴레옹 법전)에 들인 공력을 잘 보여주는 숫자이다.
역시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은 회고한다. “나의 진정한 영광은 마흔 번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민법전(나폴레옹 법전)>을 말살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민법전>은 나의 행정재판 절차를 글로 옮긴 것이며 장관들과의 서신을 수집한 것이다. 행정가로서, 또한 광대한 ‘프랑스 가족’을 재조직한 자로서 행한 그 모든 일들이 … ”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조르주 보드로노브는 나폴레옹의 법전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법전은 출생, 결혼, 이혼, 분배, 증여, 상속, 사망과 같은 개인과 가족에 관한 모든 사항을 다루고 있다. 법 앞에 평등하고, 양심의 자유와 국가의 비종교화를 이루었다는 면에서 이 법전은 가히 ‘혁명적’이다. 또한 소유권에 대단히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부르주아적’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가족 내 위계질서를 세워 남편의 권위를 아내의 상위에, 아버지를 자식의 상위에 둔 점에서는 ‘나폴레옹적’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민사법은 그 동안 약간 개정되기는 했지만 오늘날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 법전이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일리리아 같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의 법률제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1806년에는 민사소송법을, 1807년에는 상법을, 1810년에는 형법을, 그리고 1814년에는 지방법을 선포했다. 그는 국가발전에 금강석과 같은 초석을 놓은 절대 권력자였다.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
나폴레옹은 군인으로서 정권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단순히 군인의 몸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인물이라면, 아프리카 우간다의 무자비한 독재자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는 보다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 법전, 교육, 종교, 국가를 움직이는 모든 장치를 재정비하고 위대한 프랑스를 만들기 위해 매진한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유럽 어디에 있던 연락이 가능한 커뮤니케이션과 우편제도의 간소화까지도 포함된다.
그에 대한 연구나 평전이나 에세이가 60만 종이 넘는다는 건 나폴레옹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은 나폴레옹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라고 유배지에서 말했다. 화무십일홍, 회자정리라는 한자성어는 영웅 나폴레옹을 빗겨가지 않았다. 모든 권력과 인생에 가을과 겨울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는 예수의 진언처럼 그는 결국 유배지였던 엘바 섬을 탈출해서 1815년 영국의 웰링턴 장군과 프러시아의 블루허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과 전투인 워털루 전투의 패배와 무리한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인해 장엄했던 나폴레옹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조제핀과의 사랑과 이별, 마리 루이즈와의 재혼
나폴레옹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조제핀과의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황제가 되어 조제핀을 버리고,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루이즈와 결혼도 했지만, 그의 부인이자 연인이었던 조제핀과 함께 한 말메종 성에서의 생활은 인간 나폴레옹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한 시절'이었다. 조제핀은 아름다운 육체와 열정을 지닌 여인으로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애증을 느끼게 했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그녀가 너무 야한 옷을 입는다고 그 옷을 찢어버리는 행동도 했다. 그때 조제핀은 옷장에 걸려 있는 무수히 많은 다른 야한 옷을 고르고 있었다. 한 여인에 대한 사랑과 질투의 감정에 충실했던 나폴레옹의 이러한 면은 연애와 사랑에 헤매고 상처받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었다.
이제 시절이 좋아져서 나폴레옹처럼 위대한 인물은 될 수 없어도, 나폴레옹과 조제핀과 같은 사랑과 열정은 오늘날 연예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절에 연애와 사랑은 나폴레옹이거나 귀족 일부의 특권이었다. 난잡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 특권을 누구보다도 잘 누렸던 황후 조제핀도 1814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유배된 뒤 버림받은 여인의 몸으로 두 사람이 가장 행복했던 장소인 말메종 성에서 쓸쓸히 죽었다.
첫 번째 황후 조제핀(왼쪽), 두 번째 황후 마리아 루이즈와 아들 나폴레옹 2세(오른쪽)
1815년 6월 배신자 푸셰(푸셰 역시 자신이 추대한 루이 18세로부터 국외 추방 명령을 받는다.) 주도로 프랑스는 나폴레옹을 버렸다. 하지만 민중들의 지지와 권력을 되찾자는 측근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나폴레옹은 말메종으로 향했다. 워털루 전투 이후 마지막 망명길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곳을 방문해서 “나의 불쌍한 조제핀! 그렇게 사랑하던 장미를 꺾으며 길을 걷는 그녀의 모습을 지금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라고 탄식했다. 나폴레옹은 “내 안에는 다른 두 인간이 있다. 머리를 가진 인간과 가슴을 가진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그의 가슴을 가장 강력하게 차지하고 휘저어 놓은 여인은 조제핀이었다.
"나는 식물처럼 되어 버렸소. 이제 사는 것이 아니오."
퇴락한 나폴레옹은 애당초 미국으로 향했으나 영국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영국 선박에서 나폴레옹은 대접을 잘 받았다. 나폴레옹은 영국의 런던 근교에서 감시는 받겠지만 안락한 생활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탄 벨레로폰 호가 영국 플리머스에 닻을 내리자 모든 상황은 급변했다. 통신이 두절되었고,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짐을 뒤져 귀중품까지 약탈해갔다. 프랑스 황제는 영국의 전쟁포로, 혹은 유배 정치인으로 전락했다.
나폴레옹은 8월 9일 노섬벨랜드 호를 타고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향했다. 대서양 남쪽에 버려진 섬, 바다와 같았던 나폴레옹은 작은 섬에 유배되었다. 10월 14일 나폴레옹은 라스 카즈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 섬에서 자신의 회고록을 작성할 생각을 하고 눈앞에 보이는 세인트헬레나 섬을 마주했다. 유배 생활 동안 그의 회고록을 정리하던 다정한 라스 카즈도 강제로 떠나야 했다(이후 라스 카즈는 <세인트헬레나 회고록(1823)>을 남겨 나폴레옹 연구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프랑스의 작가 샤토브리앙은 <저승 비망록(1841)>으로 반 나폴레옹의 선두에 섰다).
나폴레옹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이 외로운 영웅에게 하나, 둘 등을 돌렸다. 1820년 7월 나폴레옹의 병세는 완연해졌다. 유럽 전역을 안방 드나들 듯 하던 강인한 한 남자는 환자가 되어 이렇게 말했다. “침대가 내게 아주 달콤한 공간이 되었소. 이 세상의 어떤 보물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요. 얼마나 엄청난 변화인지. 내가 얼마나 쇠락했는지 …,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면 힘겹게 노력해야만 한다오 … 내 근력과 사지가 나를 버렸고 … 나는 식물처럼 되어 버렸소. 이제 사는 것이 아니오.” 그는 아들인 나폴레옹 2세에게 역사를 깊게 성찰하고 공부할 것을 당부했다. 자신처럼 살지 말고 평화롭게 유럽을 만들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바다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1821년 5월 5일 새벽 5시 나폴레옹은 전설의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후, 이 영웅의 죽음에는 독살설 등 여러 가지 추측들이 어지럽게 떠돌아 다녔다.
▶ 1818년 독일 사상가 마르크스 출생
전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칼 마르크스
1871.5.30 파리코뮌에 관한 담화문 <프랑스 내전> 발표하다
그에 대한 입장이 비판적이든 긍정적이든 마르크스를 거치지 않고 20세기 사회, 정치, 경제사상과 사회과학 이론, 그리고 20세기 역사를 거론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주의의 종언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문제의 끝이자 결론이라기보다는 문제의 시작이자 발제라고 할 수 있다.
7일간의 시가전 끝에 코뮌은 붕괴되고 3만의 시민이 죽었다
“코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부이고, 착취계급에 대한 생산계급의 투쟁이 낳은 소산이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완수하기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노동하고 생각하고 투쟁하고 피 흘리는 파리는 새로운 사회를 가슴에 품은 채, 적들이 바로 문 앞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역사를 창조하려는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노동자의 파리는 코뮌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의 영광스런 선구자로 영원히 칭송받을 것이다. 그 순교자들은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가슴 속에 간직되어 있다.”
1871년5월29일 파리 시내의 바리케이트(왼쪽), 독일어판 <프랑스 내전> 팸플릿(오른쪽)
1871년 5월 28일 파리코뮌의 마지막 바리케이드가 함락됐다. 이 날을 전후로 한 주 동안 약 3만에 달하는 코뮌파가 전사하거나 학살당했다. 두 달 전 3월 28일 코뮌 성립 행사가 열렸을 때 코뮌 위원 92명 가운데 17명이 국제노동자협회(인터내셔널) 회원이었다. 같은 날 런던에서 열린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는 마르크스가 ‘프랑스 내전에 대한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 담화문’을 새로 작성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5월 30일 ‘담화’를 낭독하고 총평의회가 이를 승인했을 때, 그것은 코뮌을 위한 조사(弔辭)이자 묘비명이나 마찬가지였다. 6월 13일 런던에서 35쪽 분량 영문 팸플릿으로 발행된 이 담화문은 2쇄 3천부가 두 주가 안 되어 매진되었고, 같은 해와 이듬 해에 걸쳐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등으로 번역됐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국가를 노동자의 사회적 노예화를 위해 조직된 공적 폭력이자 계급독재의 도구로 보았다.
방탕한 대학생 주당(酒黨)에서 철학 중독자로 변신해 읽고 쓰는데 전념
마르크스의 부계와 모계는 여러 세대에 걸쳐 랍비를 배출했지만, 아버지 히르셸 마르크스는 유대교와 유대인 사회를 떠난 계몽주의 성향의 변호사로, 유대인 공직 진출이 금지되자 하인리히로 이름을 바꾸고 온 가족이 기독교 세례를 받게 했으며 트리어 변호사협회 회장이 되었다. 어머니는 네덜란드계 유대인 앙리에트 프레스부르. (세계적인 기업 필립스의 창업자 제라드 필립스와 안톤 필립스 형제의 대고모.)
마르크스는 1835년 17살 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 졸업 논문 <직업 선택에 관한 한 젊은이의 성찰>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예 같은 도구로 일하기보다 자기 영역에서 독립하고 인류에 봉사할 수 있는 분야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소명이라 믿는 직업을 마음먹은 대로 차지할 수 없다.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회적 관계가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같은 해 본 대학에 입학, 선술집 클럽에 가입해 주당(酒黨)이 되었고 불온사상 혐의를 받는 시인 클럽에서 활동했으며, 패싸움과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1841년 3월까지 재학하는 동안 아버지의 뜻과 달리 법학보다 철학에 몰두했고, 1841년 4월 15일 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로 예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시절 마르크스는 두문불출하며 읽고 쓰고 생각하는데 전념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철학 중독자가 되어 사회 생활과 단절되는 것을 무던히도 걱정하다가 1838년 5월 세상을 떠났다. 1843년 6월, 마르크스는 누나의 친구로 네 살 연상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했다. 고향 트리어의 한 동네 이웃이던 귀족 관료 베스트팔렌 남작의 딸이었다. 예니는 평생 마르크스에 헌신적이었다. 갖은 고생을 하던 시기 남편의 동지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이런 하찮은 고생 때문에 기가 꺾였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내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아요. 내 삶의 버팀목인 사랑하는 남편이 여전히 내 곁에 있으니까요.”
파리와 브뤼셀에서의 마르크스 -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보수반동의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프로이센에서 학계에 자리 잡을 가능성이 희박해진 마르크스는 1842년 쾰른의 <라인신문> 주필로 일했지만 이듬해 정간 조치를 당했다. 파리로 이주하여 <독일-프랑스 연보>를 발간했지만 창간호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평생의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났다. 1845년 프로이센 당국의 책동으로 파리에서 추방당한 마르크스는 브뤼셀로 이주해 엥겔스와 함께 <독일 이데올로기>(1845-46)를 출간하고 <철학의 빈곤>(1847)을 간행했으며, 공산주의자동맹의 의뢰로 <공산당 선언>(1848)을 집필했다.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교황과 짜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첩보경찰 등 구유럽의 모든 열강은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집권당으로부터 공산당이라는 비난을 받아보지 않은 반대당이 있는가? (……)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 장인과 직인, 한 마디로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 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 혁명 앞에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1848년 독일에서 이른바 3월 혁명이 일어나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쾰른으로 옮겨 1년 간 <신(新)라인신문>을 발간했지만 다시 추방당해 파리로 옮겼고(이후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시민권을 회복하지 못했다), 여기에서도 다시 추방당해 런던으로 이주했다.
마르크스가 런던 딘스트리트 소호 28번지에 살던(1850년~1856년) 1853년 경찰 첩자가 기록한 집안 형편은 이러했다. “전부 다 깨지고 해지고 찢어진 것뿐이요, 모든 게 먼지 투성이인데다가 한없이 어질러져 있다.(……) 그래도 마르크스나 부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다. 손님을 정중하게 맞아들여 담배든 뭐든 있는 대로 정성껏 대접한다. 결국에는 재치가 넘치는 흥미로운 이야기판이 벌어져서 집안의 궁색한 꼴에도 눈감고 불편도 참을 만하게 된다. 실제로 사귀어보면 참 재미있고 신기한 집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르크스는 거칠고 참을성이 없는 성격이지만, 그래도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더 없이 온화하고 자상하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뒤 왼쪽)와 칼 마르크스(뒤 오른쪽) 그리고 마르크스의 부인 예니와 두 딸 라우라와 라우라와 엘리노어(1864)
마르크스의 주저 <자본론>의 타이틀 페이지(1867)
이 시기 마르크스의 유일한 수입원은 <뉴욕 데일리트리뷴>의 유럽 통신원 원고료였다. 형편이 다소 나아진 것은 1864년 이후 집안 유산과 친구가 남긴 유산을 물려받은 다음부터였다. 마르크스는 대영박물관에서 경제학, 역사, 정치, 민족학, 인류학 등 광범위한 분야의 책과 자료를 섭렵했다. 읽은 것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노트에 빽빽이 초록(抄錄)해 나갔다. 그 성과가 <정치경제학 비판>(1859)과 <자본론>(1867년 1권 간행. 사후 엥겔스에 의해 유고가 정리되어 1885년 제2권, 1894년 제3권 출간)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노동력만 소유하고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 이렇게 두 계급이 있다. 노동자는 임금을 초과하는 가치를 산출하지만, 노동자가 받는 것은 노동력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 뿐이며,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는 자본가가 차지한다. 그런데 한 시대의 생산력 발달은 생산관계(생산과정에서 사람들이 맺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 소유관계를 포함)와 모순된다. 이 모순이 역사 단계 이행의 동력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러한 모순은 경제공황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일치는 자본가들이 사적으로 소유했던 생산수단을 사회에 귀속시켜 공유함으로써 실현된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착취와 계급이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자본론>은 비록 미완성이지만 수많은 책들은 낳을 것이다"
생애 마지막 10년 마르크스는 건강이 악화되어 지속적인 집필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만년의 마르크스는 러시아에서의 혁명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가능성에 대한 태도는 애매한 편이었지만, <공산당선언> 러시아어 제2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의 혁명이 서방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신호가 된다면, 그리고 양자가 상호보완한다면, 현재 러시아의 토지 공동소유제는 공산주의 발전을 위한 출발점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881년 말 마르크스는 늑막염에 시달리며 병석에 누웠고 아내는 사경을 헤매기 시작했다. 12월 2일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마르크스는 병세가 심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듬해 마르크스는 요양을 다녔지만 병세는 악화되기만 했다. 1883년 2월 마르크스는 폐에 고름집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3월 14일 오후 2시30분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집을 방문했을 때, 가정부는 마르크스가 2층 난롯가 의자에서 “반쯤 잠들어 있다”고 말했다. 1, 2분 뒤 그들이 올라갔을 때 마르크스는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3월 17일 11명이 참석한 장례식에서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외딴 구석에 묻혔다. 사회주의 경향 언론들의 다분히 의례적인 찬사 외에는 언론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죽음이었다. 마르크스를 비방했던 <펠멜가제트>만이 “<자본론>은 비록 미완성이지만 수많은 책들을 낳을 것이며, 사회적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 1813년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출생
▶ 1789년 프랑스, 성직자·귀족·평민의 3부로 구성된 국회인 삼부회 열림
▶ 1436년 한성·경기·충청·경상·전라·황해·평안도에 지진 발생
https://youtu.be/ymKA4Ditl9k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