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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신춘문예 응모했다가 낙방한 작품인데,
아까워서 올려 봅니다. 까페도 활성화 되는 마음에 부끄럽지만,
염치불구하고 .. ㅋ
봉 구
잊었던 사건의 재해석, 걸레봉으로 내 머리를 때리다.
하나 둘씩 점점 많아진 낯익은 얼굴들에 둘러쌓여 정신이 혼미해 진다.
오랜 타지생활에 지친 나를 위로해주는 고향! 가끔씩와도 항상 날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아주는 그 곳! 겨울이면 꽁꽁 얼은 저수지는 아이들의 썰매장으로 변하고 어른들은 빙어를 잡았다. 가을이면 밤송이 가시에 찔리며 갈색으로 여문 밤을 주웠다. 여름이면 사슴벌레를 잡으러 온 산을 휘젓었고 아무리 깊어도 종아리까지 밖에 차오르지 않았던 냇가를 수영장 삼아 물장구를 치며 웃음꽃이 얼굴 한 가득 머금을 수 있었던 나의 고향! 봄이 되면 그윽한 아카시아 향으로 온 동네를 감싸는 나의 쉴 곳, 그곳에서 함께 무지개를 향해 달리던 친구들... 어렴풋이 꿈속에서만 보이던 얼굴들이 눈에서 선명해 졌고 웃음꽃에 여물며 점점 술기운에 휩싸이는 지금! 순간 잊고 있었던 이름이 갑자기 떠오른다. 봉구...
우리 시골동네에는 봉구라는 아주 착한 바보가 살고 있었다. 거짓말도 할 줄 모르고, 남들이 괴롭혀도 웃었다. 그는 말수가 적었는데 아마 바보라서 다른 사람들한테 이용만 당하고, 괴롭힘만 당했기에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말수를 줄인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살갑게 대해 준 사람에게는 말도 걸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기도 하며 곧잘 친한 척을 하던 아이였다. 봉구랑 난 친하진 않았지만 잠시나마 친한 적이 있었다.
봉구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항상 다림질한 단정한 교복과 네모난 금테 안경, 중학교 1학년인데도 165cm의 큰 키와 얼굴은 하얗고 눈동자는 맑았다. 덧니를 빼면 모난 곳 없는 생김새였다.
봉구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왔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5km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고 봉구는 그 반대 방향으로 5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다.
시골동네의 특성상 버스를 타야하는 거리더라도 드문드문 편성된 버스노선 때문에 걸어서 집과 학교를 오가는 시간이 더욱 빨랐다. 때문에 등·하교 하는 시간이 길었고, 걷는 동안 함께 속이야기를 털어 놓을 수 있어야 진정한 친구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하지만 봉구와 난 이런 분류에 해당되지 않았기에 각별한 사이는 아니였다.
우연찮게 봉구와 내가 앞뒤로 앉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두 마디 정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일반인 보다 지능이 낮은 사람의 의식 상태를 궁금해 하는 나의 왕성한 호기심이 그와 짧게 자주 이야기 하게 만들었다.
불쌍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한 봉구와 짧게 말을 걸어주고 숙제를 도와주는 동안, 우리는 약간이나마 가까워 질 수 있었다. 물론 나만의 생각일 것이다. 봉구는 항상 그래왔듯이 남들에게 이용만 당했기에 세상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지금도 혼자만에 성에 갇히어 외로이 살아갈 것이다.
“봉구는 어제 무엇을 했니?”
내가 물으면 봉구는 어눌한 말투로 짧게
“응으 자아저언거어 타앗써” 라며 쑥스럽게 이야기 했었다.
봉구가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있다면 자전거 타기이다. 봉구는 핸들을 잡지 않고 학교 내 경사가 높은 언덕을 내려오는 묘기를 자주 보여주었다. 또한 걸어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야만 하는 아주 높은 산에 위치한 동네도 어지럽게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타고 올라갔다.
하루는 봉구가 벙실 웃고 있길래
“봉구야! 오늘은 왜 웃고 있어? 좋은 일이라도 있어?”
“응... 나 오오오느느늘 고오오배백해에에서”
봉구의 작은 눈이 웃음을 머금고 있어 더 작아보였다. 나는 그 사건이 너무 궁금해 평소보다 더 친한 척을 하였다. 우리는 평소와는 달리 단답형의 말이 아닌 대화로 이어질 수 있었다.
“누군지 알려줄 수 있어?
“으응! 오오느느 채엣 사아러어 가아아느느데 고오배엑해에섯.”
“그래? 근데 누구야?”
“서어저엄 누우나아”
흥미로운 관심거리는 순간 날아갔다. 이 시기 남자들이 밤잠을 못 이루며, 말 한번 못 걸어 본 누구나 좋아할 만한 예쁘고 공부 잘하는 또래 여학생을 좋아하는데 나의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동네 서점에 시집 못간 우리보다 10살도 더 많아 보이는 여자라...’ 아무리 바보라지만 너무나 터무니 없는 대상이였다.
“응?! 서점 누나...? 주인집 딸? 너 그 여자가 몇 살인지 알아?”
“으응! 스우무웃세엘알 이루움도오 아알아.”
“대단한걸? 말도 걸어본거야?”
“나아 서어저엄 자아주우가아 아치이임, 저어어녀녓으로 가아서어 어구울 보오고오 와아아”
“하하 그 여자 이름이 뭐야?”
“미이이주우우.. 남아아미주”
아무리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의 남자들은 사랑과 현실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봉구의 사랑이야기는 나한테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화제를 돌려야 했다. 늘 안부처럼 묻던 말이 튀어 나왔다.
“숙제는 했어?”
짧게 물어본 후 난 블랙홀처럼 빨려갈 것 같은 검은 칠판쪽으로 성급히 돌아앉았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다고 할까 전혀 가망성 없는 사랑에 벙실 된 그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봉구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건이 있었다.
“사아앙호오오야 머어해엣?”
“응?”
“나아아 오오늘 미이주우 누우나아 마아낫다. 구운데에 나아보고오 화아내에어.”
“하하 왜?”
“나아보오고 서어점 오지이말아아래에”
“글쎄 왜 그랬을까?”
“너어무우 스우올펏”
“봉구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나.. 나아안 그으냥 너어무 조아섯 겨오온하자아고오 해에엣눈데 나아보오곳 오오지잇 마아래엣써”
“결혼?”
“응! 조아하아며언 겨오온하아느운 거어자아앗”
“지난 번 좋아한다고 고백했었잖아 그때는 뭐라고 했었는데?”
“지이나안 버어언 고오오백할아아 때에에느으으 미이주우나아가 그으냐앙 씨이잇 웃어섯다아. 그으은데 겨겨어호옷하아자니이까아 ‘나아가아’ 아아고오 소오오리이쳐엇써”
“그때는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네가 싫어졌나 보네 여자의 변덕은 못 말린다니까. 하하”
“미이주우... 누우나아...”
앞으로 다신 오지 말라고 쫓겨났었음에도 미주의 예쁜 얼굴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봉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으으래에에도오 좋아아아. 겨어얼호오오하알거어야”
“꼭 결혼해! 아직 가망성은 있어 하하”
나의 웃는 소리에 봉구의 표정이 굳어졌다. 봉구는 순간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
국어시간에 아무 시나 써 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다들 술렁이는 분위기다. 선생님은 어제 과음을 했는지 술이 덜 깬 표정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며 쓰디쓴 커피를 마시고 있다. 국어선생님이 아무시나 써보라는 이야기는 전날 술을 많이 먹어 피곤하니 수업하기 힘들다는 신호이다. 이내 혼자말을 중얼거리는데 교실에 있는 아이들이 다 들리듯 크게 내뱉는다.
‘젠장! 이 생활도 때려치든지 해야지 죽었다 깨어나도 교감되긴 글렀다니까. 평범한 교직쟁이가 아무 빽도 없이, 사바사바도 없이 가봐야 어디까지 가겠어? 그것도 머리좋고 좋은학교 졸업해야 잘되면 교감이지 나 같은 지방대는 교무부장만 10년째야 빌어먹을 세상! 한시에서부터 기승전결 운운하며 4단계 논리를 펼치더니, 결국 4단계 교원을 만들었구만... 뭐 사람 사는 것도 4단계지. 그래도 이 시기에 밥 벌어 먹고 사는 건 3단계 이상일 게야.’
이 후 국어선생님이 따분했던지 쓴 시를 발표하라며 학생들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반장 네가 쓴 시를 읽어 볼래”
“네? 쑥스러운데...”
“창피하긴 수업인데...”
반장이 엉기적 일어나며 마지 못해 자신이 쓴 시를 읽는다. 창피한지 목소리는 작다.
어리석은 자
현실이 슬픈자 과거를 돌아보니
흐드러지는 메밀꽃은
제 자리를 멈춰 추억을 뿌리고 있다.
비극은 현실이나 걸어걸어 나아가서
어두움을 밝히는 까만하늘에
반달하나 박혀 있다.
아득히 먼 것 같아 잡힐 것 같지 않고
강을 건너고 산을 헤쳐도
새벽이 오지 않을 거라 믿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떠올라
하얀 소금 뿌려 놓듯 메밀꽃 꿈 길을
사뿐히 걷고 있는 것을 알았다.″
“잘 썼구나 무슨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메밀꽃 필 무렵의 소설을 시로 표현한 거예요”
“아! 어리석은 자, 시로써 주인공의 아들임을 명시해 논 거로구나”
“그냥 아무 생각없이 쓴 건데요”
“하하 아무 생각없이 쓴 것이 소설의 답을 밝혔으니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데... 나중에 시인해도 되겠어. 하지만 문학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면 학문으로서의 가치가 없단다. 그러니 너의 시는 당분간 신춘문예에 내지 말기로 하자. 하하 참 잘 썼구나 또 발표해 볼 사람?”
“선생님 봉구도 시를 썼어요!”
옆 짝인 진현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반 학생들의 눈엔 별 하나씩 박혀 있다.
“봉구가?!”
선생님도 놀랐는지 흥분해 있었다.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봉구는 자신이 쓴 노트를 어눌하게 팔로 가렸다. 진현이의 ‘킥킥’거리는 비웃음이 흘렀다.
“봉구야 시 쓴 것 좀 읽어볼래?”
“아-아-돼엣”
봉구는 놀랐는지 말을 이어가지 못하였다. 안 그래도 머리가 모자라 발음이 어눌하고 말을 빨리 하지 못해 답답했지만 당황해서인지 더 어눌하게 짧은 신음만 내었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두 팔로 노트를 가린 봉구는 이내 진현의 힘에 밀려 윗부분이 조금 찢어진 채 노트를 빼앗기고 말았다.
“제가 대신 읽겠습니다. 제목 상호가 좋다.”
반 아이들의 비웃음 소리가 교실 안을 가득 채웠다.
앞에 앉아 있던 나는 어리둥절하여 진현이를 잠깐 바라보았고 다시 블랙홀 쪽을 향하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무슨 내용일까?’ 많은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제목에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 시를 발표하고 나면 난 반 아이들의 놀림거리로 하락하고 말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만 감돌았다.
상호는 나에게 아침마다 말을 거러(걸어) 준다.
숙제 해 왔는지도 뭇(묻)는다.
자전거로 집에 데려다 주고 싶다
상호는 과자도 주고 나에게 연필도 빌려 준다
나는 상호가 참 좋다
상호는 기(귀)엽다
미주 누나 보다 좋다
미주 누나는 나를 시러(싫어) 하지만 상호는 나를 좋아한다.
나는 상호가 좋다.
순간 반 아이들은 더 크게 웃기 시작했고 진현이의 비웃음은 나를 처량하게 만들었다. 이내 봉구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낮게 ‘병신같은 새끼들’이라며 조롱했다. 갑작스런 진현이의 돌출행동에 국어 선생님은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봉구에게 칭찬을 하였다.
“봉구가 시를 참 잘 썼구나! 자 조용! 봉구도 시를 잘 썼는데 다음 발표할 사람?”
‘딩동’ 기다리던 구원의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국어수업이 끝나고 반 아이들은 매점으로 화장실로 뛰어갔다.
“야 바보랑 사귀니까 좋냐? 둘이 영화를 찍어라! 킥킥. 짱돌 담배나 피러 가자”
진현이의 불량스런 목소리가 나를 처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고개만 숙였다. 교실은 웅성 웅성 거렸다. 모든 소리가 나와 봉구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순간 봉구가 너무 미웠다. 옆에 앉은 반장은 나의 어깨만 두드려주며 ‘괜찮아?’라며 형식적인 위로만 해 주었다.
‘바보라 잘해 줬더니 나랑 친한 척을 해? 앞으로 내가 아는척 하며 지내나 보자. 아! 병신 같은 게 짜증나게 진짜...’ 속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삭히며 봉구와 두 번 다시는 얼굴도 마주치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으로만 가득찼다.
담배를 멋스럽게 피고 온 진현이 교실 문을 박차며 들어왔다.
“아 씨 다음 미친 노처녀 포리너(foreigner) 시간 아니야? 책 안가져 왔는데... 야 반장 책 가져왔냐?”
“응 왜?”
“너꺼 나 줘라!”
“뭐?”
반장은 온순하며,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얼굴도 잘생기고 운동도 잘해 모범생들 사이에 리더역할을 도맡았다. 진현이와는 초등학교 동창으로 꽤 가까운 사이였었다. 하지만 과거 친밀했던 둘의 관계는 중학교를 진학하면서 깨어졌다.
반장은 공부도 잘했으며 집안까지 유복하였다. 아버지께서 부동산을 하고 있어 농사짓는 아이들이 허드렛 일을 할 때 TV에서만 보던 게임기를 가지고 놀았다. 그렇게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시골아이들 얼굴처럼 새까만 것이 아닌 희끄무레했다.
모든 아이의 우상이었던 반장의 뒤를 진현이도 졸졸 잘 따랐었다. 하지만 중학교를 진학하고 짧은 시간에 키와 몸집이 커진 진현이는 불량한 형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더 이상 반장에게 휘둘려 묻혔었다는 과거를 창피하게만 느끼고 있었다.
이젠 둘의 싸움에도 진현이가 이길 것이라는 추측이 기정 사실화 되었지만 여전히 반장은 학우들의 리더역할을 도맡으며 진현이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진현은 항상 반장을 따르는 반 아이들이 못마땅했는지, 학교내에 가장 예쁘다던 시장통 떡집의 셋째 딸 숙희를 교실로 불러 들여 키스를 하며 모든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었고 쉬는 시간마다 오토바이를 훔친 이야기, 잠시 가출하면서 동거한 여자와의 하룻밤의 사건 등 불량스러운 영웅 심리로 동급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려 했었다. 하지만 반 아이들은 여전히 반장을 좋아하고 따랐다.
그런 결정적 계기가 된 일화를 잠시 이야기하자면,
진현이가 반 아이들에게 과시하려고 쉬는 시간에 교실에서 담배를 피운 적이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자 후각에 예민한 여자 선생님이 ‘교실에서 담배 핀 아이가 누구냐?’며 추궁하기 시작했고 범인이 나올 때까지 반 아이들 전원의 종아리를 때린다고 위협했었다.
아무도 나오지 않자, 정말로 1번부터 교탁위로 올라가 종아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4번쯤 맞았을 때 진현은 ‘빨리 자수하자!’ 라며 반 아이들에게 공포를 부렸고 교실 안은 적막해졌다. 그때 반장은 슬며시 손을 들며 일어나 ‘자기가 피웠다.’ 며 선의의 거짓 진술을 했다.
선생님은 ‘반장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을 알기에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덮어 둔다.’며 오히려 반장의 희생정신을 칭찬한 사건이 있었다.
그 후 진현이는 더욱 반장이 얄미웠는지 ‘네가 반장이니까 알아서 해’, ‘반장이 하는 거 따라해 봐’ 라며 학급 일을 떠 넘기고 반 아이들을 협박까지 하며 반장을 트집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장은 여전히 선생님의 지시와 자신의 일을 척척해 나가며 리더역할을 맡고 있었다.
“야 반장 나 영어책 안 가져 왔는데 니 책 좀 나줘! 넌 공부 잘해서 영어선생님한테 덜 혼나잖아”
“진현아! 그런 것이 어딨어? 나도 혼나”
“이 븅신 남자가 쪼잔하게 여자 선생님한테 혼나는게 무섭냐?”
“그게 아니라... (적막) 그래! 초등학교 때 친했으니깐 오늘 내가 영어책 너 준다.”
“야 네가 언제 나랑 친했어? 바보랑 사귀는 애 짝꿍 주제에... 킥킥”
진현은 반장과 친한 나까지 싸잡아 공격을 했다.
‘휴우-!’ 반장의 한숨은 짧고 깊었다. 반장의 터무니 없는 희생정신이 발휘되었다. 절친한 나를 엮어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반장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고 진현이와 싸움을 벌일 눈치였다.
“왜 꼽냐? 그렇게 쳐다보면 어쩌려고? 왜? 영어책 주는게 싫어? 병신아?”
반장이 영어책을 진현의 얼굴에 던졌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분위기다.
“이게 미쳤나?”
“보자보자 하니 요즘 잘나간다고 옛날 생각 잊었나본데 야 너 나한테 초등학교 때 맞고 다녔어”
“그래! 그때 어떻게 맞았는지 여기서 한번 보여줘 봐라”
후닥닥 주먹과 발길이 오갔다. 처음에는 한 대 두 대 주거니 받거니 하다 결국 진현이 압도적으로 때리기 시작한다. 반 친구들은 어느 틈에 구경을 하고 망을 보았다. 갑자기 반장의 발차기가 진현의 턱을 정확히 가격하자 진현이와 패를 같이하며 불량한 행위를 나누는 추종자들이 적시적절하게 끼어들어 말리기 시작한다.
“반장 니가 참아라 더 싸워봤자 너만 더 맞는다니깐 진현이 아는 형들이 너 놔둘거 같냐? 그만해 자식아”
둘은 잠시 멈추었다. 진현이도 갑작스런 반장의 발차기에 번개불을 보았는지 싸우려 들지 않았다. 더 이상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이 한동안 고요했다. 반장은 ‘씩씩’거리며 자리에 돌아 앉으려하는 순간 어느 틈에 진현이 뛰어와 반장의 뒷통수를 주먹으로 갈기며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반장이 바닥에 엎드려 있자 진현은 발로 반장의 얼굴을 짓밟기 시작했다.
“죽을라구 병신새끼가”
반장은 본능적으로 팔로 머리를 가리며 더 맞지 않으려고 좌우로 뒹굴었다.
수업 시작 종이 ‘땡땡’ 울리며 진현의 비겁한 구타는 멈추었다. 결과는 보나마나 반장의 얼굴이 만신창의가 된 채로 끝났다. 누가 이겼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반장은 더 이상 저항할 의사도 없었고 더 싸워보았자 방과 후 옥상에 불량한 형들과 또래 아이들에게 둘러 쌓인채 실컨 맞기만 할 뿐이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반장은 내심 여기서 끝내고 싶어 했을 것이다.
절친한 사이였던 나는 반장의 싸움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속으로 ‘선생님이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반장 괜찮아?”
“응!”
반장은 ‘응’이라고 했지만 많이 맞아 얼굴이 부었다. 수업시간 내내 선생님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 역시 반장을 영웅으로 생각하며 따르던 아이였기에 반장이 너무 안쓰러웠다.
“영어책 없는 사람 빨리 자수해”
아무도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반장은 맞은 댓가로 영어책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도 없어?”
“자 이번 시간에는 길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에 대해서 알아보자”
“와우 후이즈 디스?”
꼬브라진 혀로 노처녀 영어선생님은 한글을 하찮게 만들기 시작하며 수업을 진행하였다. 교실 구석구석을 다니는 하이힐의 소리가 ‘또각또각’ 크게 들리고. 꼬부라진 혀놀림이 멈추었다.
정적-
“봉구야! 책 안 가져왔어? 다음부터 가지고 다녀”
여자 선생님만의 특유한 친절한 말투가 베어 나왔다.
“아- 아- 아니!”
“응 괜찮아 다음부터 가지고 다니면 되지”
“아- 아- 아니!”
“뭐가 아니야? 너 책 어딨어?”
봉구의 책상에서 멈춘 영어선생님은 바보 봉구를 나무랄 생각이 없었지만 계속되는 ‘아니’라는 말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틈에 영어선생님 손에는 국어책을 들려 있었다. 책을 안 가져온 것을 교모하게 숨기기 위해 봉구는 국어책을 펼쳐 놓은 것이었고 영어선생님은 그걸 예리하게 발견한 것이었다.
“야 머리가 나쁘면 착하기라도 해야지. 책 안 가져 왔다고 내가 혼냈어? 왜 거짓말을 해? 그리고 국어책은 왜 펼쳐놔? 이 자식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모두가 당황했다. 봉구가 선생님을 속이기 위해 국어책을 펼쳐놓을 정도의 야비함이 없다는 걸 우리는 잘 알았기에 다들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또한 봉구의 어머니는 아침마다 직접 책가방을 챙겨주기 때문에 교과서를 안 가져 올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설마...?’ 하며 뒤를 돌아보았는데 책이 없다며 쉬는 시간에 땡깡을 부리던 진현이의 책상 앞에 영어책이 떳떳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아- 아아- 아니이 나아 채엣 잇서어요오”
“어디서 자꾸 거짓말이야? 뭐 어딨어? 책가방에 있어? 도시락가방에 있어? 집에 있어? 아님 천장에 있어?”
“아- 아- 거기 말고 여-여업-페에”
선생님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옆을 보았다. 진현이 ‘씩’ 웃는다. 반장과 한판 싸운 흔적이 이마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진현이! 네가 봉구 책 갖고 있어?”
“아니예요 봉구가 준거예요”
“몹쓸 자식! 힘없는 애 책을 빼앗아?”
“봉구가 저 줬어요 자기는 책 없어도 선생님한테 안 혼난다면서”
“야 너 거짓말할래? 영어책에 서봉구라고 써 있잖아? 응? 안되겠어!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따라와”
“아 왜 그러실까? 정말이라니까요”
“이 자식이... 봉구가 왜 너한테 책을 주냐?”
“아 사람 말 되게 못 믿네 그러니깐 지금껏 시집을 못 갔지!”
‘깔깔’ 반에서 수컷들의 비웃음이 들리며 영어선생님의 얼굴은 빨개졌다.
“너 이 자식 끝나고 교무실로 따라와”
“네- 썅”
영어선생님은 ‘썅’이란 소리를 들었음에도 모르는 척 교단으로 쫓기듯 걸어갔다. 그 자리에서 진현이를 혼내기엔 여자의 힘은 너무나 연약했다.
“봉구! 뒤질라구 지랄을 하는구나”
진현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봉구 주변에 있는 다른 아이들도 들었을 것이다.
“수업 끝나고 내가 교무실 갈 것 같냐? 봉구 너 패죽이기 전까지 절대 안가... 배신자!”
‘아- 아-’ 봉구의 두려운 신음을 반 아이들이 여럿 들었지만 봉구를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봉구가 ‘바보 맞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교과서를 안 가져 와도 봉구는 선생님들에게 혼나지 않는다. 그건 약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봉구가 ‘책을 안가져 왔다.’라고 말했으면 진현이에게 협박을 당하는 처참한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책을 안 가져왔다.’ 라고 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해결될 일이었다.
거짓말을 할 줄 몰라 책을 가져왔다고 말한 것이 오히려 선생님한테 꾸중을 듣는 것보다 몇 백배 큰 형벌로 이어질 줄은 봉구는 알고 있었을까? 혹시 알았더라도 봉구는 사실대로 ‘책을 가져왔는데 진현이가 빼앗아 갔다.’ 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딩동-’ 수업종이 울리자 영어선생님은 교실 밖을 나갔다. 전 시간에 반장과 진현이의 안타까운 싸움을 구경하느라 화장실을 가지 못한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소변이 보러 화장실로 뛰어 갔다. 그렇게 빨리 뛰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줌이 마려워서? 아님 다른 이유라도? 나는 소변만 빨리 해결하고 다시 교실로 뛰어 들어왔다. 나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진현은 교무실에 가지 않고 걸레봉으로 봉구를 개 패듯 두들기고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좋다.
‘아아퍼어오! 아아퍼오엇’ 쇠소리 비비는 듯한 봉구의 굉음이 들린다. 걸레봉으로 때리는 것에도 분이 안 풀리는지 교실창문가에 봉구를 몰아 붙이고 ‘떨어트려 죽일거야’ 라고 고함을 치며 봉구를 들기 시작했다.
“아아! 무서워어 사알여어주엇”
창문 난간을 간신히 잡고 있는 봉구는 3층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온갖 바락을 했다. 겁에 질렸는지 회색 교복바지가 검게 물들었다. 결국 오줌을 싼 것이다.
“에이씨! 더러운 새엣끼이!”
진현이는 봉구를 바닥에 팽기쳤다. 그리고 한참을 더 때지자 봉구기 무릅을 꿇은 채 두 손을 비비며 ‘잘못했어! 잘못했어! 영어책 너꺼야’라며 처절하게 빌기 시작했다.
아무 저항을 할 수 없는 아이가 맞고 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보다는 통쾌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나의 괜한 친절로 인해 반 친구들 앞에서 창피함을 주었던 봉구는 사실 내가 때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내가 바보를 때린다면 모든 아이들이 나를 비겁자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엉뚱하게 튀어나온 한 편의 시가 이토록 큰 원망으로 마음을 변하게 할 줄이야. 사무치는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진현이는 봉구의 구석구석을 잘도 두둘겼다. 그 순간 나는 묘한 쾌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반장의 얼굴을 보았다. 안도의 한숨 섞인 표정을 지으며 봉구가 맞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만약 봉구가 진현이에게 맞고 있지 않았다면 이번 쉬는 시간도 전 시간과 마찬가지로 반장은 진현과의 무모한 싸움으로 피해를 보아야 했을 것이다.
쉬는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야 앞으로 봉구랑 이야기 하는 놈은 나한테 죽을 줄 알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싸움은 그렇게 쉬는 시간동안 2번 벌어졌다. 그 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봉구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자전거 뿐이었다.
반장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고 20년만에 중학교 동창들을 볼 수 있었다. 낯익은 모습이 한 두 사람 보였고, 여러 추억들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어’ 라는 소리와 함께 ‘반갑다’ 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됐다. 악수를 권하고 꾸준하게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들이 무엇을 하며 사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사람사는 이야기를 듣게 되니 비록 장례식장이었지만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진현이는 평소 운동신경이 뛰어난 장점을 살려 스턴트맨이 되어 있었고 짧은 단역으로 출연을 자주 했다고 한다. 술이 오고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진현이는 학창시절 덫 없이 놀던 어린 시절의 회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너희들한테 정말 미안했다. 가장 창피하고 비겁했어. 약한 애들 때리고 돈 뺏고... 결국 고등학교도 졸업 못해서 유명배우로 성장하는 것은 꿈도 못 꾸게 됐어! 그때가 지금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그래도 혹시 나중에 나 유명해지면 너희들이 내 과거 이야기 하면 안 된다. 혹시라도 얘기하는 놈 있으면 다시 망나니 조진현으로 돌아갈지도 몰라”
다들 한바탕 웃었다. 모처럼 행복감에 젖은 웃음이었다.
웃음꽃과 술기운에 휩싸이자 까맣게 잊고 잊었던 봉구의 이름이 떠올랐다.
“야 너 봉구 알지?”
“봉구... 누구?”
“바보 있잖아 집도 가난해서 저기 초가집 살았던 애”
“글쎄...”
봉구와 진현이는 한 때 짝이었음에도 기억하지 못했다.
“네가 봉구 영어책 빼앗다가 영어선생님한테 혼나고 다음에 봉구 두들겨 팼잖아? 그거 기억 안나?”
“글쎄... 내가 책 빼앗은 애가 한둘이었냐?”
“아! 참! 잘 기억해봐 동네도 너랑 같았다고...”
진현이는 후회스런 학창시절 추억을 더듬느라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 자전거 타던 바보 봉구?”
짱돌이 끼어들어 자전거와 바보라는 봉구 존재의 실마리를 던졌다. 그제서야 모두가 봉구의 존재가 기억났는지 고개를 끄덕이거나 박수를 쳤다.
“아 그때, 영어선생님 책 안 가져온 거는 전쟁터에 총 안 가져온 것이라며 크게 오바했잖아! 정작 군대도 안 갔으면서 비유는 참... 그리고 그때는 정말 내가 영어책 뺏은게 아니라 그거 진짜 봉구가 나 줬어 자기는 책 안 가져 와도 안 혼난다고, 봉구랑 나랑은 그래도 같은 동네 살아서 함부로 안 대했다.”
“거짓말! 그런 놈이 오줌쌀 정도로 봉구를 때렸냐? 아까 후회한다고 사죄 해 놓고 지금에서 딴소리야? 아님 스턴트맨도 배우라고 연기하는거냐?”
동창들은 또다시 한바탕 웃음을 토해냈다.
“진짜 줬다니까 난 영어책 대신 국어책 펼쳐 놨는데, 봉구 그 자식이 내 국어책 가지고 가면서 영어책 줬다니까 그래서 그 국어책에 내 이름 써 있었잖아”
믿지 않는 듯 억지 웃음소리로 이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반장이 아버지 장례가 끝나고 다시 직장으로 올라가기 전 나는 모교 운동장을 반장과 함께 걸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포근함. 우린 대화 없이 걸어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반장! 봉구 기억나냐?”
“응! 장례식장에서 거론되던 봉구? 상치르면서도 너희들 얘기 몰래 듣고 있었어. 그리고 난 걔한테 과자 받았었다.”
“언제?”
“진현이한테 얻어터지던 날이었어. 봉구도 영어책 사건으로 맞았었던 날. 장례식장에서 네가 얘기하던 사건이 발생했던 날 말야. 그 날 저녁에 집 앞에서 봉구가 기다리고 있더라고”
“그래?”
“그 자식 그때 왜 우리 집 앞에서 과자 주고 갔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얼떨결에 받기는 했는데 나중에 만나면 물어봐줘라. 그래도 봉구랑 너랑은 친하지 않았냐? 시까지 써주고 하하”
“친하기는... 바보랑 나랑 어떻게 친해지냐? 하하, 신기해 지금껏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던 봉구가 왜 갑자기 떠올르는 것일까?하긴 고향에 오랜만에 내려 왔으니 잡생각이 많아져서 그렇겠지. 그 자식 때문에 네가 진현이한테 덜 맞았잖아.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평생 기억해 줘라.”
“자식 나랑 바보랑 엮냐? 너한테 시 쓰면서 고백했었잖아 너 아직도 못 잊고 있을 거니깐 연락 한번 해줘라 하하 상호가 조오옷타아앙!”
“집 앞에서 과자까지 받은 건 너다. 바보야”
순간 머리가 더듬거리면서 봉구가 자전거를 타고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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