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StuEKVgcN1U
<요한계시록 11:1-3>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2절 끝부분에서 성전 바깥 마당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데 그 기간이 마흔두 달 동안이라고 말합니다.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거죠. 그런데 마흔두 달이 3년 6개월이면 7년의 절반입니다. 7이 완전수라면 3년 6개월은 불완전한 수인 셈이지요. 성전이 짓밟히는 시련과 고통을 당할 때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해진 기간동안만 박해자들이 박해를 가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고통과 시련을 당하게 되면 먼저 절망감이 찾아오고 그 절망이 내 마음을 지배해 버리면 이 고통과 시련이 끝이 없을거라고 여기게 되지요. 그러면 극단적인 선택으로까지 나아가게 되기도 하는 겁니다.
하나님 외에는 영원한 게 없지요. 무엇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자체가 영원한 곳이 아닙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과학자들도 이 지구가 수명이 있고 지구를 존재하게 하는 저 태양도 수명이 있다고 하지요. 이 지구가 수명을 다하면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의 생명도 끝나 버리는 거 아닙니까?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행복도 영원하지 않고 불행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건강도 영원하지 않고 병든 것도 영원하지 않지요. 높은 권세도 영원하지 않고 밑바닥 생활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3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요.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일을 예언하니라.’ 두 증인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교회를 1절에서는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이라고 비유했는데 이제 3절에서는 교회를 두 증인으로 비유하고 있지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승천하실 때에 사도행전 1:8절에 의하면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참된 뜻을 나타내는 증인이 되는 거죠. 두 증인이라는 것은 증인의 증언이 그 당시 법적인 효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최소 두 증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언급된 것입니다.
이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셨다고 하는데 그 권세는 무슨 권세일까요? 남을 휘어잡는 권세일까요? 세상을 내 맘대로 휘두르는 권세일까요? 진정한 권세는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굳게 붙잡을 수 있는 권세입니다. 악한 시대 속에서도 정의와 선함을 굳게 붙잡을 수 있는 권세이지요. 거짓과 술수가 난무한 세상에서도 진실함과 정직함을 지켜갈 수 있는 권세입니다. 아무리 온천하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다 해도 거기에 거짓과 편법과 술수와 속임이 담겨져 있다면 그 권세는 하나님 앞에서 모래 위에 세운 권세일 뿐이지요.
이 두 증인은 굵은 베옷을 입었다고 3절은 말합니다. 굵은 베옷은 통회자복하며 회개할 때에 입었던 옷이지요. 즉 이 두 증인은 세상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던 세례요한이 강조한 게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역시 회개의 메시지였지요. 예수님도 세례요한의 뒤를 이어서 역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14-15절을 보면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역시 회개의 메시지였지요.
이 두 증인이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면 오늘날의 교회도 역시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를 강조해야 합니다. 죽으면 없어져버릴 물질의 복과 무병장수의 복과 만사형통의 복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 참된 구원의 영생으로 나아가게 하는 회개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거죠. 참된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복음과 예수님의 삶을 증인처럼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예언 기간이 천이백육십 일이라고 3절 마지막에 말하지요. 천이백육십 일은 2절에서 이방인 박해자들이 성전을 짓밟는 마흔두 달과 동일합니다. 즉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박해와 시련을 당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은 여전히 있다는 것이지요. 박해당한다는 이유 때문에 복음과 상관없이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산상변모사건 때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신 경우도 있지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최악의 고통의 모습을 지니시기도 하셨지요. 마찬가지로 교회와 성도들이 번영하고 성공하고 풍요롭다면 거기에서 나타낼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증인의 모습이 있고, 시련과 위험과 박해의 고통 속에 있어도 고난당하신 예수님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역할이 여전히 있는 겁니다. 지금 사도요한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은 로마의 박해에 시달리고 있지요.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교회와 성도들은 변함없이 생각해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의 생명은 교회의 크기나 건물이나 모이는 숫자에 있지 않지요. 교회의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참된 예수가 살아있다면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이고, 아무리 규모가 크고 많은 활동을 한다 해도 예수님에 대해 소홀하다면 죽은 교회입니다. 언제나 예수께서 살아계셔서 예수님의 성실한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참된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복음과 예수님의 삶을 증인처럼 나타내야 합니다,
교회의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참된 예수가 살아있다면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이고,
아무리 규모가 크고 많은 활동을 한다 해도 예수님에 대해 소홀하다면 죽은 교회입니다.
언제나 예수께서 살아계셔서 예수님의 성실한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내가, 내 가족이, 그리고 내가 다니는 교회가 그리고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성실한 증인으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내가, 내 가족들이 내가 속한 회사의 구성원들이 주님께 기도하는 삶 살아가게 되길 기도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으나 주님으로 인하여 힘있게 나아가게 되길 기도하며,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움으로
오늘을 살아가게 되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오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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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이 살아있는 느낌이 드네요.
늘 함께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