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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신 제주수필문학회장
▲ 김순신 제주수필문학회장 ⓒ뉴스라인제주
최정숙은 1902년 제주 삼도리에서 2남 4녀 중 큰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제주 초대 법원장을 지냈으니 당시로써는 권세가의 집 딸이었다. 여덟 살 때 최초 사립학교인 신성 여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강평국, 고수선을 만나 후일에 제주 여걸 3인방이 되어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에 앞장선다. 학교를 졸업한 친구 중 강평국과 고수선은 서울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최정숙은 아버지의 반대로 올라가지 못했다. 당시에는 여자는 굳이 학문할 필요가 없고, 나이가 차서 시집이나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정숙은 배움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더 큰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를 찾아가서 사정하고 편지로 부모님을 설득했다. 뜻을 이루기 위해 심지어 단식투쟁까지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마침내 아버지로부터 서울학교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진명여자고등 보통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정숙은 진명여자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여자 보통 학교(오늘날 경기여고) 사범 과에 들어가 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한다.
여성의 사회 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었던 시대 상황과 일제에 대항하여 자신의 신념을 펼친다는 것은 보통의 강단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7세의 나이에 ‘소녀결사대’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던 일화를 보고 그녀가 얼마나 애국심에 불타는 강한 지도자였음을 알았다. ‘소녀결사대’는 최정숙이 당시 초등 교원 최고 양성기관인 경성여자보통학교 사범과에 진학했을 때 애국열에 불타는 79명의 학생과 함께 조직됐다. 이들은 1919년 3월 1일, 학교 측의 출입 통제를 받았지만, 학교의 잠긴 문을 박차고 만세운동의 현장으로 나갔다. 그 일로 최정숙은 서대문형무소에서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며, 꽃 같은 나이에 공권력에 의해 고문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석방된 후에도 건강이 안 좋았지만, 민족의 계몽을 위해 교육에 종사하던 중 <따뜻한 봄바람>과 <조국의 산하> 등 우리의 혼이 담긴 노래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또다시 구속되기도 했다. 반복되는 구속으로 병을 얻은 최정숙은 고향 제주에 내려와서 여성을 위한 야간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녀는 끊임없는 학구열로 의학 공부를 해서 의사가 되고자 했다. 1937년 늦은 나이에 의학 공부에 도전하여 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제주에 내려와 1944년 소아과전문의원 정화의원을 개원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었던 당시에는 링거 및 항생제 등 의약품이 턱없이 부족했다. 동남아에서 넘어온 성병이 부인들과 신생아에까지 전염되면서 실로 처절했던 상황이었다. 이에 최정숙은 가난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마다하지 않았다. 징용되어 와 일제의 괴롭힘에 시달리는 동포들에게 치료와 함께 식사를 챙겨주기도 했다.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가 없는 어려운 노동자들을 위해서는 주머니를 털어 여비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녀의 박애 정신은 교육에서도 빛을 발한다. 제주 4·3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부녀회를 조직해 계몽운동과 문맹 퇴치에 앞장섰다. 신성 여자 중고등학교가 재건되어 초대 교장으로 일할 때는 무보수로 봉사하면서 교육에 온 열정을 쏟았다. 그러한 그녀의 숭고한 삶을 인정해 1955년 10월에 로마 교황청은 그녀에게 훈장을 주었다.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최대로 영예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대한적십자사 제주지사 부지사장, 제주도 중등교육 회장, 대한결핵협회 제주도지부장 등을 역임하며 끊임없는 박애 정신과 민족교육에의 열정을 이어갔다. 1964년에 도 단위 교육자치제가 실시될 때 최정숙은 초대 제주도 교육감으로 추대되어 교육자로서 마지막 열정을 쏟았다.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감이기도 했다.
최정숙은 1977년 2월 21일 심장마비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람은 관직에 있을 때 사리사욕을 얼마나 절제할 수 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 최정숙은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한평생 살면서 자기를 위해 집 한 채도 남기지 않고 훌훌 털고 가셨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었지만, 그녀의 삶은 숭고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아름다웠다. 그녀가 살아오면서 남긴 커다란 업적과 인품은 오늘을 사는 나에게 삶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개인의 삶을 뛰어넘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더 나아가 참 신앙인으로서 한평생 부끄럽지 않게 살다 간 최정숙, 그녀의 삶을 존경하고 흠숭한다.
추신: <최정숙을 기리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아프리카 부룬디에 최정숙여자고등학교를 세우고 올해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 이야기는 차후에 글로 남기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