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은 중국의 개경이다.
개경(개성)과 고려의 위치에 대한 결정적 근거
개경(개성)과 고려의 위치에 대하여 결정적 근거는 바로 '동명성왕'의 무덤이다.
1123년 고려에 왔던 중국 송나라 사신이 서긍이 기록한 고려도경에 동신성모지당(東神聖母之堂)이 개성에 모셔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도경'은 김부식이 송에 다녀온 이후 고려에 왔던 사신 서긍이 지었는데, 1123년(인종 1) 송나라 휘종(徽宗)의 명에 따라 한달 남짓 개성(開城)에 머물면서 체험한 견문을 바탕으로 송나라에 돌아가 편찬한 사서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체적인 동명성왕무덤의 위치는 절강성의 선도산인데,
중국고지도인 "주경도(州境圖)"에 따르면, 절강성 임해현의 '신라산'이다.
또 천하고금대총편람도에 따르면, 경주 바로 밑에 팔공산이 표시되어 있다.
팔공산 아래 '수' 지명이 있는데 이는 '천하고금대총편람도'상의 '경주'위치이다.
고려의수도가 개경이라면, 개경은 현재의 개봉이었을 때, 장안(지금 서안 : 섬서성)은 서경이었고,
이성계는 華山(섬서성) 아래 3년간 도읍하였다가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고, 한양이라 한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을 추가로 덧붙이자면, 섬서성의 화산 부근에 화양과 화양구곡(송시열의 건물)도 있다.
10C~14C의 조선사 속의 고려는 현재 반도 사람들이 제도권 교육을 통해 지식화 되어 알고 있는 것처럼
조그마한 스케일이 고려는 아니었다.
高麗史와 대륙 정사서에 쓰여져 있는 고려는 대륙1만리 강역에서 황도를 하남성 개봉(開封)으로,
동경(東京)을 낙양(洛陽)으로 서경(西京)을 섬서성 서안(西安:호경)으로 했던 황하지대의 황제국이었다.
때문에 고려 광종은 즉위 11년(960)에 개경(開京:開封)을 황도(皇都:황제가 자리하고 있는 나라의 중심지)로
고쳐 부르도록 했던 것이다.
993년에 요(遼)의 80만 대군이 고려에 침입하였을 때에 고려의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徐熙)가 단신으로 적장 소손녕(蕭遜寧)을 만나 외교 담판을 벌인 자리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고구려의 옛 국도(國都)였던 서경(西京)이 고려 영토로 포함되어 있다. 고구려 땅의 경계로 따진다면 요나라의 동경(東京)도 그 경계 안에 있다."고 반박하여 오히려 강동 6주를 회복하기도 하였다.
중국고금지명 사전에 따르면, 요나라의 위치는 섬서성과 섬서성의 서쪽 주변에 있다고 하였다.
중국인들이 편찬한 송사(宋史)에서도 고려는 본래 고구려라고 인식하여 '고려열전(高麗烈傳)'을 서술하였던 바, 이는 고려가 고구려를 승계한 국가라고 생각한 것이 당시 사람들의 역사인식이었으며, 이러한 인식은 이후 명사(明史)에까지 이어졌고 고려는 서경(西京)에 고구려의 국조(國祖) 동명성왕(東明聖王)을 모신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개경(開京)의 동신사(東神寺)에는 주몽(朱蒙; 東明聖王)의 어머니 하백녀(河伯女)를 동신성모(東神聖模)로 모셨다.
이는 고구려 국모신 신앙과 제의(祭儀)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려 문종시대에 전 중국왕조 당나라시대의 안서도호부의 지명이 그대로 차용되면서 그 곳의 지진상황이 기록된 점이 대륙고려의 중요한 증거로 판단된다.
1. 현종 (AD1009년~)
3년 11월 - 漣州 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15년11월 -金州 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금주는 현 감숙성 소재)
16년 4월 - 嶺南道 廣平,河濱 등10현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영남도는 호남성, 호북성, 하남성 일대)
慶州, 尙州, 淸州(10도중 중원도),安東,밀성 등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21년 2월 - 交州(10도중 삭방도),익령, 동산현에서 지진
2.덕종 (AD1016~)
원년 10월 - 尙州(10도중 영남도)등 10여 현에서 지진이 일어남 2년 6월 - 安東府 峽州에서 지진
3. 靖宗(정종 AD1035~)
원년 6월 - 開京에서지진이 일어남 8월 - 개경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벼락치는 소리와 같았다.
9월 - 慶州(영동도 -내몽고 감숙성)등19주에서 지진이 일어남.
2년 6월 - 개경 및 동경 및 상주 광주등 2개주, 안변부 관내 주현에서 지진이 일어나 가옥이 폐허로 변했다. 동경에서는 3일동안 지속되다가 그쳤다. 동경관내州縣,밀성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마치 벼락치는 소리와 같았다.
3년9월 - 龜州,朔州,博州,泰州에서 지진이 일어나 그 곳에서 멀리 떨어진 鎭까지 위협했다
4.문종(AD1047~)
6년 2월 - <안서도호부>에서 지진이 일어남
((■<안서都護府>는 고려에는 관제가 없었고 당나라 때 도호부명으로 서역 지역인 티벳 투르판 등지의 실크로드상 오지. 우리는 여기서 고려가 과거 당나라 때의 10도와 일치하고 당서부터 내려오는 안서도호부까지 총칭 고려의 관할지역 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12년4월 - 지진이 발생
20년4월 - 개경에 지진발생
27년1월 - 지진발생
5.선종(AD1092~)
9년11월 - 지진발생
6.숙종(AD1103~)
8년11월 - 개경지진...등 (하략)
위의 기록에서 보았듯이 고려라는 나라를 한반도로 상정할 때 10년도 안 되는 기간마다 큰 지진이 일어났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한가지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개경에서부터 전국적으로 지진의 피해가 있었다는 것을 반도식민사관으로 볼 때 어떻게 설명하여야 하며 정종 때 보듯이 경주를 포함한 19주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면 엄청난 지역인데 첨성대는 왜 아직까지 멀쩡한 것인지 궁금하다.
한가지 중요한 것은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지진 다발지역이 개경, 경주, 금주, 안서도호부등 소위 감숙성 및 신강성, 청해성, 위구르자치구 등이라는 것이다 .
추론이지만 1976년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당산대지진은 무려 60만명 이상이 사망했었으며 북경에서 150Km떨어진 내몽고 자치구와 접경지역이라는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
그리고 당의 재배지역이었고 고구려명장 고선지 장군이 대회전을 치르며 활약했던 투르판등이 안서도호부이고, 고려사에서 고려의 관할지역 안서 도호부의 지명과 고려10도의 지명인 嶺南道(현 호북,호남, 하남성 일부)등이 고려사에 기록이 나온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왕경인 중주의 땅 한양을 설명하고 있는데 산하가 얽히고 기자의 땅이고 화산이 솟아있고 한강이 띠를 두른 형상은 장안(호경 지금의 서안)과 낙양과 개경(개봉)을 중심으로 이른바 패수(조선의 물줄기)를 묘사한 말이다.
한강은 한수(漢水)이고 후대에 황하라 하지만, 옛부터 중원 땅에는 인체의 허리부분을 두르는 띠와 같다 해서 대수(帶水)라 불리고 한양을 감싸고 돌아간다 하여 한수가 되었다 .황하의 이름은 수십 가지가 있고 또 토막토막 잘라 부여된 명칭이 많아 일일이 설명하자면 끝도 없다 그렇다고 한수는 황하만의 명칭이 아니다. 조선 후기에는 호북성 무한의 양자강과 합류하는 물줄기 가 한수가 되고 서세동점에 따라 한반도에도 한강은 만들어진다. 조선의 중심지는 "낙양"이라고 분명히 지도의 문장에 씌여 있다.
고려와 이조의 강역도 의심스러워
한반도의 어디에도 낙양이 존재했거나, 낙양의 전거가 없다.
낙양은 신라 천년의 고도 장안과 개경의 가운데 있으며 동관과 서관의 가운데 있고 경기도이며 관내도 중심에 있는 것을 어찌 해석할까?
그런데, 경기도가 결정적으로 고려가 대륙이었음을 알려주는 열쇠라는 것이다 .
당나라가 편제한 경기도에 섬서성의 서경(서안, 장안)이 있으며, 고려가 이를 다시 편제하여 고려의 지방으로 삼았다.
고려의 경기도에 나오는 지명을 찾다보면, 한반도에 위치할 수 없는 지명이 나오는데, 섬서성, 하남성(신라의 옛 강역)에 찾을 수 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개경주변에 6개의 적현(赤縣)과 7개의 기현(畿縣)이 설치되었는데, 1018년(고려 현종 9)에 이들 적현, 기현을 묶어서 왕도의 외곽지역을 정식으로 '경기(京畿)'라 부르기 시작했다.
본래 '京'은 '천자(天子)가 도읍한 경사(京師)'를, '畿'는 '천자 거주지인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5백 리 이내의 땅'을 의미한다.
'경기'라는 말은 당나라시대에 왕도의 주변지역을 경현(京縣,赤縣)과 기현(畿縣)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고려의 패서도(浿潟) 즉, 경기도는 수도 서경(西京)을 관할하는 지방이기 때문에 당 태종의 경기도(京畿道)와 같을 수밖에 없다.
하남성 개봉에 가보면 송나라 시대의 시장을 복원해 놓았다는 곳이 있는데, 시장 한가운데 고려의원이라는 큰 의원이 있고 설명문에 쓰기를 고려와 송나라는 많은 교류가 있었고, 그리하여 일찍부터 고려의 의원이 와서 진료하였다고 한다고 기록하였다.
김용무의 대륙 고려 설에 따르면, 하남성 개봉(송나라 수도)의 서쪽에 낙양과 장안이 있는데, 이곳이 고려의 수도이라고 한다.
게다가 대륙 고려로서 결정적인 증거는 절강성의 항주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난인데, 호북성, 하남성, 산동성까지 확대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와 TV 드라마에 따르면, 홍건적은 한반도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는 홍건적의 난에 의해 유린당하였다는 기록이 나와있으므로, 반드시 하남성과 산동성 주변에 있어야 한다. 현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중국의 기록을 토대로 고려의 지경을 그려보면 그림과 같다.
그러면 강화도로의 천도는 원나라의 압력에 못 이겨 대륙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씨 박씨 호족들의 지역에 고려 황실이 피난 와서 28년 간 강화도에 있다가 개성으로 가서 남은 161년 간 임시 수도에서 살았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이씨조선의 강역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며 실제 지명을 대입해 보면 전체 만주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다음과 같다.
그러면 왜 현재 우리나라의 영토는 한반도 이내로 좁혀졌는가? 우선 원나라에 쫒긴 대륙교려의 강화도 천도를 그 이유로 들 수 있고 그 다음에는 이씨조선의 병자호란을 그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래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나라 초기만 해도 고려는 중원에 발을 붙이고 있었으나 점차 영토을 잃고 동진을 거듭했다.
이씨조선 인조 때 청태종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오기 전 영토는 아래 그림과 같다.
삼전도 항복이 있은 후 인조는 그 때만 해도 가지고 있던 만주지역을 청나라에 내어준 듯 하다.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연해주와 만주 동북지역은 일본과 중국의 몽골 정통후예 말살정책에 의한 자의적인 조작결과로 밖에 볼 수 없다.
모든 빼앗긴 땅들은 복원되어야 하지만 우선 일제 36년 동안 이루어진 만주 동북 지역은 시급히 환수되어야 한다.
참고로 언어의 문제인데 주몽이나 최치원의 기록에서 보듯이 단어만 같으면 일년이 지나지 않아 말은 통한다.
출처:https://blog.naver.com/free_less/110114999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