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제 38사단의 패배와 과달카날에서의 비참한 후퇴
출처: http://blog.naver.com/mirejet/110038153812
1942년 11월 10일, 사노 타다요시(佐野忠義)중장이 이끄는 제 38사단의 선발대가 과달카날에 상륙했다. 14일에 주력사단의 수송이 개시되어 해군은 제해권의 확보와 다시 비행장 포격을 위해 전함 2척을 포함한 제 11전대를 파견했는데 여기서 제 3차 솔로몬 해전이 발생했다.
일본해군은 이 해전에서 전함 2척을 잃고 비행장 공격도 실패로 끝나 수송선단은 미군기의 공습제물이 되었다. 그 결과 수송선 11척 중 6척이 침몰하고 1척이 크게 파손된 채로 해역을 벗어나고 말았다. 다음날에 강행돌격을 한 수송선 4척도 해안에 도착하기 전에 화염에 휩싸여 불타버렸다. 이런 상황으로 제 38사단의 병기와 식량은 거의 보급을 받지 못한 상태가 되어 버렸고 핸더슨 비행장에서 날아오는 미군기의 기총소사에 물자와 병사들은 계속 줄어들었다.
이 때 상륙을 확인된 병력 수는 2천명으로 중화기는 아예 없었고 식량도 4일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제 38사단의 출격당시 서류상의 병력은 약 2~3만명을 넘었지만 전염병과 기아로 죽음의 문턱에서 허덕이는 자가 태반이어서 전쟁수행이 가능한 병력은 8천명 남짓에 불과했다. 18일, 제 38사단에 의한 야습이 감행되었지만 실패하고 그 후 아우스텐 산의 서쪽 구릉지대의 수비대로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43년 1월, 미군의 반격공세에 다시 내몰리게 된다.
제 38사단의 수송실패 후 대본영은 다시 제 51사단과 제 6사단을 과달카날로 보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과달카날 섬의 항공기지도 증강되어 미군의 제공권하에 수송을 성공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또 저속의 수송선은 과달카날 근처에 가기 전에 파괴될 우려가 있어 구축함에 의한 생쥐수송작전을 계속했지만 구축함의 수송도 10월 하순 제 2사단 총공격의 실패 이후 약 3개월동안 10척의 구축함이 공격당해 격침당하는 등 피해가 컸다. 이에 잠수함을 이용한 수송도 개시되었지만 구축함보다 적재량이 적어 성공해도 큰 효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12월 6일에는 각료회의에서 작전부장인 다나카 신이치(田中新一)중장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16만 5000톤의 선박을 과달카날에 보내는 것을 검토했으나 대본영은 증원을 생각하지 않아 도조 히데키를 향해 바보자식이라는 고성도 오갔다.
1942년 12월 31일 어전회의에서 <계속해서 전투를 수행하기란 불가능>이라고 의견이 모아져 과달카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의해 한 달을 넘긴 후인 1943년 2월 1일부터 7일에 걸쳐 철수작전이 이루어졌다. 각 부대는 예정대로 철수지점으로 도착했지만 몸을 가눌 수 없는 부상병이나 환자들을 <처분>이라는 명목으로 자결을 유도케하는 비참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과달카날 섬에 상륙한 일본군의 총 병력은 31,404명으로 그 중 철수한 병력은 10,652명이었다. 그 전에 부상, 후송된 자는 740명, 사망, 행방불명자는 약 2만 명을 넘었는데 직접 전투에서 전사한 자는 약 5천 명, 나머지 1만 5천명은 전염병으로 사망 또는 아사(餓死)했다. 한편 미군의 피해는 전사 1,598명, 부상 4,709명이었다.
대본영은 국민들에게 패배의 사실을 숨기기 위해 철수를 전진<돌릴 轉, 나아갈 進>이라는 이름으로 보도했다. 그 때문에 철수한 장병의 대다수는 그대로 남방지역의 격전지로 다시 배치되었다. 이 비참한 상황에 대해 국민들이 알게 된 것은 대본영이 발표한 다음의 한 구절 때문이었다.
<솔로몬제도의 과달카날 섬에 작전 중인 부대는 작년 8월 이후 격전고투로 전투력을 많이 상실했지만 그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2월 상순에 동 섬을 철수해 다른 지역으로 배치한다>
과달카날 섬의 전투는 일본의 전투수행능력의 한계를 넘어 선 상황이 되어버려 11월 24일, 한 장교가 <먹을 것이 없는 병사들은 손에 얼마간의 소금을 쥔 채 죽어넘어지고 시체는 부패해 구더기가 들끓고 있다>라고 대본영에 보고했지만 철수명령이 아직 결정되기 전이었다. 한 달 후인 12월 31일에는 일본군이 드디어 철수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 순간에도 많은 병사들이 굶어죽었다. 이는 일본군의 보급이 끊겨 발생한 현상으로 한 생존자는 정글을 푸른 사막이라 불렀다.
거의 모든 부대에선 기력이 남은 병사들은 식량을 구하러 정글을 헤집고 다녀 진지를 사수한 것은 부상병과 병자들 뿐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겨우 식량을 손에 넣어도 힘이 없어 삼키지 못해 죽는 병사 및 식량을 빼앗기 위해 서로 죽이기도 하는 처참한 상황도 발생했다. 또 섬에 고립되어 식량도 어려워지자 군기도 문란해져 귀환병의 보고에 따르면 같은 일본군끼리 병든 자를 살해하거나 사망한 자의 인육을 먹는 비극적인 사태도 일어났다고도 한다. 이러한 군기문란으로 부대를 떠나 정처없이 헤메는 <유랑병>이라는 병사도 발생해 일본군의 조직적인 전투능력은 거의 와해되고 말았다.
당시 고미카와 슌페이(五味川純平)라는 병사가 쓴 수기에는 인간으로서 신기한 생명판단을 아래처럼 남기고 있다.
"일어설 수 있는 자는 수명 30일, 일어나 앉을 수 있는 자는 3주일,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자는 1주일, 누운 채 소변을 보는 자는 3일, 이제 말할 수도 없는 자는 2일, 또 아예 아무것도 못하는 자는 내일"
과달카날 섬 최후의 철수작전에 참가한 해군수송지휘관의 말에 의하면 철수하기 힘든 부상, 병자들 대다수는 무사도 정신을 중시해 포로가 되기 보다는 수류탄 등으로 자결하던가 전우의 손에 의해(수류탄, 총, 총검 등)장사지내졌다.
일본군 철수작전 종료 후 과달카날 섬은 솔로몬 제도에 걸친 미군의 새로운 병참기지가 되었다. 또 섬 내의 잔존 일본군 토벌도 이루어져 미군의 부대 숙련도도 올라갔다고 이야기되어진다. 전후 발행된 그래프 잡지사의 <라이프>지는 미군의 포로가 된 일본군 부상병들이 전차 앞에 일렬로 서서 캐터필러에 깔려 살해당하는 모습이 게재되기도 했다.
남은 일본군 병사들 중 일부는 과달카날 철수작전시 추격하는 미군을 방해하기 위해 요소에 복병으로 배치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식량채집을 행하면서 일본군 철수 후에도 개별적으로 저항하며 목숨을 이어나갔는데 최후의 일본군 병사가 항복한 것은 1947년 10월 27일이었다.
미드웨이 해전과 함께 과달카날 전투는 태평양전쟁에서 공수의 전환점이 된 전쟁이었다. 보통 과달카날 전투는 일본군이 미군의 물량공세에 압도당해 패배한 싸움이라고 알려져 있다. 가와구치 지대의 패배 시점에서 냉철히 판단해 보면 그 시점에서 병사들을 투입시키지 않았으면 이후의 이전투구 소모전으로 아무런 소득없는 싸움과 전투손실을 막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항공기의 피해는 미드웨이 당시보다 3배나 더 많고, 파일럿의 사망 수도 배를 넘었다. 이 때문에 숙련된 조종사의 수가 적어지고 항공전력의 질이 낮아졌다. 항공전력의 소멸원인은 거점이었던 라바울에서 과달카날까지의 거리가 왕복 8시간이라는 장거리 공격이었다는 점이 제일 컸다. 브겐빌 섬의 부카와 부잉등의 중간 기착지를 처음 계획시 넣지 않아 정비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기체를 운용하다가 추락하거나 불시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격침된 수송선의 대부분은 당시 민간에서 징발된 상선들로 썼기때문에 이후 해상운송과 군수물자 생산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해군은 수송선 부족으로 구축함을 이용하는 바람에 구축함의 대량파괴로 미드웨이의 항공부대 소진과 더불어 작전수행에 큰 피해를 입었다.
물량에 대해 말하자면 물론 미군이 마지막 시점으로 볼 때 물량이 일본군을 압도했지만 모든 전투에서 압도한 것은 아니었다. 8월의 시점에서 미군은 제 1차 솔로몬 해전의 패배로 수송선단 일부가 철수하는 등 중화기와 탄약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식량도 부족했는데 반데그리프트 소장은 일본군이 다시 습격해 온다면 연합군은 전멸할지도 모른다라고 당시 술회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군이 최초 약 900명의 이치키 제 1돌격대, 다음의 가와구치 부대 6,000명과 이치키 후발대라는 병력의 추가투입을 행한 것만으로도 적을 압도하는 숫자였지만 격퇴당하고 만 것이다. 일본군이 먼저 점령에 성공했지만 그 후 일본에서 6천킬로미터나 떨어진 이 섬을 미군이 반격하기 전에 철저히 정비하고 작전을 세워 수비에 임했더라면 솔로몬 일대의 해역을 연합군에게 허무하게 내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군의 공습에 의해 파괴된 채 과달카날 섬 해변에 폐기된 수송선 야마즈키마루(山月丸)와 잠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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