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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옷을 입으면 말씀이 풍성하게 살아납니다!
본문 : 골로새서 3장 12절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새번역>
‘옷이 날개다.’ 라는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옷을 입고 있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천차만별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외모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첫 인상을 설명할 때 그 사람이 입은 옷이 강렬하게 자리 잡아 그 옷을 기준으로 여러 가지 느낌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보여 지는 ‘옷’이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위 ‘명품’에 더욱 더 애착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최근 소식을 보니 처음으로 명품을 구매하는 나이가 점점 더 어려져 평균 15세라고 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명품을 입어야 자신의 가치도 올라간다고 생각한다는 의식입니다. 정말 옷이 명품이면 사람도 명품이 되는 것일까요? 정말 인간의 가치가 ‘옷’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요?
사실 구약 성경에서도 ‘옷’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사장’의 의복은 더욱 더 그러합니다. 화려하기가 다른 어떤 명품 옷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세부적인 것까지 하나하나 다 설명해 주심으로 만들어진 옷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더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특별한지 출애굽기 28장을 통틀어 오롯이 제사장의 옷에 관한 이야기만을 담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사장의 의복은 영광과 존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의복은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옷입니다. 첫째,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제사장 직분의 거룩성과 위엄을 드러내고, 둘째는 이 권위를 부여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순종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놓치지 말아야 할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아론 이후의 모든 제사장들은 이 옷을 입기에 합당한 삶을 살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고 나면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입기 위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제사장의 의복은 제사장들에게 좋은 신앙의 교본이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해 동물을 죽이시고 그 가죽으로 만드신 ‘옷’도 있었습니다. 겨우 겨우 무화과나무 잎으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가리고 있던 아담과 하와를 위해 하나님은 직접 처음으로 동물을 죽여 그 가죽으로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은혜의 옷이었고, 장차 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보여주는 특별한 옷이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덮어 주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혀 주시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은혜’라는 옷을 입혀 주실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죄악 가운데 있었지만,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가득하지만, 그 것들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이 ‘가죽옷’으로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가죽 옷을 입은 존재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사장의 옷을 입기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결심한 존재가 되어야 하고, 그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심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풍성히 살아 있도록 말씀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입은 자는 ‘말씀을 살아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로마서 13장 14절A, 새번역>
그렇기에 우리는 수시로 우리가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어떤 옷을 입고 있는 그리스도인인지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볼 때는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냐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어떤가에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하나님을 욕되게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지어주신 가죽 옷을 벗고, 다시 무화과나무 잎을 입고 있다면, 마땅히 예배 가운데 나아갈 제사장의 의복이 아닌 세상에서 유행하는 왕의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다면 지금 당장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버리고 다시 옷을 입어야 할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있지 않다면 우리를 통해 사람들은 예수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입기 위한 권면을 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골로새서 3장 9절B~10절A, 새번역>
옛 사람이란 옷을 벗어버린 존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새 사람이란 옷을 입고 있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새 사람이란 옷을 입고 그 위나 안에 옛 사람이란 옷을 다시 주어 입고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은 벗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통에 영영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럼 새 사람이 입는 옷은 어떤 옷일까요? 성경은 친절하게 하나씩 하나씩 그 옷에 대해서 설명해 줍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이란 옷을 입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골로새서 3장 11절, 새번역>
이 옷의 특징은 특별히 사람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차별하고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옷을 입으면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게 되는데 헬라인과 유대인, 할례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 인종, 종과 자유인에 대한 차별과 구별을 자연스럽게 벗어 버리게 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형제요, 자매요,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옷은 특별히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공동체가 모두 함께 입어야 할 옷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안에 차별이나 구별이 존재하지는 않습니까? 빈부의 격차를 의식해서 행동하고, 배움의 차이에 따라 나누어지고, 재능의 차이를 드러내거나, 그 외에도 서로간의 수많은 비교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아직 이 ‘평등’이란 옷을 입지 못한 것입니다. 예배 안에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예배를 드리는 하나 된 예배자 공동체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안에는 결코 차별과 구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주 안에 우린 하나’라는 글귀는 찬양 가사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 우리 공동체가 함께 선포할 수 있는 고백이어야 하고, 우리가 함께 입고 있는 단체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동정심’이란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그리스도인답게 따뜻한 ‘동정심’이란 옷을 입어야 합니다. 사실 동정심이란 단어가 부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동정심’이란 단어에 대해서는 ‘인애’, ‘불쌍히 여기는 마음’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쉬운 성경이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골로새서 3장 12절A, 쉬운성경>
내가 사랑을 받았기에,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기에, 그 받은 사랑만큼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받은 자답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은혜라는 설명이 아니면 이해될 수 없는 용서를 받았다면,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말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인 ‘크리스챤 오블리주’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그러움’이란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 4장 5절, 공동번역>
셋째, ‘친절함’이란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 친절함이란 옷이야말로 가장 티가 많이 나는 옷입니다. 기왕이면 악세사리처럼 늘 보이게 입고 다녀야 할 옷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친절하다’ 이 공식은 비록 지금은 깨진 것처럼 보이지만 꽤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던 말이었습니다. 나를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사실 친절이 아닙니다. 그건 그냥 응대일 뿐입니다. 이 친절함의 옷은 나를 친절하게 대하지 않더라도, 때론 무시하더라도, 나는 친절함을 잃지 않는 것이 핵심 포인트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어렵다고 느끼십니까? 그럼 이 성경 말씀을 꼭 마음에 담아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친절함을 실천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40절, 새번역>
모든 사람을 하나님 대하듯이 대한다면 이 친절함은 결코 가식의 옷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옷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친절함과 늘 동시에 따라 다니는 이 악세사리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미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친절함과 미소가, 친절한 미소가 어느 곳이든 그 장소를 아름답게 변화시킬 것을 확신합니다.
넷째, ‘겸손함’이란 옷을 입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빌립보서 2장 3절, 새번역>
겸손이란 옷은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겸손을 ‘속옷’으로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중요한 옷으로서, 겸손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겸손이라고 드러나지 않아야 합니다. 겸손이야말로 그림자처럼, 잔상처럼, 떠나고 난 빈자리 풍경처럼 ‘겸손’이란 이름 없이 잔잔하게 느껴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모습과 같이 우리는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9장 9절, 개역개정>
예수님도 입으셨던 겸손의 옷을 어찌 우리가 안 입을 수 있겠습니까?
다섯째, ‘온유함’이란 옷을 입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입기가 어려운 옷이기도 하고, 가장 입고 싶은 옷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분명히 입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입지 않는 한 겨울 내복과도 같은 옷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뜻을 가진 이 ‘온유’의 옷을 입고 나서야 비로소 이 말씀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로마서 12장 18절, 새번역>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내기에는 너무도 모난 나의 모습을 덮어주고, 변화시켜 줄 온유의 옷이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축복 역시 이 땅에서의 화평한 관계를 설명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방할 수 있지만 비방하지 않고, 다투어야 할 상황에서 다투지 않고,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한다면 반드시 이 ‘온유’란 옷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여섯 번째, ‘오래 참음’이란 옷을 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으로서 입어야 할 마지막 옷을 성경은 ‘오래 참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비슷한 말과 뜻이겠지만 저는 한문으로 ‘인내’라는 말보다 한글로 ‘오래 참음’이란 말이 참 좋습니다. 단순히 괴로움이나 어려움, 억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라는 뜻의 ‘인내’보다 왠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행복한 단어라 생각되는 ‘오래 참음’이 좋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오래 참음’은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 참음’이란 뜻의 헬라어는 ‘후포모네’입니다. 이 후포모네는 단순히 참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헬라어 ‘후포모네’는 꾸준함, 항상성, 지구력, 일관성을 의미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 동일하고 미래도 동일할 것을 말합니다. 의도한 분명한 목적이 있기에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즉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지속적인 실천을 담은 말이 ‘후포모네’, 즉 ‘오래 참음’이란 옷인 것입니다.
이 옷을 먼저 입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야말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오늘도 우리를 향한, 이 땅을 향한 ‘오래 참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음’의 결과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사건이었고, 십자가 구원이었으며, 영원한 생명을 알리는 부활의 축제인 것입니다.
이제 이 옷을 우리가 입어야 할 때입니다. 이 옷을 입어야만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 길을 가리라!’ 결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도록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히브리서 12장 1절, 공동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이제 옷을 갈아입어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체육시간에는 체육복을 입고, 잠을 잘 때는 잠옷을 입듯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입고 계시던 ‘옛 사람’이란 옷을 벗어서 버려 버리십시오. 그리고 ‘새 사람’이란 새 옷을 함께 입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새 사람이란 옷은 여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이란 옷을, 너그러운 마음이란 옷을, 친절함이란 옷을, 겸손함이란 옷을, 온유함이란 옷을 그리고 오래 참음이란 옷을 입으면 멋진 한 벌, ‘새 사람’이란 옷이 완성될 것입니다. 분명하게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이 옷을 입으면 말씀이 풍성히 살아날 것입니다. 이 옷을 입으면 말씀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설 때 스스로도 알게 되고, 곧 이어 사람들도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입니다. 새 사람이란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라는 어둠 속을 비추이는 빛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