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새의 전설 / 이미영
에어컨 실외기가 놓인 곳에 비둘기가 날아든다. 곤장치기, 독방에 가두기, 잠 안 재우기 등의 모진 고문이 있지만 그 정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새 근처에 있기’야말로 인생 형벌이다. 초등학교 소풍으로 달성 공원에 가던 날,
초입에 늘어선 새장과 비둘기가 떼 지어 날던 잔디밭은 현실에 펼쳐진 악몽이었다. 크든 작든 꼬꼬댁이 돌아다니는 닭장은 상상도 하긴 싫은 징벌이다. 쥐라기, 백악기를 지나 오늘날 일인 일닭 시대에 닭이 무서워서 닭고기를 못 먹는 일인이다. 그렇게 생겨 먹었다. 날개 달린 것들은 무조건 피해야 상책이다.
쫓아내기는커녕 후다닥 커튼을 치고 방에서 벌벌 떠는 엄마를 토닥여준다. “독수리 사진을 붙여보자.” “그걸로 돼?” 저보다 큰 새는 무서워서 안 올 거란다. 하긴 허수아비도 들판에서 새들 위에 군림하던 시절이 있었으니 금세 귀가 솔깃하다. 독수리 사진만으로 안심할 수 없다. 전문 업체에 의뢰해 실외기가 있는 곳에 비둘기 기피용 망을 설치했다.
방비망(비둘기를 방지하는 장치)을 설치하고 나서도 이놈들은 날아든다. 회귀본능이 작동해서란다. 얼토당토않지만 솔거의 소나무 그림으로 돌진한 새에게 생각이 이어진다.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를 보고 나뭇가지인 줄 알고 앉으려다 부딪혀 죽었다던 앞뒤 분간 못하는 신라의 새. 눈먼 새 덕분인지 솔거는 역사상 잊힐 수 없는 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솔거의 일화는 그를 미술계의 스타로 만들었다. 노송도를 어찌나 사실적으로 그렸던지 새들이 와서 자진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나라 고대 미술계의 전설이 되었다. 그림이 남아있지 않으니 위대한 화가의 면모를 이 전설에 기댈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 「열전」에 등장하는 화가는 딱 한 명, 솔거! 그를 인정할밖에.
우리 집 방비망에 계속 날아드는 비둘기나 허수아비에게 속았던 새들의 감각을 생각해 보면 그리 신통할 리 없다. 노송도 앞에 서면 솔바람이 이는 것 같다거나, 솔거가 황룡사 벽화를 그리기 위해 사계절을 소나무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했으면 믿음이 갔을 것을. 어두운 굴속에서 살아 하늘거리는 석굴암 석상들을 조각한 장인은 입도 다시지 않고 눈먼 새들을 불러 화가를 높이 세웠다. 찬란한 예술을 외면한 허름한 평론의 선택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조르조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에는 200여 명의 예술가가 등장한다. 미켈란젤로 장에는 그의 편지, 시, 스케치를 인용해 그림, 건축을 논한다. 삶을 통해 생생한 미켈란젤로를 평가하고 있다. 저자는 화가, 건축가 등과 개인적인 교류를 맺고 실증적인 평론으로 그림과 화가의 위상을 확인시켜 준다. 르네상스의 예술과 평론이 균형을 이루는 모습을 본다.
지난겨울 대구문학 149호를 받고 무조건 수필 월평 페이지를 펼쳤다. 평론가는 수필가의 프로정신을 언급하고 ‘아울러 깊이 읽지 말고 그냥 지나갔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로 서두를 맺었다. 148호에 글을 실은 나는 ‘태평스러운 무지와 관성적 아둔함에 빠져있는’ 허울 좋은 수필가이다.
쓰디썼다. 이번에는 고3 때이다. 허구한 날 아픈 딸에게 매일 아침 코를 잡고 꿀꺽 삼키라며 엄마가 강제로 먹이던 새까만 한약이 떠올랐다. 사약을 받듯 헛구역질을 유발하던 아침 한약은 일 년 내내 계속되었다. 억지로 들이키던 검은 물은 건강하게 고3을 보낼 수 있다는 최면을 걸어주었다. 엄마는 “이걸 먹어야 대학 갈 수 있다.”고 약사발을 들이밀었다. 합격자를 발표하던 날 한약 덕분에 버틴 것이라고 약사발을 쓰다듬었다.
사약 같던 그 맛이 되살아났다. 월평이 백배는 더 썼다. 148호에 실은 잡문은 제발 아무도 기억 못 하는 글이 되어야 한다고 각성했다. 평론의 쓴 약을 마시고 의미 없는 나르시시즘에서 깨어나라고 스스로를 흔들었다. 쓰디쓴 맛이 단물이 되어 돌아오라고 월평을 되새기며 잠금장치를 걸었다.
쓴맛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구문학 156호에는 수필 월평이 없다. 155호에 글을 실었는데…. 합격과 동시에 꿀맛으로 변한 약사발을 재현할 수 없다. 단 맛도 쓴맛도 볼 수 없는 빈 그릇을 계속 삼킨다. 대구문학 157호, 158호에도 수필 월평은 계속 부재중이다.
어디든 글을 싣고 나면 그다음 호를 먼저 기다린다. 밝은 눈으로 나를 읽어 줄 평론을 마중한다. 오래 기다려야 하면 어쩌나, 대구문학의 뒷장을 뒤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