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오늘날 황허 유역은 농경에 부적합하지만 5천 년 전에는 고온다습한 아열대기후였다. 이 지역에 대홍수가 자주 발생하자 사람들이 힘을 합쳐 대규모로 관개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문명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철의 발명과 함께 양쯔강 유역에도 새로운 문명이 들어섰다.
황허의 유명한 후커우 폭포<출처: (CC BY-SA) Leruswing at Wikimedia.org>원본보기
“우(禹)가 없었다면 우리는 물고기가 되었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는 강과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고대 문명이 꽃피웠던 황허의 홍수는 중국인들의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홍수가 심할 경우 왕조가 붕괴될 위험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의 건국신화를 보면 홍수와의 싸움이 많이 나온다. 전설의 왕조라 불리는 다섯 제왕의 마지막 순임금 때 황허가 범람하면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순임금은 ‘우’에게 황허의 홍수를 막으라면서 인력과 자재를 무한으로 사용할 특권을 주었다.
고심하던 우는 황허의 바닥을 깊게 파는 준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 황허의 바닥을 깊게 파서 하천을 정비했다. 또 황허의 주된 흐름에 집중된 엄청난 강물의 양을 줄이기 위해 방수로를 팠다. 우는 물줄기를 다스리는 한편 홍수를 가져오는 용과 뱀을 황허에서 쫓아냈다. 심혈을 기울인 공사 끝에 황허의 홍수는 사라졌다.
기록에 의하면 우가 황허의 치수에 성공한 이후 1,500년간 강물이 범람하지 않았다고 한다. 평생 황허의 홍수를 막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던 우는 중국 최초의 국가인 하(夏)의 왕에 오르게 된다. 중국의 건국설화를 이해하려면 황허와 홍수를 알아야만 하는 이유다.
초기 황허 문명의 발생
세계의 4대 문명은 큰 강의 주변에서 발생했다. 그런데 중국 문명은 중국에서 가장 큰 강인 양쯔강이 아니라 황허에서 발생했다. 고기후자료 분석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에는 여름철 우기마다 황허 유역에서 대홍수가 자주 발생했다.
산시성의 마을을 흐르고 있는 황허<출처: (CC BY-SA) Fanghong at Wikimedia.org>
황허의 본류 근처에서는 살기가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산속을 흐르는 지류(支流)에 인접한 단구(段丘)나, 지류가 평지로 나올 때 만들어진 선상지(扇狀地) 등에서 소규모 영농을 시작했다. 소규모의 농경 취락이 황허 문명의 최초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소규모 농경으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범람원 땅을 얻어야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농지가 생기므로 황허의 치수 작업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으로는 치수가 불가능했다. 자연스럽게 정착민들이 힘을 합쳐 관개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국가와 문명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황허 문명의 시작이다.
이 시대의 초기에는 허난성의 페이리강(裴李崗) 문화와 허베이성의 츠산(磁山) 문화가 있었다. 후기에는 양사오(仰韶) 문화와, 그로부터 발전한 룽산(龍山) 문화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양사오 문화는 기원전 4,000~기원전 2,000년경 정도이다. 룽산 문화는 일부 특수지역을 제외하고 기원전 2,500~기원전 1,500년경으로 추정된다.
중국 문명이 황허에서 발생한 까닭은?
문명이 발생하려면 농사가 시작되어야 하고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수자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지금의 기후나 지형, 지질로 보면 황허 유역은 농사짓기에 부적합하다. 오히려 양쯔강 유역이 풍부한 물과 따뜻한 기후로 농경에 매우 적합하다. 그런데 양쯔강이 아닌 황허 유역에서 문명이 시작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과 기후가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엔 황허 유역이 양쯔강 유역보다 농사짓기가 좋았다는 것이다.
지금 황허는 우기를 제외하고는 강에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다. 그러나 중국 건국설화에서 보듯 황허의 홍수 치수는 당시 왕조들의 가장 큰 일이었다. 많은 비가 내리는 기후였던 것이다. 황허 유역은 대홍수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역이었지만 잦은 홍수로 생성된 범람원은 중국인들에게 더욱 비옥한 토지를 제공해 주었다.
양쯔강은 저습지에 삼림이 들어서 농지 확보가 어려웠다.
<출처: (CC BY) Andrew Hitchcock at Wikimedia.org>
그렇다면 양쯔강 유역의 기후는 어땠을까? 고기후분석에 의하면 양쯔강 유역은 당시에 고온다습한 밀림형 기후였다. 황허 유역보다 기온이 매우 높고 강수량도 훨씬 많았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토질이 비옥해서 작물의 생육환경은 좋았다.
그럼에도 양쯔강 유역은 저습지에 크고 작은 호소(湖沼)가 많고, 삼림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따라서 작물재배를 위한 농지 확보가 어려웠다. 또한 숲이 우거져 있어 야생동물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초기의 정착민들이 농업으로 살아가기엔 황허보다 조건이 나빴던 것이다.
지형적 조건도 황허가 문명의 발생에 유리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 황허 유역은 비교적 평탄하고 산이 적었다. 사람들이 도보로 왕래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나 양쯔강 유역은 늪과 원시림으로 뒤덮여 있고, 야생동물이나 벌레들이 많아서 사람들의 왕래가 어려웠다.
황허 유역은 원활한 교통으로 인해 생산과 소비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었다. 이는 많은 인구가 유입되는 원인이 되었다. 기후 요인으로 인해 황허에서 중국 문명이 시작된 것이다. 현재 중국의 최고 인류로 알려진 란톈원인(藍田原人)은 웨이허강의 남쪽, 산시성 란톈현에서 발견된다. 이 또한 초기 문명이 황허 유역에서 생겼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황허 유역의 기후는 어땠을까?
일본의 NHK는 황허 유역에서 문명이 발생한 원인에 대한 특집방송을 만들었다. 이들은 황허 문명이 태동한 기원전 3,500년 전에는 황허 유역이 지금보다 훨씬 살기 좋았다고 주장한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코끼리 뼈나 화분식물이 그 사실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황허 문명에서 출토된 세발솥<출처: (CC BY-SA) User:Mountain at Wikimedia.org>
이곳에서 발견되는 코끼리 뼈는 4~6살 정도로 현재 동남아에서 서식하는 아시아 코끼리 종류와 같다. 당시 이런 코끼리가 황허 유역에서 살았다면 지금보다 기후가 더 온난하고 비도 많이 내렸을 것이다. 중국 산시성 대학의 조수광 교수는 당시 황허 유역의 기후가 아열대기후구 쪽에 가까웠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지역에서 코뿔소나 아열대 식생의 화분이 발견되는 것을 증거로 든다.
당시 황허 유역의 황토지대는 초목이 우거지고 푸른 숲에 짐승과 새들이 많이 사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현재 황토지대의 삼림이나 초원지대는 전체 면적의 겨우 5%이다. 그러나 1,500년 전에는 50%였고, 3,500년 전에는 80%에 이를 정도로 푸르렀다는 것이다. 이런 자연환경으로 인해 황허 유역에서 문명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다.
1만 년 전에 드라이아스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온난기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에 가장 최고조의 기후온난기가 시작되었다. 이후 3천 년 동안 황허 유역은 매우 고온다습했다. 현재의 양쯔강 유역과 비슷한 기후였다고 기후학자들은 보고 있다.
중국의 고기후학자 유소민은 신석기 후기의 양사오 문화 유적지에서 사슴, 호저, 자라의 잔해가 발견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5천 년 전부터 하왕조(기원전 2205~기원전 1767)까지의 기후는 현재의 황토고원기후가 아닌 온난다습한 삼림소택기후였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도 있다. 1921년 스웨덴의 앤더슨은 허난성 민지현 앙소촌에서 출토된 채색도기에서 곡식 껍데기를 발견했다. 이 곡식은 사람들이 재배한 벼와 조의 껍데기였다. 또 산시성 화현의 양사오 문화층에서도 벼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두 지역의 대부분에서 기후변화로 벼가 생산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황허 유역의 허난 및 산시 지역이 오늘날보다 따뜻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중국 남부에만 서식하는 대나무쥐의 유해가 황허 유역에서 발견되는 것은 기후변화의 증거가 된다.
또 이 지역에서는 양잠의 흔적도 발견되고 있다. 마와 비단실로 짜는 방직의 흔적도 발견된다. 양잠과 마는 기온이 따뜻한 지역에서만 가능한 것들이다. 시안 동쪽 교외에서 대나무쥐(竹鼠)의 유해가 발견된 것도 하나의 증거가 된다. 대나무쥐는 오늘날 양쯔강 이남에서만 서식하는 동물이다.
이들을 통해 당시 황허 유역의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2~3℃ 정도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연평균기온이 16~18℃ 정도였다는 것이다. 서경(書經)의 우공(禹貢)편에 “우 임금이 토지를 구획하시고 산에 따라 나무를 베시며 높은 산과 큰 내를 정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에는 강수량도 많고 초목도 매우 무성했음을 알 수 있다.
황허 문명 이후의 발전
석기시대가 끝날 무렵 구리에 주석을 섞은 청동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청동으로 우수한 무기를 만든 쪽이 다른 쪽을 제압하여 왕조를 건설하고 국가 체제를 정비하기에 이른 것이다. 중국에 실재했던 최초의 왕조는 은(殷)이다. 은나라의 청동기는 황허 문명의 매우 특이한 상징이다.
청동문화는 서주(西周)시대까지 이어진다. 동주시대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누어진다. 춘추시대 초기에 철제 농구와 공구가 나타난 것은 중국 농업사상 일대 혁명이었다. 이를 계기로 우경(牛耕)이 시작되었다. 대규모의 수리공사(水利工事)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농경은 능률적이 되었으며 경지면적이 확대되고 수확도 급격히 증대했다.
부의 축적은 화폐경제의 발달을 촉진했다. 청동화폐가 생겼으며, 상공업의 융성은 도시의 번영과 국가의 부강을 가져왔다. 이때부터 중국의 고대문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춘추전국시대의 거대한 성이나 분묘, 그곳에서 발견되는 갖가지 호화로운 유적도 당시의 부강함을 배경으로 한다.
전국시대의 진묘수(鎭墓獸)묘 속에 놓는 짐승 형태의 신상으로 악령을 내쫓는 의미가 있다.
<출처: (CC BY) Sean Pathasema/Birmingham Museum of Art at Wikimedia.org>
중국 문명에서 획기적인 전기가 된 것은 철의 발명이다. 양쯔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이 철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기술은 유럽보다 1,500년 이상 앞선 것이었다. 철이 없었다면 고도의 문명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철을 추출하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
중국인들은 기원전 500년경에 기술을 개발해 세계 최초의 용광로를 만들었다. 철광석을 섭씨 약 1,450도까지 가열하면 녹아서 액체가 만들어진다. 그러면 거푸집에 부어 온갖 형태와 크기의 도구를 만들 수 있다. 식어서 굳은 철은 강하고 단단해진다. 이들이 만든 쟁기는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아무리 단단한 땅도 뚫고 개간할 수 있었다.
식량생산이 증가하면서 더 많은 사람의 부양이 가능해졌다. 인구가 증가하고 영양 상태도 좋아졌다. 국가는 쉽게 군대를 모아 강한 정부를 만들 수도 있었다. 이때부터 황허 유역과 함께 양쯔강 유역에 새로운 중국 문명이 들어서게 되었다.
중국 남부의 양쯔강 유역은 더 많은 쌀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었다. 철과 쌀은 처음에는 양쯔강 유역에 살던 중국 남부인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비단을 만들어 낸 황허 유역의 북부인들도 이들에 처지지 않았다. 쌀과 비단, 철은 식량과 부, 전쟁을 뜻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황허 문명과 그 뒤를 이어 나타난 양쯔강 문명의 대립과 화해라는 틀 안에서 강력한 국가로 발전해 나갔다.